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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도농협의 창설과 발전과정
백 년 전 우리나라의 농민은 원시적 영농방식으로, 후진적 농업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항상 가난과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농사일이 매우 힘들기만 했다.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했으니 등짐에 의존할 수밖엔 없었다. 과학적으로 고안된 농기구가 없어서 무슨 일이던지 수동에 의존했다 능률도 안 오르고 힘만 더 들었다. 그런 중에 지혜를 얻은 것이 “품앗이” 또는 “두레계” 같은 것으로 결집하여 농사일을 공동 작업으로 능률도 올리고 흥을 돋우어 힘을 덜기도 했다.
계 (契)라는 모임은 서로서로가 협동하여 도움을 주고받는데 목적이 있다. 작은 출자로 몫 돈을 만들어 상을 당하거나 혼사를 치룰 때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공동정신이 성장하여 전개한 운동이 농업협동조합이다. 이들은 자주적인 협동조직을 통하여 농민의 생활력을 높이고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들은 생활자재구입과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는 것과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등 가입한 조합원과 관련된 경제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민주적 자립정신으로 운영하여 서로의 이익을 창출해냈다
8.15 광복이후 전형적 농업국이었던 우리나라의 농민은 농지개혁의 큰 혜택을 받아, 소작농이라는 노예적 형편에서 나름대로 지주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량을 촉구하는 농업정책으로 농민들은 서서히 발전하는 농업을 하게 되었으며 생산물의 판매 소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절실히 요망하게된 것이 농업협동조합이다
정부는 1958년에 농업은행과 구농협을 설립하였으나 활동이 매우 부진했다.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5.16정부는 농민들이 빚을 지고 그 이자에 허덕이는 현실을 파악하고 이 고질적인 고리채를 정리하려면 농민들이 서로서로 도웁는 농업협동조합이 절대로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1961년 6월15일에 도 지부 8개와 시 군 조합 140개(지소 383개)로 특수조합 257개를 바탕으로 현재의 농협을 발족시켰다. 선진국에 농협은 농민자체로 뭉쳐진 자생단체였지만 우리나라의 농협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권장하여 농민이 결집한 조합이었다. 그때에 양도조합이 257 개의 특수 조합에 속할 수 있었다. 그것은 면내에 고기연 윤경기의 활약으로 황영식 군 농협장의 도움을 받았고 당시의 국회의원 김재춘이 힘써 주었기 때문이었다.
리 동 단위조합 시대
광복이후 농림부는 농협에 관한 법률의 제정이 늦어지자 농업인 스스로가 협동조직을 만들도록 추진하였다.
1952년부터 농림부는 전국이 읍면단위에서 한 사람씩 지도요원을 선발하여 농업이론 및 영농기술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육을 받은 요원들은
자기 고장에 가서 자연발생적인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 설립된 것이 농촌실행협동조합이었다 이들은 공동구판장의 설치와 운영, 일부 농산물의 일용품과 물물교환을 실시하였다. 구판장에서는 장생호(개량된 호미) 와 유아등을 공동구입하여 판매했다
“장생호”는 농민들이 밭일을 할 때 쪼그리고 앉아서하니까 힘도 더 들고 능률이 안 오르기 때문에 손잡이를 길게 만들어 서서 일을 하고 먼 곳에 있는 풀도 뽑고 밭을 파 이르기도 쉽게 개량하여 농민들에게 권장한 농기구이다. 유아등은 원형으로 만든 유리병에 등잔불이 장치되어 있었다. 밤에 불을 켜서 묘판에 설치해두면 나비들이 날아들어 죽음으로 병충해를 예방하는 이른바 신발명농기구였다. 이 외에도 비료와 기타 농기구들과 생활용품을 공동판매하는 사업을 하였다. 양도면에서는 삼흥리 농협이 매우 활발한 사업을 했다. 조합장에 윤필수 였고, 상무이사에 고기연이었다. 이들의 왕성한 농협활동으로 산문부락 용팡골에 수력발전소를 설치하여 강화 최초로 전기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7년 농협법이 제정되면서 리 동 조합은 합법적인 협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모두 해산되었다.
1957년, 농협법이 국회에 통과되면서 시 군 구 농협과 중앙회, 3단계로 조직되었다.
1958년3월, 자본금 300억환을 농협과 농협단체가 출자토록하고 농업인에 대한 직접융자허용 등에 대한 법 개정으로 그해 4월1일에 특별법에 의한 농업은행이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1961년 6월16일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농협과 농업은행 두 기구의 통합을 의결하고 새로운 농협 법에 따라 구 농협과 농업은행이 통합하였다
양도 농업협동조합의 발족(1972년9월11일)
그동안 리 동단위로 구성되었던 농협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농협과 농은이 통합한 후 리 동 조합은 페쇠하고 1972년 9월7일에 양도면 단위 농업협동조합이 새로 발족하였다.
농협중앙회 산하에 강화군농업협동조합이 발족하였다
강화군농협 장은 황영식이 선임되었다.
따라서 양도농협 장은 고기연이 선임되었다 고기연은 리동 농협시대부터
농협 사업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되어 양도농협의 초대 조합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양도농협창설의 중책을 맡고 어려운 길을 출발하였다.
초창기에는 사무실을 지금의 주민 센터인 복지관에 책상 몇 개 놓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창설당시의 양도농협 조직은 다음과 같다.
조합장 ; 고기연 참사 ; 김 순 영농부장; 한규목 서기; 유병일
이사 ; 긴옥현 김정길 한상춘 한상태 전기수 이동천 이근배 강유신 (계 8명)
이들의 초창기에는 보수가 없었다. 조합장으로부터 전 임직원들이 매우 빈약한 형편에서 출범하였다. 배를 띄우기는 했으나 바다로 나갈 힘이 없는 것이었다. 선원들에게 보수를 줄 자금조차 없어서 초창기 직원들은 매우 처절하였다. 그러나 고기연조합장은 농민의 협동정신에 의한 자주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다.
조합 청사 신축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합 현판을 걸어야할 건물이 있어야 했다. 고기연은 군 농협 황영식 조합장을 만나 양도농협 청사를 건축하기위한 정책자금을 받아올 수 있었다. 1973년 10월30일에 건평67㎡을 건립하고 양도 면민 차원에서 준공식을 하였다.
조합장은 대외적인 업무를 수행하였고 내부에는 김순 참사를 수반으로 영농 업무와 조합 자금 조성하는 일과 조합원의 농업경영에 필요한 양농자재를 공동구입하여 싼 값으로 판매하는 업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양도농협 초대 이사들,
초기에 이사들은 아직 농협에 개념조차 바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조합원의 농업향상을 생각하고 개발하는 것 보다는 어떤 명예직 정도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초창기의 이사들은 양도농협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귀중한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 1975년 10월이었다. 연쇄점용으로 21.4㎡을 건립하고 고기연조합장은 한없이 만족했다. 지금까지 조합원들에게 별다른 이익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농협으로서의 실감을 느끼지 못했었던 것이다 이 연쇄점이 완공되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의 생활용품이나 농기구를 시중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판매하게 되었다.
연쇄점사업은 예상했던 것보다 순조로웠고 많은 이익을 올렸다 그것은 농민조합원들이 농협을 사랑했고 농민의 조합이라는 관심이 깊어졌기 때문이었다. 연말에는 조합운영에서 남은 이익금을 조합원에게 돌려주는 환원사업을 단행하였다. 그런 일은 출자를 많이 한 조합원과 연쇄점이용에 힘써준 농가에 균등하게 분배하는 시책을 썼다. 구판사업이 비대해지고 운영자금도 원활해졌다.
1978년에는 유류판매 사업을 시작하였다 인화물질을 취급하는 업무임으로 시설관리나 판매허가를 받는 과정이 까다로울뿐더러 석유를 현장에 배달해주는 업무까지 하기 때문에 저장고나 유류수송차를 구비하기까지는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특수시설을 구비해야했던 유류취급소 6㎡을 건립하기까지는 고기연 조합장이 계획한 사업을 이사들이 잘 이해하고 협조했기 때문에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로인하여 후에 다른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초석이 다저 졌다고 볼 수 있다. 1978년까지 조합창립이래 6년간의 세월에 양도농협이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조합으로서의 형태는 매우 눈부시게 성장했다.
조합의 세대교체
양도농협이 창립하기까지는 전술한 바와 같이 초대조합장 고기연의 노고가 컸다 개척자는 누구나 힘들기 마련이었다. 창립당시의 조합장이나 사무직원들은 참으로 보수가 미약했다. 유병일의 증언에 의하면 오랜 기간을 무보수로 일했고 적게는 4만원에서 최고 15만원을 받아봤다고 하니 그들의 어려웠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1978년 10월23일부로 초대조합장 고기연이 퇴임함으로 세대를 교체하게 되었다. 고기연은 양도농업협동조합창설의 선구자로 조합기능에 기초를 닦은 공로자로 양도농협 역사에 남는다.
1978년10월, 제3대 조합장으로 김 순이 취임하였다. 김 순은 고기연조합장과 참사로 일하면서 조합업무 각 분야에 경험이 풍부하여 조합장 실무를 수행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다만 조합운영자금 조성하는 일이 난관이었다. 정부에서 대출받는 공영자금은 한계가 있었다. 그 외에 방법으로는 조합원의 출자를 독려하는 방법을 세웠다 조합원이 농협에서 어느 한도 출자해 줄 것을 권장했다. 그러므로 조합원이 현금대출을 받으려면 영농자금을 제외한 모든 대출에서 반드시
출자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은행 문이 높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양도농협 초기역사에 꼭 기록할 일은 이사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개별적으로 출자를 많이 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여비 한 푼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농협에 출자는 많은 금액으로 앞장섰다.
양도농협 사무관계도 조합장으로부터 서기에 이르기까지 많이 교체되었다. 이사들도 전에 있던 지역 유지들이 아니라 농사현장에서 직접 종사하는 젊은 농부들로 세대를 교체하였다.
김 순 조합장은 1981년 10월까지 업무를 수행하고 퇴임하였다
그 후임으로 제5대 조합장에 윤순석이 선임되었다 윤순석은 군에서 제대한 후 곧바로 농협업무에 종사하였다 오랜 근무기간을 통하여 쌓은 경력이 조합장업무를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조합이 성장하고 업무량이 많아졌다 정책적으로나 업무 수행하는 과제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삼흥리와 도장리에 있는 창고도 증축 또는 수리해야할 형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업무를 수행하는 사무실도 협소하였다.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과감하게 단행하여조합청사를 61㎡으로 증축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도단위조합을
양도농업협동조합으로 승격하여 위상을 높였다
양도 농협의 성장시대
1990년 3월20일은 윤순석에 이어서 이강신조합장이 (7.8.9대)취임하였다.
양도농협이 출범한지 어언 18년이 되었다 고기연이 나무를 심고 김 순과 윤순석조합장이 물을 주었다면 이강신조합장시대는 성장하는 시대였다. 조합의 규모가 커졌다 농민들의 조합에 대한 인식도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서 의례히 농협을 이용하는 것을 생활화하게 되었다
1990년 연말연시 연휴가 끝나고 새로운 각오로 시무식을 마친 양도농협의 사무실은 얼굴이 바뀌었다 윤순석이 9년간의 집무기간을 끝내고 새로운 수장으로 이강신 시대가 열렸다. 직원들의 책상에는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무처리 방식이나 금전출납도 온라인(on-hine)으로 전산화하였다 이른바 P C시대가 열린 것이다. 온라인이라는 생소한 용어는 조합원들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온라인이란 컴퓨터의 단말장치(端末裝置)와 중앙처리장치가 직결되어있어 보내온 정보를 즉각 처리하여 보내는 방식이다.
사무를 취급하는 여자 경리 직원들이 처음 대하는 방식인지라 우선 컴퓨터공부를 해야 했다. 고객들도 PC에 익숙하지 못해서 어색한 경우가 많았다 사무실의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아직 익숙하지 못해 마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상대하는 것 같아서 매우 난처했었다. 경리직원들은 일정 기간의 특별교육을 받았다.
온라인 시스템은 양도농협 성장에 지름길이 되었다 조합원이 농협에 일보러왔다가 오랫동안 기다리는 일은 없어졌다. 그것은 옛말이 되었다
모든 업무를 전산처리방식으로 하고 경리 직원들도 컴퓨터에 능숙해졌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은 양도농협에서 BC카드를 발급받고 현금인출기에서 자유롭게 돈을 찾아 쓰는 선진적 생활에 진입하였다.
농민편의를 위한 시설물들,
농사일이 고된 조합원들의 힘을 덜어주기 위하여 구상한 것이 농산물 건조장과 도정공장이다 가을에 벼를 수확하여 건조하려면 마당 가득히 펴 널고 혹은 아스팔트 도로주변에서 말리는데 갑자기 비가 오든지, 날씨가 흐리면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이 불편을 덜기위하여 농협이 대형건조장을 건립하였다 농민들이 벼 말릴 걱정 없이 논에서 바로 농협으로 운반해오면 수확이 끝나는 것이니 농민은 매우 편리해졌다.
건조장에 부응하여 도정공장이 필수였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도정능률을 올리고 우수한 쌀을 가공하기위하여 완전 자동화시스템을 가춘 공장, 60㎡를 건축하였다 그러므로 하루에 2백 포대를 쉽게 도정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가을이면 농민들에게 고민이 되는 것은 갑자기 쌀이 쏟아져 나오니까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불합리한 현상을 막기 위하여 선매자금을 방출하였다 우선 일부의 쌀값을 주고 곡가가 정상적으로 형성 되었을 때 팔아서 갚도록 하는 시책인데 농민의 불이익을 막을 수 있었다.
1993년 12월 22일에는 생산한 쌀의 판매를 촉진하기위한 방안으로, 지대미(紙袋米)포장을 구상하여 건평30㎡를 건립하였다 지대미 시설에서는 도정한 쌀을 4K에서 10,20,K단위로 포장하여 소비자들에 자유로운 선택을 유도하고 도시인들의 취급상편의를 도모함으로 미곡판매량을 더 올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시설을 확충하기 까지는 이강신조합장의 대 내외적으로 눈부신 활약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조합발전을 위한 각분야의 시설을 가추는 데는 첫째로 다가오는 난관이 언제나 자금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중앙에서 사업자금을 유치하려면 일정한 자체자금이 있어야 했다 양도농민으로서는 자체자금을 조성하는 일이 부득불 한계가 있었다. 이강신 조합장은 계양농협과 자매 의 연을 맺었다. 그로인하여 인천 서구 구민에게 질적으로 우수한 양도 쌀을 판매하는 소비처를 구축했다 계양조합장과 긴밀한 협의로 쌀값을 미리 받는 방법을 택하여 자체자금을 조성하기도 하였었다. 결과적으로 건조장이나 도정공장을 건립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금은 양도농협이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강신조합장은 12년 재임 기간에 양도농협을 성장시켰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일꾼이었다.
양도농협, 도약(跳躍)의 시대.
2002년도에 이강신조합장의 임기가 끝나고 전 조합원이 참가하는 조합장
선거가 있었다. 정순길 후보가 압도적으로 당선되어 2002년 3월20일에 양도농협 제 10대 조합장으로 취임하였다.
21세기를 향하는 한국농협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양도농협도 새로운 몸짓으로 도약의 틀에 뛰어 오르게 되었다.
정순길 조합장은 농협의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력에 이어 농협대학을 졸업한 농협이 낳은 농협인 이었다.
전임조합장이 농협의 기능을 많이 성장시켜놓은 터였지만 정순길은 꿈의 나래를 펴고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농협운영을 항상 탐구하였다
그것은 건조장과 도정공장을 더욱 발전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이었다. 그리고 농민이 애써 지은 농산물을 한 푼이라도 더 받고 팔아주는 것이 농협이 할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이익을 조합원에게 돌려주는 시책을 구상하여 이익금을 조합원에게 돌려주는 환원사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사업은
전임조합장시대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익배당을 가급적 더 많은 몫을 농민에게 나누어주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연말이 되면 이익배당금과 출자배당금을 현금 또는 생활용품으로 돌려주었다 이 외에도 농협이 간접적으로 나오는 이익도 빠짐없이 나누어 주는 방안을 세웠다 소금이나 “밀 바” 또는 상품권 비료, 등을 이익배당으로 농민의 손에 들려 주였다
인천시 서구, 서 인천농협과 자매를 결연하였다, 서 인천 농협에서는 조합원들의 벼를 양도농협 도정공장에서 가공하였다. 서 인천 지구는 도시형 농협임으로 쌀을 구매하는 인구도 많았다. 양도농협의 “강화 섬 쌀”을 많이
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양도농협은 서 인천농협에서 외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무이자로 자금을 쓰고 후에 쌀로 상환하는 시책인데 여기에서 나오는 이자만 치더라도 수 억 에 달하는 이익을 생성할 수 있었다.
도정공장은 꾸준히 가동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다. 농민들이 농협을 더욱 신뢰하므로 일 년 농사 전량을 농협에 위탁 판매 하였다. 도정료와 판매수수료에서 나오는 수익금도 전보다 훨씬 증가하였다.
정순길조합장은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입출금이 안 되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를 해소하기위하여 2005년 6월5일부터 365일 자동코너를 가동하였다. 도시에서 등산이나 낚시하러 왔다가 돈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와서 예금을 인출하게 되었다 밤중에 지나가던 상인이나 외지인들도 급히 돈이 필요하면 와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양도농협의 판도가 바뀐 것이다.
정순길은 더 먼 미래를 꿈으로 펼쳤다. 지금의 도정시설이나 농협운영이 영세하다는 점을 착안하고 항상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였다
가능포를 바라보며 장지포 넓은 벌판을 내다보면 미래의 농업은 지금처럼 규모가 작으면 농민이 살아나기 어렵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고심했다.
화도에서 외포리 까지 해안도로는 완전 포장되어 개통하게 되었는데 도시인들이 더 많이 양도를 경유하게 될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농민들이 작게만 보이는 것은 농협의 지도지로서 참기 어려운 고민이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구상을 하게 된 것이 DSC(건조 저장시설)건립이다.
그러나 양도면 단독의 힘으로는 자금조성 하는 일이 역부족이어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순길 조합장은 화도농협 석영관 조합장과 첫 면담을 갖고 대형 건조장과 도정공장을 세움으로 쌍방조합의 이익을 창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화도 조합장은 양도조합장이 내놓은 복안과 구상에 시인은 하면서도 화도면민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일에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나 양도농협 장은
이사회를 소집하여 양 화도 연합으로 DSC(도정공장)건립하는 사업계획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사회에서 통과했으며 나아가서 대의원 총회에 승인까지 받았다.
다시 화도 농협 장을 만나서 양도에서 통과한 사례를 설명해주었다 화도 농협이 이 사업에 관하여 승인을 하면 다행이지만 만약에 승인을 얻지 못하면 양도농협의 꿈도 가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화도면에 석영관 조합장은 수차례 연임한 인물로 면민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양도농협이 면민을 설득한 모델을 적용하여 화도에서도 이사회와 대의원 총회에서까지 승인을 얻어 냈다.
년 월 일 양화도 농협의 이사진을 포함한 임원 전원이 연석회의를 두어 차례 거쳐서 드디어 양쪽 조합 간에 연합 사업으로 꿈의 대사업을 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양도면 능대리 번지 3600m2 를 구입하였다.
이 사업을 완성하기위하여 예산 32억원을 책정하고 양쪽이 공히 투자하기로 협약을 체결하였다. 한 쪽에서 17억을 자비로 부담하는 어려운 사업을 결의한 것이다. 그 날이 2007년 11월25일이였다.
이 사업은 2009년에 건조사이로 2 기(二器)를 건립하고 2010 년에 또 2 기를 건립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 사업 계획에는 농민들의 농기구를 수리하는 대규모 의 센터를 건립한다. 농민은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대형 육묘장을 설치한다. 이 거대한 사업은 양도 농협이 하늘높이 날 으는 도약의 꿈이 될 것이다 물론 화도 농민에게도 같은 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양쪽 농협장은 자기 면의 명예를 걸고 도약(跳躍)의 나래로 하늘높이 나르고 있다.
맺는 글
양도농협이 여기까지 온 것은 초창기개척자로 농심을 잃지 않고 오직 양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한 일꾼들의 노고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귀중한 일꾼들은 역대 조합장과 이사들이다 조합장의 힘이 컸다면 그것은 울타리와 같이 단결하여 견인차 역할을 감당한 이사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귀중한 이름들을 여기에 기록하고 숨은 노고에 치하를 드린다.
필자의 조사 불충분으로 누락된 분이 있으면 정중히 양해를 구한다.
역대 조합장
고기연 김 순 윤순석 이강신 정순길 ( 5명)
역대 이사님들(무순)
김옥현 김정길 한상춘 한상태 전기수 이동천 이근배 강유신
안만규 송학근 김종엽 전광흠 한관석 한재형 양효석 윤석찬 윤용정 신화섭
계동춘 이덕양 이건해 전혁순 윤준배 김용묵 전 작 김상묵 김창구 박용주
이득재 한종열 김진홍 한광희 김진평 윤희철 윤영옥 윤찬구 이효순 박상갑 박홍규 송용식 이재훈 계기능 최성규 구영회 한규창 정준기 구태회 (47명)
역대 감사님들 (무순)
유증순 남궁겸 신원섭 김영환 전광흠 안병화 염영태 박상규 이근배 윤호상 김기문 윤종선 강유신 한진수 (14명)
이외에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많은 출자를 해준 조합원과 고향을 떠나서 외지에 살면서도 예금만큼은 양도농협을 이용해주신 분들도 있다
작은 힘과 큰 생각이 합하여 우리고장에 농업발전에 산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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