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원시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된 것은 아마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도구를 사용하여 산과 들을 개간하여 씨앗을 뿌리고 재배하여 곡식을 거두었던 역사적 유적들이 너무 흔하니 말이다.
그러나 벼농사와 같이 논에 물을 대어 쌀을 얻는 관개농업(灌漑農業)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 동안 땅을 파헤쳐 씨앗을 부린 후, 곡식을 기르는 단순한 농경사회에서 식물의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을 적시에 공급하여 곡식을 재배하는 혁신적인 생산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근대의 산업혁명과 비견할 만한 변화였을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치를 이용하여 자연상태로는 도저히 물을 댈 수 없는곳까지 물을 끌어대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
그 옛날에는 그저 수로를 만들어 흐르는 물길을 돌리는 방법, 상류지역에 뚝을 쌓아 물을 가두었다가 때에 맞추어 흐리게 하는 방법 등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즉, 자연이 주는 혜택으로 빗물이 땅속에 배여 들어 천천히 지하 또는 지표를 흐르게 되는 도랑이나 개울의 물을 그대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농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역은 산이 깊은 곳으로 일년내내 계곡에 물이 흘려내려 부근의 논과 밭에 물을 대어서 농작물을 키울 수 있었던 곳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깊은 산이 있고 계곡의 물이 많아 시냇물 사시사철 흘러내리는 지리적 환경이 잘 갖추어진 곳이라야 한다
그 하나는 이렇게 산속의 계곡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짖는 지역의 이름에 거의 산(山)자가 들어가게 된다.
안산,오산,아산,예산,서산,금산,괴산,논산,군산,익산,마산,양산,경산,선산,울산이 그러하다.
다음으로는 계곡물이 벌판에 이르러 시냇물이 되어 흐르는 하천물을 이용하여 농사 짖는 지역의 이름에는 거의 천(川) 가 들어간다. 춘천,화천,홍천,연천,동두천,포천,부천,이천,인천,서천,진천,제천,옥천, 예천,김천,사천,순천,합천,영천이 그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관개농업이 이루어진 곳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시내나 강에 보(湺,洑)를 막아 물의 높이를 높이고, 새로이 수로를 만들어 논에 물을 대는 방식으로 당시로는 가장 첨단의 방식이며, 지형의 특성을 잘 이용하여 보의 위치, 수로의 구성 등 상당히 인위적인 설계와 공사에 의해 종합적인 관개수리시설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곳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적합한 고을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한자어가 '주(州)' 라고 생각한다. 흔히 사람이 많이 사는 '고을 주'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사견으로는 내 천(川)자에 가로질러 말뚝을 박아 만든 보(洑) 모양을 상형화한 주(州)로써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진 곳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보(湺,洑)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면,
물을 댈 논이나 밭보다 수위가 높다고 판단되는 상류의 강이나 개울의 물목에 우선 큰 말뚝을 물길을 가로질러서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 놓는다. 그 말뚝과 말뚝 사이에 짚으로 만든 동아줄에 나뭇가지를 엮어 쬐개 놓으면서 아주 커다란 돌 등으로 눌러놓는다. 다시 나뭇가지 대궁쪽을 보 밖으로 향해 엇대놓고 가지쪽부터 가래질을 해서 모래 등으로 물 속 땅에 파묻는 작업을 반복하면, 말뚝이 박힌 쪽이 점차 높아지져 결국 넘치던 물길이 막혀지고 보(洑) 안에는 물이 가득하게 고이게 된다. 저수량이 급격히 많아지는 장마에는 자동으로 보(湺)가 넘쳐 물이 흐르게 되므로 일정한 높이의 저수량만을 늘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물을 미리 만들어 놓은 도랑-수로(水路)를 따라 아주 멀리 떨어진 논까지 흘러가서 전체 벌판을 흐르게 되며, 이 것들이 넘치게 되면 다시 하류의 강이나 개울로 흘려 버리게 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봇물이 들녘에 가득차 넘쳐 늘 풍부하다면 아무런 싸움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나, 가뭄에는 부족하기 일쑤여서 서로 자기 논밭에 물을 먼저 끌어 대려고 목소리 높여 싸우는 모습을 들녘에서 쉽게 목도할 수 있던 것이다. 이를 일컬어 아전인수(我田引水; 자기논에 먼저 물을 대려하는 듯 이기적인 모습을 일컫는다)라는 한자성어가 생겨나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오래도록 설치된 보(洑)에 의한 관개농업이 잘 이루어진 지역은 당시로는 첨단농업의 중심지로서 많은 사람이 모여 들어 다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지역명에는 반드시 주(州)자가 들어가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원주,파주,양주,광주,여주,정주,충주,공주,전주,완주,무주,나주,승주,상주,성주,영주,경주,진주 등 그 면면을 살피면 아주 오랜 옛적부터 관개농업이 매우 발달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 수 있었던 큰 고을이였다는 곳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나아가 이와 같은 첨단의 관개농업 및 원시적 농업 방식 등이 함께 어우려져 다른 지역보다 농사짖기 편안한 지역의 이름에는 늘 안녕(安寧). 즉 편안 안(安)자와 편안할 녕(寧) 자 중 한 자라도 지명에 들어 가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안성,안동,안양,천안,태안,부안,진안,함안,보령,의령,창녕 등이 바로 그 곳이라고 본다.
---------------------------------------------------------------------------------------------------------------------
우리와 조상님들이 살았던 안성. 서삼 들녁의 지난 날 관개시설을 되돌아 보면,
우선, 자연발생적으로 물이 항상 있었던 '고래실(또는 고라실)'이다. 치재에서 바드실고개로 넘어가는 좌측 땅으로 항상 샘물이 넘쳐나는 논으로 가뭄에 걱정이 없던 최상을 땅으로 큰아버지의 소유의 논들이 대부분 이곳에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으로 '수증들(즉, 물이 말라가는 들녘'이라는 뜻)'로 반드시 물을 대야 하는 관개시설이 있어야 했던 들녁으로 이를 위하여 '수증들보'가 이보 벼루모퉁이 근처에 있었고, 그 곳으로부터 치재쪽으로 돌아 넓은 수증들과 돌모루 앞들까지 드넓은 벌판에 물을 공급하였던 것이다. 일부 큰아버지네 논 우리 논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네 논들이 주로 위치해 있었던 들녘이다.
그 밑으로는 평장골 앞쪽의 들녘인 '궁들'. 이 들녁에 물을 대던 궁들보가 이보의 아래에 자리잡아 물을 가로 막고, 그 수로가 아적바위를 지나 평장골 앞쪽으로 나 있어 그 동네 앞 들녁을 적시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장진개' 들녁이며, 그 장진개 들녁에 물을 대는 보로서 장진개보가 돌모루 앞 개울 철판다리가 있었던 아래녘에 있었다. 개울건너 큰할아버지네 논들이 대부분 이 들녘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장진개 보는 우리마을 아이들의 미역감는 장소로 활용되어 돌모루 아적바위 사람들이 이곳에서의 추억을 하나씩 가지고 있음직 하다.
이와 같이 우리 고향은 농사를 짖기 위한 수리시설이 제법 잘 설치된 지역으로 쓰라린 가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던 것은 수증들보, 궁들보, 장진개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곳은 조상때부터 편안히 쌀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곳이다. 오히려 장마때 개울둑이 넘쳐 온통 마을이 수해를 입었던 기억들이 아직까지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