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가. 1832년 7월 24일 고대도 정박
조선 정부의 기록에 해당하는 비변사등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순조실록, 동문 휘고 등과 서구인(西歐人)의 기록에 해당하는 귀츨라프 일기와 린제이 항해보고서를 종합하여 볼 때 귀츨라프 일행은 황해도에서 충청해안으로 이동하여 외연열도에 정박하였다가 녹도와 불모도를 경유하여 1832년 7월 24일(음력, 6월 27일) 고대도에 도착 하였다. 이와 관련된 조선 정부의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비변사 등록(備邊司謄錄)
1832년 8월 3일(음력, 7월 8일) 기록된 비변사등록에는 공충감사와 수군우후 및 홍주목사 보고(牒呈)를 인용하여 고대도에 도착한 날짜는 명시하지 않았으나 이양선이 고대도에 정박하였다고 하였다. 즉 “홍주 땅 고대도에 인박(引泊)한 외국인(漂人)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문정하였더니 영국인이라 하였으며 그들은 주문(奏文)과 예물을 주며 통상교역을 요청하였다.”라고 하였다.*1)
-壬辰 七月 初 八日, 司啓曰, 卽見公忠監司洪羲瑾狀啓, 則救擧水虞侯金瑩綬, 洪州牧使李敏會 牒呈 以爲洪州地古代島引泊 漂人言語難通以書問情 則乃是英吉利國人 要請設誼交易云, 而所謂奏文及 禮物俓先逢授者-
2) 일성록(日省錄)
비변사 등록과 같은 날(8월 3일) 일성록에는 공충감사의 보고서(馳啓)를 인용하여 이양선이 고대도에 정박한 일자는 밝히지 않았지만 “고대도에 인박(引泊)한 외국인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문정하였다”는 고대도 정박 사실을 확인하였다.*2)
-初八日 壬子. 公忠監司洪羲瑾 馳啓, 狀啓以爲 水軍虞侯金瑩綬, 洪州牧使李敏會 曣報內 古代島漂人引泊浚彼人處問情則 言語 難通以書問-.
3)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8월 4일(음력, 7월 9일) 승정원일기에는 수군우후와 홍주목사의 보고(牒呈)를 인용하여 “홍주 땅 고대도에 인박(引泊)한 사람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문정하였다”라는 고대도 정박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3)
-壬辰 七月 初九日 癸丑, 水虞侯金瑩綬, 洪州牧使李敏會 牒呈 以爲洪州地古代島引泊漂人 言語難通以書問情-
4) 조선왕조실록(王朝實錄)
1832년 8월 16일(음력, 7월 21일) 조선왕조(순조) 실록에는 “7월 22일(음력,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汎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 뒤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다.”고 하였다.*4) 이 기록은 고대도 지명에 “뒤 바다(後洋)”라는 용어를 추가하여 정박지의 위치 개념을 고대도 주변으로 범위를 확대하였다. 그리고 “7월 22일(음력, 6월 25일)”정박하였다고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5)
-公忠監司洪羲瑾 狀啓, 六月 二十五日, 何國異樣三汎竹船一隻, 來泊於洪州古代島後洋- .
5) 동문 휘고(同文彙考)
동문 휘고(原編續漂民五上國人)와 순조실록 자문(咨文)은 1832년 8월 16일(음력, 7월 21일)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즉 “1832년 7월 23일(음력, 6월 26일) 유시(酉時) 경에 이양선 1척이 본주 고대도의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는데,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어서 역학 오계순을 차송하고 본 지방관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 김형수로 하여금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달려가서 합동으로 문정하게 하였더니, 언어가 통하지 않아 문자를 대신 사용하여 이곳에 오게 된 동기를 상세히 힐문하였다.” 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고대도 지명에 “안항(安港)”이라는 항구 이름을 추가하여 정박한 위치의 개념을 확실히 하였다. 그리고 정박한 날짜에 대하여도 “7월 23일(음력, 6월 26일)”이라 기록하였다. *6)
-本年六月二十六日酉時量, 異樣船一隻, 到泊於本州古代島安港, 聞甚驚駭, 就差譯擧吳繼淳, 該地方官洪州牧使李敏會, 水軍虞侯金瑩綬, 馳詣船泊處, 眼同問情, 語言不通, 替用文字, 詳詰來由-
6) 기타 자료
이밖에 고대도 정박과 관련한 기록으로 통문관지(通文館志), 연원직지(燕轅直指), 동화전록(東華全錄) 및 관련 연구 논문 등의 자료가 있다.*6-1) 리진호, 귀츨라프와 고대도, p.46. 1997. 7. 17
위와 같은 조선 정부의 여러 기록들은 귀츨라프 일행이 1832년 7월에 고대도에 정박하였다는 사실을 입증(立證)하기에 충분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박 장소와 날짜를 고증하기에는 다소 미흡하고 한계성이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정박 장소에 대하여 ‘고대도’, ‘고대도 뒤 바다’ “고대도 안항”으로 서로 다르게 정박 위치를 기록하여 개념 정립이 곤란하다. 두 번째 이유는 정박한 날짜의 기록이 “7월 22일(음력, 6월 25일)” 또는 “7월 23일(음력, 6월 26일)” 및 “기록 누락” 등으로 일자의 개념 정립에 어려움이 있고 상치(相馳)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개념 정립이 곤란하거나 상치되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자료 수집과 검증 절차가 필요하였다.
여기에는 첫째. 일성록에 충청수군 우후(虞侯)의 증언록(原情)이 있다. 즉 수군우후(김형수)는 녹도(鹿島) 별장(別將)으로부터 “7월 22일(음력, 6월 25일) 녹도를 지나 불모도 쪽으로 항해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하였다. *7) 이 같은 증언은 7월 22일 정박 장소가 고대도가 아니라 녹도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홍주목사가 의금부에서 증언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홍주목사가 수군우후의 공문을 받아보니 7월 23일(음력, 6월 26일) 불모도에 정박 중”이라 하였다.*8) 이 같은 증언은 7월 23일 정박 장소가 고대도가 아니라 불모도 라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리스(Rees) 선장이 이끄는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암허스트 호는 그 항해 목적이 통상교역과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임무 외에도 한국 서해안의 “해양탐사(海洋探査)”를 목적으로 하였다.*9) 그러므로 녹도에서 고대도 까지 해양 탐사를 하려면 그 거리와 해양 상태의 지형적 여건을 고려 할 때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였을 것이므로 7월 22일 또는 7월 23일에 고대도 까지 도착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귀츨라프 일행은 7월 22일 녹도에 정박하였으며, 7월 23일 불모도에 정박하고, 7월 24일에야 고대도에 도착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
나. 귀츨라프 일기와 린제이 항해보고서
1) 귀츨라프의 일기
귀츨라프 일행은 1832년 7월 24일(음력,6월 27일) 충청해안(고대도)에 정박하여 지방 관리(官吏)들과 만나 처음으로 필담을 교환하였다. 이 부분을 귀츨라프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7월 24일, 커다란 선박 한척이 우리들 가까이로 접근해 오더니 우리 배에 승선하기 전에 종이쪽지 한 장을 전달하였다. 그 종이쪽지에는 심한 풍파에 항해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느냐는 위로 인사와 이들이 온 것이 협박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배 안으로 안내된 그들은 스스로 관리들이라 신분을 밝혔다. 그들은 우리가 대접한 럼(rum, 술의 일종)을 마시며 부드러운 분위기 가운데 우리의 국적을 정중하게 물었다.
그리고 지방관들은 지금 우리가 정박하고 있는 곳은 대단히 위험하므로 자기들이 개갱(Gan-keang)*10) 이라는 안전한 항구(bay)로 안내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고관들을 만나기도 편리하고, 우리들의 목적인 통상 교섭에도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친절에 감사하고 오늘은 날씨가 나빠 항해에 위험하므로 내일 그 권고에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일행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은 매우 사교적이었다. 국왕(순조)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으나 36년간 집권하고 있으며, 300고을 이상을 통치한다고 하였다. 지방관들은 중국 돈에 대하여 알고 있고 유통된다고 하였지만 달러($)는 본 일도 없다고 하였다. “한국에서 은과 구리가 생산 된다”고 하였다. 그들 중 한사람은 우리에게 중국 고전을 한국말로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중국의 통계연감을 보여주며 조선에서 1년에 네 번의 조공(Tribute)을 보냈다고 했는데 사실이냐고 물으니 주저 없이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일기 원문은 다음과 같다. *11)
―A large boat came along-side, and before the people came on board, they sent up a slip of paper, expressing their sympathy with us in our hardships from the winds and weather, and assuring us that they did not come to intimidate us. Those who entered the cabin called themselves mandarins, and made very free with the rum. They inquired politely our country, and remarked that we had anchored in a very dangerous place, adding, we will bring you to a bay called Gan-keang, where you may find safe anchorage, meet the mandarins, adjust the affairs of your trade, and obtain provisions. We did not follow their advice in going to-day, because the weather was very hazy, but promised to follow their direction to-morrow.
The principal man of this company was very communicative; yet he would not tell us the name of the king, but simply said that he had reigned thirty-six years, and ruled over three hundred cities. They know the Chinese money, "cash," which they said was also current among them, but they had never seen a dollar, "In our country," said they, "there is silver as well as copper found." One of them explained to us a Chinese classic in his own native dialect, reading very fluently. We showed him a Chinese statistical work, which stated that the king of Corea sent a tribute four times a year to China, and asked him whether this was true. He answered, without hesitation, this is the fact.
위와 같은 일기를 살펴보면 “스스로 관리(官吏)들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배안에 들어 왔다”, “일행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은 매우 사교적 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사람은 중국 고전을 한국말로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필담자(筆談者)는 충청 수영의 지방관들로 볼 수 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충청 수군 절도영 우후의 관직”에서 수군우후는 정 4품의 무관직으로 2년을 주기로 교체되며, 그 밑에 토착군관(土着軍官) 1명, 대변군관(待變軍官) 20명, 진무(鎭撫) 8명, 지인(智印) 4명, 나장(羅將) 2명, 관노(官奴) 2명, 관비(官婢) 4명이 배속되었다.*12)
그러므로 이날 방문자는 충청 수영의 수군우후 밑에 있는 토착군관과 대변군관 또는 다른 관리 중에 한문에 박식한 관리와 선원들이 참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린제이 보고서
고대도 정박과 관련하여 린제이는 항해보고서에 그의 방문 목적과 지방관들로부터 안전한 항구로 이동하도록 권고 받은 사실과, 서울의 위치와 국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화 당시의 분위기와 선물 등에 대하여 7월 24일 항해보고서에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가) 방문목적에 대하여
1832년 7월 24일(음력,6월 27일), 안개가 끼고 궂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이때 지방관들은 배를 타고 우리 배에 찾아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은 한문에 정통한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질문하였다. 우리는 영국 사람들이며 조선 국왕께 우호적 관계 개설을 희망하는 공문(letter)과 선물을 드리기를 원한다고 방문 목적을 설명하였다. 이 부분을 영문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13)
-The following day(July 24) the fog and bad weather continued uninterrupted. We were again visited by several boats, in one of which was a person who thoroughly understood the Chinese language. He commenced the conversation by asking our nation, and condoling with us on the hardships we were exposed to from wind and weather. I replied, more from curiosity than with any hopes of a favourable opening, “that we were natives of Great Britain, and wished to present a letter and presents to the King of Corea.
나) 안전한 항구로 이동 권고
배에 올라온 방문자 중 텡노(Teng-no)라는 지방관은 현재 외양선이 정박 중에 있는 장소(고대도)는 대단히 위험한 곳이므로 30리(10 miles) 정도 이동하면 거기에는 수심이 깊고 항해가 용이하며 안전하게 닻을 내릴 수 있다고 하였다.*14) 그리고 그곳에 가면 고위 관리를 만나 무역에 대하여 협상하고, 식량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영문보고서는 다음과 같다.*15)
The reply was, “you are here exposed to dangers; I will show you the way to a safe anchorage, where you can present the document to a great mandarin.” I gladly availed myself of this unexpected opportunity for the accomplishment of my wishes. Our visitor informed us that his name was Teng-no and that he had been expressly sent by a mandarin of rank in the neighbourhood to visit the ship, and see on what business she came. Teng-no was now anxious that we should immediately move the ship to the harbour he spoke of, which was only 30 le, or 10 miles distant, assuring us that we need entertain no anxiety or suspicion, for the water was deep, and the pilots knew the passage well; adding, as an inducement, “having been many days at sea you must doubtless think of eating fish and flesh; follow where I shall lead you, and you shall have both." I replied, expressing our high satisfaction at the hospitable feeling manifested, but that as our ship was large, and the weather thick and boisterous, we could not venture to move that day, but that if he would return the following morning we would thankfully accept his offer to pilot us to a safe anchorage, where we might meet with an mandarin of rank. To this the acceded.
다) 서울(首都)과 국왕에 대하여
조선의 서울은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지명은 ‘한양(Han-yang)’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모든 지도와 수집된 정보(Timkouski's Mission)와 일치한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암허스트호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부터 300리(里)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 수도가 위치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국왕의 이름은 알지 못했으나 나이는 43세이고, 36년 간 전국의 300여 고을을 통치하고 있다고 인지하였다. 영문보고서는 다음과 같다.*16)
In reply to some of our questions, he stated the name of their capital to be Keng-ke-taou Han-yang. The first three characters, which have hitherto been adopted in all maps as the name of the capital of Corea, appear merely to designate that is the capital town, and the two last, Han-yang, are the name of it. That this information was correct is evident on comparing it with what us stated in Timkouski's Mission, Vol.Ⅱ.p.101. He further told us, that it was distant 300 le. In reply, to a question as to the name of his king he replied, “I dare not write his sacred name: he rules over more than 300 cities, he is 43 years of age, and has sat on the throne 36 years.
라) 대화 분위기와 선물에 대하여
귀츨라프 일행과 탱노(Teng-no) 등 신분이 있는 관리들과의 대화는 부드러운 분위기 가운데 몇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린제이는 방문자들에게 선물(calico, camlet)을 주었는데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뒤에 약간은 받아들였다. 배를 몰고 온 선원들은 사자 문양이 새겨진 단추를 선물로 받았다. 포도주와 독한 술도 마셨다. 이에 대한 영문보고서는 다음과 같다.*17)
- Previous to his going away I offered some trifling presents of calico and camlet to Teng-no and some other respectable-looking persons with him: they at first refused, repeating the common sign of drawing their forefinger across their throats, but after a little they received our gifts. A lion button was given to each of the sailors, and appeared to delight them much. After having staid some hours on board, during which we entertained them with sweet wine and spirits, they left us and went on shore. The Coreans have all a decided partiality to strong liquors, of which they drink considerable quantities without its producing any effect on them
. 위와 같은 서구인들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조선정부 기록과 연계하여 볼 때. 귀츨라프 일행이 충청해안에서 활동한 상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항해 경로 등을 고려하여 1832년 7월 24일 정박한 장소가 고대도 라는 사실도 인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관들과 귀츨라프 일행 간의 필담(筆談) 내용 중에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예를 들면 첫째, ‘대단히 위험한 곳이라고 지적한 정박지는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둘째, ‘개갱(Gan-keang)이란 안전한 항구는 정확하게 어디인가? 셋째, 개갱에는 과연 안전한 곳에 닻을 내릴 수 있고, 고위 관리를 만날 수 있으며, 식량도 구 할 수 있는 여건이 구비되어 있는가? 등의 의문점이다.
첫 번째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선 고대도 지명 중 제1차 검토 대상으로 고대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선바위와 모란여 사이에 있는 ‘목안’의 입지 여건을 조사 하였다. 다음으로 고대도 동북쪽 간단여의 아래에 위치한 현재의 고대도항 주변을 제2차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제3차 검토 대상은 고대도 주변의 모든 해안을 개략 조사하였다. 그 결과 광범한 문헌자료와 청문조사를 통하여 ‘목안’을 귀츨라프의 정박지라고 추정하는데 잠정 결론지었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의문점 즉 간게앙에 대하여는 고대도 안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별도로 보다 상세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다. 고대도의 지명 조사
1) 고대도의 개황
고대도 정박과 관련하여 귀츨라프 행적을 살펴보려면 우선 고대도안의 지명 조사는 필수적이다. 고대도(古代島)는 예로부터 마을이 형성된 섬으로 집터가 많아서 고대도(古垈島) 또는 ‘고뎜’ 이라고 한다. 서구인들의 탐사 기록에는 1816년의 영국 탐사선 맥스웰(Maxwell)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나, 1857년 프랑스 군함 비르지니(Virginie)호의 게렝(Guerin)제독 일행이 수심 측량을 하면서 고대도항을 Majoribanks 라 명명하였다. 이때 불모도는 Lapierre라 하였으며, 원산도는 Roussin 이라 명명(命名)하였다. 안면도는 1832년 린제이가 이름을 붙인 Lindsay 섬 그대로 사용하였다.*18)
고대도는 삽시도 북쪽 4.5km 에 위치하여 있으며 대천 항과 오천 항에서 각각 16km 떨어져 있다. 이 섬의 면적은 0.92㎢ 로 어족 자원이 풍부하여 현재 97가구 241명의 인구가 어업을 주로 하고 있는데 선박운영을 비롯한 멸치와 실치 잡이 등에 종사하고 있다. 섬 일부에 농경지가 있으나 논은 없고 밭에 고추, 양파, 배추 등을 경작하는 정도이다.*19)
2) 개갱(Gan-keang) 지명 조사
1832년 7월 24일, 귀츨라프 일기에 기록된 개갱(Gan-keang)이라는 지명을 한국기독교 역사서 대부분 기록에서는 조선정부 문서 기록을 위주로 고대도와 동일한 개념으로 해석하거나, 고대도 안에 있는 어느(?) 지명으로 판단하고 있다.*20)
만일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간게앙과 고대도 지명과 어느 부분이라도 일치 또는 유사하거나, 지형적 입지 조건이 매우 유사하다는 당위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검증 절차에서 고대도 안에 “안전한곳에 닻을 내릴 수 항구와, 고위 관리를 만날 수 있는 관청과, 식량을 구 할 수 있는 시장 여건이 구비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지리적 측면도 고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기록된 한국기독교 역사를 원점으로 돌려 그 지명과 지형 등 조사 연구가 선행되고 재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개갱’ 또는 이와 유사한 발음의 지명을 고대도에서 찾아보려고 여러 차례 조사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더구나 안전한 곳에 닻을 내릴 수 있는 항구의 입지 조건과 고위 관리를 만날 수 있는 관청과, 식량을 구 할 수 있는 시장 여건이 구비되어 있는 장소는 없었던 것으로 잠정 결론지었다. 이 같은 잠정 결론의 근거는 각종 문헌 자료와 정밀지도(해도 및 지형도)를 가지고 수차의 현지 조사와 청문(聽聞) 조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증언의 청취 대상자도 고대도 지리에 밝은 최재문 이장(010-7932-1674)을 비롯하여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 거주한 최고령 남자 김창술 옹과 최고령 여자 하옥희 권사, 그리고 귀츨라프 기념교회 박원열 담임목사(010-4405-7104), 지역학교의 전연옥 교사(019-399-2051), 기타 주민 등 폭 넓게 접촉하였다. 지리․역사 부문의 각종 문헌자료와 향토사도 세밀하게 검토하였다. 행정기관(오천면출장소, 면사무소, 시청 등)의 공직자들과도 협의하면서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간게앙 또는 이와 유사한 발음의 지명을 고대도로 연계하는 것은 타당성이 희박하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보완을 위하여 새로운 핵심 과제로 조사 범위를 고대도 주변 섬까지 확대하였다. 그 결과 귀츨라프 일행이 정박하였다는 간게앙 또는 이와 유사한 지명으로 원산도에서 ‘개갱’이라는 지명과 ‘관개(官家)’ 라는 지명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별도로 자세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3) 고대도의 지명들
고대도 내륙에는 북쪽으로부터 뒷산, 당산, 산끝재, 봉화재 등 여러 개의 산이 있다. 이중 봉화재는 고대도 중앙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가 89.5m이며, 옛날에 조난이 있거나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 봉화 불을 피워 신호를 했던 산이다. 그리고 윗말의 서쪽에는 43.8m 의 낮은 당산(堂山)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매년 정월 3일 당제가 거행 된다.(사진 참조)
고대도 섬 둘레의 해안에는 간단여 등 14개의 지명이 있다. 이 중 최북단의 ‘조구여’에서 최남단의 ‘선바위’에 이르는 서쪽 해안은 주로 바위 너덜로 되어 있어 배의 정박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만 동남쪽 해안의 목안(모라녀)의 경우에는 옛날에 세곡선이 잠간씩 머물었다고 전해지나 이 지역 해도(海圖)와 지형 여건을 고려할 때 안항으로 보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고대도 동쪽의 현재의 항구는 최근에 개발되었으나 수심과 바람막이 여건을 고려할 때 이 또한 안항으로 보기 어렵다.*)지도 6-1 참조
고대도 지명조사와 관련하여 고대도의 북쪽 해안으로부터 남쪽 해안에 이르는 섬 주변의 지명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21), *22), *23)
고대도 해안의 지명들
- 간단여: 고대도 북쪽에 끝에 있는 바위 너덜로 단면(斷面)이 날카로워 부쳐진 이름이다.
- 조구여: 고대도 북서쪽 끝에 있으며, 옛날 오천수영의 수군들이 가끔 드나들며 목을 지키 던 여이다. 바위에 해산물이 많아서 조구녀 들을 의지하여 마을 사람들이 살았다.
- 뒷산너머: 고대도 북쪽의 뒷산 서쪽에 있는 해안이다.
- 당너머: 고대도 당산의 서쪽 해안이다.
- 어르금너머: 고대도의 봉화재와 산 끝 재 사이에 서쪽으로 난 골짜기 해안이다.
- 석바래: 고대도 서남쪽에 바위 너덜로 되어 있어 돌이 많아 석바래 라고 한다.
- 선바위(돛단녀): 고대도 남쪽에 솟아 있는 바위로 고기잡이를 나가는 어민들이 하루의 무사함을 빌며 한번 식 머리를 숙이고 지나간다는 장승같은 바위이다.
- 모란여: 고대도 남동쪽 해안의 섬을 두르고 있는 바위 너덜이다.
- 목 안: 고대도의 남동쪽 항구로 들어서는 안쪽이다. 고대도의 첫 관문이었으며 옛날 세곡선(稅穀船)아 잠시 머물었다고 전해진다. 천수만의 조수와 교차되는 곳으로 고기가 많이 서식한다.
- 술몽뎅이: 봉화재의 동쪽 해안이다.
- 어르금: 산끝재의 동쪽 마을이다.
- 앞장벌: 동쪽 해안에 마을 앞에 있는 갯벌이다.
- 뒷장벌: 동쪽 해안에 인접한 마을의 북쪽으로 현재 고대도 항구로 개발된 중심지이다.
- 가운데말: 고대도로 입구 선착장과 연결된 마을로 섬 주민 80%가 이 마을에 거주한다.
인용문헌
*1) 비변사등록, 1832년 8월 3일(음력, 7월 8일) *#-壬辰 七月 初 八日, 司啓曰, 卽見公忠監司洪羲瑾狀啓, 則救擧 水虞侯金瑩綬, 洪州牧使李敏會 牒呈 以爲洪州地古代島引泊漂人言語難通以書問情則乃是英吉利國人要請設誼交易云, 而所謂奏文及禮物俓先逢授者
*2) 일성록, 1832년 8월 3일(음력, 7월 8일) *# -初八日 壬子. 公忠監司洪羲瑾 馳啓, 狀啓以爲 水軍虞侯金瑩綬, 洪州牧使李敏會 曣報內 古代島漂人引泊浚彼人處問情則 言語 難通以 書問.
*3) 승정원일기, 1832년 8월 4일(음력, 7월 9일) *# 壬辰 七月 初九日 癸丑, 水虞侯金瑩綬, 洪州牧使李敏會 牒呈 以爲洪州地古代島引泊漂人言語難通以書問情-
*4)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순종대왕실록, p.91, 1993. 12. 30.
*5) 조선왕조실록, 1832년 8월 16일(음력, 7월 21일)
*6) 동문휘고 / 순조실록, 1832년 8월 16일(음력, 7월 21일)
*6-1) 리진호, 귀츨라프와 고대도, p.46. 1997. 7. 17
*7) 일성록, 1832년 9월 1일(음력, 8월 7일) *# 수군우후는 녹도 별장의 보고를 받고 7월 23일 원산도에서 배를 타고 불모도로 나갔는데 세찬 비바람으로 고대도로 표류하여 이틀을 머물러 있었다. 현지의 상주 수비 군관이 수군우후에게 보고한 사실을 증언한 것이므로 신빙성이 있으며 7월 24일 고대도 도착은 타당성이 있다.
*8) 일성록, 1832년 9월 1일(음력, 8월 7일) *# 이는 행정의 제1차 책임관인 홍주목사 증언이므로 2차 감독관 공충감사 보고보다 정확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서해안의 지리적 입지 여건을 고려 할 때 항해 경로가 <녹도(7월 22일)에서, 불모도(7월 23일)를 경유하였다면 7월 24일 고대도에 도착>은 타당성이 있다.
.*9) 이상업, 서양인들이 본 한국근해, p.23, 2003.10.31
*10) 간게앙이란 지명은 충청해안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지명의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기록한 것으로 해석 된다.
*11) C. Gu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pp.329-330, July 24
*12) 고동환, 조선 후기 도서정책과 원산도의 변화(논문), 2007
*13) Mr. Lindsay's Report. Report of proceedings on a Voyage to the Northern ports of China in the ship Lord Amherst(Second edition). p.222, 1834
*14) 텡노라는 이름은 기록 과정에서 잘못 알아들었거나 발음을 틀리게 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15) Lindsay's Report, pp.222~223
*16) Lindsay's Report, p.223
*17) Lindsay's Report, pp.223~224
*18) 이상업, 서양인들이 본 한국근해, p.147, 2003.10.31
*19) 보령시오천면, 도서현황 2008.7 현재
*20) 리진호, 귀츨라프와 고대도, p.57.
*21) 차경철, 오천의 어제와 오늘, pp.214~218. 2000.10.14
*22) 보령시, 보령의 지명, pp.167~168. 1998.12.10
.*23) 보령시, 그 섬에 가고 싶다, pp.43~52, 2007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