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는 매국노인가
아래글을 보면 민비는 일본 낭인이 죽엿지만
민비는 조선군 장교들한테 죽음을당한거나 마찬가지 란 생각이 들며
우범선의 이 친일 일본 군병의 앞잡이를 햇지만 당시 우범선등의 군인 계급(무반)이 처한 현실 을 생각하면 집권을 위해 일본군대를 이용한것 그런것은 김일성이 집권을 위해 쏘련군대를 끌어들여(625당시 쏘련군은 전차부대 와 공군에 참전함) 전쟁을 벌인거 보다는 나쁠게 없지 않을 까
우범선은 수대 내려오는 무반(전문 군인 집안)으로 훈련대 교관으로 군사교육을 할때 훈련을 받던 양반자제들이 무반인 우범선에게 하게 를 하며 하대를 해 우범선이 화를 내며 군복벗은 적도 잇다한다
아래는 당시의 기록
신식군대로서 1881년 오군영 80명의 지원자를 특선하여 이들을 이름을 별기군이라 하였는데, 이것이최초로 창설된 신식군대로 교관으로는 서울주재 일본 공사관 소속 공병소위 호리모토레이조를 초빙, 다케다를 통역관으로 하여 훈련. 당시 교련소당상에는 민영익(을, 정령관(대령)에 한성근(, 좌부령관(중령)에 윤웅렬우부령관(중령)에 김노완(), 참령관(소령에 해당)에 우범선을 각각 임명하였다.
한데 내노라하는 귀족 양반집 자제들인 사관생도들은 우범선 소령이 양반이 아니라 해서 교관을 부를 때 말을 놓아 ‘너’라고 불렀다. 이에 생도들을 모아놓고 “너희가 훈련을 마쳐도 참위(현재의 소위)에 불과할진대 월등한 상급자요, 그 더욱 교관으로서 ‘놈’이라 불리는 것은 쓸개 있는 사나이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고 일장 연설을 하고 옷을 벗어 던지고 빠져 나왔다.
또 훈련 참관차 온 문관(왕명을 받고)이 사령대에서 장죽을 피며 거들먹 거리는 것을 베어 버리겟다고 위협을 해 혼줄을 낸적도 잇다 한다
그런 기개는 우범선의 실력에서 나온게 아닐까 또 조선의 신분제에 좌절한 우범선은 조선 자체를 뒤집어 버리려한것은 아닐까...
이모씨가 쓴 조선의 국모라는 단어는 민비 에겐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망친 한낱 투기많은 여인네에 지나지 않는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외척 안동김가 에의해 기둥뿌리가 썩은 조선의 피페를 막기 위해 흥선군이 자기 처가집의 처제뻘 되는 무남독녀 고아인 민비를 며느리로 햇지만 임 니비란 여자 친정집에 양자를 들여 친정식구를 만들어 인척정치를 조선의 망국을 재촉햇다)
민비나 고종이 좀더 현명햇다면 조선이 처한 국제 현실에서 충분하게 중립노선으로 독자생존이(태국의 예) 가능햇을것이며 노일 전쟁이나 청일 전쟁은 조선이 외교적으로 미스를 해 벌어진 전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범선의 이름을 볼때마다 원충연이나 악비 같은이들이 생각난다
아래는 국민대 강사의글
우범선(禹範善, 1857∼1903 )
민비시해사건의 주동자
1895년 훈련대 제2대대장.
1895년 민비시해사건에 훈련대 동원 책임
1903년 민비시해사건 이후 일본에 망명중 암살됨
아버지의 범죄, 아들의 속죄
신념이 남달리 강한 사람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갈 때에는 그러한 신념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받을 것인가를 생각해만 한다. 만일 그러한 신념이 역사적 상황을 잘못 판단하였을 때 그 해독은 참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 사람의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의 세대까지 그 후과가 남겨지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사적 과오를 속죄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명성황후 시해범 우범선의 아들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한참이던 때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국내로 돌아와 일심으로 우리나라의 농업의 발달만을 위해 한평생을 보냈다. 그가 소리없이 연구에만 몰두하게 되었던 것은 자신의 직업상의 문제만은 아니었고, 역사적으로 부과된 자신만의 짐을 대신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범선은 매우 신념이 강하고 자신이 결정한 문제에 대해서는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당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능력 있고 추진력이 강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그와 같이 1895년 이른바 '을미망명객'으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권동진은 "우범선이 출중한 줄 알았다. 그는 무엇보다 담력이 출중하였다. 대담하고 학식 있고, 학식 중에도 군사학에 특히 뛰어났었는데, 그 자신뿐 아니라 그의 조상도 하사로 다니던 분으로 대대로 군벌집안이었다. 그래서 군부대신도 늘 그에게 물어 매사를 처리할 지경이었다.……그는 민비사변 때에도 가장 선봉에서 활약하였고 한 일도 많았다. 군인 가운데서는 주동자가 그였으니까"라고 하여 소신에 가득 차 민비시해에도 가장 앞장 섰던 인물로 우범선을 말하고 있다.
개화사상의 수용과 별기군 참여
우범선은 1857년 5월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병법에 관해 수업을 하였으며, 20세가 되던 해인 187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무과 급제 이후 곧 황해도 청단찰방에 배치되었으며, 강화도 조약으로 조일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자, 우범선은 동양의 대세와 조선의 앞날을 생각하며, 개화사상을 가진 김옥균, 이주회* 등과 교유하면서 개국론을 주장하였다. 조선의 국교가 열리고 근대화운동이 한참 벌어지던 때 조선 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군제 개편에 착수하였는데, 그것이 이른바 별기군의 창설이었다. 즉, 별기군은 일본공사 하나부사의 건의에 따라 1881년 4월 5군영에서 신체 강건한 지원자 80명을 특선하여, 무위영에 속하게 하고 그 이름을 별기군이라 하여 창설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 조직은 일본인의 주선으로 조직되었고, 호리모토라는 일본 군인이 군사고문으로 있었다 하여 '왜별기'라고도 불렸다. 이에 우범선은 별기군이 조선군제를 근대화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에 참가하였다. 또한 그는 별기군 참령으로 참가하면서도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 훗날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집권한 뒤 우범선이 일본에 밀항했던 것을 문제 삼아 체포되었을 때, 자신이 일본에 건너갔던 이유를 "난국을 헤치자면 일본과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정을 알려고 간 것입니다"라고 설명한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그는 일본과 일본의 근대화를 흠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민씨 척족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우범선은 평북 순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평안 감사 민병석*의 도움으로 장위영 영관이 되었다. 이후 1894년 6월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입하여 민씨정권을 몰아내자, 갑신정변 이후 침체된 개화파가 일본을 배경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갑신정변에 참가하였던 사람들로서 일본의 조종에 의해 개혁을 추진하는 일본의 지시와 명령의 전달자였다. 이때 친일적 성향을 가진 우범선은 그해 8월 군국기무처의 의원이 되어 갑오개혁에 참여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하수인이 되어 이른바 '내정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명성황후 시해 주도
일본에 의한 타율적인 개혁이 진행되고 친일정권에 의해 1895년 4월 훈련대가 창설되자, 우범선은 그 제2대대장으로 발탁되었다. 훈련대는 중앙군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친군영을 강화하기 위하여 일본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의 건의에 의하여 1895년 정월에 조직되었다. 당시 훈련대는 일본 사관(士官)을 초치하여 훈련하였으며, 우범선 이외에 이두황*, 이주회* 등이 대대장으로 있었다. 이 훈련대는 친일의 교두보로서 친일세력의 힘의 뒷받침이었다. 친일세력 중 갑신정변의 주도자 박영효*를 중심으로 1895년 5월 김홍집이 사임하고 박정양내각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 확립에 반발하면서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일군의 정치집단이 대두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민비는 박영효를 축출하려 하였다. 이렇게 되자 박영효 등 친일세력들은 1895년 6월 기사회생의 밀계를 꾸미고 있었다. 이를 위해 우선 훈련대의 장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병력을 이용하여 왕궁을 점령한 후 고종을 폐하려고 하였다. 이때 우범선은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음모가 곧 누설되어 박영효 체포령이 떨어짐으로써 그는 변복을 하고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민비는 더욱 반일·친러적 경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민비세력은 1895년 7월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협력하여 친일세력을 축출하고 그 대신 친러세력을 등용하려고 하였다. 9월 1일 일본 공사 이노우에의 뒤를 이어 새로 미우라 고로가 공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때 조선의 정국은 왕권이 강화되고 친러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친일파의 몰락이 대세가 되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위축된 세력을 만회하고 자파 세력을 부식하는 데 최대의 장애가 되는 민비를 시해하려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우라는 조선인 중 친일적 성향을 가진 우범선을 만나 난국을 헤쳐 나아갈 방도를 물었다. 이에 우범선은 미우라에게 "나는 무부다. 어떤 정견이 있을까마는 다만 조선의 정치 개선은 즉결적으로 그 당우를 일소하지 않으면, 비록 어떠한 고재 양책이 있을지라도 변개하기 어렵다"라고 하면서 민비시해를 통한 친일정권의 성립을 주장하였다. 그 계획은 9월 20일경부터 구체화되었다. 즉, 시해계획은 해산위기에 직면한 훈련대를 이용하여 이들에 의한 쿠데타로 위장하고, 일본공사관 무관 구스노세와 공모한 후에 대원군을 끌어들이고 서울에 있던 일본인 대륙낭인들을 앞잡이로 해서 민비를 살해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미우라는 친일 조선인을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 간부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 전 군부협판 이주회를 포섭하여, 민비시해의 훈련대 동원책임을 우범선에게 맡겼다. 다시 말해 민비 시해계획의 주모자는 일본공사관의 마쓰무라 구스노세, 일본 낭인 오카모도 류노스케를 지도자로 하는 그룹과 우범선 등의 친일 군인들이었다. 그 당시 경성에서는 친일적인 훈련대와 순검이 충돌하여 난투가 벌어지는 일이 잦았다. 이렇게 되자 민씨 일파는 훈련대를 해산하고자 하였고, 고종도 이 방침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렸다. 10월 7일 훈련대 해산의 하교가 내려졌고, 이에 미우라는 훈련대를 담당한 우범선에게 군대를 동원하라고 명령하였다. 10월 8일 새벽 4시반경 대원군을 끌어내어 궁성에 들어가서 민비를 살해한다는 계획하에, 우범선은 대원군 앞으로 나아가 "대원위 대감께 인사 여쭙니다. 훈련대의 대대장인 우범선 참령입니다. 참령 우범선이 지원군을 이끌고 대원위 대감께 충성을 바치러 왔습니다" 하고는 대원군을 사인교에 태우고 궁궐로 들어갔다. 궁궐의 침입자들인 낭인들은 대부분이 일본옷인 하오리 하카마 차림에다 긴칼을 차고 있었다. 그 뒤를 일본공사관의 수비대가 따랐고, 그 다음에 선 것이 참령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였다. 훈련대는 그들의 특수한 군복 차림에다 역시 장총으로 무장했다. 경복궁을 침입할 때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소오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부대는 경회루를 동쪽으로 돌아 옹화문으로 밀려 가고 훈련대가 뒤로 처져 우범선은 주력인 낭인부대를 좌익 후면에서 엄호했다. 민비의 용모를 모르는 일본 낭인들은 한참을 찾아 다닐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민비가 눈에 들어오자 미야모도와 마치 두 사람의 일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낭인 데라자키라는 자가 민비를 칼로 내려쳤다. 민비를 살해한 이후 미우라 공사가 경복궁으로 들어가 민비의 시체를 확인하였으며, 그는 오기하라에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급히 화장하라고 명령하였다. 오기하라는 낭인들을 인솔하여 옥호루의 동쪽에 있는 솔밭에서 민비를 불태웠고, 그 유해는 우범선의 지시에 의해 윤석우가 정전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지고 가서 땅속에 묻었다. 이로써 국모시해사건은 끝이 났고, 그해 9월 훈련대를 파하고 친위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9월 13일 훈련대 제1대대장 참령 이두황, 제2대대장 참령 우범선을 파직시키고, 이범래·이진호가 각기 제1·제2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을미사변을 계기로 전국에서는 '국모보수'의 기치하에 의병의 봉기가 일어나는 등 반일의 분위기가 성숙되면서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일군의 정치세력들은 반일 분위기에 편승하여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해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에 촉발되어 본격적인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듬해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민비시해의 주범인 우범선은 이두황, 황철과 함께 일본으로 달아났다.
고영근의 우범선 처단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도쿄 혼교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자를 알게 되어 그녀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우범선 등 이른바 '을미망명객'들은 국내에서 그들에게 현상금을 걸고 자객을 파견하였기 때문에 늘 암살당할 위험 속에서 살았다. 당시 이들은 대부분 고베박영효가 경영하는 조일신숙에 있었고, 이곳에서 그는 윤효정한국의 고학생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일신숙이 해산되자 우범선은 1903년에 구레시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만민공동회 사건과 폭발약 음모사건으로 1899년 7월 일본으로 망명한 전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이 1903년 7월 오사카의 윤효정의 식객으로 왔다. 그는 윤효정으로부터 을미사변 때 민비를 살해한 괴수 우범선이 일본에 망명해 있다는 것을 듣고, 그를 살해할 것을 결심하였다. 고영근은 일찍이 민비의 총애로 병마절도사의 관직을 받았고, 민비의 비호 아래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왔다. 이에 그는 '국모보수'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 결행한다면 다시 고종의 환심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과거에 누렸던 권력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일본에서 귀국하기 위해 대반전을 벌일 것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고영근은 우범선에게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해 우선 윤효정이 그를 살해하려 한다는 음모를 말하면서 그의 의심을 풀었다. 그후 그들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져 우범선은 고영근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우선 그는 우범선이 거주하는 구레시에 집 한 채를 빌려 그곳에서 기거하였다. 이어 고영근은 1903년 11월 24일 집들이를 겸하여 우범선을 초청하였다. 집들이에 온 그를 고영근은 미리 준비한 단도로 목과 어깨를 찔렀으며, 고영근의 종자 노원명이 철퇴로 그의 머리를 몇 차례 내리쳤다. 이로써 우범선은 타국에서 국모시해에 대한 심판을 받았다. 그를 살해한 고영근과 노원명은 즉시 히로시마 경찰서에 자수하였고 '국모보수'의 문구를 보여 주었다. 한편 국모시해범 우범선이 고영근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소식이 그가 죽은 다음날 알려지자, 중추원 의장 김가진이 "도망가 있는 죄인 고영근이 우범선을 일본에서 살해한 것은 충의에서 나온 것이니, 법부로 하여금 고영근의 죄를 면해주고, 외부로 하여금 일본공사관에 조회하여 즉시 호환하여 민비와 천하의 인신(人臣)의 원을 풀 것"을 청하였고, 특진관 민영우 시종원경 이유인, 정3품 윤이병법부대신 이재극 등도 고영근의 죄를 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고종은 국모시해범을 처단한 고영근의 죄를 면해주었다. 반면에 우범선의 친일·반민족적 행위는 죽음을 통한 응분의 대가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