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에서, 남북한 지리적 분단, 오히려 그것보다도 먼저 역사의식의 단절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민족과제의 우선 순위이라 볼 때,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단군과 고조선으로 대표되는 상고사 연구와 이해는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단군과 고조선은 우리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자 할 때 항상 먼저 떠올려 왔고 민족사의 출발점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단일민족으로서의 존재근거였습니다. 그리고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굳건한 신념은 수천 년 세월동안 동방겨레를 동포애로서 끈끈하게 묶어 주었습니다. 만일 우리들 중에 "단군이 국조냐? 실존인물이었냐?"고 따져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진짜 우리 할아버지인지 따지고 드는 참으로 불경한 질문이며 그렇게 따져 묻는 분도 단군의 자손입니다.
최근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단군 임금이 중국의 요임금 때와 비슷한 무렵에 고조선을 개국했다는 것에 동의하는 학자들이 점차 늘고있습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고조선 건국과정은 비록 신화(神話)로 채색되어 있지만 단군 임금이 실존했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신화라는 것이 뭡니까?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이 고대인의 원시적 관념과 결합하여 신비적 표현으로 재구성된 것이죠. 신화도 역사의 산물입니다. 신화라는 포장지를 뜯어내면 그 속에는 역사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화다 아니다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소모적인 논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신화든 전설이든 간에 역사적 사실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있느냐가 우리 추구해야 할 문제의 관건이라 할 수 있으며 진정 역사가가 해야할 일은 신화인지 전설인지 구분하는 것, 즉 사실이냐 허구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역사의 본모습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학자적 양심과 책임을 내팽개친 일제의 어용학자들은 고조선 건국사와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의 건국사까지도 모두 신화라고 우기면서 우리 역사가 일본 역사보다도 늦은 3세기경에나 시작되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짜놓은 상고사 해석 공식은 패망해 물러간 후에도 이 땅에 그대로 남게 되어 반세기 넘도록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휘감아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앞에서는 반만년 역사와 배달민족을 강조하면서도, 돌아서면 단군신화를 운운하는 조잡한 역사인식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열강이 밀려들던 지난 19세기말, 근대화 물결에 휩쓸리게 된 중국인들은 낡아빠진 봉건적 유산들을 청산하기에 분주했습니다. 신문명을 접하게 된 중국의 학자들을 오직 서구문물과 서구적 역사관을 중시하고 중국의 고전에 남아있는 중국고대역사기록을 송두리째 부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은허(殷墟)에서 상(商)나라 유적이 발굴되어 쏟아지자 은나라까지를 마지못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하(夏)나라 유적이 발굴되자 하나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아예 요순시대를 넘어 삼황(三皇)시대까지 역사적 사실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단군 임금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문헌고증과 고고학적 조사를 통한 연구성과가 축적되면서 단군신화를 고수해온 우리 학계도 지난날 역사연구방법에 문제점이 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사학계는 단군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다는 긍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학자들과 많은 대중들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신화는 곧 허구'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단군을 바라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실존여부에 대한 오해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이 문제에 책임이 있는 역사학계는 분명한 입장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신화라고 하는 명칭에 대해서 학계와 일반의 인식차이가 현격하므로 일본인들이 붙인 단군신화라는 호칭을 단군사화(檀君史話)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습니다. 최근에 개정된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이 단군의 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명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향은 과거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는 역사의 뿌리가 끊어진 기존의 문헌사료만을 고집하고 무미건조한 단편적인 설화해석과 몇 점의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안주하면서 사료부족이라는 해묵은 구실로 실질적인 사적(史蹟)조사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구체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겨레 역사는 겨우 2천여 년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역사학의 특수한 현실을 감안할 때 무엇보다도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고대사 복원의 단초를 제공할 상세한 문헌사료의 확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료이며 그것이 전하는 파천황적인 사실들은 기존에 통용되어온 고대사체계를 뒤흔들며 한국사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해야 된다는 주장을 각계각층으로부터 불러일으킨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개된 지 20년이 넘도록 대학강단의 대다수 학자들은 사료적 신뢰성의 문제를 지적하며 {환단고기}를 상고사연구의 기본사료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환단고기}의 사료채택 여부를 놓고 세 가지 엇갈린 주장으로 분파 되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은
첫째는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보는 시각으로 대체로 강단사학의 입장입니다.
둘째, {환단고기}가 정통사서라고 보는 견해로 재야사학과 소수의 강단학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셋째,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중도적 입장이다.
이 가운데 {환단고기}에 대해 위서론은 제기하는 역사가들은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에서 모순되는 연대기록과 국제관계 기술이 발견되고, 국가·문화·인류·세계 등 근대적 용어 사용, 그리고 삼신일체론(三神一體論)·천지창조 개념이 기독교 교리와 유사한 점등으로 비추어 기독교 사상에 익숙한 근대의 인물이 위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것은 한마디로 한민족사의 역사관의 기반인 신교문화의 정신세계를 전혀 볼 줄 모르는 철학 없는 위인들의 소견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현존자료를 놓고도 그 진실성과 의미를 밝히려 한다기보다는 지엽적 헛점만 찾아 부각시키고 핵심적 내용까지 모두 부정하려드는 것입니다. 이 책을 엮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나 감수자 해학 이기 선생, 출간한 이유립 옹 모두 20세기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안 할 때 근대적 언어가 가미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필된 사료를 위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필된 사료를 위작이라고 한다면 지구상에 위작 아닌 사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일부 술어와 연대상의 고증문제가 제기될 수는 있으나 민족사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시원사와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한(韓)문화 뿌리의 심층구조와 대세를 보는 데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음을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하의 내용은 몇 년 전 단군학회에서 주최한 1999년 전반기 학술회의에 오간 토론내용과 그 밖의 논고를 중심으로 엮은 것입니다.
1) 위서론
대부분의 우리 역사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위서임을 입증하는 근거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 {환단고기}가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편찬된 해(1911년)로부터 약 70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점인데 계연수와 이유립이 이 책의 공개를 늦추었던 동기가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의혹이 제기된다는 점입니다.
둘째, 이 책에 기록된 관직과 인명, 지명, 용어 등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교육기관인 경당이나 그 관직인 욕살(褥薩) 등이 단군조선 때도 그대로 등장하고 있고 '원시국가', '문화(文化)', '남녀평권(男女平權)', '부권(父權)' 등을 비롯한 근대적 용어가 등장하는 점입니다.
셋째, {환단고기}에서 인용한 사서들은 현존하지 않거나 서명(書名)만 남아있으므로 그 이름만 도용해서 위작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넷째, 위서라고 낙인된 {단기고사}와 그 유사한 내용들이 나타나는 점을 위서론의 증거가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위서론으로 제기된 네 가지 가운데 강단사학이 집중적으로 거론해온 것은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용어들의 문제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제시해온 것은 [단군세기]의 기록에 청나라 때 사용된 지명(영고탑(寧古塔), 장춘(長春))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조인성 교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전설과 관련하여 생긴 지명이므로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성립 이전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기록을 들어 영고탑은 중국 청(淸)나라의 조상 여섯 형제가 이곳 언덕에 자리잡고 산 데서 생긴 지명인데 청나라 때 생긴 이 지명이 청(淸)나라 이전의 단군조선 시대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토대로 {환단고기}를 청나라 건국 이후에 조작된 위작으로 단정한 바 있습니다. 또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와 {단군세기}에 나오는 상춘(常春)은 장춘(長春)의 오기(誤寫)로 보고 장춘이 청 가경(嘉慶) 연간(1796∼1820)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므로 {태백일사}와 {단군세기}가 위작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단군세기}의 [서문]에서
나라가 형(形)이라면 역사는 혼(魂)이다. 형이 혼을 잃고 보존될 수 있는가.
라고 한 부분은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1915)에 나오는
대개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다. 지금 한국은 형은 허물어졌으나 신만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인가.
라고 한 것과 비슷하며, 또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는데 성(姓)은 연씨(淵氏)이다. 그 선조는 봉성인(鳳城人)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祚)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고 하며 증조는 광(廣)이라고 한다. 모두가 막리지(莫離支)였다.
라는 기록은 [조대기]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인성 교수는 '자유'와 '태조'는 1923년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묘지(泉南生墓誌)가 발견됨으로써 알려진 것이므로 {태백일사}가 1923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며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2) 진서론
현재 전하고 있는 {환단고기}는 1949년 이유립이 오형기로 하여금 정서(正書)시킨 것인데, 원본과 인쇄본, 필사본 등이 사라지게 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손을 거치면서, 저술된 시대와 다른 근대적 용어가 사용되고 비전문가로서 역사가에 의하지 않은 인쇄와 필사 등을 통하고 보니 본문(本文)과 주해(註解)가 혼동되어 진실성에 의구심이 확대되고 결국 위서 논쟁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진서론임을 주장해온 송호수, 박성수, 임승국 등은 강단 사학계의 위서론은 {환단고기}에 대한 충분한 내용 검토 없이 몇 개의 자구에만 얽매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반론의 근거들을 제시하였습니다.
특히 위서론에서 제기되어 온 용어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반론하였는데 영고탑의 문제에 대해서는 반론의 근거로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영고탑(寧古塔)에 대한 기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寧古)'이며 자리는 '특(特)'으로 '영고탑(寧古塔)'이 청(淸)나라의 시조와 관련되고 있다는 학설은 와전된 것으로 주장합니다. 즉, 구설(舊說)로서 지명이 아니므로 청나라 시조 운운하는 {만주원류고}의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라는 것이죠. 상춘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춘(常春)이라는 본래의 지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청나라 가경제 때 지명을 장춘으로 바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조대기]에 나오는 '연개소문'의 父인 '太祚'와 조부인 '子遊'의 문제에 대해서는 도리어 이 부분이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북경 낙양에는 중국식 발음 표기인 '천(泉)씨'로 되어 있지만, {환단고기}에는 '연씨(淵氏)'로 되어 있고, 선조가 봉성인이라는 사실과 증조부의 이름이 '광(廣)'이라는 사실까지 상세히 나와 있으므로 이것을 다 위작이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강단사학이 지적해온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근대적 용어의 문제에 대해서,
송호수 박사는 위서론자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문화', '산업' 같은 용어는 {한비자(韓非子)}와 류향(劉向, B.C77∼6)의 {설원(說苑)} 등에도 나오는 용어로 근대 이후에 사용된 단어가 아니라고 반론하였고 이희근은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근대적 용어 등은 후세에 가필되었다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이 책의 모든 내용이 후세에 창작 조작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고 {환단고기} 서문에서 20세기에 편집했음을 스스로 밝힌 책에 '20세기 용어들이 사용되었다'고 위서라고 비판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며 계연수가 기존 책들을 재편찬할 때에 자신의 지식을 첨가하여 가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비난하는 데 쓸 역량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데 도움되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또 한 가지, 강단사학이 {환단고기}에서 인용한 사서들이 현존하지 않거나 서명(書名)만 남아있다고 해서 이름만 도용해서 쓴 위작이라고 단정지은 주장에 대해 진서론자들은 일제시대 총독부가 우리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사서들을 압수하여 파기하거나 은닉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성수 교수는 단군학회 1999년 전반기 학술회의 지정토론에서 조선사편수회의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이 태종실록과 세조실록에 나오는 고기(古記)들이 고려왕실의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음을 시인한 바 있다고 밝히고 또 이병도가 쓴 진단학보 창간사에 현재 3종의 고조선비사 이본(異本)이 있다는 기록을 들어 일제 시대 1920년대까지 상고시대를 밝혀줄 고서들이 남아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서론자들 가운데는 독특한 방법으로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발굴해낸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환단고기} 내용에 나오는 기록과 중국사서와 발굴유물을 비교 검토하여 {환단고기}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는 사실들을 찾아냈다. 이것은 {환단고기}가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된 책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문학 교수인 박창범, 라대일은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의 천문기록에 주목하였습니다. 두 문헌에는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현상'이 기록되어 있고 일식 현상이 10건, 큰 썰물이 1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기록된 고조선시대의 천문기록】
시 기 기록내용
B.C.2183년 2세 단군 부루 58년 日蝕
B.C.1733년 13세 단군 흘달 50년 五星聚婁
B.C.1533년 17세 단군 여을 20년 여름 日蝕
B.C.935년 29세 단군 마휴 9년 南海潮水退三倜
B.C.918년 6세 기자 2년 7월 七月 日蝕
B.C.837년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 三月 日蝕
B.C.765년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 四月 日蝕
B.C.579년 19세 기자 1년 봄 日蝕
B.C.423년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 二月 日蝕
B.C.258년 47세 단군 고열가 48년 10월 十月 朔日 日蝕
B.C.241년 36세 기자 인한 35년 日蝕
수퍼 컴퓨터를 동원한 조사결과 오행성 결집현상 부분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단군세기} 13대 흘달단군 50년, 즉 B.C.1733년에 다섯 개의 별이 婁星 근처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1년 전인 B.C.1734년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 해 7월 13일 저녁 다섯 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였습니다. B.C.1733년을 기점으로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 밖에 없었죠. 박교수는 1년 정도 오차가 발생한 점에 대해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현재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기록에 대해 누군가 중국문헌의 천문현상이나 혹은 컴퓨터를 동원해 측정한 기록, 또는 무작위로 {단군세기}에 기술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국문헌에 나타난 천문현상의 기록은 훨씬 늦은 기원전 776년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내놓은 1979년 이전에 이러한 기술을 동원하여 위작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작위로 천문기록을 기술했다해도 맞을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결과 0.007%에 불과하므로 거의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은 제29세 마휴 단제 9년(B.C.935년)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있는데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결과 전후 2백 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있었던 것은 4년 후였다. 누군가 작위로 기술해서 맞을 확률은 0.04%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식현상의 기록입니다. 일식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므로 일식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 때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뿐이므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기록이 주나라 때인 B.C.776년인데 비해, 2세 부루 단군 때인 B.C.2183년의 일식 기록은 중국의 기록보다 무려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 그리고 10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 중 두 개는 해 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창범은 밝혔습니다.
⑶ 중도론
학자들 가운데는 {환단고기}의 진위성을 가리는데 있어서 신중한 태도를 강조하며 일방적인 비판도 추종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한때 조인성 교수와 더불어 {환단고기}의 진실성에 의혹을 제기해왔던 이도학 교수는 {환단고기}를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도 문제가 있음을 시인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환단고기}를 전면 부정하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남아있다. 그 이유는 {환단고기}가운데 사서로서의 성격이 가장 두드러진 {태백일사}에서 발견하게 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사의 광배명(光背銘)에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은 '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壬子年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卽位年 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같은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의 묘지(墓誌)에서는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밖에 {태백일사}에는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의 '타이'라고 하는 아유타국(阿踰 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 이는 백제의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시사 받을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환단고기}가 지닌 사료가치도 1911년에 {환단고기}가 편집되었다는 전제하에서만이 가능함을 명백히 해 둔다. {환단고기}는 역사연구의 개별적인 사료로서보다는 그 속에 담긴 사상이나 사학사적인 의의가 더욱 값질 것으로 믿어진다. 각기 다른 4권의 책을 하나로 엮은 {환단고기}는 현존하지 않는 기존 문헌들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다. {환단고기}가 인용하고 있는 문헌들을 통해 우리 나라의 사상사나 사학사적인 체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 일조(一助)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되풀이해서 이야기 하지만, 이것 또한 {환단고기}의 출간 내력이 서지학적인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환단고기}를 사료뿐만 아니라 사학사적인 측면에서도 이용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환단고기}에 나타난 이른 바 '대조선주의'가 관념의 산물이었는지의 여부를 앞으로의 고고학적 성과에 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 고대문화와 밀접히 관련된 중국 요녕성 객좌현(喀左縣)에서 5천년 전의 대형 제단(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 빗살무늬 토기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사실을 부기(附記)하면서 끝맺는다.
윤내현 교수는 단군조선의 역대 임금을 논하면서 {환단고기}에 나오는 47대 단군 임금을 소개하고 있는데 역시 서지학적 검토가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중도론적 견해는 {환단고기}가 사료적 진실성이 있다는 점에 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서지학적 검토 없이 활용하는 데에는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현 역사학계의 주류는 대체로 위서론이거나 유보적 입장이기 때문에 {환단고기}를 토대로 한 역사연구는 제도권 안에서는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 재야학계에서만 진행되고 있는데 과학적 검증 절차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죠.
대체로 중도론적 견해는 {환단고기}가 사료적 진실성이 있다는 점에 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지학적 검토 없이 활용하는 데에는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환단고기}의 진실성 여부를 둘러싼 학계의 쟁점토론의 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환단고기}가 가필된 점은 있을지언정 위서는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졌습니다.
얼마 전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환단고기]에서는 진서론을 앞에 소개하고 위서론으로 뒤집는 바람에 시청자들에게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만일 위서론을 먼저 소개하고 진서론으로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입증했다면 결론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환단고기} 내용 중 몇몇 가필된 부분은 대일 항전과정을 치르던 복잡한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또는 이유립 선생이 태전(太田)에 거주하면서 가필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위서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이유립 선생이 단학회의 창시자 이기 선생으로부터 여러 손을 거쳐 전수 받았음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은 이유립 선생의 부인이 단단학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 역사 찾기를 평생 소원했던 이유립 옹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으며, {환단고기}와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평주}(이유립의 {환단고기} 번역본)는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 번역 출간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이 {환단고기 평주}는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것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이유립 선생은 운명하셨죠. 1979년에 펴낸 {환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는데 정오표는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으로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 선생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환단고기}가 적어도 이전부터 존재했던 책이며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부분 가필한 점 역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건이 일어난 당대에 저술된 1차 사료가 아니라면 가필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한 문헌사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고대사서를 대표하는 {서경(書經)}, {죽서기년(竹書紀年)}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문헌들이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대량으로 가필이 가해졌음은 이미 청나라 고증가(考證家)에 의해 밝혀진 역사학의 상식이다. 그러나 가필이 좀 있다고 사료적 가치까지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물론 사료는 신빙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연구에 앞서 서지학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학계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환단고기}의 사료 채택을 무기한 유보시키는 구실로 오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은 이미 우리 현대사의 큰 흐름이 되어버린 상고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도외시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서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여 역사학계 스스로가 설자리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