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비시(Vichy)"는 지난 20년동안 가장 괄목할 만한 학문적 성장을 가져온 연구 분야를 대표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약 250명의 연구자들이 이 시기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었으며, 갈수록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 가운데 하나인 "비시 프랑스"에 대한 관심의 점증은 "현대사"라는 새로운 연구분야의 발전을 가져오는데 기여하였다. 현대사는 2차대전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때문에 자연히 비시가 그 출발점이 될 수 밖에 없다. 기존의 비시에 관한 연구는 "인류애에 반하는 범죄"였던 유대인 박해에 초점을 맞추어왔고, 때로는 역사적 진실과 법정 진실의 문제가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도 적지않았다. 프랑스에서 역사청산문제와 관련하여 1997년 친독부역자였던 '파퐁(Papon)'소송재판이 벌어지면서 비시문제는 또 한번 여론의 수면에 떠오르게 되어 논쟁을 가열시켰다. 이러한 논쟁속에서 역사가의 임무는 무엇일까 ?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감정적, 법적, 저널리스트적 접근 혹은 신화적 요소를 탈피하고 정확한 진실을 찾아내는것, 과학적이고 공정한 접근 태도가 우리가 지향해야할 바가 아닐까 ? 현재속에서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과거의 부정적인 잔영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과거와 현재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본 연구는 프랑스 역사의 편류로서의 비시는 공화주의적 기원을 가지는 프랑스적 요소들에 의해 전적으로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전제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비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격을 규정짓기 위해서는 제3공화국-비시-레지스탕스-제4,5공화국간의 관계에서의 연속성을 필히 고려해야만 한다. 본 연구는 비시가 가지는 정치적, 법적 정체성의 문제는 차후의 과제로 미루고, 비시하의 경제개혁정책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제3공화국의 이란성 쌍생아인 '비시 프랑스(Vichy France)'와 '자유 프랑스(France libre)'를 주창한 레지스탕스(Resistance)는 대등하지만 서로 상반되는 역사적 세력으로 간주할 수 있다. 비시와 레지스탕스는 분명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는 개혁, 즉 국민주의의 부흥, 사회적 화해 및 조화, 도적적 갱생, 계획되고 공정한 경제, 역동적 국가 등을 추구하였다. 그 가운데서 경제생존 및 혁신을 위한 프로그램의 창출은 여러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전후 드골임시정부에 의해 계승되어 체계적으로 추진된 부분이 적지않았다. 예를들면 1942년에 입안된 '10개년 경제계획'은 단지 1차대전이전의 정상성으로의 복귀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새로운 경제질서를 설계하려는 장기적 전망속에서 구체화된 경제계획이라는 점이다. 비시의 1942년 경제계획은 극단적 통제경제와 제3공화국의 자유방임주의경제를 벗어나려는 일종의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논리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전후 경제회복프로그램의 틀을 짜기위해 드골임시정부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경제계획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44년 여름 드골과 레지스탕스가 페탱주의자들을 대체했을 때, 뚜렷한 정치적 불연속성이 나타났다. 그러나 국가경제관리면에 있어서 비시와 레지스탕스 그리고 전후 드골정부로 이어지는 경제혁신 및 경제계획 프로그램은 분명 일련의 연속성을 가진다. 비록 비시의 국민혁명은 실패하였지만, 비시에 의해 공식화되었던 프로그램들은 프랑스를 새로운 정지경제로 이끌어줄 레지스탕스에 의해 세워진 강력한 힘과 결합하여 전후 프랑스의 현대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는 비시의 경제개혁정책을 세가지 측면에서 재조명하고자 하며, 목차구성은 다음과 같다.
I. 머리말
II. 비시의 산업통제시스템
III. 비시의 '노동헌장'과 '협동사회'
IV. 비시의 계획경제
V.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