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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 선생님의 호적상의 생년월일은 1936년 2월 11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선생님의 정확한 출생일자는 음력으로 1935년 9월 26일이라고 한다. 선친께서 이렇게 출생신고를 늦게 한 것은 김선생님 앞에 출산한 두 아이가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자 선생님의 경우는 아예 살아난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리다가 백일을 넘겨 출생신고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생님이 태어난 곳은 경북 영일군 청하(淸河)다. 청하는 내연산(內延山) 보경사(寶鏡寺)로 이름난 곳의 이웃 고을인데 신라시대에는 해아현(海阿縣)이라 불린 유서깊은 고장이다. 미술사적으로 말하면 진경산수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환갑 무렵에 이곳 현감을 지내고 그 유명한 「금강전도」(호암미술관 소장)를 그린 곳이니 그것이 미술과의 보이지 않는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김선생님의 예술에 대한 자질은 두 동생분이 모두 예술을 전공한 점으로 미루어(한분은 조각을, 한분은 바이올린을 전공) 부모님으로부터 내려받은 것 같다. 게다가 그 시절 아들들에게 모두 예술을 공부하게 한 것을 보면 선친께서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교육관을 가졌던 분으로 짐작된다.
선생님의 선친은 일찍이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해방 후에는 교장)을 지내셨는데 민족주의 사상을 지닌 분이었다고 한다. 선친께서는 부임한 학교마다 일본인 교장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곤 하다가 학교를 그만두셨다. 그러다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 입구에 있는 문명(文明)학교에서 근무하였는데 이 학교는 그곳 유지들이 뜻을 모아 만든 사립학교였다. 이 학교가 일제말 총독부령에 의해 접수되자 선친께서는 이에 저항하다가 도피생활에 들어갔고 남은 가족들은 "먹을 것이 없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그 통에 막내 여동생을 잃는 등 일제 식민지 시대를 혹독하게 체험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선생님의 민족주의 사상은 이 체험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김선생님의 선친께서는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이런저런 일로 재판, 수감, 실직, 복직 등을 되풀이하는 바람에 집안 살림이 매우 어려웠다고 하며 이로 인해 선생님의 중고교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학교공부보다는 독서에서 탈출구를 찾고자 했다. 그 무렵 읽은 책은 주로 문학서적이었고 그밖에 고유섭(高裕燮)의 『송도고적(松都古蹟)』『조선탑파의 연구』 그리고 일본인 미학자 오오니시 노보루(大西昇)의 『미학과 예술학사(美學及藝術學史)』등이 있었는데, 다 이해는 못했지만 흥미로웠고 이 경험이 나중에 미학을 택하게 된 동기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70년대에 김선생님은 정보부에 자주 연행되었는데 한번은 선친의 과거사를 들먹이며 집요하게 추궁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사정으로 김선생님은 1년 늦게 미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선친께서 작고하시는 바람에 이후 형제분들은 모두 각자가 벌어서 대학을 마쳤다고 한다.
당시 미학과는 미술대학에 속했는데 1960년 4·19혁명 직후 학생들의 데모로 원 소속인 문리과대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선생님은 4학년으로 과회장이었고 김지하 시인은 2학년 때였다. 지금도 김지하 시인은 김선생님을 "윤수 형"이라고 부르고 미학뿐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동지로 인간적인 친교를 맺고 있는 것을 보면 이때부터 뜻으로 만난 선후배였음을 알 수 있다.
1961년, 미학과를 졸업한 김선생님은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학부시절 미술사 특히 한국미술사 강좌는 거의 개설되지 않아 들을 수가 없었고, 도대체 미학이 어떤 학문인지나 공부해보자는 생각에서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대학원을 5년이나 다닌 것은 학비와 생계를 위해 출판사에 근무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4·19혁명 이후 고조된 민족주의 운동에 자극받아 사상적으로 고민을 거듭한 데 연유한다. 석사학위 논문은 「칸트의 미 분석론에 관한 연구」였다.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김선생님은 곧바로 강의를 맡아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과 효성여대 등에서 미학과 미술사 강의를 하셨고, 1968년 서울대 미학고의 시간강사를 맡으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창립한 '한국미학회'의 간사 및 편집위원을 맡으셨는데 초창기 미학회지는 거의 김선생님이 도맡아 만드셨다고 한다. 이때부터 김선생님의 인생은 본격적으로 미학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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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윤수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68년 2학년 때였다. 그 해 미학과에 처음 출강하신 선생님은 3·4학년 과목을 가르쳤기 때문에 수업은 들을 수 없었지만 김기주(인천가톨릭대 교수), 강준혁(메타기획 대표) 등 3학년 선배들로부터 좋은 선배분이 새로 강의를 맡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미학과는 한 학년 정원이 10명이어서 선생이고 학생이고 누가 누구인지 바로 아는 아주 작은 집단이었다. 김윤수 선생님이 미학과에 출강하자마자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철학으로서의 미학, 즉 니콜라이 하르트만(N. Hartmann)의 미학을 비롯한 관념미학을 반강제적으로 주입하는 바람에 미학 자체에 흥미를 잃어가던 미학도들에게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학문으로서의 예술학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1969년 봄 3학년 때 나는 김윤수 선생님의 '예술학 특강'을 수강신청하면서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강의교재는 파싸르게(W. Passarge)의 『현대예술사의 철학』이었다. 이 책은 19세기 유렵에서 일어난 미술사의 여러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해설한 책으로, 오늘날에도 이 분야의 최고의 입문서라 할 만한 것이다.
이 강의를 통하여 나는 서양의 미술사학은 단순히 연대기적 역사나 문화사의 한 분야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방법론과 철학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뵐플린(H. Wolflin)과 부르크하르트(J. Burchhardt)의 형식사로서의 미술사, 드로르자끄(M. Dvorak)의 정신사로의 미술사, 파노프스키(E. Panofsky)의 해석학으로서의 미술사, 하우저(A. Hauser)의 사회사로서의 미술사 등을 들으면서 나와 동창생들은 처음으로 살아있는 예술학을 배우는 감동을 받았다. 이 강의에는 타과생도 몇 명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당시 국문과 2학년생이던 최원식(인하대 교수)으로, 질문도 잘하곤 해서 미학과 학생 이상으로 예술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김선생님의 강의는 중요한 사항을 노트에 받아쓰도록 불러주고 그것을 보충해 설명하는 식이었기에 재미있을 리 없었지만 그 내용이 워낙 충실했기 때문에 모두들 만족했고, 그때 내가 받아쓰고 메모한 노트는 지금도 내 책꽂이에 꽂혀 있다.
김선생님은 당시 직책이 시간강사에 불과했지만 제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여느 전임교수보다 강했다. 학생들 개개인의 성향과 관심분야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고 그 학생의 장단점은 물론 장래에 대한 걱정까지 같이 해주셨다. 사실 당시만 해도 미학과를 나와봐야 앞길이 막막한 시절이었다.
이 점은 교육자로서의 김선생님의 남다른 모습이었고 선생님은 정년 퇴임 때까지 그 자세를 잃지 않았다. 영남대 교수로 같이 재직하면서 선생님이 논문지도 학생의 글을 꼼꼼히 읽고 고쳐주고 참고문헌을 계속 제시하며 지도하시는 것을 곁에서 보면서, 나는 항시 그 반의 반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왔다. 그런 선생님의 자상함에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1969년 봄 어느날 강의가 끝나고 김선생님은 학림다방 아래층에 있던 대학다방으로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자네는 미학을 포기했다며?"라고 말머리를 꺼내시더니, 미학에는 여러 분야가 있으니 자네가 하고 싶은 분야를 공부하면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셨다. 그리고 얼마 뒤 선생님은 내게 이딸리아 르네쌍스시대에 바사리(G. Vasari)가 쓴 『미술가 열전』, 정확히는 『이딸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삶』이라는 책의 영문 축소판을 한권 선물해주셨다. 그것이 결국 나를 미술사의 길로 들어서게 했고, 나는 우리나라 화가들의 삶을 복원한 『화인열전( 人列傳)』에 나의 학문적 일차목표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김윤수 선생님과 이렇게 맺은 인연은 방학중이나 수업이 없을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나는 선생님의 정릉 댁에 자주 놀러 갔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는 미학과에 김윤수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심을 자랑하고 또 자랑했다.
그래서 문리대 학생들이 펴내던 『형성(形成)』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유영표(매경 바이어스가이드 대표이사)에게 선생님의 글을 받아 싣게 했는데 그 글이 제들마이어(H. Sedlmayr)의 『중심의 상실』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또 『대학신문』기자로 있던 심지연(경남대 교수)에게 부탁해 당시 한창 벌어지고 있던 문학에서의 순수-참여논쟁에 대한 논평을 받아 싣게 했다. 그 글은 아주 짧은 것이었지만 대단히 명쾌한 논리로 참여문학을 지지하는 리얼리즘론이었다.
김선생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리얼리즘 미학과 미술의 실천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오윤, 임세택, 오경환 등의 이름으로 발표된 『현실 동인 제1선언』은 이들 미술학도 3인과 김지하, 김윤수 등의 토론을 김지하 선배가 대표집필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김선생님은 우리 근대미술에 대한 자료를 열심히 검색했고 그것이 훗날 김선생님이 근대미술 작가론을 집필하는 기초 조사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은 김윤수 선생님의 편이 아니었다. 1969년 삼선개헌이 통과되더니 가을학기 끝무렵에는 느닷없이 삼과폐합(三科廢合) 사건이 일어났다. 철학과·미학과·종교학과를 통폐합하고 정원을 줄인다는 것이었다. 이에 미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반대데모가 일어났다. 본4(본관 제4) 강의실에서 농성을 하면서 삼과폐합 철회를 요구하는 데모를 연일 계속하였다. 김윤수 선생님은 이때 농성장에 김지하 시인과 자리를 함께 하며 학생들의 저항에 힘을 실어주었다. 김지하 시인은 선배로서 그렇다치고 강사 신분의 김선생님이 학생들 데모에 함께 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있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이 농성은 학생운동세력과 결합하여 총장실 침입이라는 당시로서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끝을 맺고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안병국(가톨릭대 교수) 등은 제적되어 군에 입대하게 되며, 미학과는 끝내 철학과의 미학 전공 정원5명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당시 김선생님은 미학과의 유력한 전임 후보 중 한 명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기회를 잃고 몇 년 후 이화여대로 가시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윤수 선생님은 유인태(전 국회의원) 같은 운동권 타과생으로부터도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어 오랫동안 우리들은 정릉 선생님 댁으로 세배를 다니곤 하였다.
1971년 3월 이후 나는 갑자기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군 복무중 선생님께 받은 편지와 휴가 때 학교에 와서 둘러본 기억에 의하면 김선생님은 여전히 학생들에게 깊은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채희완(부산대 교수), 이상우(연우무대 연출가) 등 미학과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교학과의 임진택(연출가)·홍세화(저술가), 고고인류학과의 장선우(영화감독) 심지어는 미술대학의 김민기(가수), 사범대학의 이애주(서울대 교수) 등도 선생님을 따르고 있었다.
정통적인 강단의 사제관계로 김윤수 선생님의 제자를 든다면 김기주, 박정기(조선대 교수), 민혜숙(전 그림마당 '민' 대표), 채희완 그리고 필자 등을 꼽겠지만 사실상 김선생님의 제자가 학생운동권과 문화운동가 전반에 걸쳐 있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김선생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렇게 많았지만 당시 김선생님은 한낱 시간강사로 생활도 매우 어려웠다. 정릉 버스종점 가까이에 있던 작고 어두운 연립주택에 노모를 모시며 그 박봉의 강사료로 생활하였다. 게다가 척추디스크라는 고질병을 앓고 계셨는데 그 병은 고등학교 때 추운 겨울 냉방에서 생활하면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선생님을 좋아해서 시도때도 없이 댁으로 놀러 갔는데 그럴 때면 밤상도 술상도 쓸쓸했다. 어떤 때는 모두 밖으로 나와 자장면을 먹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그런 궁핍한 생활에서 기력을 좀 펼 수 있게 된 것은 1973년 이화여대 교수가 되고부터다. 선생님 나이 37세에 처음으로 얻은 안정된 직장이었다.
이때부터 김윤수 선생님의 본격적인 글쓰기와 비평활동이 시작된다. 선생님의 비평활동은 주로 『창작과 비평』에 근대미술 작가론을 게재하는 것으로 본격화되었다. 「춘곡(春谷) 고희동(高犧東)과 신미술운동」「좌절과 극복의 논리-이인성(李仁星)·이중섭(李仲燮)을 중심으로」「김환기론(金煥基論)」등 연이어 발표하는 근대미술 작가론은 근대미술을 민족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한 것으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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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연일 독재체제가 점점 강고히 구축되어 갈 무렵이었다. 서슬 푸른 군사독재에 모두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1973년 12월 24일 장준하, 백기완 선생의 주도하에 '개헌청원 30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30인 중에 김선생님이 들어 있었고 이때부터 선생님은 당국의 요시찰인물로 주목받게 되었다. 1974년에는 백낙청 교수, 홍성우 변호사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준비모임에도 참가하였다.
1974년 긴급조치1호,4호가 발동되었다. 나는 당시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복역하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기 때문에 그 사이 김선생님이 밖에서 하신 일은 잘 알지 못했으나, 백낙청 교수 파면취소 서명운동, 김지하 시인의 구명운동, 구속학생 석방운동 등에 열심히었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다시 발동되었다. 이때 수감중인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한 부가 김선생님을 거치게 되었다. 또 서울대 5·22사건으로 도피중이던 유영표가 선생님 정릉집에 피신하고 있었다. 이것이 발각되면서 김선생님은 마침내 1975년 11월 정보부에 연행되고 몇 달 후 긴급조치9호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구속되었다. 선생님의 재야운동에 대한 응징이었던 것이다.
김선생님이 출소한 것은 구속 10개월 뒤인 1976년 8월이었다. 그 사이 재직중이던 이화여대에서 당국의 강압에 의해 해직되었다.
교도소 수감 당시, 김선생님을 면회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으로 제한되어 있어 선생님의 친척 여동생 되는 분이 옥바라지를 하고 있었다.(노모께서는 이미 몇해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 어느날 그 여동생이 내게 전화를 해서 한국일보사 기획실의 허현 선생을 만나달라는 전갈을 해왔다. 허현 선생은 문리대 운동권 선배여서 익히 알던 터라 찾아 뵙고 당시 한국일보사에서 간행하고 있던 '춘추문고'에 선생님께서 그간 쓰신 글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펴내는 일을 내가 대리 계약하고 출간하게 되었다. 그 책이 『한국현대회화사』이다. 당시 선생님은 책을 빨리 펴낼 생각이 없으셨다. 글을 좀더 보완해서 펴낼 계획이었는데 교도소에 수감되고 학교에서도 해직되는 바람에 또다시 생활비와 영치금이 문제가 되니까 마지못해 출간을 승낙하신 것 같다. 그때 나는 얼마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한국일보사에서 인세를 받아 삼선교에 살던 선생님의 막내동생에게 전해드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김선생님의 책이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은, 안할 얘기로, 교도소에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선생님의 예의 완벽주의 때문에 계속 미루다가 성사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훗날 김선생님의 평론집 발간을 재촉할 때면 지인들로부터 "또 교도소에나 들어가야 대리 출간될 텐데"라는 농담을 듣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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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9월 김선생님이 영등포구치소에서 석방되던 날 고은, 신경림, 백낙청 등 선생님의 친구분들과 동생 김익수 교수 그리고 필자 등 10여명이 교도소 앞에서 선생님의 출소를 기다렸다. 초췌한 모습으로 교도소 문을 나오는 선생님을 모두들 반가움과 안쓰러운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그리고는 차에 나누어 타고 정릉 선생님 댁에 다시 모였다. 결혼을 하지 않아 쓸쓸히 비어 있을 그 집에 김선생님을 홀로 보내기 싫은 마음이 다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출소 후 실업자 처지가 된 선생님은 다시 생계와 공부 모두를 위해 번역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빙글러(H. M. Wiingler)의 『바우하우스』와 잰슨(H. W. J.anson)의 『서양미술사』같은 방대한 저서의 번역을 시작하였다. 그 엄청난 작업량은 비록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선생님의 건강으로는 해내기 힘든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결국 이 두 책은 출간되어 우리는 서양미술사와 20세기 건축·디자인사의 가장 유명한 고전 두 권을 번역판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김선생님의 번역작업은 미술책이 귀하던 시절, 미술의 대중화와 미술인들에게 좋은 책을 정확하게 변역하여 전달한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졌다. 선생님이 처음 번역한 책이 슈미트(G. Schmidt)의 『근대회화소사』(1972)인데, 6,70년대에는 원고를 쓸 수 있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부 겸 돈벌이로 『여원(女苑』지에 연재했던 것을 묶은 것이다. 그리고 존 버거(J. Berger)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허버트 리드(H. Read)의 『현대회화의 역사』등은 훨씬 후에 번역하셨다. 이것은 김윤수 선생님의 인간상을 얘기하는 데서 간혹은 쉽게 지나치는 당신의 중요한 일면인 것이다.
70년대 말 암울한 유신시대를 보면서 김선생님의 이력에 특기할 만한 것은 1978년 1월부터 창작과 비평사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창비'에서 일하면서 이듬해에는 당시 영남대학 교수로 있던 고 이수인 선생(전 국회의원)의 권유로 영남대에 출강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당시 대학 출강이 금지된 신분이었지만 그 시절 영남대학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국에서 선생님의 출강 사실을 알고 담당 형사가 출강하는 날 아침이면 댁으로 빠짐없이 찾아와서 출발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시간에도 때맞추어 도착을 확인하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
1979년 10·26이 발생하고 이듬해 '서울의 봄'이 오자 김윤수 선생님은 복직되어, 염무웅 선생 등과 함께 영남대학교로 옮겼다. 선생님으로서는 낙향인 셈인데 영남대로 옮기게 된 이유는 당시 대학 집행부가 미학과를 신설해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김선생님은 이화여대 미술대학의 이론교수보다는 학부부터 가르칠 수 있는 미학과의 창설이 학계와 사회를 위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결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선생님의 꿈은 곧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뒤이어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고 대학가에 찬서리가 몰아쳐 다시 강제 해직되고 만 것이다. 한편 『창작과 비평』도 강제 폐간되면서 김선생님은 다시 실직자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서울미술관 관장으로 일하다가 83년 1월부터 창작과비평사 발행인을 맡으면서 선생님의 '창비 시대'가 시작되었다.
김선생님은 84년 10월 해직교수 복직조치에 따라 영남대에 복직되셨다. 두 번째 복직이었다. 그후 서울과 대구를 매주 왕복하며 '창비'일과 강의를 병행했는데, 이듬해 창작과비평사가 당국의 탄압을 받아 출판사 등록을 취소당하는 사태를 겪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창작사'라는 이름으로 재등록하여 명맥을 유지했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 선생님은 '창비'의 보루로서 그리고 민주화운동가로서 영일이 없는 80년대를 사셨다.
한편 영남대에 복직은 했으나 미학과를 창설해주겠다던 대학 집행부는 모두 교체되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도 김선생님은 학교 당국에 끊임없이 요구하여 1988년에는 일단 대학원 석사과정에 미학·미술사학과를 창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영남대 미학·미술사학과가 서울 이남에서 주목받는 학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이다.
90년대 들어 김선생님은 영남대의 중요보직을 역임하며 당시 극도로 혼란하던 학내질서 회복과 대학 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대학사회 안에서는 잘 알려진 일이며, 1991년에는 필자를 영남대 교수로 이끌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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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 선생님은 비록 한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교수지만 여느 교수와는 달리 대학 밖에서 자신을 실천한 또 한몫의 삶이 있고 사회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더 크고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 하나는 양심적 지식인으로서의 활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족미술운동에서 보여준 실천적 행동이었다.
김선생님은 필자가 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때만 해도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치는 소장학자였다. 그러나 유신체제 출현과 더불어 재야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언젠가 그 동기를 여쭈었을 때 선생님은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한 헤겔의 말을 들면서 "학생들이 나서서 싸우고 끌려가고 하는데 지식인이랍시고 책만 보고 않아 있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또 선생님이 출감한 후 어느 술자리에서 "자네들이 간 길을 따라가 견학 잘하고 왔지"라고도 말씀하셨다. 그 이상의 내면적, 사상적 동기에 관해서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김윤수 선생님은 81년 가을 무렵 임세택, 강명희 부부가 세운 서울미술관의 관장을 맡으셨다. 1년여 기간에 불과했지만 일련의 기획전으로 서울미술관은 미술계의 멸소로 그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미술계에서 리얼리즘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자 이를 후원하는 미술관 활동이 중요하다고 인식한 김선생님은 과감한 기획전을 시도했다. 서울미술관 관장시절 김선생님이 임세택과 함께 기획한 '프랑스 구상회화전'같은 전시회는 모노크롬계 일색으로 서구 현대미술을 왜곡하여 받아들인 기존 미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신학철의 개인전을 연 것은 민중미술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전시회였다.
1980년 민족미술 민중미술운동이 일어날 때 이 젊은 작가들에게 사실상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주신 분이 김윤수 선생님이었다. 젊은 작가들이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분은 김윤수 선생님 윗대로는 없었다. 누군가 20세기 후반기 한국미술사를 서술한다면 80년대 리얼리즘 운동의 정신적 지주는 김윤수 선생님으로, 그 운동에서 사실상 이론적, 도덕적 무게를 갖고 힘을 실어준 분이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선생님은 유능한 신인을 발굴하고 이들의 작업을 평가하고 후원하는 실천적 비평활동으로 민중미술운동에 크게 기여해왔던 것이다.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 창립 때는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지만 88년에는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고, 99년 이래로는 사단법인 민예총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제도상의 이력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윤수 선생님이 미술계에서 갖는 상징성이었다.
김윤수 선생님은 80년대와 90년대를 보내면서 '창비'일과 학교 일에 몰두하느라 글쓰기를 중단하여 당신이 실천하고 있는 비평과 학문의 방향이 무엇이라고 글로 명확히 천명한 바는 없다. 다만 우리는 그간의 선생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하여 이를 피부로 느끼고 몸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해 김선생님은 정년퇴임의 자리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사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을 몰랐습니다. 또 워낙 세월이 수상하여 대학을 들락거리는 통에 정년퇴임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거친 역사의 격랑을 살면서 사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렵고 고단한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내가 일생을 살아가는 데 목표와 이상이 있었다면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것과 실천적 학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가지를 병행하거나 통합하는 삶이란 내게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벅찬 일이었습니다.
나는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지만 미학을 위한 미학이나 미술사를 위한 미술사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미학, 살아있는 미술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미학과 미술사 연구의 바탕을 이루는 정신은 언제나 민족주의였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데서 출발하며 결코 편협한 내셔널리즘이 아닌, 세계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르로 얼마나 살지는 모르지만 사는 동안 그런 점들을 목표로 하여 글로 남기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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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 선생님은 퇴임기념 문집을 발간하겠다고 했을 때 극구 사양하셨다. 내 삶은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내세울 것도 없으니 제발 그런 것은 만들지 말라고 고사하셨다. 실상 필자는 선생님을 35년간 가까이서 보아왔지만 선생님을 깊이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선생님을 두고 주변에서는 흔히 '청년 김윤수'니 혁명적 로맨티스트니 하는 데 대해 내가 보기에는 외유내강형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제자나 후배들에게는 늘 자장하고 따뜻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선생님께서 오랫동안 독신으로 계셨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다 보니 저 험난한 시대를 사시며 온갖 사람들을 대하고 또 온갖 일을 겪으면서 내적 갈등이나 심적인 고충이 오죽했으랴 싶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생님은 중요한 책이자 글들을 꼭 찾아 읽으셨거나 읽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선생님의 참모습을 꼽는다면 뭐니 해도 개인적인 야심이나 욕심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늘 뒤에서 일하며 자신의 일은 나중으로 미루시곤 했는데, 이 점이 아마도 선생님의 장점이자 단점이 아닌가 한다. 여태 해외여행도 한번 안 하신 것도 그래서인 걸로 안다.
김선생님은 또 어떤 일을 맡으시면 그 일에 전념하는 성미다. 서울미술관을 맡았을 때나 '창비'일을 맡으셨을 때 그리고 대학에서 보직을 맡아 하실 때도 그랬다. 그래서 한 때는 '저 어른이 저 일에 왜 저렇게 열성이실까. 저 열성을 학문에 쏟으시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선생님의 성품이나 신조를 잘 몰라서 나온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언젠가 "지식인은 먼저 남을 위해 봉사하고 자신은 맨 나중에 즐긴다"라는 중국의 한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생활신조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2월 대구시내 한 음식점에서 영남대학교 대학원 미학 미술사학과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모여 김윤수 선생님의 정년퇴임을 기리는 송별회가 있었다.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로 정년퇴임을 하는 송별회는 쓸쓸한 자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축하를 드리기도 무엇하고, 그렇다고 위로의 자리로 삼는 것도 경위에 맞지 않는다.나는 분명 이 자리에서 무언가 얘기를 해야 할 텐데 이 애매한 자리에 맞는 말이 무엇일까 고민고민했다. 그런데 송별회장 안에 들어다 보니 학생들이 써붙인 플래카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김윤수 선생님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드리며.'
이 글귀를 읽는 순간 이럴 때는 학생들이 선생보다 더 선생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선생님은 이제 수업에 매달리고, 논문을 지도하고, 잡무에 시달리던 데서 해방되어 하고 싶었던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계기를 얻으신 것이다. 20년을 두고 출간을 미루어온 미술평론집도 내시고, 평생 몸으로 실천해온 리얼리즘과 민족예술의 미학을 학문적 저서로 정리하여 그것이 이땅의 미학도에게 공부와 실천에서 하나의 길라잡이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 마음이 일어났다.
이날 나는 동료교수로서 또 제자로서 무언가를 말할 차례가 되었을 때 그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은 다음 이렇게 인사말을 맺었다.
전년퇴임을 65세로 규정한 것은 인간의 평균수명이 50세도 못 되고 70세를 넘기면 장수라고 하던 시절에 정해진 나이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평균연령이 70세가 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체감하는 나이는 현재 자기 나이에 0.7을 곱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따질 때 선생님은 이제 45세의 중년일 뿐입니다. 생에 창조적 열정이 극에 달하는 시기가 45세에서 55세라고 하였으니 여기 플래카드에 씌어 있는 대로 선생님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드립니다.
※위 글은 김윤수 교수 정년기념 출판서 <민족의 길, 예술의 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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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