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더웨어 광고 변천사.
1960/1970/1980/1990년대
우리나라 광고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인쇄광고,즉 신문광고로부터 시작한다고 볼수있다. 신문광고의 역사는 1백년을 넘어섰다.
개화운동의 한 방편으로 창간된 한성주보에 처음으로 광고가 게재된 이래 광고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과 질 양면에서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언더웨어 광고는 외설적인 면이 많이 되두된다. 하여서 광고로 나오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1960년대부터 신문광고를 통해 알려지기시작한 언더웨어 광고의 변천사를 살펴보면서 90년대,TV광고에 이르기 까지의 과정을 더듬어 보자.
1960년대
모델을 투입해서 언더웨어 광고를 하기엔 위험 부담이 많았던 1960년대.속옷 광고 시장이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림으로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지금의 만화책을 연상하면 되겠다. 한번에 스타킹과 란제리를 모두 실물없이 보여주는 이 그림광고의 위력이 얼마나 되었을까 의심스럽겠지만 '반달표' 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란제리의 대명사격인 브랜드였다.
더구나 팬티 스타킹을 입은 맵시가 잘 나타나도록 이음새가 없이 매끈한 포즈를 잡아야 하는데 어떻게 보여줄지가 난감했다고 한다. 외설이냐,예술이냐가 아니라 외설만 아니면 다행이라고 할정도였다. 지금까지도 언더웨어 시장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비비안 광고 역시 그렇게 시작하다가 60년대 말에 모델이 투입되기는 했지만 얼굴없는 모델이었다. 스타킹 광고 역시 다리만을 내보내는 수준이었다.
1970년대
70년대 들어오면서 드디어 우리는 모델의 얼굴을 볼수있게 되었다. 한 단계 성장한 것은 분명하나 두드러진 광고로서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시기였다. 아직은 필수품으로서의 제품이 시장을 석권하는 상황이었다. 내의 제품의 패션화는 7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저렴한 가격과 실용성이 강조되던 상태에서 패션을 강조하는 제품의 등장은 80년대 들어오면서 부터 였다.
여성용 내의를 개발한 뉴인나는 이러한 흐름을 새로운 시장 수요로 바꿔놓기 위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80년대 들어오면서 다양화된 제품들을 선보이게 되었다. 불황기가 찾아오면서 시장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게 되었고,이에 대응하여 소비자들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폭넓은 제품 개발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80년대 들어와서는 신제품 개발의 중요성이 매우 높아지기 시작했다. 극히 미미하나마 내의의 패션화 추세가 여성용 내의류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하였다. 빅3인 백양,태창,쌍방울의 경우 자체 브랜드인 BYC,빅맨,트라이를 앞세워 여성은 물론 남성 속옷의 패션화,고급화,컬러화,고가화,다양화 선풍을 일으키며 고급 패션내의류 제품 생산에 참여하게 되었다. 남성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촛점을 맞추었던 이들3사의 광고 전은 85년 이후 더욱 불붙기 시작했다.
편안하 내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쌍방울은 20~40대의 활동적인 남성을 타겟으로 가장 원초적인 편안함의 대명사를 기본 Massage로 하고 2차로 패션성,고급성을 강조했다.
이덕화가 모델이었던 트라이 TV광고는 시리즈 물을 탄생 시키면서 내의 업계의 새로운 기류를 만들었다. 문이 열리면 여자가 서있고 다시 문이 닫히면 문을 손으로 치던 이덕화의 터프한 모습과 오버랩되는 "편안한 내의 쌍방울"이라는 헤드라인을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문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여자가 상징하는 바는 무었이었을까?
백양은[세계가 함께입는 BYC] 라는 슬로건답게 내의 전문업체로 45년간의 긴역사를 가지고 있는 자사의 BYC 가공 및 실켓 가고등 축척된 가공 기술에다 기발한 광고전략을 통해 광고 그대로 지구촌의 패션내의 BYC를 세계 곳곳에 심었다.
유인촌의[아하! BYC]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태창은[빅밴 패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언더웨어가 속옷만의 기능에서 벗어나 외의류를 겸할 수 있는 패션성 있는 제품으로 정착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속옷의 패션이라는 말이 극히 자연스럽게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80년대 후반부터 란재리 시장이 소재나 스타일에 이르는 전 분야에 걸쳐 급속하게 팽창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란제리는 속옷이라는 개념아래 일반 메리야스와 아이템의 차이가 있었을뿐 큰 격차를 보이지 않았다.
1990 88년 서울 올림픽이 있는해에 1조원을 돌파한 광고비는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GNP대비 1% 선을 넘었다. 그리고 95년에는 5조원에 가까웠고 60억달라를 넘어 세계 10위권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87년 부터 시작된 광고시장의 자유화는 91년에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감각 광고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광고 표현의 영역은 더욱 확돼되었고 찬반의 의견도 있었으나 알몸광고가 신문에 나오게 되었다. 외국에서 만든 광고의 국내 집행도 완전 개방 되었다. 그리하여 멀티미디어의 시대에 광고표현이 현안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또한 컴퓨터그래픽의 도입은 90년대 광고 표현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경제발전에 따라 시장경쟁이 치열해 짐으로 광고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언더웨어 광고 역시 그러했다,컴퓨터그래픽의 대두화 함께 각 언더웨어 광고늘은 더둑더 이미지화 되어가기 시작했다. 여성의 몸매가 드러나는 과감한 광고에서부터 상징성을 가지고 이미지만을 부각시키는 광고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관능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남성에기 성적인 매력으로 받아드려질 수 있고 여성에게는 아름다움의 대상이 자기 일수도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여 구매 의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형상기억합금 브라와 몰드브라,노라인 팬티는 획기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ONE패드,TWO패드,THREE패드 등으로 가슴을 크게보이게 하는 브라에서 부터 볼륨업 브라,엉덩이를 올려주는 힙업 거들 까지 기능성과 패션성을 겸비한 다양한 컬러의 제품들이 선을 보였다. 또한 브랜드마다 타겟층을 10~40대 까지 세분화하여 다양한 컨셉을 가지고 언더웨어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단순히 속옷을 입는 다는 개념에서 패션화를 거쳐 섹시함을 일컫는 속옷으로 탈바꿈하기 까지 수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과연 2000년대에는 어떤 속옷광고가 만들어질까?
2000년대
21세기의 과학은 인체에서 신비스럽고 초 자연적인 측면 보다는 건강과 환경이라는 당면과제를 속옷도 동반한다
그러나 여성 속옷은 여체와 페티시즘이라는 性과 무관하지 않은 감각적.시각적 .자극적 인 여성 性의 상품화는
계속된다.
가공기술과 직조기술의 발달로 혈액순환.지방분해.근육발달등 건강에 도움이되는 용어들이 속옷업계에도 시작되었다.
옷을 입으며 건강해질수있다!!!
2004년 건강증진박람회에 동참한 엘레모아는 속옷과 건강.환경과의 연계성을 알린 낮설은 이슈를 제시했다.
現 기능성 속옷 은 판매process를 메뉴얼화 하고 있는 업체는 흔치 않다.
핸드메이드의 제조과정이 대기업도 아직은 시작하지 않았다.
백화점이나 일반유통에서 구입하기는 쉽지는 않은부분이 21세기라는 高문명사회에서 아니러니 하기도 하다.
전세계적으로 동양에서도 일본만이 제조가능한 분야이고 일본에서 수입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다.
1세기를 내다보는 혜안과 투자가 가능하다면 국내산 기능성속옷을 만들수 있지않을까?
2000년대는 아직은 일본만이 생산 가능한 분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