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원나라가 019컬러폰 행사 경품으로 제공한 5박 6일간의 이번 여행은 주관사 측의 세심한 배려와 짜임새 있는 일정, 그리고 친절한 안내 등은 늘 손해 보는 느낌을 지니며 살던 우리 교원들에 대한 적극적인 우대책의 하나로 여겨져 더욱 감사하고, 민족의 영산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마음 설레였다.
8월 10일 오후. 우리 부부의 즐거움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한 궂은 날씨임에도 우리 일행을 실은 북경행 CA186 비행기는 그 육중한 몸을 일으켜 힘차게 청주공항의 활주로를 가르고, 이내 구름 속 그 포근한 창공으로 우리를 안겨주었다. 창 밖의 풍경에 새삼 감탄하며 들뜬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나의 미안함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간 나는 내 아내의 삶에 대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배려하였던가? 하는 회한과 남들의 외국 나들이 얘기를 동화처럼 들어온 터에 내심 기대도 했을 법한 아내에 대한 무관심 등이 나를 더없이 부끄럽게 했다. 북경에서 국내선 여객기로 환승하여 연길의 호텔에 도착한 것은 청주를 떠난 지 7시간이 지난 후였다. 내일은 일찍 백두산으로 향한다 하여 들뜬 마음으로 지내는 첫날밤은 길기만 했다.
- 백두, 그 넉넉한 품으로! -
안도현 이도백하까지 이르는 조선족들이 한족들과 어울려 사는 만주땅의 풍경은 우리의 30-40년전의 내 어린 시골 마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에서 옛 향수에 젖어 있기에는 이젠 내 스스로 너무 변하지 않았는가. 나즈막한 단층집, 콩과 옥수수, 벼 들이 자라는 논과 밭, 길가에 간이 천막을 치고 옥수수와 과일, 산나물 조금씩을 쌓아놓고 여행객에 손짓하는 주민들, 칸막이 없는 화장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글생글한 얼굴로 `월드컵 4강` 이야기를 우리들만큼이나 소상히 알고 자랑스러이 얘기하는 정겨움과 중국의 소수민족들 중에서 조선족들이 가장 탁월하고 부지런하여 부자도 많다며 자부심을 지니고 말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우리의 모습과 어쩌면 저렇게 같을까 ” 하는 동질감으로 흐뭇했다.
점심식사 후 날씨가 갑자기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변변찮은 쉼터에 노란 우의 하나로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피하며 어쩌면 천지를 볼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에 우리 모두는 시달렸다. 이틀을 꼬박 달려서 겨우 도착한 백두산 아래 끝 동네인데 어찌 그냥 돌아간다는 말인가? 하며 지레 속상함을 말하는 일행들도 있었고, 통일이 되면 하루 일정이면 편히 올 거리라며 푸념하듯이 생색내며 지껄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를 안내하는 현지 안내양은 걱정도 없는 편안함이 있었다. 어쩌면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인가 했더니, 이곳의 날씨는 갑자기 흐려지고 갑자기 맑아지고 그렇단다. 그렇다면 이 중에 누구라도 선행의 공덕을 많이 닦았다면 아니 조금의 공덕만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영험한 백두의 신은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감으로 내심 마음을 달랬다.
찦차에 분승한 우리 일행은 비바람과 운무의 지척을 가름하지도 못하며 천문봉 아래 주차장에 내려섰다. 아직 천문봉의 머리조차 분간할 수 없는 운무 속에서 앞서가는 행렬을 따돌리고 천문봉 깎아지른 절벽 끝으로 나아갔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오기라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더 보고 싶은 천지의 현신을 기다리는 절실함 때문이었다. 비바람이 더 거세게 불었다. 극심한 불안과 절망감에 왜 나는 실오라기만한 덕조차 가꾼 적이 없었던가? 하는 후회로 서글프기까지 했다. 그 찰나 “야호!” 아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랬다! 참으로 넉넉한 백두의 신은 우리를 향해 자비로운 모습으로 당신의 몸을 내비추시었다. 운무를 바람으로 몰아 한쪽으로 모이게 하시고, 맑은 빛으로 천지의 끝없는 푸르름과 반짝이는 은빛 섬광을 아주 알맞게 연출해 내고 계신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책상 물림 서생의 작고 소박한 바램조차도 외면하시지 않고 당신의 영험을 내려주시는 백두의 넉넉함은 운사와 우사를 거느리고 홍익의 큰 업을 이루시던 환웅님의 뜻에 이르렀음이라. 너무도 고마웠고 아름다웠다. '장백에 오르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한다'라던 등소평의 단언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하늘 아래 인간의 마음으로 직하하는 장백폭포의 날선 칼날을 두고 내려오는 발길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나는 왜 이곳을 왔는가? 저 건너 백두대간의 당당한 흐름이 물결치듯 꿈틀거리는데, 나는 거대한 한민족의 용트림을 보듬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한 걸음으로 달려오지 못하고 왜 그 먼길을 마음 졸이며 왔는가? 부끄럽고 착잡했다. 백두산 온천수의 부드러움으로 육신의 피곤함과 속속들이 찌든 상처를 치유하려 했으나, 가슴 깊이 애린 분단의 설움만큼은 털어 버릴 수 없어 훗날의 과제로 남게 하니 백두의 신은 끝끝내 민족의 영산이었다.
- 일송정 푸른 솔아! -
8월 12일 아침 해란강 어구에 이르렀다. 포악한 일제가 민족의 기상을 지우려 잘라낸 푸른 소나무 자리에 세운 정자가 당시의 일송정에 시린 민족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였다. 마침내는 이 땅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염원으로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한 목소리로 '선구자' 합창을 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한국의 모 출판사의 지원으로 잘 보존된 용정중학교(옛 대성중학교)를 돌아보고 윤동주의 시비 앞에서 선각자들의 모습을 추모하였다.
도문으로 가서 두만강을 보았다. '두만강 푸른 물'이라고 했던가. 강건너 저편에서 손을 흔드는 북한 병사, 구걸하는 탈북 소년, 풋과일을 팔아 연명하는 조선족 여인들 아무리 둘러보아도 간도의 현실은 우울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자 노력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로써 민족의 기상을 되살리는 '푸른 솔'은 키워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인민들의 꿈, 천안문 광장에 들렀다. 유구한 역사 속에 흐르는 무한한 잠재력은 모택동 시신을 보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선 중국인들과 일터로 향하는 노동자들의 긴 자전거 행렬, 즐비하게 늘어선 소규모 점포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천안문 광장에 모여 개혁과 개방을 외치던 중국의 인민들이 이제 실용적인 미래를 준비하고 있음을 보았다. 매미구이, 전갈구이 등 이들에게는 팔 수 있는 모든 것은 자원이고 그들의 머리 속에서 빠르게 계산되어 현실적인 재화로 살아나고 있었다.
급한 것도 없는 대범한 중국인의 기질을 표현한 듯한 만리장성과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려 했던 풍광의 절경 용경협에서의 기억만큼이나 아쉬운 중국에서의 날들은 이렇게 꿈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이번 백두산 탐방과 용정, 연길, 도문, 가는 곳마다 조선족들이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의 끈을 놓지 않고 무던히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서 새삼 감동을 받으며 광복절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집에 도착했다. 4녀 1남의 아들딸들이 이 아비보다도 제 어머니의 늦깎이 해외여행이 달나라 비행이나 한 것처럼 야단법석이어서 지친 잠도 미루고... 그래! 오늘은 우리만이 백두의 천지로 가보자꾸나!
누구는 `무명교사를 예찬한다` 하였다. 별로 잘한 것도 당당해 할 것도 없는 시골의 무명교사와 결혼하여 30년을 해외 나들이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속상해 했을지 모르는 아내의 마음을 우연한 기회에 보상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주)교원나라에 새삼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며, 고달픈 여정에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시종일관 열과 성의를 다해 안내해 준 2호차 박원선양을 포함한 (주) 교원나라가족에게 감사하며, 우리 교원들의 복지를 위해서라도 교원나라가 더 많은 발전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