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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김씨 충의공파에게 강탈당한 사육신을 찾아주세요!
이 글은 김문기 후손 김경연씨가 사육신 수호회란 단체의 성원규의 글을 논박한다
는 글에 대한 반박이다.
하나.하나 찍어가며 일일이 반박해 주고 싶지만 악의와 독기로 가득 찬 글에 대응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 돼, 이 글의 전문을 올려 주는 것으로써 반박을 대신할까 한다
* 3년 후 위의 글 주장과 달리 하나.하나 일일이 찍아가며 김경연씨가 올린 성원규의 글을 논박한 글에 대해 반박한 글이 게시판 323번에 올려져 있습니다. 반박문을 쓰게 된 동기가 아랫 글에서 밝혀 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이 반박문 보다 김경연씨에 대한 아주 리얼한 반박문이 있습니다 바로 이 게시판
38번의 "자칭 사육신 수호회란 단체의 성원규의 글을 논박한다를 반박한다" 가 있고,
44번의 " 자칭 사육신 수호회란 단체의 성원규의 글을 논박한다를 반박한다에 대한 재반박의 나의 생각" 이 있으니 뜻있는 분은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김문기 후손 김경연씨가 쓴
"사육신 수호회란 단체의 성원규의 글을 논박한다"
의 반박글에 대해서 너무나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고 회원들께서 강력한 반박이 있어야 김문기후손들의 기세를 꺾어 놓을 수가 있다고 하는 주문이 있어서 김경연 씨의 반박글이 있은지 꼭 3년만에 전면적으로 반박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게시판 323번
"박살난 김문기18세손 김경연(김녕김씨 서울종친회 카페지기)의 사육신 수호회장에 대한 반박의 꿈"
이란 제목으로 올려져 있으니 독자 여러분께서는 참고 있으시길 바랍니다.
김녕김씨는
김영삼 전 대통령.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김진우 전 헌법재판관 등
무수한 각계 인사를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현재 우리나라 가문중
김녕김씨네 보다 인물이 많이 나오고 각계각층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중은 없다
.후손들이 잘 되는 것은 조상님의 음덕일 것이다.
진실로 축하하고 축하할 일이다.
또한 후손들이 조상의 음덕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은 후손된 자로선 당연하고
아름다운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도가
너무 지나쳐서
자기조상 빛 내기위하여
남의 조상의 묘(사육신묘 경내,사육신 성삼문의 아버지 양운검 성승장군의 묘) 봉분을 파헤쳐 없앤다든가
자기조상 사적을 빛 내기위하여
남의조상(사육신 유응부선생)의 사적을 헐뜯고 깎아내린다든가
또한 남의 조상(유응부)의 사적을 자기(김문기)조상의 사적이라고 강탈해가는
비도덕,
비윤리,
비상식,
비이성적인
행태를 보인다면
이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태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행되고 있다는데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지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으로
목숨 내놓고
무소불위의 권문세도가
김녕 김씨 충의공파 대종회 문중사람들의
초법,
무법의
행태를 고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월은 거슬러 올라
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벌어졌던
사육신 출척(黜陟)사를 논하려 한다.
생각하기도 끔찍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버젓이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국사편찬위원들에 의하여
역사를 뒤엎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後倒先史的 大發惡事件”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 말의 뜻은
후대의 사람이 선대의 역사를 뒤엎어 송두리째 부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듣기도
생경한[金文起}라는 인물을 놓고
死六臣으로 집어넣느냐 마느냐하는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편입시키면
사육신중
누구를 빼느냐가 대두되었는데
어이없게도
사육신 유응부선생을 빼기로
전원일치 합의를 봤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김문기가 사육신으로 편입되고
대신
유응부가 사육신에서 빠지는
해괴망측한 사건이 자행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
김문기를 사육신묘역에다 봉안하여 현창되어야 한다고
적극적인 건의문까지 올렸다.
이것을 핑계로
김문기 후손들은
기존 봉안되어있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를
파헤쳐 없애버리고
뿐만 아니고
成氏之墓란 표지석도
뽑아 언덕아래 구렁창으로 내던져버리고
이것도 모자라
成氏之墓란 글자마저도
그라인드로 갈아 없애버렸다.
(成三問선생 후손 성표환씨의 증언.
李塏선생 후손 이은규씨의 증언.
柳誠源선생 후손 류지영씨의 증언)
어느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성승의 후손들은
김녕김씨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넋을 잃었고
혹자는
입에서 선혈을 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대
제일가는 역사학자들이
이성을 잃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역사뒤집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해치운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선조들에게 죄짓는 일을
감히
자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문기는 당시
정보부장으로 있는
김재규씨의 조상이었다는 것이다.
1977년 당시는 서슬 퍼런 유신시절에다 정보부의 위력을 경험해본 분들은
당시
사회의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당시
정보부장 김재규씨는
자기조상 김문기가
성삼문등으로
단종복위 모의를 같이하고 같이 죽은 것에 대해 한없는 흠모를 가졌다고한다
이 말을 미루어보면
김재규씨가 자기조상 김문기가
사육신으로 명단이 들어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회한을 품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사육신 문제는
남효온 선생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하여 왈가왈부 할 수 없다
해서도 안 된다
. 역대 조선 왕조도
남효온의 육신전을 인정하여
그들의 공적,
행적을
실록에 편입시켰다.
그런데
1977년 당시
국사편찬위원들에 의하여
이 육신전이 전면 부정되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오전된,
와전된,
야사
운운하며
육신전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후도선사적 대발악사건(後倒先史的 大發惡事件)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조상의 면전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유사 이래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김문기가 사육신 명단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은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둔갑시키기 위하여
명분과
근거를 찾기 위해
별의별 궁리를 짜냈다.
찾고
찾다가
한가닥 희망을 발견한다.
그것은 세조실록의 세조2년 6월 8일 병오조의 바로 이 기록이었다.
아래의 기록은 김문기 후손 전 헌법재판관 김진우 씨가 쓴 국사편찬위원회의 백촌 김문기 사육신판정의 이론적 배경이란 책 169~170쪽에 있는 것을 옮겨온 것이다.
①三問性躁進, 自以重試居魁,名在人先, 而久滯於提學參議, 其父 勝 素昵於瑢, 曾爲義州牧師, 殺人落職,收告身科田, 瑢語其黨曰勝最付於我, 如有變當立我馬前者, 乃啓請還給, 是語播聞於人 三問以是自疑, ②彭年以女壻瑔故 每懼及, ③緯地嘗被譴懷怨,④塏,⑤誠源, 以秩卑鬱鬱 思欲進達 遂相深結, 汲汲往還, 情跡詭秘, 人皆訝之, ⑥文起與朴彭年爲族親且密交, 文起時爲都鎭撫, 與彭年三問謀曰第汝等在內成事耳, 我在外領兵, 雖有違拒者, 制之何難」
사관에 의한 악담, 악평이지만
바로 이 문구를 가지고
原死六臣 운운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가담자의 순서를 매길려면 아래와 같이 하는 것이 정도요 원칙이다.
①三問性躁進, 自以重試居魁,名在人先, 而久滯於提學參議, 其父 ②勝 素昵於③瑢, 曾爲義州牧師, 殺人落職,收告身科田, 瑢語其黨曰勝最付於我, 如有變當立我馬前者, 乃啓請還給, 是語播聞於人 三問以是自疑, ④彭年以女壻⑤瑔故 每懼及, ⑥緯地嘗被譴懷怨, ⑦塏, ⑧誠源, 以秩卑鬱鬱 思欲進達 遂相深結, 汲汲往還, 情跡詭秘, 人皆訝之, ⑨文起與朴彭年爲族親且密交, 文起時爲都鎭撫, 與彭年三問謀曰第汝等在內成事耳, 我在外領兵, 雖有違拒者, 制之何難」
이렇게 순서를 매겨보니
미안하지만
金文起는 원사육신에도 끼지를 못 했다
기록 순서대로 보면
① 성삼문, ② 성승, ③ 안평대군 이용, ④ 박팽년, ⑤영풍군 이전 ⑥ 하위지, 까지가 원 死六臣이고
김문기는 ⑨ 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⑦ 번 이개와 ⑧번 유성원도 아예 6신에 끼지도 못했다.
이개와 유성원이 육신에도 끼지 못하는 이 세조실록 기록이 국사편찬위원회와 김문기 후손들이 말하는 원사육신 기록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국사편찬위원회는 세조 2년 6월 8일 병오조에 백관을 군기감 앞에 삥 둘러 모아놓고 이개 등을 사지를 거열하여 조리 돌려 저자에 효수한 머리를 3일간 매달아 두었는데 여기에 김문기가 도진무로 박팽년, 성삼문과 모의할 적에 군 동원을 맡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여섯 분이 그 당시 사육신으로 가려졌던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김문기를 가리켜 세조조에 가려진 원사육신이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내걸었다.
이들은
당시 유응부(兪應孚)는 여기에 끼어있지 않았으므로
사육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고
대신 김문기를 편입시켜야 된다는
해괴한 논리로
金文起를 세조조에 「가려진원死六臣」으로 편입했다.
이 글의 논리라면
成勝이 두 번째로 기록되어 있는데
成勝은 세조조에 「버려진 원死六臣」이란 말인가?
여기에 대해서 국사편찬위원회는
대답해야 한다.
「金文起는 가려진 원死六臣이고
成勝은 버려진 원死六臣」이라고
같이 포함하여
사육신에 편입시켜 놓았다면
명분이 더욱 그럴싸하지 않는가?
명백히
成勝은 두 번째로 기록되어 있는데도
원六臣에 끼지 못하고
아홉 번째로 기록된 김문기는
원사육신으로 편입한 논리가
어째
구차스럽고
억지스럽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스스로 생각해봐도
우스꽝스럽지 않는가?
한 사람의
세도가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역사를 날조한 것은
후인들에 의하여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합법성을 가장한
세도가의 고도의 역사 조작이었고
김형승씨가 저술한 「충의공 김문기 사육신 현창」이란 책을 보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젠
버젓이
김문기가「死六臣」이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김문기를 「死六臣」이라 기록한 적도 없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런데
유독
김녕김씨네 사람들만이
「死六臣」이라 우겨대니
스스로
생각해도
낯
뜨겁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이
다
웃고 있는데..........
*여기서 위 실록과 관련하여 이른바 『세조조에 가려진 원사육신 논』에 대해서 첨기(添記) 하고자한다
김문기후손 측이나 김문기후손의 뜻에 동조하는 일부 지각없는 논조자들은 위의 세조실록 기록에 대해 이렇게 말을 한다.
성승기록은 문맥상 성삼문에 귀속된, 둘로 나뉘어 진 문체가 아니고 하나의 문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승은 객체의 사건으로 이 사건 기록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지는 전혀 잘못된 논지이다
악담, 악평하기 위해서 성승을 끌어들인 것은 맞지만 사건 기록은 전혀 별개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실록 기록도 성삼문과 성승을 분리하여 별개의 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 기록도 가장 길다.
성삼문의 사건 기록은 (三問性躁進..... 而久滯於提學參議) 오래도록 제학, 참의에 머물러 불만이 있었다는 것이 삼문의 사건 기록이고,
이어지는 실록은 그 아비 성승은 하고
삼문과 아비 성승을 구분지어
별개의 사건으로 다루어 나가고 있다.
그(성상문) 아비 성승은 본디
안평대군 용과 친하여 (其父勝素昵於瑢).... 이렇게 성삼문과 성승을 분리하여
별개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성승이 성삼문사건에 연계된 것이 아니고
성승은 단독사건으로
안평대군 용을 성승에게 귀속시켜
성승과 안평을 연계하여 악평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실록의 기록이 김문기 후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조조에 가려진 원사육신 (原死六臣) 논』 이라면 성삼문으로 시작해서 실록에 거명 된 순서대로 밟아가야 합리적일 것이다.
그래야 김문기 후손들이 주장하는 세조조에 가려진 원사육신 논이 힘을 받을 수 있다.
이 실록은 분명코 원사육신을 논한 기록이 아니다
원사육신을 논한다면서
김문기를 제외한
일곱분의 충신을 이토록 악평악담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김문기 후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백번 양보하여 원사육신을 논한 기록이라 해도
원사육신의 순서가 성삼문이 첫번째가 아니라
거명순서로 보면
이개가 첫번재가 되어야 한다.
명색이 세조조에 가려진 원사육신을 논하는 자리에
첫번째 거명된 이개가 빠지고
두번째 거명된
성삼문이 첫번째로 거명되고
또, 세번째,
네번째 거명된
성승과
안평대군 용은
단종충신이 아니던가?
왜
이 두 사람을
무슨 근거로
순서에서
잡아 뺀단 말인가?
순서대로 거명하면 이렇다
1,이개 2,성삼문 3,성승 4,안평대군 용 5, 박팽년 6,하위지 7, 유성원 8,김문기 순으로 되어 있다
. 이 기록에는
이개가 두번 거명되고,
성삼문,박패년도 두번 거명된다.
이 순서대로 보면 하위지까지가
김문기후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세조조에
가려진 원사육신이
될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문기후손
전 헌법재판관 김진우씨는
유영박 교수 고희기념, 한국사학 논총 170p~ 217p 에서 이 원사육신논을 전개하면서 그 순서를 아전인수 격으로 김문기를 원사육신 안에 끌어 맞추기 위하여 이렇게 순서를 매겼다.
1,성삼문 (여기선 성승. 안평대군 용은 잡아 뺌) 2,박팽년 3,하위지 4, 이개 5,유성원 6, 김문기
참으로
얼토 당토않는
원사육신 논을
어거지로 꾸며 맞춰
어떻게 해서든
김문기를
원사육신으로 만들고 싶어
안간 힘을 쓰는
김문기후손
전 헌법재판관 김진우씨의
비 상식적이고,
비 이성적이고,
비 역사적인
역사조작 행위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김진우씨는 역사조작 그만하시고 당신의 선조 김문기가 군을 동원하여 성삼문,박팽년에게 단종복위 거사를 돕기로약속 해놓고
거사당일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김문기의 배신행위에 대해서 숨겨진 사적이 있으면 사육신 후손과 국민앞에 밝히고 배신자의 후손된 자로써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1977년 당시 김문기사육신 날조극을 벌일 때 국사편찬위원들이나 이후, 김문기후손 전 헌법재판관 김진우씨 등이 이 사건 기록이 성승과 성삼문의 기록이 전혀 별개의 사건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김문기를 세조실록상 원사육신에 편입 시키려면 성승사건 기록이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성승사건 기록을 성삼문사건에 귀속시켜 성승을 제외 시켜버렸다.
그래야 일곱 번째로 기록된 김문기가 이른바 세조실록상 가려진 원사육신 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편입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문기 후손 김경연씨도 성원규의 글에 반박한다는 글에도 이 실록을 다루어 기세 좋게 성원규의 글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분석이 나가기 전까지는 그 비판이 어느 정도 통했는지는 몰라도 오늘의 이 글이 나간 후에는 지금까지 있었던 세조실록상 김문기 원사육신 논은 자동적으로 사라 질 것이다
위의 실록 기록도 성승과 성삼문의 사건 기록이 전혀 별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안평대군 용과 연계 된 성승에 대한 악 소문이 나 돌자 성삼문이 이로써 스스로 의심했다.(三問以是自疑)고 밝히고 있다. 『三問以是自疑』 이 기록은 성승사건 기록과 성삼문사건 기록이 전혀 별개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분명한 성삼문사건과 성승사건을 하나의 문체로 묶으려는 의도는 김문기사육신 날조하는데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신문 광고에서도 누차 밝힌바 있지만 김문기는 바로 이 실록에서 박팽년 성삼문에게 군을 동원하여 단종복위 거사를 돕겠다고 굳은 맹세를 한다 그 기록이 위 실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문기가 당시에 도진무(지금의 수도 경비 사령관 격) 가 되어 박팽년 성삼문으로 더불어 모의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다만 창경궁 안에서 성사만 하라 나는 창경궁 밖에서 군을 거느리고 있다가 대드는 자가 있다면 제압해 주겠다
(文起 時爲都鎭撫 與彭年三問謀曰 第汝等 在內成事耳 我在外領兵 雖有違拒者 制之何難)
김문기는 거사 당일 창경궁 밖에서 군을 거느리고 있다가 대드는 자가 있다면 제압해 주겠다고 큰 소리 쳤지만 막상 거사 당일 김문기는 군사동원은 고사하고 그림자 자체도 보이지 않았다.
김문기 후손들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거사당일 김문기는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대답하라
이 실록에 별개의 사건으로 기록된 성승을 잡아 빼어
자기들 멋대로 가려진 원사육신 운운 할 때는 큰소리 뻥뻥 치더니 김문기가 군을 동원하여 거사를 돕겠다고 해놓고 막상 거사당일 김문기는 어디에 있었냐고 묻는 말엔
하나와 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이유가 뭔지
우리는 알고 싶은 것이다.
김문기 후손들이 말하는 단종복위 거사를 돕겠노라고 스스로 말한 김문기는 거사당일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문기처럼 거사를 배신한 『가려진 원 사육신』도 다 있나?
성승은 거사당일 아들 삼문, 박팽년, 유응부, 박쟁으로 더불어 창경궁 문 앞에서 김문기가 군을 동원하여 나타나 주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창경궁 밖에서 군을 거느리고 있다가 대드는 자가 있다면 제압해 주겠다고 큰 소리 뻥뻥 치던 김문기는 이 날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이른바
김문기의 단종복위 거사 배신 사건인 것이다.
이 배신의 기록을 가지고 김문기 후손들은
사육신의 영도자니,
거사의 주모자니,
가려진 원사육신이니 하며 야단 법석을 떨었다.
사육신의 거사를 배신한 선조를 가지고 지금도 김문기가 사육신이라고 우겨 댈 텐가?
김문기 후손 김경연씨는 지금도 성원규의 글을 논박한다고 큰소리 칠 자신 있나?
이 책을 보면 이 나라의 대통령을 역임하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 책 저자에게 자택에서 연금중에 써서 보냈다는 「事必歸正」이라는 휘호가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재임 중에는「역사 바로 세우기」를 주창하신 분이다. 이런 분이 자기네 조상은 역사를 날조하여 死六臣으로 둔갑시킨 것을 「事必歸正」이라 했으니 아연할 수밖에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님께 한 말씀 드립니다. 당신네 조상 김문기 한 사람 「가짜 死六臣」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역사 날조범의 악명을 뒤집어 써야 했는지 아시기나 하십니까?
이 책에 기록된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문기 사육신조작 판결을 내린 사람들은 역사에 두고두고 역적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가짜 사육신 김문기」때문에 유응부 선생 후손들은 30년 이상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생업을 포기하고 피눈물을 쏟으며 죽어 갔습니다.
또 「가짜 死六臣」김문기를 사육신 묘역에다 현창하기 위하여 성승의 묘를 파헤치고 표지석까지 뽑아 언덕아래로 내던졌다.
성승의 후손들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입에서 선혈을 쏟은 사람들이 부지기 수 였습니다. 온 국민의 존경과 추앙을 받던 김영삼 전 대통령님!
역사바로세우기는 「가짜 사육신 김문기」를 정조대왕의 「어정배식록」에서 밝힌 바대로 민신, 조극관과 함께 「三重臣」으로 모셔가는 일입니다.
조상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권력과 세도로 아무리 사육신으로 조작하려해도 역사는 金文起를 「端宗忠臣 三重臣」으로 기록되고 전해질 것입니다.
김형승씨가 저술한 「충의공 김문기 사육신 현창」이란 책을 보니까 온통 「유응부선생과 남효온 선생」 비난 뿐 이었습니다. 「가짜 사육신 김문기」 한 사람 현창하기 위하여 진짜 사육신을 욕창하고 있었습니다.
김형승씨는 김문기가 남해섬으로 귀양가서 신세 한탄하며 읊은 방백한(放白鷴)이란 시를 엉뚱하게도 함길도에서 김문기가 단종을 생각하며 읊었다고 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소경입니까? 바보입니까?
이것은 당신의 조상을 모독하는 것인 줄 왜 모르십니까? 더욱 웃기는 것은 이시 말미에 「참으로 애절하고 충절이 넘치는 시다.」라고 토를 달았습니다(77쪽~78쪽).
죄송하지만 나는 이 시를 보고 빙긋이 웃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애절하고 충절이 넘치는 시」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김형승씨! 이젠 조상을 위해서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공감 안 되는 글을 왜 쓰십니까? 귀한 조상 욕되게 하지 마시고 편한 곳으로 모시십시오
. 헌법재판관을 역임하신 김진우 전 헌법재판관님께도 한 말씀 드립니다.
저는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진짜 사육신 유응부 선생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집어넣은 것은 이것은 어느 죄에 해당됩니까?
「새치기입니까?」
「날치기입니까?」
기왕 법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몇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이재호 전 부산대학교 교수님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역사는 함부로 왜곡 조작할 수 없다」란 제하로 「김문기 신사육신설의 곡론을 변박한다」는 글로 김문기 신사육신설의 불가함을 극력 저지했다고 합니다.
이 때 당시 김녕김씨 문중 사람들이 찾아와서 김문기에 대해서 반대의 글을 쓰지 말라고 회유, 협박까지 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또 전라도 광주에서는 김씨 문중사람이라는 어떤 분은 전화로 구족을 멸하겠다고 공갈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도 이 글을 쓰면서 김녕김씨 문중 사람들에 의하여 어떤 일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법과 권력을 가진 집안은
사육신을 강탈하고
남의 조상의 묘혈을 파헤쳐도 괜찮습니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학자를 찾아가
구족을 멸하겠다고 회유협박해도 괜찮습니까?
대통령 나오고
정보부장 나오고
헌법재판관 나온
집안은 남의 조상 묘혈을 파헤치고
공갈협박하고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사면권이라도 받았습니까?
힘없는 우리 사육신 후손들은
사육신을 강탈당해도
묘혈을 파헤쳐도
숨죽이고 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 소중하면
남의 조상도 소중한 법입니다
권력가진 자는
남의 조상 박살내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
김녕김씨네들의 조상 위하는 방법입니까?
호소 드립니다
사육신 유응부 선생을 그의 후손들에게 돌려주십시오!
성승의 묘혈을 원상회복시켜주십시오!
김문기 허묘를 사육신 묘역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해 가십시오!
아무리 사육신 묘역에다 허묘를 쓴다 해도
김문기가 사육신이 되지 않습니다
욕만 얻어먹을 뿐입니다
지금은 당신들의 권력 때문에 그 허묘를 지키고 있을지 몰라도
김영삼 전 대통령도 죽고
김진우 전 헌법재판관도 죽고
우리 세대가 모두 죽으면
그때도 김문기의 허묘가 지켜질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힘드십니까?
가짜로 사육신 만든다는 것이요!
세상 사람들이 다 손꼬락 질 하고 비웃고 있다는 것을요 왜 모르십니까?
호소 합니다
김문기는 민신, 조극관과 함께 삼중신으로 모셔 가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조상을 위하는 길입니다.
현재 사육신현창회는 「가짜 사육신」김문기 한사람 때문에
진짜 사육신들이 욕창(辱彰)을 당하는
사육신욕창회(死六臣辱彰會)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김씨 일족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육신 현창회」는
진짜 사육신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조용히 물러나 주십시오.
그렇게 해야 사육신의 거룩한 희생을 받드는 길입니다.
「김진우 전헌법재판관」님의 결단을 촉구 합니다.
그럼 이재호 교수의 증언을 여기에 옮겨 보겠습니다.
「전라도 광주에 있는 김문기 문중 사람들이 전화해서 구족을 멸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이일규 대법원장과 함께 사육신 참배를 하려는데 김재규 쪽 사람들이 참배를 못하게 훼방했다. 참배는 못 하고 한탄만 하고 돌아왔다.」
「부산에 있을 적에 밤에 김문기 문중사람들이 찾아 와서 사육신에서 손을 떼라고 회유, 협박했다
「사육신 이야기만 나오면 나의 내자는 지금도 놀라 어쩔 줄을 모른다.」,
「당시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김재규가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부산이다 보니 화는 면한 것 같다.」
「김재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절대 권력자니까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였을 것이다.」
*필자가 이 말을 녹음해 놓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이 사육신 문제는 역사에 근거하여 학문적으로 밟아가야 생명력이 있지, 지금의 내 말을 녹음해서 감정적으로 대처하면 원래 의도했던 뜻이 크게 훼손당할 수 있다.」
「김재규가 자기 조상 김문기를 자꾸 사육신으로 조작하려 할 때 그때 느낌이 김재규가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했는지 마음에 각오가 선 것 같은 전율이 오더라고요. 그러더니 끝내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말았어!」
「이현희, 이병도, 이광린, 전해종, 고병익 등 이 사람들은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조작하는데 거수기 노릇한 인물들이야. 국사편찬위원회를 국사조작위원회로 둔갑시키고 말았어!」
※ 이재호 선생은 현재 89세로 생존해 계십니다
.
※ 또 한 사람의 증언이 있어 여기에 싣겠습니다
.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담당 편사연구관으로 김문기 사육신 조작회의에 참석했던 김후경(매월당 김시습 선생 후손)씨는 30년이 흐른 뒤 2007년 음 6월 8일 충목공(忠穆公) 유응부 선생 사당을 찾아가서 「죄를 청하는 고축문」을 읽었는데
이 고축문에 의하면「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유응부 선생을 빼내고 그 자리에 김문기를 집어넣어 사육신으로 판정을 내린 것은 안팎에서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 시인했다.
김후경씨의 고백으로 그 동안 말만 무성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압력설을 입증해주었다.
김후경씨는 김문기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김문기가 불복했다고는 하나 호언컨대 두 마음 가진 사람이었다고 고축문에서 맹 비난했다」 자세한 내용은 「청죄고축문」을 참고하기 바람.
※ 김문기가 사육신이 아니라는 것을 조선왕조실록은 여러 군데서 밝히고 있다. 정조실록 32권 15년 2월 병인조를 보면 충장공 권자신, 충의공 김문기는 육신이 화를 당하는 날 같이 죽었다(忠莊公 權自愼, 忠義公 金文起 同死於六臣被禍之日)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김문기는 육신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못 박고 있는 것이다.
단종묘 충의록에도 충의공 김문기는 세조 병자년에 부자가 육신으로 더불어 동시순절(忠義公 金文起父子 世祖丙子與六臣同時殉節)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제는 김문기를 삼중신이 있는 곳으로 편히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조상을 욕되게 않는 방법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 김영삼 전 대통령님!
지금 사육신의 후손들은 원한과 분노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권력을 이용 힘없는 사육신의 후손들을 제압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신들의 조상 김문기가 사육신이 되지는 않습니다. 용단을 내려 김문기를 삼중신으로 모셔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신 후손들은 김문기를 절대로 사육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김녕 김씨의 위력을 잘 압니다 KBS같은 언론기관도 김녕김씨 말 한마디에 사육신 관련 프로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언론기관을 장악하고 있으니 우리는 하소연할 곳을 잃었습니다 언론기관도 김녕김씨 눈치 보기에 바쁩니다. 퍽이나 좋으시겠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를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십시오.
학자들이 무슨 죕니까?
이병도 같은 대학자가 「김문기 가짜 사육신」만들어주기 위해서 권력 앞에 학자적 양심을 팔았습니다
이재호 교수는 바른말하다
구족을 멸한다는 위협을 받고 30년 이상을 두려움 속에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님! 「김문기 사육신」에 대한 욕심을 버리십시오 용단을 촉구합니다.
※ 전 헌법재판관 김진우씨의 「추가탄원서」란 논문 310쪽을 보면 웃지못할 기록이 있다. 「六臣사건은 儒臣사건이고 武臣은 그 주축이 아니어서 六臣속에 꼽을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儒臣인 金文起 先生이 들어가고 武臣 兪應孚가 들어갈 수 없음은 당연하다.」
김진우 전 헌법재판관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六臣사건을 儒臣사건이라고 정의했습니까?
거사를 하는데 武人없는 거사가 역사 속에 단 한글자라도 있습니까? 붓만 든 儒臣들이 무슨 거사를 합니까?
金文起는 儒臣보다는 武人에 가까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세조2년 경자조를 보십시오
. 성삼문이 세조의 신문에 이개, 하위지, 유응부도 알고 있다고 최초로 불었습니다. 또 재촉하니까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을 불었고, 또 재촉하니까 유응부, 박쟁도 알고 있다고 불었고, 무인 성승, 유응부, 박쟁은 최초의 가담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동자이지 우익은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김진우씨가 주장하는 세조2년6월9일 정미조 사건에도 近者餘黨李塏…(中略) 成三問, 朴彭年, 河緯地, 柳誠源, 朴仲林, 金文起, 沈愼, 朴耆年, 許慥, 朴大年, … 여기에도 김문기는 7곱번 째로 들어 있습니다.
六臣사건이 「儒臣」사건이라면 朴仲林이 儒臣이니까 박중림 까지만 六臣에 들 수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김문기는 이 六臣에서도 빠져 있지 않습니까?
김진우 전 헌법재판관님!
이젠 김문기 사육신 조작 그만하시죠?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세조실록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 김문기는 배신자였다.」란 글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六臣은커녕 背信者로 분석되어 있습니다
육신전을 지으신 남효온선생을 그만 비판하십시오
. 유응부의 사적을 김문기의 사적이라고 억지주장 그만 하십시오.
정조대왕의 어정배식록에서 유응부를 死六臣으로 정의내리고 김문기를 三重臣으로 정의내리고 남효온을 生六臣으로 정의내린 정조대왕을 비판하고 비난하십시오.
왜 우리 할아버지 김문기를 死六臣에 안 넣고
三重臣에 넣었느냐고 원통하고 분통하다고 말입니다.
그 동안 조선왕조실록 많이도 뒤졌더군요.
그런 사적 밝혀낸다고 김문기가 사육신 되지 않습니다.
사육신은 남효온선생에 의하여 정의 내려지고 정립된 것입니다.
정작 억울한 사람은 성승과 박쟁입니다.
유응부와 같이 운검이 되었지만 死六臣에서 빠졌습니다.
어찌 이 뿐이겠습니까?
사실 김문기의 사적을 보면 부끄럽고 창피한 것만 있지 않습니까?
고약한 성질하며 딸의 추문,
(김문기와 그 딸의 추문사건은 이 게시판 23번 24번 27번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뭐하나 내놓을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냥 三重臣으로 있었으면 좋았을 걸,
괜한 사육신 욕심 부렸다가 선조를 욕보이고 후인들이 김문기의 못된 사적을 다 뒤져 알게 했으니 이것이 후손의 어리석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현희씨, 이병도씨, 유병하씨, 유영박씨 등도 권력자에게 아부하여 극구 김문기를 비호하고 사육신이라고 우겨대며 억지주장을 해줬지만
속으로는 「키득키득」거리며 조롱, 조소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선조를 가지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었습니까?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만들려면 조선조왕조실록과 남효온의 육신전을 모두 불태우고
새로 역사를 창조하시면 김문기가 사육신이 될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관까지 지내신 분이 그렇게도 판단력이 흐려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성삼문의 직파후손 성원규라고 합니다. 언제 한번 만나 차 한 잔 하며 사육신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필자의 선친은 당시 김문기 후손들이 성승의 묘혈을 파헤쳐 표지석 까지 뽑아 내던진 것을 보고 분을 이기지 못하여 선혈을 펑펑 쏟았습니다.
거꾸로 당신네 조상이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묘혈이 파헤쳐졌다면 김진우 전 헌법재판관님께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춤추시겠습니까?
지금 유응부의 후손들은 피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김진우 전 헌법재판관님!
김문기 사육신조작 그만하시고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 평상심으로 돌아오십시오.
지금 사육신 현창회에 참여하시는 몇 분의 사육신 후손들은 노량진의 의절사에 아예 들어가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김문기의 위패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언제까지 조상을 조롱거리로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후손이 현명해야 조상의 넋이 편안합니다.
저도 김진우 재판관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조상을 위하여 애쓰신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변명하고 꿰맞추고 비호하려니 글 쓴 본인인들 오죽했겠습니까?
세상 사람은 다 어리석지만은 않습니다.
저만해도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측은해 보였습니다.
이 조상 문제만 아니면 국가의 원로로서
존경받으며 여생을 보낼 분이 억지로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조작하려다 보니 , 체면 같은 것은 아예 내팽개쳤더군요.
다시 한 번 김진우 전 헌법재판관님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 사육신 문제는 그 후손들에게는 신성불가침의 성역입니다
김진우 전 헌법재판관님!
유영박저 “白村, 金文起 硏究의 基礎”란 책을 보니까 452~460쪽에는“사실확인서”라는 글이 있더군요
이병도. 백낙준. 이선근. 조기준. 유홍렬. 황산덕. 김후경. 최영희. 전해종씨 등이 서명날인 한 이글의 내용은 1977년9월22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문기 사육신조작 판결을 내릴 때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나 기타 그 누구로 부터도 압력이나 간섭을 받지 않았다는 것인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런 확인서까지 받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압력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주는 것 아닙니까?
스스로 말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런 판정을 내렸다면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필자가 이글을 보니까 자유로운 것 보다는 무언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는 감이 더 강했습니다
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판결이 내려졌다면
굳이 이런 확인서까지 쓰고,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 확인서도 김씨가의 청탁이나 압력으로 썼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눈치 챌 일이고,
아무리 아니라 해도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문기 사육신, 조작판결 내릴 때 참석했던 김후경씨는 2007년 음 6월 8일 “忠穆公 兪應孚”선생 사당에 찾아가서“죄를 청하는 고축문”에서
안팎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김문기 사육신, 조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 했습니다
김후경씨는 매월당 김시습선생의 직계후손으로
차마 사적을 범할 수 없어 충목공 유선생 사당에 와서 죽을죄를 청한다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참고:
이재호 교수의 말씀에 의하면 이병도씨는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것, 충신의 후손 김후경은 못된 짓은 했지만 그래도 잘못을 뉘우치고 고백 했다는 것에 주목 할 것
*김문기 사육신 역사조작 작업은 여러 곳에서 조직적이고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08년 3월에 출간된 “肅慕誌〞에는 어이없게도 김문기가 〝왕조실록상 사육신의 한분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조실록에는 단 한글자도 김문기가 사육신이라고 기록된 문구는 없습니다.
김문기 후손들이 말하는 세조2년6월8일 丙午條를 근거로 「原死六臣」 云云하는데 바로 이 기록이야말로 김문기의 「背信」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기록인 것이다.
지금 김문기 후손들이 벌이는 「김문기사육신 조작 작업」은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젠 노골적으로 「「중고등 교과서」에도 김문기가 「死六臣, 死七臣」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소문대로라면 이것은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교육당국의 조속한 시정이 있어야 한다.
*김문기의〝性疾惡〞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바로 이문구를 가지고 김문기 후손 측에서는〝김문기는 천성이 악을 미워한다”로 해석했는데 이 해석은 완전 잘못된 해석이다.
漢文을 해석할 때는 전후문맥을 살펴야한다.
吐를 달아보면 그 참뜻의 가부를 알 수 있다
「金文起의性이疾惡하야當會議都堂하면可黜之人이多出其口로다或有異同인댄必極辨務勝하야傍若無人이러라」
「김문기의 천성이 고질적 즉 병적으로 간악하여 도당에서 회의에 임 할 때면 면박당하는 사람이 김문기의 입에서 많이 나왔도다. 혹 자신과 이견이 있을진댄 반드시 온갖 말로 이기기를 힘써서 옆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하더라」
可黜之人이란말도 내쫓긴 ,혹은 쫓겨난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겠으나 상황논리로 볼 때 면박 당했다로 해석하는 것이 나을것 같다.
이 性疾惡이 천성이 악을 미워한다로 해석이 되려면 병질(疾)자가 아닌 미워할 질(嫉)자로 쓰여져 있었어야 이의가 없다.
이 병질(疾)자는 통상적으로 고질(痼疾)적이란 뜻이다.
이 악(惡)자도 단순히 악한 것, 나쁜 것 보다는 「奸惡, 邪惡」이란말의 준말인 것이다
혹, 자신의 뜻과 다르면「或有異同」
반드시 온갖 말로 이기기를 힘썼다.「必極辨務勝」
이말은 고집이 쎄고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 분명하다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했다「傍若無人」
이 말도 도도하고 건방지고 방자하다는 뜻이다
겸손함이란 찾아 볼 수가 없다.
만약 “김문기는 천성이 악을 미워하여”로 해석하게 되면
다음문장이
可黜之人이니
必極辨務勝이니
傍若無人이니
하는 부정적이고 고집스러운 강퍅한 문투가 나올 수가 없다.
이글을 볼 때
김문기는 천성이 고약하고 고집스럽고 괴퍅하며 안하무인의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 드러나 있다.
* 김문기 후손 측에서는 나의 이 해석에 대해 노발대발하겠지만
나의 이 해석은 문맥전체를 놓고 한 것이니 의심스러우면
한문지식이 높은 학자를 찾아가서 자문해 보기 바란다.
*김문기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단종 10월9일 허추가 아뢰길
가만히 병기를 실어 나른 죄는 실로 현저한 일입니다
배 두 척을 써서 나를 때에 이징옥 김문기가 어찌 몰랐겠습니까?
이를 징계하지 않으면 난신적자가 두려워할 것이 없겠습니다.
우정언 공기가 본원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길
김문기, 권수를 법으로 처치 하소서
김문기가 한방면의 통찰이 되어서(함길도 절제사로 있을 때 군수품 빼돌린 사건을 말함)
병기 실어 나르는 일을 어찌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런데도 말하기를
서울에 도착한 뒤에 종의 자식으로 인하여 비로소 알았다 하였으니
그 간사하고 속임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이효경의 아들 번이 김문기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김문기의 천성이 탐욕이 많아
이효경의 재산이 풍족하다는 말을 듣고
그의 아들을 취하여 사위로 삼았다.
이와같이 실록에 나타난 김문기의 천성과 행적은
매우 고약하고 맹랑하다
김문기 후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런 행적과 천성을 가진 김문기가 과연 사육신의 영도자가 될 인물이라고 보는가?
이 사적을 보는 순간 김문기가 유응부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응부는 당당 대장부로
세조의 엄혹한 추국에도
세조 너를 죽여
옛 임금(단종)을 복위하려고 했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실록의 내용 한 가지만 보아도 秋江 南孝溫선생이 아무나 선정하여 「死六臣傳」을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젠 김문기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우린 언제까지 김문기 후손들의 「김문기사육신, 造作장난의 전횡」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2008. 4. 1,
사육신 수호회장 성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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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감사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이 글은 의지가 없으면 읽기가 지루하지요 그 내용이 너무 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문기 사육신 날조의 본말을 알려면 이 글이 절대적입니다 김문기 후손들에겐 이글이 죽기 보다도 싫은 글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 주셨더군요? 감사하다는 말씀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전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잘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그냥 웃고 갈께염 ㅎㅎㅎㅎ
그럼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속이 후련합니다. 진실이 밝혀지는 그날까지 ...화이팅입니다...
격려의 말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역시 속이 후련한 댓글을 보니 10년 묵은 체쯩이 쭈~욱하고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