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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3장 강해 - 새 사람, 새 역사.
챨스 디킨스는 영국이 나은 세계적인 작가입니다. 19세기에 씌여진 그의 글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읽히고 사람들은 그의 작품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는 그의 책 두 도시이야기(런던과 파리)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의 글을 통해서, 글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보입니다.
간절히 원하면서 열렬히 거부하는,
갈망하면서 외면하는,
잡으려하면서 뿌리치는,
그런 갈등하고 방황하는 뒤죽박죽인 ‘나’를 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삶이지요.
사람이 사는 삶은 결국 이것을 결정해야하고, 또 결정짓게 됩니다.
‘누구’와 ‘왜’, ‘어디’를 향해 가느냐...
맞습니다.
정말 중요한 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고의 인생이었는지 최악의 인생이었는지, 지혜의 삶이었는지 어리석음의 삶이었는지, 빛이었는지 어둠이었는지, 희망이었는지 절망이었는지...
인간의 삶은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동행하는 동행자를 바꾸지 않는 이상,
목적을 바꾸지 않는 이상.
길을 바꾸지 않는 이상,
그 길은 계속 이어집니다.
영원히 말이죠.
챨스 디킨스는 1843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크리스마스 캐롤]이라는 책을 썼지요. 우리는 모두 스크루지 영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사람 꼭 스크루지 영감 같아!’
어느 쪽을 말하는 걸까요?
디킨스가 말한 스크루지 영감은 하루 밤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챨스 디킨스가 [두 도시이야기]에서 표현한 대로라면, 스크루지 영감은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니,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적 방향전환, 그의 모든 생각, 감정, 언어, 행동 전반에 걸친 대 변혁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던 것이지요.
챨스 디킨스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사람들이 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그런 글을 썼던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우리의 심성은 부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주신 것들이지요.
사랑, 지혜, 고귀함, 의로움, 아름다움, 성결함, 평화, 거룩함, 장엄함, 찬란함 같은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들이며 우리는 그러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해야합니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요나의 ‘죽기’는 요나의 ‘살기’, 아니 ‘다시 살기’가 되었습니다.
챨스 디킨스가 원했던 크리스마스, 그가 원했던 스크루지는 소설이지만 요나의 이야기는 소설이 아닌,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인 것이지요.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였고(2:1),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갔습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불순종에서, 숨고, 죽어버리기에서, 순종과 나타남과 살고 살리기로 일어난 것입니다.
‘메타노이아’입니다.
요나는 새 사람이 되었고 새 역사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는 사명이 담겨 있습니다.
풍랑 사나운 깊은 바다에 던져졌음에도 다시 산 것,
다시 하나님을 바라 본 것,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
다시 육지로 돌아온 것,
다시 사명이 주어진 것,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쉽게 말해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선물 받았습니다’ 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은혜 받았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선물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받게 된 크고 소중한 선물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다 선물입니다. 생명도, 삶도, 우리가 마시는 공기, 눈에 비치는 아름다운 세상,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오늘 이 하루도 다 선물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을 알게 된 것, 믿게 된 것. 우리가 소망하며 바라보는 천국은 선물이 아닌가요?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늘 감사하고 그럼으로 더 큰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선물을 더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은혜와 선물에 관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선물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에는 항상 받은 자의 의무가 포함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 6:1절에서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의 해방을 주셨지요. 그들은 그 땅에서 종살이하며 학대 받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억누르는 당대 강력한 이집트의 힘에 저항하고 맞서 싸워 그들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해방할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해방하고 자유의 몸이 되어 이집트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애굽을 굴복시킨 하나님의 능력이었지요. 그것은 크고 놀라운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종의 신분과 삶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과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기를 기뻐하셨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존엄 가운데 사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땅에서의 의무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지요. 그들이 그 땅에 거하면서 이방의 빛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6장에 잘 나와 있지요.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이 모든 것이 다 선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요나가 다시 살게 된 것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은 요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요나가 받은 큰 선물이지요.
그는 죽을 줄 알았고 그 바다에 던져짐으로 자신의 생명과 사명이 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거기서 인간의 죽음과 사망권세를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고 바다 속 물고기 배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것이지요.
그는 다 끝날 것이다 여겼던 그곳에서도 생명을 선물로 받았고, 다시 사명을 받았고, 다시 일으키시고 쓰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살려두지만 버려질 수 있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 살리시고 다시 말씀하시고 다시 보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지요. 그러나 환란의 시간이 닥쳐왔을 때 그는 예수님 떠나 달아났고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3년 전 물고기를 잡던 어부로 다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찾아가시고 또 찾아가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베드로를 만나 주시지 않습니까?
은혜위에 은혜를 주시는 거지요.
그리고, 그 은혜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예루살렘을 향했고 그곳에서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죽기가지 사명을 다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던 것이지요.
그 은혜 안에는 의무가 있고 사명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행하며 살아갈지를 묻고 늘 길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사람이 사는 게 삶이잖아요.
삶이 잘못된 것은 사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바르게 되어야 삶이 바로 되고, 사람 사람의 삶이 바로 되어야 세상이 바로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사람이 바르게 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서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는 것이고 그가 사는 삶이 바른 삶이 되겠지요.
요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고 그는 다시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큰 성 니느웨로 갔습니다.
역사적 문헌에 따르면 그 성은 큰 성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저 큰 성읍”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3일 길인데 하루를 다녔다고 합니다. 급속도록 회개의 역사가 일어 난 것입니다. 기적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회개가 일어났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섰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돌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요나가 먼저 회개했어요.
회개한 자가 회개를 외쳤어요.
그리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어요.
요나가 ‘새 사람’이 되어 ‘새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나오는 탕자의 모습이 성경 그 어느 곳에서 보여주는 회개보다도 회개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향을 돌려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자신의 모든 신분과 권리를 철저히 내려놓기까지 낮아지면서 그저 아버지의 집으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완전히 아버지 집에 돌아온 거 맞으시죠?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거 맞으시죠.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구원의 길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내가 무슨 공로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 내 영혼을 위해 바칠 그 어떤 것도 그 만한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요.
요나의 외침을 듣고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사람들이 다, 짐승에서부터 위로는 왕에 이르기까지 다 금식하며 엎드린 겁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지요. 그들이 다 하나님을 향하여 몸과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때 그곳에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나타난 것입니다.
5절 말씀,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9절.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절.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결과입니다.
이 생각을 해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신 거예요.
그래서 요나를 보내신 거고요.
우리는 항상 교만해요.
좋은 결과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으려고 해요.
웃기지요.
그러면 안돼요.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시지요.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결과를 다 만들어 좋으시고 그 좋은 결과로 우리를 이끌어 가셔요.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총체적 은혜’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글귀가 있어요.
“하나님은 계획보다 실제가 더 좋으시다”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이 말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일 수 있어요.
그래도 저는 괜찮아요.
그만큼 이 말이 너무 좋아요.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고통 속에서 소리치며 울부짖는 게 아니예요.
우리의 불순종, 교만, 의심, 고집 같은 것들이 가져온 자연스러운 결과들이지요.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의 좋은 의도와 계획들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오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포기 하지 않으셔요.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셨다면 저는 죽어 지옥에 던져졌을 겁니다.
그건 당연한 결과지요.
저도 제가 짜증스럽고 싫을 때가 너무 많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 때문에 계획을 바꾸셔요.
조용하던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시고 큰 물고기도 준비하셔요.
배가 곧 뒤집힐 지경인데 그런 배 안에서 무슨 제비뽑기를 할까요?
하나님이 하시면 가능한 일이예요.
우리가 자주 울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울게 하시는 까닭이지요.
그 사랑의 친절하심, 그 은혜의 섬세하심에 우리는 다 항복당하고 마는 거예요.
우리는 늘 당합니다.
우리가 항복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만 그런가요?
저는 늘 항복을 당해왔습니다.
요나를 항복시키신 하나님
니느웨도 항복시키셨습니다.
니느웨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 세 가지 숨은 요인들을 생각해 봅니다.
1. 이미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그곳에 보내시기 전에 그들을 흔들어 놓으셨어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국력이 약해지고 백성들은 힘들어진 상태였는데 당시에 역병과 일식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곳에는 두려움이 있었다는 기록을 읽었습니다.
견고하던 터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 사람들의 마음도 흔들립니다.
약해지는 거지요.
역사적으로 아무리 강대한 재국도 무너지지 않은 제국이 없습니다.
강한 자가 나오면 더 강한 자가 나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느 순간 정점을 찍고 쇠퇴해가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지 않습니까?
터가 흔들릴 때 우리는 겸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니느웨성이 아무리 건고하게 쌓여있다 할지라도 그 성을 무너뜨리려는 자는 더 큰 힘을 비축하고 그 성을 향해 돌격해 오기 마련입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서 다음이 미가서고 그 다음이 나훔입니다. 나훔이라는 선지자는 요나의 사역이 지나가고 약 130년이 흐른 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다시 니느웨를 향해 선포합니다. 요나의 시대의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새로운 세대가 또 하나님을 거역하며 악을 행하며 그들의 터전을 자만삼고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훔은 그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요나가 다녀간 후 50년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가 되었지만, 약 100년 뒤, BC 612년에 니느웨는 함락되고 앗수르는 멸망하게 됩니다.
어느 시대는 구원하시지만 어느 시대는 저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예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권에 있습니다.
평안한 삶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건강이 무너지고 재정이 무너지고 삶의 터전이 무너질 때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도 잘하는 일이지만, 삶의 자리가 안전하고 평안한 때에 더욱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력이 나빠져서 성경을 읽을 수 없는 때가 오고, 책상에 책을 펴고 앉을 수 없는 날이 우리에게 오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는 때가 오고, 하루의 오랜 시간을 침내에서 지내야 하는 때가 우리 앞에 옵니다. 그때가 이르기 전에 부지런히 교회를 오가며 예배를 드리기를 힘쓰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사람들과 만나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기를 즐거워하는 멋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의 외침이 그곳에 있기를 원하셨어요.
요나는 요사이 자신이 경험한 죽음과 삶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당장 말할 수 없는 큰 경험을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경험자는 확신을 갖고 말합니다.
요나의 말에는 생명력이 있었을 겁니다.
아주 오랜 전에 마이클 호튼의 책속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어느 기자가 작곡가 맨델스죤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어떻게 종교개혁교향곡을 작곡하게 되었습니까?
그때 멘델스죤은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확신을 갖고 있엇습니다. 그러나 우리시대에는 의견만 갖고 잇을 뿐이지요”
듣는 이에 따라서는 뜬금없는 대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을 생각해 보면, 그 역시도 신앙의 확신을 갖고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독교에 대한 의견을 갖고 있습니까?
요나의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그의 말은 아주 공격적이었습니다.
40일지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진다고 했으니까요?
벽돌 한 장으로 쌓아올린 금이 간 담벼락도 몇 년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니느웨 성이, 그렇게 크고 견고한 성이 무너지리라고 말할 때, 외치는 자에게서부터 확신으로 충만해있을 때 그는 이들의 영혼을 흔들것입니다.
다른 일들을 말할 때는 우리의 의견을 말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확신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단들은 그릇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경험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확신으로 충만한 가슴과 언어로 여려분을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전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다리를 놓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 이라는 말은 원래 다리를 놓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폰티펙스(pontifex)는 제사장에 해당하는 라틴어인데, 제사장이란 원래는 긍정적이고 강력한 목적을 지닌 적극적인 개념으로 본래 뜻은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란 사람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가도록 도와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실제적인 직분이었다.
요나는 하나님과 니느웨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의 외침은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었고 그 성은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되어 사람을 살리고 넘어진 자를 세워주며 방황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 진리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거룩하고 복된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 니느웨의 회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바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한 사람이 뜻을 돌이켜 하나님께 굴복하는 데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되어 질 수 없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다른 그 어느 것으로도 대치 될 수 없고, 나타내질 수 없는 불변의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지요.
이 역사가 한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인 것이지요.
그때 그곳에서 그 한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겸손히 기도하는 일을 빼놓아서는 안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 여기까지 왔지만 한 번도 저 자신에게 기대를 걸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잘 압니다.
그러나 나의 최선위에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나아갑니다.
주님이 나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신다 하셨고,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으니 그 말씀이 얼마나 내게 위안과 평안을 주는지 모릅니다.
베드로도 요나처럼 실패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찾아가시는 주님의 은혜에 그는 다시 돌아갔던 갈릴리를 또 떠나 예루살렘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언제나 요나처럼 순종하는 듯 불순종하고 베드로처럼 강한 듯 나약합니다.
그러나 지난날을 돌아보면, 오늘 이순간도 내가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고 여러분 또한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거듭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지요.
우리는 큰 은혜를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나라에 다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만 합니다. 낯에는 태양 빛처럼 찬란하게, 밤에는 달빛처럼 평안하게 그렇게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임하심으로 우리가 그 나라에 도달할 수 가 있습니다.
순종하며 나가는 길에서 주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국가적인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3000명을 회개 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했습니다. 다 성령님의 놀라우신 역사입니다.
요나서 3장은 쉽게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과 즉시 회개하는 이방인을 대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요나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41과 누가복음 12:41을 보면 예수께서 요나서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예수님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심판 때에 예수님의 전도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는 말씀도 더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니느웨 사람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은 없는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던 요나가 다시 돌이켰고, 그의 설교를 들은 니느웨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이켰습니다.
갈릴리로 가서 어부로 돨아왔던 베드로가 다시 돌이켰고, 그는 또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을 돌이켜 그들의 얼굴을 하나님을 향하여 들게 했습니다.
돌이킨 자는 또 누군가를 돌이키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과 얼굴을 돌립시다. 우리도 누군가를 살리러갑시다.
벧전 2: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