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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혼[愛國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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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스크랩 KMDb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정기택 감독 자료
musical 추천 0 조회 68 10.03.24 09: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출처: 한국영화감독사전
 
일명 운파. 1905년 평양시 수옥리에서 미곡상을 하는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양 광성중학을 마치고 서울로 유학. 감리교 계열인 배재고보를 다니다가 2년 만에 휴학한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가 영화계에 등장한 것은 4년 간의 상해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1925년 이경손 감독의 <개척자>에 출연하면서 부터이다. 이듬해 <장한몽>(1926)에서 주인공 이수일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신사역을 비롯 <산채왕>(1926),<금붕어>(1927)등에 출연, 미남형의 배우라는 말을 들었다. <산채왕>의 흥행 실패로 이경손이 어렵게 되자 평양의 부친을 설득해 정기탁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그를 끌어들여 <봉황의 면류관>(1926)을 제작, 주연한다. 이 영화의 실패로 아버지의 돈을 모두 탕진하게 되자 새로운 자본주를 물색하여 알렉산더 뒤마 원작 <춘희>(1928)를 제작,주연했으나 이 영화 역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가 감독 작품으로 첫선을 보인 것은 같은 해 상해로 건너가 만든 <애국혼>(1928)이었다. 이른바 상해파 영화의 기점이 된 이 영화는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것으로 정기탁에게 진정한 영화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교포사회에 널리 읽힌 박은식의 <애국혼>을 각색하여 여운형의 소개로 중국 3대 영화사의 하나인 대중화백합영편공사를 찾아가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안중근 이야기는 반일감정이 높은 중국 관객에도 좋은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이 영화의 감독 뿐만 아니라 주연까지 맡았다. 계속해서 <화굴강도>(1928),<여애도>(1929),<흑의 기사>(1933)등과 대표작이 된 <상해여 잘있거라>(1934)를 연출하게 된다. 그는 13편의 영화에서 감독, 또는 주,조연을 했다. 그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자살설 등 여러가지로 엇갈릴 뿐 분명하게 알려진 게 없다.
 
 
출처: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21227&di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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