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운룡 시 해설
생명의 아름다움 혹은 기쁨에 대하여
금 동 철(문학평론가․서울대 교수)
1. 자연, 생명의 원천
21세기 서정시의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는 생명이라고 할 것이다. 생명, 즉 살아있음이 주는 힘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주는 끈이기에, 동일성의 달성을 최우선의 미학으로 하는 서정시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생명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가 될 때, 시인은 이러한 자연과 의사소통할 수 있게 되며, 자연이 펼쳐 내는 그 많은 존재의 비밀들을 언어로 옮겨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가득한 이러한 생명의 힘을 인식하고 그것을 우리의 인식 속으로 새롭게 가져오는 과정이 특별히 요구되는 이유는, 오늘날의 일상적 삶이 극단적인 도시화의 과정 속에서 자아와 세계 사이의 관계의 고리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도시란, 오늘날의 일상적 삶의 자리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반드시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공간이다. 인공의 냄새가 배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생명은 그 자체의 본질적인 가치를 결코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 인간은 생명 속에 둘러싸여 살지 않으면 끝없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공의 공간인 도시에다 가로수를 심고 공원을 만들어 자연을 자신들의 주변으로 가져오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도시 공간 속의 공원이나 가로수는 인공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가 될 뿐이다. 이런 생명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은 숲에서 발견하는 작은 샘물 같은 생명 자체의 숨결을 뿜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시멘트로 처발라진 도시 인근 약수터 같은 인공의 냄새만 전해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리에서 생명은 결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공해에 찌들린 삶의 고단함만 전해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계와 의사소통하고 존재의 본질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생명의 근원에 이르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리에 서정시가 존재한다. 서정시는 생명의 근원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서정시가 본질적으로 지닌 동일성의 미학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일체감을 이루어냄으로써 존재의 본질과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 내면의 깊은 욕망의 발현인 것이다. 세계로서의 자연 사물들이 지닌 생명력이 서정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정시인은 자연을 물질적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동일한 생명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식이 생명시학의 토대가 된다. 생명시학은 그러므로 서정시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운룡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이러한 생명의식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을 본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한없는 생명력을 지니고, 오늘날을 사는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무기력과 한계를 새롭게 갱신시키는 힘을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 그만큼 시인은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생명의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조용한 새벽, 길 찾아와
산 하나 짊어지고 명상한다
숲이 무슨 수로 산을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지
숲이 어떻게 초록의 깃털로 산을 품고 사는지
단단한 목질을 콕콕 쪼아대는
나무좀의 시디 신 이빨 가는 소리에
개미의 당당한 발자국 소리에
환하게 깨어난 이슬
처음으로 입술을 포갰을 때
풀잎, 첫 경험이라 얼마는 놀라는지
그런 부끄럼을 우리 사람들이 실컷 훔쳐가도록
눈 못 뜨게 가려놓고 이슬, 저는 왜
초롱초롱한 눈 가리는지
세상 구경 다 끝낸 나는
산 하나 내려놓고 명상한다.
--「명상하면 산을 안다」 전문
시인의 시선 앞에 산은 그 충일한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조용한 새벽길에 오른 산에서 시인은 숲이 껴안고 있는 산과 그 속에 살고 있는 무수한 생명들의 강한 힘들을 진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시인은 산에서 큰 나무나 숲, 혹은 새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좀의 이빨 가는 소리를 듣고 개미의 당당한 발자국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세밀한 시각과 청각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만큼 시인의 의식이 산에 들어서면서 세밀하게 깨어나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시인이 자연과 하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동일성의 세계 속에서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 속에 강하게 내재해 있는 당당한 생명의 힘을 찾아낸다.
이운룡 시인은 이 시의 후반부에서 이러한 자연의 생명력을 ‘이슬’이 지닌 순수하고 깨끗한 아름다움으로 환치시켜 놓는다. 풀잎과 이슬이 함께 있는 그 새벽의 순간을 ‘첫 경험’이라는 신선한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생명력 속에 내재해 있는 성적 에너지를 은연중에 드러내 놓는 것이다. 이것은 이운룡 시인이 찾아낸 자연의 새로운 모습이라고 하겠다. 자연의 생명력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은 세속에 찌들려 생명력이 고갈된 인간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제공하는 생명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다. 전통 자연시의 대표적인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는 점은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욕망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자연이 지닌 생명력은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모든 자연 사물들 속에는 성적인 에너지가 충만해 있는 것이다.
들에, 산에 가면 봄 햇살이
푸릇푸릇 암내를 풍기고 다닌다
너에게서 나까지 벌겋게 물이 올라서
밤꽃 비린내 얄궂어라
아래에서 위로 솟는 물은 문제가 있다
온갖 잡새들 아랫도리 까발리고
그 황홀한 신음을
봄 강물에 흥건히 풀어 놓는다
저 새,
그걸 못 견디고 삐죽거리다
온몸 일시에 무너져선 입도 삐뚤어졌나
봄은 변명이다
저 산이 달겨들어 흘레붙었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바탕 시원스럽게 울어버린다.
--- 「봄, 흘레붙다」 전문
봄날의 산이 내보이는 생명의 힘을 성적인 에너지의 충만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속에는 그러한 자연과 동화되고자 하는 욕망이 진득하니 배어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에서는, 겨울 대지를 따뜻하게 비춰주는 봄 햇살이 그저 산과 자연을 환하게 비춰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에 ‘푸릇푸릇한 암내를 풍기고’ 다닌다. 이러한 표현에서 새봄에 피어나는 자연의 생명력을 성적인 에너지에서 찾는 시인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성적인 에너지는 생명력의 매우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생명의 자기복제를 가능하게 하는, 다시 말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이 세상의 본질적인 에너지 중의 하나인 것이다. 성적인 에너지가 추악하게 타락한 모습이 아니라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닐 때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 창조의 세계를 허락받는다. 이운룡 시인이 바라보는 자연에는 이러한 순수한 성적 에너지를 지닌 생명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성적인 에너지로 표출되는 이러한 자연의 충만한 생명력에 시인도 어느 사이에 동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너에게서 나까지 벌겋게 물이 올라’ 있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자연과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의 생명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 미운 수컷이고 싶다
암내난 봄을 타고 올라
깜박 스러지고 싶은
숨찬 햇살이고 싶다
피 흘리는 꽃잎 살 틈에
소갈머리 없이 사정하고 싶은
--- 「봄날」 중에서
봄날의 자연 앞에서 시인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한 마리 수컷이 되고자 한다. 이것이 추하기보다 신선한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는 이유는, 자연과 온전히 하나 됨으로써 자연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자아의 생명력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한 욕망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서정시의 힘이 존재한다. 시인은 자연과 자아를 동일시함으로써 늙어가는 자신의 생명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2. 어둠 혹은 죽음의 의미
이운룡 시인의 이 시집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죽음이다. ‘생명’과는 전혀 상반된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이 이 시집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내면 의식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삶의 끝으로 인식하고,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한다. 여기에는 이 땅의 삶만이 전부이며, 죽음 이후는 오직 무일뿐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현재뿐인 인생에게 자신의 현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것이기에 죽음이 더욱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그런데 이운룡 시인은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그의 시에서 정면으로 다룬다. 그것도 자연이 지닌 강한 생명력을 성적인 에너지의 충만으로 묘사하고, 그 에너지 속에 스스로를 던져 넣는 그 순간에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다루어 내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의식 속에서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그 무엇이기보다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는 한 의미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의 의식 속에 죽음은, 삶의 연장선상에서 맞이하는 하나의 사건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월의 무덤 위에 꽃나무 하나 심었다
앞으로, 나무는 오래 살터이고
나는 죽어서 만날 것을 알고 심었다
그날엔 하늘도 나의 푸른 밥그릇 조용히
땅에 엎어놓겠지, 그것이
무덤과 꼭 닮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왜 슬픔을 슬퍼하지 않는 것일까
나무,
아무 말 없으나 죽음 속에서도 한 치씩 크고
꽃이 핀다는 사실
죽어서 만날 것을 믿는 약속의 땅에
길 하나 있다, 거리가 있다
숨쉬는 날, 숨 끊어진 날
나무의 삶, 나의 죽음 그 먼 거리
사이에 길이 있다, 땅에는
가깝고도 먼 저승길 따로 있다.
--- 「땅에는 길이 있다」 전문
시인은 여기서 죽음을 ‘땅에 있는 길’로 묘사하는데, 그 길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삶이 끝난 자리에 존재하는 죽음, 다시 말해 삶과 선명하게 구별된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죽음은 아니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삶의 연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음 속에서도 한 치씩 크고 / 꽃이 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제 단순한 상실이나 소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유가 생의 상실 혹은 존재의 소멸 때문이라면, 시인은 오히려 죽음 너머에서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무의 삶’과 ‘나의 죽음’ 사이에는 ‘먼 거리’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 난 길을 발견함으로써 둘 사이의 연결 혹은 만남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만남이란, 삶과 죽음의 공존이라고 하겠다. 죽음이 죽음으로만 타자화 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함께 공존하게 될 때, 이 땅의 삶은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자연 속에 충일한 생명력을 경험하고 그 생명력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자리에 서 있는 시인의 시선 앞에서, 이러한 죽음은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것이 된다. ‘세월의 무덤 위’에 심는 꽃나무는 시인이 깨닫게 된 이러한 삶과 죽음의 의미를 형상화한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삶의 궤적이 그려내는 세월의 무덤 위에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상징하는 한 그루의 꽃나무를 심는다. 이것을 통해 시인은 죽음이 단절이 아니라 삶의 연장선이며, 그 속에서도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깊은 산 암자 하나 불러 동행했다
어둠은 생각의 깊은 집이라, 그 방
뜨끈한 구들장에 엉덩이 벌겋게 덴
등신불, 오늘 밤에야
마음 속 도량에 앉히고 눈 감았다
산 부처라면 너무 황홀해
꿈을 깨워 바람 휘휘 날리자
금방 흩어지다 그대로 무심해진 어둠,
나는 온 데 간 데 없고
아득한 근원, 이제
껍질 속 보여 다오
--- 「어둠이라는 집」 중에서
그의 시에서 ‘어둠’은 ‘죽음’과 동의어이다. 이장을 위해 판 할아버지의 무덤 속에서 발견한 것은 뼈가 아니다. “어둠이 된 흙”(「어둠이 된 흙」 중에서)이었다는 표현 속에서 죽음과 동의어가 된 ‘어둠’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이 시에 형상화된 ‘어둠’ 속에도 마찬가지 ‘죽음’이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기에, 이 ‘어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찾아가는 시인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다. 시인에게 ‘어둠’ 곧 죽음은 이 생의 끝이 아니라 ‘생각의 깊은 집’이 된다. 이는 시인이 삶의 의미를 명상하고 존재의 본질을 찾아가는 자리가 바로 ‘어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인은 허상으로서의 ‘나’를 버리고 진정하고 본질적인 자아인 ‘아득한 근원’과 만나게 된다. 존재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는 자리, 그래서 삶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 ‘어둠’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죽음’이라는 삶의 자리가 그대로 자아의 본질을 인식하는 중요한 자리가 됨을 말해 준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통해 시인은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뿐만 아니라, 자연이 주는 강한 생명력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동일성의 미학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지리산 봄이 왔다 가라 손 까불어서
그 손잡고 갈까 망설이다
나, 마음 앞세워 서둘러 갔네
시끄러운 귓소리 몇 차례 헹구고 나서
실상사 문고리 잡고 흔들어 댔더니
봄이 문 열고 나와 안고 들어가데
그러더니, 부처님 실눈 속에 폭 들어앉아
나를 빤히 내다보고 알았다는 듯
허상은 벗어 놓고 실상만 가져가라 하데
--- 「지리산 봄이 손 까불어서」 중에서
봄의 생명력은 이처럼 삶의 의지뿐만 아니라 존재의 본질까지 깨우쳐 준다. 부처님 실눈 속에 들어앉아 ‘허상은 벗어 놓고 실상만 가져가라’고 말하는 이 시의 이미지 속에서, 화려한 생명력으로 시인과 동일시되었던 ‘봄날’의 이미지와, 삶과 죽음의 본질을 꿰뚫어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인의 어둠에 대한 인식이 함께 만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이 자연의 생명력과 존재의 본질을 한 자리에 놓고 사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흙내 살내 꽃내 합환이 되어
세상천지 모르고
깊고 푸른 잠에 푹 빠진다면
그런 나, 얼마나 좋으랴.
--- 「비에 젖은 흙냄새」 중에서
결국 시인이 추구하는바 생명 세계의 끝은 이처럼 자연과 자아가 완전히 하나 된 세계, 그래서 삶의 의미로 충만해지는 세계이다. 이러한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 서정시는 동일성의 미학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삶은 이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모든 존재들은 그 본질적 의미들을 풍성하게 노정하며, 서정시인은 언어를 통해 그러한 의미들을 붙잡아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운룡 시인이 서 있는 자리가 존재의 원초적, 본질적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