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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계 사랑방
봄보리밭에 나래 접은 검은 갈매기
― 黑鷗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출생과 수학 시절
흑구(黑鷗) 한세광(韓世光) 선생은 1909년 평양시 하수구리(下水口里)에서 목사였던 한승곤 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3년 평양 승덕보통학교, 1928년 평양승인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 1929년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가게 된다. 이 때 미국으로 가던 배에서 ‘흑구’라는 호를 갖게 된다. “옛 것을 버리고 새 대륙을 찾아서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고 하여 흑구라고 호를 짓는다. 조국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방랑해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 그리고 흑색이 죽음과 성실과 상실(喪失)을 상징하지만 외로운 색, 어느 색에도 물들지 않은 굳센 색 죽어도 나라를 상징하는 색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도미하여 시카고시의 North Park College에 입학한다. 이 때 흥사단의 국내 기관지였던 『동광』에 수필 「젊은 시절」, 시 「북미대륙 방랑시편」을 발표하였다. 그는 상업학교와 전문학교 상과에 다녔었지만 문학과 독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그 자신도 ‘문학을 좋아하였던 나’라고 밝힌다. 파인(巴人)의 『국경의 밤』을 열여섯 번이나 사서 읽었고, 도미한 후 3·1절 기념식에서 교민들에게 외워 주기도 했었다고 하고 중학 시절에 읽었던 Charles Lamb의 소설에서 ‘고상한 이상, 평범한 생활’이라는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1931년에는 샌프란시스코[桑港]에서 발간되는 대한민보에 시, 평론 등을 다수 발표하였고 『동광』지에 「황혼의 비가」, 「호텔 콘」 등을 발표했다.
그 다음해에는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에서 수학하였고, 그 곳에서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 수학하던 중학 선배 안익태와 만나면서 그의 음악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귀국과 문단생활
어머니의 죽음으로 독자였던 그는 1934년 귀국한다. 이 때 장편 「사형제(四兄弟)」, 단편 「암흑시대」, 평론 「영문학의 형식론」, 「도로의 삼림생활(森林生活)」 등을 발표하고 문예지 『백광(白光)』을 창간 주재하게 된다. 이후 그는 이효석, 이석훈, 양주동 등 여러 문인과 교제하게 되었고, 이를 ‘교우록’에 남겨 놓고 있다.
1934년 7월에 중앙일보에 「수필문학론」을 3회에 걸쳐 연재하였고, 「월트 휘트먼 연구」를 4회에 걸쳐 싣고 있다. 이 때부터 한흑구는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하였고, 범위도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매우 폭 넓어졌다.
1935년에는 「D.H. 로렌스론」을 발표하였다. ‘로렌스는 현대적 문예부흥을 제시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오인(吾人)들은 생각한다.’고 하며 로렌스의 사상은 원시적 본능적이요, 인간적이고 자연주의적이라고 하였다. 영문학자였던 한흑구는 그의 학문적인 영향을 수필에서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영시와 서구의 잠언들을 많이 인용, 삽입하고 있는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중학시절에 좌우명을 찰스 램의 수필 한 구절에서 찾은 것이나 영국의 시인 키츠 (John Keats)의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다움”이라는 시구(詩句)가 그의 평생의 작품의 주제가 되었던 것도 이와 관계 있다고 보겠다. 그는 한문학이나 우리의 고전보다는 영문학의 영향을 일찍 받았고, 창작에서나 사상에서도 많은 연관을 갖고 있다.
그는 아버지 한승곤이 회장으로 있던 흥사단의 회원이었는데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고,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끌려 다니다 못해 강서군(江西郡)에 있는 조상의 농촌으로 낙향하여 과수원에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후 해방 때까지 거의 문학활동을 하지 않는다. 광복이 된 후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청년문학가협회’란 모임을 가지며 문필활동을 개시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수필 「기원」, 「동해」, 「나무」, 등이다.
「보리」를 잉태한 영일만
그는 1948년 동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 보이는 경북 포항으로 삶터를 옮겼다. 포항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는 동해가 좋아 평생 포항에서 안빈낙도의 은둔생활을 했다. 이를 두고 미당(未堂)은 ‘선생은 스스로 평생을 귀양살이라도 능히 해낼 수 있는 묘한 은둔의 사색가로 사셨다.’고 평했다. 이곳에서 그는 1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가 「보리」를 쓸 당시 포항은 지금의 서산(西山)에서 내항 사이를 시가지로 하는 조그마한 어항이었고, 그 주변은 거의 보리밭이었다. 특히 그가 이육사를 비롯한 다수의 문인들과 자주 찾았다는 영일만의 구만리(九萬里)는 온통 보리밭 물결을 이뤘다. 동네 처녀들이 쌀 한 말을 다 못 먹고 시집간다고 했을 정도로 보리밭 천지였다.
포항문협의 창립 멤버이자 한흑구 선생의 생존시 절친했던 박이득(아동문학가) 씨는 “흑구 선생은 푸르른 바다와 보리가 조화를 이루며 넘실대는 영일만 일대에서 주로 작품 구상을 했었다.”면서 「보리」를 쓸 수 있었던 영감도 영일만에서 얻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지금 영일만 일대의 들녘은 파밭으로 그득하다. 보리밭은 그저 일부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1980년대 이후 주민들이 보리농사가 돈이 되지 않자 파 재배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가 17년간 몸담았던 수산대학도 아파트 신축 부지로 팔린 뒤 얼마 전 헐리고 말았다. 다만 수필가가 생전에 그토록 사랑했던 동해의 푸른 파도만이 남았다.
포항문학의 개척자
한흑구 선생이 포항에 정착할 무렵만 해도 인구 5만의 포항은 문화의 변방이었고, 문학의 불모지였다. 하지만 그가 이주한 뒤 문학적 토양을 일궈 싹을 틔우면서 포항문학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 1951년에 20여 명의 신진 문인들로 구성된 포항문인협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 시 동인 ‘효안’, 1955년 ‘청패’ 동인이 탄생됐다.
1967년에는 흑구 선생을 정점으로 한 ‘흐름회’란 향토문화 단체가 출범했다. 지역 문화행사를 주도하고 소속 회원들이 제각기 문학작품집을 내놓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문협 포항지부가 정식으로 출범하던 해인 1979년 수필가는 향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묘지는 영일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흥해읍 죽천2리 언저리에 마련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81년에 나온 포항지역의 대표적 문학지인 포항문학 창간호는 온통 한흑구의 특집으로 꾸며져 그가 포항문단에 남긴 큰 자취를 증언한다.
그의 후학들은 1983년,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청하골 보경사 인근 길섶 숲속에 문학비를 세웠다. 비의 앞면에는 「보리」의 마지막 문장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그가 문단에 남긴 업적이 수록돼 있다. 1988년부터 매년 문협 포항시지부 주최로 구만리에서 ‘보리누름문학제’가 열려 작가의 문학정신을 이어 가고 있다.
포항수산대학 정년 퇴직 후 효성여대에 출강했던 그는 “강의를 그만두고 몇 날 남지 않은 여생을 글쓰기로 보내고 싶다”고 했었다. 이후 그는 「흰구름 뭉게뭉게」, 「아름다움」, 「새봄빛」, 「맑은 공기와 물」, 「나는 한 마리의 갈매기오」, 「밤 바닷가에 모닥불」 등을 발표하였다.
수필이 무엇인지 명확한 개념조차 자리잡지 않은 193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독특한 자신의 수필관을 갖고 수필만을 일관해 오면서 창작을 하였던 한흑구는 우리 수필계의 이론면에서나 작품면에서나 이정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韓黑鷗論
김 시 헌
油畵와 같은 수필
‘아름다운 것은 眞實하고, 眞實한 것은 아름답다.’
한흑구 씨의 글 속에는 이러한 뜻의 말이 자주 나온다. 글을 쓴다는 것은 眞實을 찾아내는 作業이고, 그것은 또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이란 뜻도 된다.
수필에서 논의되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 한 가지가 內容과 形式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內容이 없는 形式은 한갓 化粧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形式이 갖추어 있지 않은 內容은 文學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內容이 없이도 形式은 存在할 수 있으나 形式이 없는 內容은 存在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한흑구 씨의 말이다. 그의 隨筆을 읽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文學의 정확하고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그림을 그렸듯이 線과 색채와 분위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隨筆은 詩의 정신으로 쓰여져야 한다.’ 이것도 한흑구 씨의 주장이다. 隨筆이 詩의 精神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은 隨筆의 文章이 詩와 같이 다듬어져야 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수필에는 사건이 없다. 小說과 같은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그의 수필에는 거의 없다. 이는 詩에 사건이 없는 사실과 一致를 이루고 있다. 그의 수필을 어느 部分이든 一部를 적당한 길이로 끊어 놓으면 그것은 훌륭한 한 편의 시가 된다. 그 모양 한흑구 씨의 수필은 散文詩라고 할 만큼 詩的인 表現으로 일관되어 있다.
‘아름다운 것은 眞實하고, 眞實한 것은 아름답다.’고 한 한흑구 씨의 말은 眞善美가 최후에 가서는 美에 연결된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만큼 수필을 통해서 藝術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哲學的인 idea가 없는 作品은 文學도 音樂도 회화도 될 수 없을 것이고, 하나의 藝術的인 作品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수필의 內容을 그는 또 이렇게 천명하고 있다.
수채화와 油畵를 두고 보았을 때 우리는 수채화에서 金素月의 詩와 같은 단조로운 抒情을 느낀다. 그러나 油畵에서는 主知詩를 읽는 것 같은 두께를 느낀다. 한흑구의 수필은 분명히 繪畵的인 요소를 가졌으면서 그것은 油畵에 속한다. 안에 씹혀지는 것이 있는 哲學이 있다는 말이 된다.
한흑구 씨는 日政 때 美國에서 修學하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살면서 抗日운동에 가담한 일이 있다. 독립운동 단체였던 興士團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다가 피검되어 獄苦까지 치른 사람이다.
해방 직후에 쓰여진 그의 수필 「보리」를 읽어 보면 추운 겨울과 싸우기 위해서 땅속에서 보리는 굽히지 않는 意志와 忍苦로써 견디다가 봄이 오자 높고 먼 꿈을 꾸면서 새로운 生命을 회복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보리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한흑구 씨 自身이 치른 항일운동과 우리 민족이 겪어 온 祖國光復에의 줄기찬 意志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작자 자신이 의식하지 않은 表現이었다고 하더라도 日帝라는 巨大한 힘과 대결해서 싸우는 동안 내부가 어느덧 「보리」와 같은 意志의 人間으로 성장되어졌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의 수필에는 공통된 精神이 있다. 그것은 빛을 향해서 뻗으려는 건강하고도 강인한 삶에의 意志이다. 이 意志는 앞에서 말한 모양 그가 몸소 抗日운동을 통해서 몸에 길러 둔 정신의 바탕이다.
「나의 座右銘」이라는 글에서 그는 ‘老兵은 죽지 않는다’라는 맥아더 장군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오직 나의 머리 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비도, 안개도, 구름도 아닌 光輝 있는 太陽의 따뜻한 볕이다.’
이는 그늘지고 연약한 것을 싫어하고 밝고 건강한 것을 선택하는 한흑구 씨의 정신력이다.
‘人生은 貧困과 倦怠와 싸우는 것이다’라는 사무엘 존슨의 말을 引用해 놓고 ‘나는 貧困과는 싸웠으나 倦怠와 싸워 본 적은 없다. 나는 결코 삶의 倦怠를 느껴 보지는 않았고 오히려 焦燥함에서 살았을 뿐이다’라고 「나의 벽서」라는 글에서 밝혀 놓고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한흑구 씨는 멈춤이 없고, 항상 전진하는 意慾의 人間이다.
그리고 後期 작품에서 남을 위한 使命의 문제를 빈번히 언급한다.
‘時間의 흐름을 탓하고 運命의 슬픔을 아프게 생각하는 것보다도 나는 저 老木이 아무 말도 없이 높이 있으면서 다만 그늘만을 잔디 위에 덮어 주는 하나의 사명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老木을 우러르며」라는 수필의 한 토막이다.
‘냉이와 달래의 속잎들도 민들레와 할미꽃의 가는 뿌리들도 눈은 다 같이 따뜻한 이불로 가리어 준다. 지금 오늘의 사명을 다 마친 듯이 눈은 소리 없이 그친다. 산에 벌에 나무 위에 또한 지붕 위에 흰 눈은 온 누리를 덮었다. 참으로 커다란 이불이다.’ 「눈」이라는 글의 일절이다. 눈처럼 온 누리를 덮어 주고 싶은 老年期의 넓은 마음이다.
사람들의 思想은 대체로 靑年期에 싹이 튼다. 무엇을 읽고, 무엇을 생각했으며, 무엇을 겪었느냐의 문제들이 形成期에 있는 靑年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고, 그것이 평생을 두고 영향을 끼칠 수 있다. 線이 굵고 건강한 한흑구 씨의 삶에의 意志는 日帝의 암흑기에서 싹이 트고, 壯年이 되면서 성숙해 왔다. 암흑을 뚫고 빛을 찾으려던 光復에의 줄기찬 意志가 그대로 몸에 배고, 정신에 심어져서 한흑구 씨를 만들어 놓았다.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자신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았던 公益에의 정신이 그대로 남과 나라를 위하는 사명감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한흑구 씨는 한 篇의 수필을 쓰기 위해 어떤 素材는 二年 또는 三年씩 생각했다는 말을 했다. 그의 隨筆이 즉흥에서 쓰여지지 않고 오랫동안의 저작(咀嚼)과 思索을 거쳐서 창작되어진다는 말이 된다.
어떤 사람은 수필을 직업의 餘技로서 쓰고, 어떤 사람은 휴식시간에 피우는 담배 한 개비의 기분에서 쓰기도 한다. 그런데 한흑구 씨는 수필에다 생애를 걸다시피 진지한 태도로써 쓴 사람이다.
바다가 좋아서 浦項을 떠날 수 없었다는 그는 6·25 사변 때 서울에서 포항으로 피난 온 후, 줄곧 20여 년 동안을 포항에서 살면서 『東海散文』이란 첫 作品集을 내놓았다. 그 作品集에는 바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바닷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유유자적 宇宙와 人生을 관조한 한흑구 씨는 道人과 같은 超然한 생활을 했다. 오래 전에는 높은 벼슬자리를 권고받은 일까지 있었는데 그는 벼슬에 매력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는 수필의 소재를 대부분 自然物에서 선택하고 있다.
‘나무, 눈, 진달래, 보리, 감, 제비, 바다, 갈매기, 코스모스, 石榴, 흙’등 어디서나 대할 수 있는 평범한 自然物들이다. 그는 이 自然들을 吟風弄月식으로 노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自然이 지닌 아름다움과 眞實을 찬미하면서 그것 속에 든 人生과 宇宙를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수필은 詩의 精神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隨筆作法을 그는 素材 선택에서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詩에는 寓意와 상징과 비유가 있다. 人生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직접적으로는 하지 않고 대개는 상징과 비유와 풍자의 방법을 쓴다. 이 詩의 창작정신이 한흑구 씨로 하여금 自然物을 선택하게 만든다. 곧 詩가 人生을 직접으로 말하지 않듯이 한흑구 씨의 수필도 人生을 직접으로 말하기를 싫어한다. 나무를 통해서 人生을 이야기하고 바다를 통해서 宇宙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곧 詩의 精神으로 수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한흑구 씨는 수필 속에 소리와 빛깔과 냄새까지도 表現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정확한 文章만이 文學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달 밝은 고요한 가을밤에 한 가닥 실바람이 불어오면 저 老木은 콧구멍도 입구멍도 아닌 큰 구멍으로 한 가닥 신비로운 소리로 슬픈 노래라도 부를 것 같다.’ 老木의 등걸에 생긴 나무구멍을 보고 표현한 대목이다. 이러한 표현에는 분명히 바람소리가 들려 오고 있다.
‘울음도 소리도 없는 향기로운 벼 향기가 나의 가슴속과 뼈 속을 찌르고 찔러주는 것 같다. 두 쪽의 가슴을 앞으로 내어 밀어 두 콧구멍으로 아침의 새말간 공기를 힘껏 마시어 본다. 그것은 공기가 아니고, 내음새다.’ 내음새를 표현해 보고 있는 대목이다. 벼 향기가 감각될 수 있는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흑구 씨는 生命을 사랑한다. 그리고 예술을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다. 그 生命이 무엇에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가? 우리의 주변에 있는 自然들이다. 自然은 神의 創造物이다. 그것에는 永遠이 있고, 神秘가 있고, 약동하는 리듬이 있다. 生命 속에 있는 이러한 힘을 바라보았을 때 인간은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을 한흑구 씨는 참지 못하고 글에 옮기고 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보람을 자기가 선택한 어떤 대상에다 걸고 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 벼슬을 좋아하는 사람, 事業을 좋아하는 사람, 관능적인 탐닉을 좋아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그 중에서 어느것이 인간에게 淸明하고 높은 것을 주는가? 그것이 藝術이다. 藝術은 人間이 창조한 새로운 生命이다. 그 속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理想이 있고, 意味가 있고, 새로움에의 追求가 있다.
‘하나의 찰나에서 무한한 영겁을 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하루라도 참되게, 착하게,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라고 하겠습니까?’
참되게 아름답게 살려는 한흑구 씨의 발언이다. 藝術은 그러한 염원을 만족시켜 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연은 참되고 거짓이 없다. 거짓이 없기 때문에 곱고 또 아름답다.’
「가을의 숲속을 거닐면서」라는 수필 속에 나오는 自然에 대한 찬탄이다. 자연에 접근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이와 같기 때문에 한흑구 씨의 수필은 氣品이 높다. 俗物이 따라가기 힘드는 높고, 멀고, 참된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은, 한흑구 씨의 隨筆은 소재가 自然一色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 단조롭다는 말을 한다. 한 편 한 편으로서의 作品에서가 아니고, 한 권으로 묶어진 作品集을 읽으면 앞에 말한 단조로움을 느끼는 것도 事實이다.
그것은 한흑구 씨의 수필에는 身邊의 雜談이 없고, 市井의 景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흑구 씨의 수필은 詩를 읽는 자세로 읽어 가야 한다. 詩의 精神으로 쓰여진 글을 詩를 읽는 자세로써 감상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한 作家의 思想과 생활을 작품을 통해서 찾아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작품은 필경 理想의 세계를 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文學의 여러 분야 중에서 수필만큼 작자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文學도 없다. 수필은 말 그대로 獨白의 文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한 모양 한흑구 씨의 수필에는 詩的인 手法이 쓰여졌기 때문에 비유와 상징과 풍자가 많다. 자신을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것에 寓意시켜서 객관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어떤 문학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수필은 形式이 자유로운 데서 여러 종류의 手法이 있을 수 있다. 과연 어떤 것이 문학적인 조건을 갖춘 수필이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논의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한흑구 씨는 수필의 方法 중 독특한 경지 하나를 분명하게 개척해 놓았다.
그것도 始終一貫 한 가지의 手法을 고집해 왔기 때문에 한흑구式 수필이라는 한 체계를 확립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흑구 씨는 이 땅의 수필문학을 위해서 넓고 큰 흔적을 금강산처럼 남긴 사람이다.
│한흑구 대표작품│
보리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 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차가움에 응결된 흙덩이들을,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속에 깊이 심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속에 묻어 놓고, 이제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래,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도 잊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개미들도, 다 제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의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랐던 억새풀 더미가 갈대꽃 같은 솜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강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구름을 지니고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大氣) 속에서도 솔잎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 속에 다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그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 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엎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지금, 어둡고 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 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오월의 맑은 하늘 아래서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었다.
3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렇던 잔디가 파아란 솔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뒤덮는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는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 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대고 또한 너의 깊고 아늑한 품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 놓는다.
4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苦楚)와 비명(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
5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 아름 덥석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6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동해산문(東海散文)
1. 바다
바다는 하나의 커다란 물 웅덩이다.
지도를 펴 보면, 바다는 육대주의 육지보다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한 오대양, 칠해로 그려져 있다.
그것은 평면적인 면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산의 높이와 바다의 깊이를 입체적으로 살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크기, 작기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육지는 흙이고, 바다는 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육지 위에 물이 괴어 있는지, 물 위에 육지가 떠 있는지, 그런 것도 알아볼 필요가 없다.
다만, 커다란 의미에서, 흙과 물이 합쳐서 하나의 동그란 지구가 되었다는 것이 어딘가 신비롭기만 하다.
이 흙과 물 덩어리의 동그란 지구가 흙 한 덩어리,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지 않고, 날마다 뱅뱅 돌아간다는 것이 더욱 신비스럽다.
이 지구 위에서 인간이라는 동물들은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물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며 살아간다.
모든 다른 생물들도 흙과 물에서 살고, 또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 운명을 도피할 자는 이 지구 위에는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시인 바이런은 인간에게는 신성과 수성이 깃들여 있다고 노래했다.
원시인들은 산에서 사냥을 갔다가도 산의 신비성에서 종교적 신앙을 얻을 수 있었고, 바다를 건너다가 노도에 부대껴서 신의 저주와 공포를 느끼기도 하였다.
지상에서의 괴로움을 천상에서 구하고 싶은 안타까운 인간의 페이소스(pathos)인 것이다.
육체라는 것은 자극히 미소한 것이다.
육체로써 이 광막한 시간과 공간을 채울 수는 없다.
다만 사고―그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은 한낱, 하나의 생각하는 갈대라고, 파스칼은 위와 같이 말하였다. 그는 또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존엄성을 공간 속에서는 얻을 수가 없다.
자신의 사색의 범위 안에서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나 혼자서 몇 개의 지구덩이를 갖고 있더라도 사색 이상의 좋은 것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공간으로 해서 우주는 나를 포함하고, 또 보잘것없는 하나의 점인 양 나를 삼켜 버린다.
그러나 나는 사고에 의해서 나 자신 속에 하나의 우주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무수한 신비를 지니고 있는 높은 산을 바라다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나는 늘 바다를 바라본다.
무한한 창공과 맞대어 있는 저 수평선 너머로 언제나 나의 사색은 물결처럼 쉬임 없이 흘러 넘쳐 간다.
광막한 바다여!
너의 크고, 넓고, 또한 황량한 것이 나는 좋다.
2. 6월의 동해
6월의 바다는 아늑하다.
무르익고, 부푼 가슴은 푸른 잔디가 깔린 벌판과 같이 고요하다.
6월은 또한 장미의 계절이기도 하다.
바닷가의 장미인 해당화들이 흰 모래판을 캔버스로 하고, 장미의 붉은색으로 한 폭의 고운 정물을 그려 놓기도 한다.
바다의 볼륨은 고요하다고 해도 모래판으로 밀려 나오고 나가는 흰 물결은 이따금 철썩철썩 소리를 낸다.
그것은 마치 바다의 숨결과도 같고, 춤과 노래와도 같은 것이다.
6월의 바닷가에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달이 떠오르는 늦은 밤에도 사람의 발자취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새맑은 해가 떠오르는 장미색 아침을 좋아하고,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오후를 즐긴다.
그들은 놀이 드리우는 황혼의 바다를 감상하고, 흰 달빛 아래서 반짝거리는 은물결들의 신비를 노래한다.
6월의 바다는 청춘과 같다.
소년과 같이 거칠게 날뛰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초록빛 얼굴과 푸른 가슴을 헤치고 고요히 누워만 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 뒤에는 무슨 세상이 있는지, 호수와 같이 잔잔하기만 하다.
바다의 깊고 넓은 볼륨 속에는 모든 생물들과 인간의 슬픈 역사가 고이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빙하시대의 생물의 비극도 너만이 알고 기록하였을 것이고, 대륙을 찾아 헤매던 인간의 모험과 고난의 역사도 너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조개껍질들을 혼자 앉아서 지켜 본다.
묵묵한 속에서도 무엇인가 서글픈 사랑의 밀어를 소곤거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조개껍질 하나를 손에 들어 본다.
해골인 것같이 머리에 구멍이 뚫려져 있다.
그러나, 조개껍질 표면에는 여러 줄의 연륜들이 곱게 그어져 있다.
조개는 빨리 자라나기 때문에 혹시 월륜인지도 모르겠다.
조개, 나는 너의 연륜을 읽을 줄 몰라서 바다의 역사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너의 연륜들은 너대로 기록한 하나의 서사시이거나, 서정시가 아니겠는가.
나는 늘 모래밭에, 또는 바닷물결 위에 시를 써 보았다.
지난날에도 많은 시인들이 바다 위에 수많은 시를 써 놓았을 것이다.
혹시나 너는, 그런 시인들의 시를 너의 연륜에다 고운 무늬로 수놓은 것이나 아닌가.
나는 너의 무늬를 들여다보면서 이러한 느낌을 가져 보지만, 나는 너의 글, 너의 시를 알아낼 수가 없다.
지금, 밀물이 들어온다.
아무리 고요한 날일지라도 밀물이 들어올 때는, 흰 물결들이 행진하는 병사들인 양 대열을 지어서 드나든다.
나는 마치 의장대를 사열하는 장교인 듯이, 그 앞을 지나간다.
통쾌한 기분이다.
울렁대는 큰 바다를 호령하는 멋이다.
이러한 멋으로 늘 살고 싶지만,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가야 하는 나인 것이다.
인생이다.
나는 한낱 인생인 것이다.
그렇다고, 너, 바다도 아무리 크고, 넓고, 깊다고 해도, 너는 신은 아니다.
또한 불멸의 화신도 아닌 것이다.
(1969년)
3. 갈매기
아침 햇살이 수평선 위에 부챗살같이 퍼져 올라올 때면, 너, 갈매기는 흰 두 날개 위에 황금빛을 지니고 푸른 바다 위를 왕자인 양 너울거리며 날아다닌다.
그러나, 너는 왕자도 아니고, 더구나 시신(詩神)도 아니다.
너는 하나의 방랑자이며, 바다를 지키고, 어부들의 길잡이군으로 필요한 바다의 새이며, 없어서는 아니 될 익조의 하나인 것이다.
푸른 하늘 위에 흰 구멍들을 뚫으면서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너희들이 고기 떼를 찾아서 공격을 가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수백 마리의 너희 떼들은 폭격기같이 물위로 다이빙하며 산 고기들을 물어 올리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솔씨를 먹고 사는 산새들은 신비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지만, 산 고기만 먹고 사는 너희들의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울음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너는 바다의 왕자도 아니고, 더구나 시신이 될 수는 없다.
너의 흰 날개, 너의 긴 날개는 춤을 추는 무희같이 멋지게 훨훨 날리지만, 너는 한낱 슬픈 방랑자인 것이다.
그러나, 너의 날개는 거센 파도에 단련을 받아서 강해졌고, 너의 두 눈은 깊은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독수리의 눈보다 더 날카롭다.
너는 먼 바다의 고기 떼를 찾아내기 힘들지 않고, 깊은 물 속에 헤엄쳐 달아나는 고기 떼를 잡아내기 문제 없다.
너희들이 모여서 고기를 잡아 내는 곳에 어부들은 기꺼이 그 곳으로 좇아간다.
너도 먹기 위해서 바다를 떠돌아다니고, 어부들도 먹기 위해서 너의 길잡이를 기뻐한다.
거센 파도가 출렁이는 검은 바다 위를 항상 헤매어야 하는 너는, 같은 흰 빛깔을 하고 있는 두루미와 학과 백로보다 얼마나 험하고 기막힌 신세인가.
오늘 아침에도, 나는 너의 황금색이 어린, 너의 활짝 벌린 힘찬 날개를 쳐다본다.
4. 성하의 바다
거셈도 없이, 푸르기만 한 여름 바다.
흐뭇한 바람과 반짝이는 햇살과 함께 빛나는 너의 새맑은 얼굴.
부풀어오른 넓고 깊은 가슴과, 커다란 볼륨을 지니고 있는 너의 품.
모든 생물의 인자하신 어머님인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부드럽기만 한가.
얼어붙었던 한 방울의 샘물도, 비단 이불같이 뜰 안에 깔렸던 안개와 아지랭이도, 시들어진 풀잎들과, 고운 꽃잎들의 향정도, 너만이 품고 있는 성하의 부드러운 바다.
한 알의 모래와, 한 방울의 샘물과, 한 알의 풀씨가 그 부드럽고, 넓고, 깊은 너의 너그러운 품을 이룩하지 않았는가.
푸른 솔가지 사이로 언덕을 넘어서 불어오는 흐뭇한 바람과 숨결을 같이하며, 긴 여름의 대낮에 졸고 있는 어머님과 같은 것이 너의 한가로운 모습이다.
이렇게 부드럽고, 이렇게 넓고, 또한 깊은 너의 품속에서, 온갖 생물들은 이제 한창 모든 삶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족속도 이름도 모르는 온갖 어족들과, 색깔도 속도 모르는 조개들과, 소라들과, 전복들과, 골뱅이들의 족파들이 너의 품 속을 기어 다니고 있다.
우렁쉥이, 말미잘, 해삼, 집게게들의 족파들이 또한 너의 가슴 위에 매달려 있지 않은가.
줄거리도, 가지도, 꽃도 없는 온갖 해초들이 너의 품을 감싸 주고, 옷 입혀 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온갖 색깔과 모양을 한 진주와 산호들은 너의 옷의 고운 무늬를 선 둘러 주고.
밤이면 크고 작은, 파아란 별들이 부드러운 여름 밤을 속삭이면서, 잠들고 있는 너의 이불 위에서 너의 꿈을 가만히 엿듣고 있기도 한다.
한 알의 작은 모래알도 현미경을 통해서 보면, 수많은 구멍들이 뚫려 있고, 또 그 구멍 속에는 수십만의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고 과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너는, 이렇게 수십만의 미생물의 세계를 지니고 있는 그 끝없는 많은 모래의 벌판들과 언덕들을 덮어 주고, 감싸 주고 있다.
또한, 너는 너의 힘찬 숨결로써 그 무수한 모래알들을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수억 년의 오랜 바다의 역사와 생리를 지니고 있는 듯한 하얀 모래 벌판 위에는 여기저기 붉은 해당화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조수 위에 한가한 갈매기들은 흰 나래를 길게 펴고, 푸름 위에 흰 동그라미들을 그리면서 고기 떼들을 노리고 있다.
온갖 생명과 빛을 한 몸에 지니고서, 푸르고, 싱싱하고, 부드러운 어머님의 품과 같은 성하의 바다여.
(1957년)
5. 겨울의 바다
겨울의 바다는 왜 저렇게 검푸른가?
찌푸린 하늘과, 검은 구름들과 함께 흩어진 대기를 비치고 있기 때문인가?
보기에도 무섭고, 소름이 끼치는 겨울의 바다다.
차갑고, 매섭고, 성낸 얼굴이다.
그 속은 또한 얼마나 깊고, 얼마나 울렁거리고 있을까?
여름엔 그 환하고, 풀색같이 아름답던 너의 얼굴이, 이젠 가느다란 미소 하나 띠지 않고 주름잡힌 노파의 성낸 얼굴을 하고 있는가.
한참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너의 얼굴은 온통 갈대밭같이 흰 꽃의 바다로 변하고 있구나.
북풍이 불어 닥치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풍이 너의 머리를 거슬려 주기 때문인 것이다.
언제나 남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순풍을 이고서 흐느적거리던 너의 잔물결들이 춤을 추며 너울거렸는데, 오늘은 몽고를 지나서 세차게 불어오는 시베리아 바람에 흰 머리털들이 거슬려 올라가는 듯한 노파의 얼굴같이 변하고 있다.
쉬지 않고 불어대는 차가운 북풍에 너의 얼굴은 더욱더 검푸르러 가고, 너의 흰 머리털들은 끝없이 거슬리어서 갈대꽃같이 쉴 새도 없이 너풀거리고 있다.
희고, 긴 삼각형의 깃발들이 너풀거리는 갈대의 초원같이 넓은 바다여.
겨울의 너의 얼굴은 참으로 험상궂기만 하다.
북풍은 그냥 소리를 내며 사구를 헤치어 바다로 쏘아댄다.
모래를 휩쓸어 너의 품속으로 휘몰아 넣는다.
눈보라치듯이 사구의 모래알들이 줄을 지어서 바닷속으로 날아들어 가고 있다.
너의 품으로부터 밀려나왔던 모래알들이다.
오랫동안 너의 품속에 안겨 있다가 너의 품을 떨어져 나왔던 모래들이다.
바람에 지치고, 햇볕에 시달렸던 모래알들이다.
이제, 다시 너의 윤기 있는 넓은 품이 그리워서, 너의 품을 찾아서 되돌아가는 모래알들이다.
너의 옆구리에서 안타까이 헤매던 모래알들도 있지만, 혹은 저 멀리 몽고사막으로부터 바다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던 모래알들도 여기까지 오고 있지나 않는지, 그것도 알 수 없다.
바람의 작용은 풍화작용 하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바람은 모래를 나르고, 바다의 물도 나르고, 하늘의 구름도 나른다.
또한 시간도 날려서 사람들의 얼굴 위에 주름을 잡아 주기도 한다.
밤사이에 너는 또 커다란 반응을 받았는가, 거센 파도로 육지를 삼켜 버리려고 하고 있다.
라디오는 저녁에도, 한밤중에도 너의 거친 행패를 보도하고 있다.
“배들이 뒤집혔다!
어부 52명을 태운 9척의 어선이 표류 중이다.
해일이다! 동해안의 3천5백여 명이 피난을 했다…….”
이러한 야반의 마지막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다.
아침의 첫 뉴스는 이렇다.
“동해안의 피해 12억 원으로 늘고, 선박 6백여 척 조난. 집 230호 전·반파. 해일 강풍…… 전국 피해 20명 익사, 150명 실종…….”
이러한 뉴스를 듣고,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수십만의 인명을 앗아 갔다는 동파키스탄의 해일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바다는 육지를 삼키려는 것인가.
육지는 또한 바다를 메우려는 것인가!
물과 흙으로써 살아가야만 하는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이 불쌍하고 서글프다.
이 가련한 인간의 정열은 하나의 커다란 인생의 운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바이런이 노래한 「맨프레드(Manfred)」의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의 뚜렷한 신성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멎지 않고, 8미터의 높이로 해안을 휩쓸어 들어오는 노도를 바라다본다.
배들은 육지 위에 휩쓸려 들어와서 넘어져 있고, 성난 겨울 바다의 아우성 치며 밀려나오는 파도는 막아낼 재간이 없다.
나는 배 한 척 떠 있지 않은, 거칠고 검푸른 겨울의 성난 바다를 한참 내다보고 서 있을 뿐이다.
(1971년)
나무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뜰 앞에 서 있는 나무, 시냇가에 서 있는 나무, 우물둑에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 길가에 서 있는 길 가는 사람들의 쉼터를 주는 나무, 산꼭대기 위에 서 있는 나무.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그것이 어떠한 나무인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꽃이 있건 없건, 열매를 맺건 말건, 잎이 떨어지건 말건, 나는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그것이 아메바로부터 진화하였건 말았건, 그러한 나무의 역사를 상관하지 않는다.
흙에서 나고, 해와 햇볕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자라는 나무.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아침에는 떠오르는 해를 온 얼굴에 맞으며, 동산 위에 홀로 서서, 성자인 양 조용히 머리를 수그리고 기도하는 나무.
낮에는 노래하는 새들을 품안에 품고, 잎마다 잎마다 햇볕과 속삭이는 성장한 여인과 같은 나무.
저녁에는 엷어 가는 놀이 머리 끝에 머물러 날아드는 새들과 돌아오는 목동들을 부르고 서 있는 사랑스런 젊은 어머니와 같은 나무.
밤에는 잎마다 맑은 이슬을 머금고, 흘러가는 달빛과 별 밝은 밤을 이야기하고, 떨어지는 별똥들을 헤아리면서 한두 마디 역사의 기록을 암송하는 시인과 같은 나무.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너는 십일홍의 들꽃이 되지 말고, 송림이 되었다가 후일에 나라의 큰 재목이 되라.”
이것은 내가 중학 시절에 멀리 미국에 망명중이시던 아버님이 편지마다 쓰시던 구절이다.
지금도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할 때마다, 먼저 아버님의 이 편지 구절을 생각하게 된다.
“높은 산꼭대기에 서 있는 소나무가 높이 쳐다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높아서가 아니라, 다만 높은 산꼭대기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높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산꼭대기 위에 서 있는 나무는 비와 바람에 흔들리어, 뿌리는 마음대로 뻗지 못하고, 가지들은 구부러져서, 후일에는 한낱 화목밖에 될 것이 없다.
사람의 발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 시냇가에 힘차게 자라는 나무들은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으나, 후일에는 좋은 재목들이 된다.”
이러한 선친의 말씀도, 내가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복돋워 주었다.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나는 마음속이 산란할 때마다, 창문을 열고 남산 위에 서 있는 송림을 바라본다.
송림이 없다 하면 남산이 무엇이랴?
나무가 없다 하면 산들이 무엇이며, 언덕들이 무엇이며, 시내 강변이 무엇이랴?
나무는 산과 벌에서 자란다.
고요한 봄 아침에도, 비 오는 여름 낮에도, 눈 오는 추운 겨울 밤에도 나무는 아무 말없이 소복소복 자라난다.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성자와 같은 나무.
아름다운 여인과 같은 나무.
끝없는 사랑을 지닌 어머니의 품과 같은 나무.
묵상하는 시인과 같은 나무.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나는 언제나 나무를 사랑한다.
(1946년)
나의 필명의 유래
나의 나이 스무 살 때, 아버님이 계시던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때는 1929년 3월이었다.
일본 요코하마항을 떠날 때 수천 마리의 흰 갈매기 떼가 내가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대양환의 뒤를 따라서 날아왔다.
진남포의 앞바다에 가서 한두 마리, 또는 수십 마리의 갈매기를 바라볼 뿐이었던 나에게 눈앞에 수천 마리의 흰 갈매기의 떼가 하늘을 덮고, 긴 나래를 훨훨 휘저으며 춤을 추는 그 광경은 참으로 황홀할 지경이었다.
하룻밤을 배에서 지내고 갑판을 올라왔더니 그 많던 갈매기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둘러보아도 새 한 마리 보이지 않고,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었고, 대야의 물을 떠놓은 것 같은 둥근 공간 위를 일엽편주가 홀로이 떠도는 것과 같았다.
약 한 주일 뒤에 웨이크와 미드웨이 섬들이 있는 근방을 지날 때에, 섬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검은색의 갈매기 떼 수천 마리가 또 나타났다. 흰 갈매기보다 거의 배나 크고, 큰 독수리같이 날고 있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갑판에 올라, 갈매기가 다 달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배 꼬리 쪽을 살펴보았더니, 웬일인지 검은색의 갈매기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긴 나래를 펴고 쫓아오고 있었다.
그 검은 갈매기 한 마리는 하와이에 올 때까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그냥 한 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옛 것을 버리고 새 대륙을 찾아서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
이런 구절을 일기에 쓰다가, 문득 나의 필명으로 사용하기로 생각했다.
흑구라고 하면, 흰 갈매기들만 보던 사람들은 혹시 역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고도 염려했으나 그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여야 하는 갈매기와도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흑색’은 서양에서는 ‘죽음’과, ‘성실’과 ‘상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고, 다만 죽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부표의 색이라는 생각에서 ‘흑’자를 택하기로 했다.
이러한 ‘흑’자 때문인지 왜정시대에는 나를 무정부주의자로 오해도 하고, 경찰의 ‘요시찰인’이 되어서 많은 박해도 받았다.
우리가 조국의 광복을 찾은 뒤에, 검은 갈매기들이 사라호 태풍에 밀리어서 동해에까지 날아와 살게 되었다.
사라호 태풍이 지나간 지 십여 년이 되는 지금도 대양에서만 살던 검은 갈매기들을 가끔 동해변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은 제비와 같은 철새는 아닌지 그대로 남아서, 푸르고 고요한 동해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1972년)
흑구 한세광 연보
1909년 음력 6월 19일 평양시 하수구리에서 부 한승곤 모 박승복 사이에 1남 3녀 중 독자로 태어남. 본명은 세광
1928년 보성전문학교 상과 입학
1929년 시카고 노스 파크 대학(North Park College)에 입학. 수필 <젊은 시절>, 시 <북미대륙 방랑시편>을 《동광》 지에 발표
1931년 나이아가라 폭포, 토론토 등 캐나다 여행. 《동광》 지에 단편 <황씨의 비가> <호텔 콘>을 발표.
1933년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Temple university) 신문학과로 전학
1934년 모친 위독으로 귀국. 월간잡지 《태평양》 과 순수문예지 《백광》 의 창간을 주재
1946년 수필 <나무> <닭 울음> 발표. (이하 작품 수필)
1947년 <화단의 봄> <기원>
1949년 <나의 벽서>
1955년 <눈> <보리>
1956년 <비가 옵니다> <감> <집> <산>
1957년 <진달래> <새 봄빛>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밤을 달리는 열차> <성하의 바다>
1958년 <새벽>.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임명
1960년 <봄비>
1961년 <나무 · 기이)
1963년 <가을 하늘같이>
1965년 <닭 울음> <노년>
1969년 <제비> <갈매기> <코스모스>
1970년 <책> <부드러운 여름밤> <새> <차창 풍경>
1971년 <겨울의 바다> <한여름 대낮의 움직임과 고요> <석류> <가을의 숲 속을 거닐며> <봄의 숨결> <오월의 중앙선>. 수필집 《동해산문》 상재
1972년 <나의 필명의 유래>
1973년 <연령> <동상의 명> <나의 좌우명> <새해를 바라보며> <주도소칙> <이육사의 청포도> <들 밖에 벼 향기 드높을 때> <봄의 화단> <신록의 동화사> <숲과 못가의 새소리>
1974년 <여름이 오면> <흙> <싸라기 말> <노목을 우러러보며>. 수필집 《인생산문》 상재
포항수산대 교수 정년퇴임
1975년 효성여자대학 강사
1979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