1931년 1월 13일 공주시민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충격적인 도청이전이 총독부에 의해 전격 발표됩니다. 1931-1-15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이에 당연히 공주는 망연자실, 비분강개하고 대전은 환호에 넘칩니다. 양 도시의 엇갈린 분위기를 공주는 공기긴장, 사형선고를 내린듯...., 대전은 추운 거리에 봄이 온듯 하며 상반된 비교를 합니다.
이에 공주시민들은 적극적인 반대 저항 운동을 펼칩니다. 윗 기사처럼 공직자들은 사퇴하고, 시민들은 상점문을 닫고, 항의 대표단이 샹경 투쟁을 벌입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1천명 가까이가 모여서 항의하고, 67면의 항의단 (그 중 여자는 5명이란 표현이 재미있습니다.)이 만족스런 답을 얻기 전에는 절대 물러 서지 않겠다며 항의합니다.
위 사진에 총독부에 항의하는 공주시민들 보이시죠? 당일자 신문(1931-1-21 동아일보)에 보면 총독부의 도청이전에 대한 이유가 정식으로 발표됩니다. 공주의 역사성, 전통성은 인정하나 문제의 철도로 대전의 기능화를 더 중점을 두고 공주 금강의 수운이 제 기능을 못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항의방문 진정단은 성과를 못 거둡니다. 항의 방문단의 공주 귀향 보고대회를 열 예정이었던 2월 2일 공주에서는 대규모의 시민대회가 열립니다.
당시 공주 인구가 1만 2천인데 항의집회에 모인 시민은 4~5천명이라 합니다. 공주시민의 40% 가까이 모인 것이니 어마어마한 숫자지요. 경찰들 100명이 배치되었으나 너무 격앙되어 있어 제지도 못하고 시민들은 새벽녘까지 (표현에 의하면 봉황산에 달이 휘영하게 떠오를 때까지) 시위를 하였다고 합니다.
급기야 31년 2월 6일 공주 금강관에서 열린 시민대회에 8천명의 시민이 참여하고, 격렬한 시위에 경찰과 충돌하는 상태까지 벌어집니다.
공주 시민의 저항은 더욱 더 격렬해지고 한편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합니다.
대전으로의 이전에 따른 이전비 예산이 삭제되었습니다. 이에 동아일보는 이전을 백지화하라는 사설을 냅니다. 어찌보면 공주에서 대전으로의 충남도청 이전은 공주-대전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공주)-대전(일본)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동아일보에서 공주를 응원하는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후 지금의 국회격인 중의원에서 도청이전이 삭감된 예산안이 그대로 통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전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대전기성회에서 이전비를 납부하겠다고 나온 것입니다. 이에 총독부는 반색합니다. 게다가 일본귀족원 (아마도 상원의회 정도 되지 않나 추축됩니다.)은 대전으로 이전을 찬성하는 입장을 들고 나옵니다.
다시 한번 도청이전은 혼란에 빠지는데 귀족원은 삭제되었던 도청이전비를 부활시킵니다. 결국 조선과 일본의 싸움에서 조선이 지고 마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결국 공정하지 못한 게임은 공주(조선)의 패배로 끝나고 이에 공주시민은 또 한번 저항합니다. 31-3-13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봉황산, 앵산, 산성산 등에 오르고 만세를 부르고 햇불시휘를 하였는데 산성산에 화재가 났다고 합니다. 흥분한 시민이 일으키지 않았나 싶네요. 결국 중의원에서도 부활된 도청이전비 예산을 승인하기에 이르릅니다.
오늘 좀 길지요? 다음이야기는 대전으로 도청 이전 과정과 도청이전으로 인한 공주에 대한 보상인 대상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그당시 공주에 거주하시던 분들의 안타까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숨과 탄식의 심정이 느껴지네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엄청난 사건이었음을 알것 같습니다 그런 아픔속에 이전을 하였으니 다시 도청을 이전할때 환청의 당위성을 더더욱 제고하였어야 하는데 그만 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