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2월 한의원을 개원하여 1995년까지 정신없이 바빴다.
진료하고 강의 나가고 봉사 나가고 개척교회 섬기고 연구하고 글도 쓰고....
인애가 영생 한방병원
몸은 힘들어도 즐거웠다.
나를 필요로 하고 찾아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행복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기에 돈을 받지 않고 오히려 내 돈을 내어 그들을 섬겨주는 관계 속에서 보람을 느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내가 맡고 있는 강의 시간은 내가 책임지는 조건으로 개원하고
주 2일을 빠지다 보니 한의원에 비상이 걸렸다.
넓은 공간에 인테리어와 진단 및 치료기기 등을 많이 구비하다 보니 빚을 졌다.
그래도 대학에서 잘나가는 교수로 있다 나왔으니 의료장비 만큼은 많이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이자와 원금도 갚아나가야 되고 봉사 활동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토요일 오후 4~5시간 봉사 나가서 100여명을 진료하면 몇칠분 투약에 관련된 비용,
일회용 침과 소독제, 간식과 저녁 식사비 그리고 기타 소모비까지 합하면 지출 비용이 매우 컸다.
후반기에는 강의를 하루에 다 몰아서 하기로 하여 진료실을 더 지키기로 했다.
직장 신우회와 “선한이웃회”의 기도회를 통해 한의원이 빨리 자리 잡아서
지역 봉사를 더한층 할 수 있도록 기도요청을 했다.
당시 이창희 권사님과 전인순 권사님을 비롯한 기도 부대의 도움은 실로 컸었다.
말씀으로 꿈으로 환상으로 응답받은 내용들을 기도회에서 서로 내놓아 은혜를 나누었다.
이런 기도 열기를 계속 높여가던 어느 날 기도 중에 후배 손영하 교수의 제의가 뚜렷이 생각났다.
자가 건물이니 의료법인을 세워 사회 환원하라는 충고였다.
나의 삶의 철학과 교수 생활과 현재 사회생활 및 가족환경을 알고 있던 그가 나를 관심 갖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애가 장수 한방병원
개인이 아닌 의료법인을 세우는 것이 곧 욕심 없이 살아가는 방법이 되고 사회 환원하는 방법도 된다.
규모 경제도 할 수 있다.
이런 장점들 외에 내 개인 재산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재정적 사회봉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법인이 되면 법인 자체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허가 기관이 늘 감독하기 때문이다.
공익, 비영리 의료법인을 설립한다 해도 막상 혜택 받는 부분은 없다.
단지 공공시설 수탁공고시 참여할 자격이 있는 정도다.
자기 재산 내놓고 별 이익이 없으니까 기피하는 것이고 최근 이런 불합리한 점 때문에
차라리 서구식으로 영리 법인화하자는 논의가 활발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의료 법인화하는 것이 자산이 있다고 해서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가 된다.
의료법인화 과정은 서류가 수차 반환될 정도로 까다로웠다.
자세한 과정을 말하자면 개원한지 3년이 지나면서 경희대에 근무하는 손영하 교수와
우연히 얘기하는 중에 힌트 하나를 얻었다.
차라리 이 건물이 박사님 명의로된 건물이니까 법인화하는 것이 안좋겠냐는 것이었다.
가족들이 많고 가문이 넓은 데다 박사님 성격이 좋고 착하고 베풀기 좋아하니까
누구라도 와서 보증서 달라 담보해 달라하면 안해주실거냐고 했다.
사실 그랬다. 이미 동생 하나가 건설 회사를 나와 건축자재 가게 한다고 부탁을 받아 담보 제공을 한 상태였다.
다른 동생들도 구두로 부탁해온 터였다.
인애가 보생 한방병원
이미 조부도 세상 떠나시고 아버지도 조부를 간호하시다가 인대가 끊어져
2회째 경희의료원에서 어깨 수술을 받은 상태여서 기력회복이 어려운 상태였다.
조부가 세상 뜨기전 “내 못다한 일을 하거라, 노인복지를 더 잘해라.
나는 그냥 작게 자비량으로 했지만 너는 정식으로 능력껏 크게 해봐라.
그렇게 기도했다.” 이어서 “원래 너는 목사가 되도록 바랐지만 이제 대학교수를 지내고 네 사업을 시작했으니
의료와 복지 쪽으로 너의 은사와 달란트를 잘 활용하라”는 유언을 이미 받았던 터다.
한국의 제도에 의하면 비영리법인을 만들어야만 가능했다.
법인을 만들려면 기초 자산이 일정액수 이상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물을 기초 자산에 넣어야했다.
부채나 담보가 없는 채로 넣어야 한다.
답이 나왔다.
의료법인을 만들어야 했다.
주님께 맡겼다.
“내 재산 다 내놓아 법인을 설립해 내가 주인이 아닌 법인이 주인인 공익병원을 만들어
욕심없이 국민들을 진료로 섬기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내 재산 내놓아 법인설립하는 것도 이렇게 까다로우면 누가 법인을 세울까 생각하면서
이를 위해서 공채로 입사한 당시 부장인 이형희 현 이사를 재촉했다.
기획과 경리를 큰 회사에서 쌓은 경험이 있던 터라 관련된 자료 정리는 잘 했고
경희대학에서 경험이 있는 손영하 부장이 도와주었다.
6개월 쯤 지났을까?
이미 동생 때문에 담보로 되어 있는 액수 만큼 변제해야한다는 조건부로
서류심사가 서울시 의학과에서 통과되었다.
이젠 내 재산이 아니고 의료법인 일맥의료재단이라는 비영리법인이 주인이 되어
내가 수탁자로서 이사장으로서 산하 병원을 잘 운영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1995년 7월 15일이었다.
인애가 우신향 한방병원
“일맥(壹麥)”이란 말은 “한알의 밀알”이란 뜻으로 성경에서 따왔다.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신우회 예배 시간마다 지혜를 달라도 기도한 결과 최종적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져 많은 열매를 재생산하는 말하자면 많은 생명을 살리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신우회에 동네 주민 중 타교회 교인이라도 우리 뜻에 동의하는 분들과
“선한 이웃회” 회원중 이 지역에 사는 분들도 같이 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동네 분 중에 이창희 권사님이 기도를 많이 하시는데 당시 무학교회 권사로 시무하고 계실 때였다.
이 권사님이 집중기도한 결과 보리단에 관한 좋은 꿈을 꿨는데 아무래도 “밀알”이란 뜻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일맥”이라는 말을 꺼내기전에 성품이 급한 이권사님이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다.
합의해서 “일맥” 명칭을 만들었다.
희안한 일이엇다.
이권사님의 꿈과 나의 생각이 일치했고 기도 멤버들과 직원들이 다 좋겠다고 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한알의 밀알로서 사명을 다 하겠습니다.”
설립 허가가 1995년 7월 15일 자로 통과됐다.
이때 아버지에게 마지막 효도를 해야된다고 생각했기에 한의원 3층 입원실에서 모시고 치료 중이었다.
다음 단계가 한방병원으로 승격시키는 일과 양한방 협진을 위해 양방전문의 채용이 필요했다.
한의사도 몇 명, 각 분야마다 허가사항을 준수하려면 직원이 최소한 25명은 더 채용해야 했다.
고정 지출이 그만큼 늘어나야 하고 일이 많아졌다. 당연히 비례하여 수입도 늘어야 했다.
의료서비스업이라 인건비 비율이 커서 운영의 묘를 잘 살리지 못하면
부도가나고 폐업하는 경우가 이래서 생긴다는 것이었다.
병원 승격을 다시 별도로 서울시에서 허가 받아야했다.
요건을 다 갖추고 현장 심사 있은 후 3개월 뒤에 한방병원 허가를 50병상, 양방의원 20병상을 허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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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화, 병원 승격은 아버지와 아내와의 합의가 있어야겠기에
병상에 누워있던 아버지 병실에 같이 모여서 조심스럽게 취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아버지나 아내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 가문이 믿음의 유산을 받아 이만큼 사는 것 감사하다.
우리가 못다한 일, 이렇게 공익화해서 둘이 협력하여 잘 이루어 나가거라”는
아버지의 어쩌면 유언과 같은 당부를 아내도 “예”하고 대답하고,
“당신은 기도하는 사람이고 난 욕심이 없으니 알아서 운영하세요”라고 내게 일임했다.
고마웠다.
두분에게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찬송했다.
사실 아버지보다는 아내가 안된다고 할까봐 설득할 각오를 했었다.
여자이니까.
아내는 서양적 사고 틀을 갖고 있어 개인 재산에 대해 부부½씩 공유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면 몇 칠 생각하면서 결정하겠다고 해도 골치아파지는 일이 있었기에 더욱 조바심했었다.
그러나 의외로 기분 좋게 수락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