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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북아 역사전쟁, 그 끝은 어디일까
지금 동북아는 총성 없는 전쟁, ‘역사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2002년 2월부터 중국은 현 중국의 동북 3성 지역에서 일어났던 고조선, 고구려, 대진(발해) 등의 한민족 역사를 자국의 역사에 귀속시키는 역사 왜곡 공작을 벌여 왔다. 그것이 바로 이제 우리의 귀에도 제법 익숙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다. 그렇다면 동북공정은 단순히 ‘중국의 한국사 빼앗기 프로젝트’인가?
동북공정은 중국 문명의 시작을 수메르 문명과 이집트 문명보다 더 이른 시기로 끌어올려 중국을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으로 만들기 위한 ‘탐원공정探源工程’의 일환이다. 탐원공정은 중국이 자국을 전 인류의 시원 국가이자 중심 국가로 만들기 위한 국가 전략 사업으로 2001년부터 기획되어 2003년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즉 동북공정은 중국을 전 세계의 종주국으로 만들기 위한 야심찬 계책의 일부분인 것이다.
2002년에 시작된 동북공정은 중국의 중앙정부 차원으로 확대된 것일 뿐이다. 중국 길림성에서 발간하는 <동북사지(2004. 4월호)>에 실린 중국사회과학원의 한 연구원이 작성한 특별 기고에 따르면, 동북공정은 사실 1982년에 동북 3성의 지방정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무려 30년 전부터 중국의 한국사 탈취가 행해져 왔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남의 역사를 훔쳐가야 했을까? 20세기 최대의 고고학 발굴 사건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여기서의 홍산문화는 ‘BCE 7000~2000년 사이에 만리장성 북쪽의 요서 지역(한민족의 고토故土)에서 번성하였던 여러 고대 문화’를 가리킨다.
발굴이 그 현실적 배경이다. 중국이 야만족의 땅으로 멸시하던 북방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더 앞서고 발달한 문화가 발견된 것이다. 이 홍산문화에서 세계인들이 중국의 상징으로 꼽는 용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BCE 3000년경에 제작된 C자형 모양의 옥으로 만든 용이 먼저 출토되고, 그 후 다시 BCE 5600년경으로 추정되는 돌로 쌓아 만든 용 형상물인 석소룡石塑龍이 발견되었다. 두 가지 모두 황하문명권의 용 유물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용 문화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홍산문화의 발견으로 북방 이민족의 문화가 중국 문명의 원류로 밝혀졌다. 이 곤란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벌인 사업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이형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은 용신앙의 기원을 중원지방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만리장성 너머에서 나왔다. 중국은 최초의 용 형상물뿐만 아니라 중국문화의 원류가 중원이 아니라 동북지방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한 것이다”(상생방송STB, <역사특강>, “발해연안문명, 한국 고대 문화의 기원” 4강, 2009.8.11.).
발굴된 세계 최고最古의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로 만들 명분을 찾기 위해, 이 옛 문화에서 뻗어나간 고조선, 고구려, 대진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변조시키게 되었다.
동북공정은 2007년 5월에 공식 종료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 왜곡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어 계속 추진되고 있다. 예컨대 한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중국의 산으로 만드는 ‘장백산 문화론’을 펼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미 2002년 10월에 백두산을 중국의 10대 명산으로 선정하여 2012년 현재 중국 제6위의 명산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국제적으로 백두산을 홍보하여 백두산 관광객이 100만 명을 돌파한지 수년이다. 윤휘탁, ‘백두산의 중국화와 우리의 대응방향’, 『한중 관계와 한반도』(제8차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학술대회), 211쪽.
세계인에게 백두산은 이미 중국의 산인 것이다.
이렇게 국제 여론을 조장한 중국은 백두산을 누볐던 고구려와 대진을 역시 백두산 인근에서 발원하였던 금(1115~1234), 청(1636~1912)의 역사와 연결 짓는 논리를 개발 중이다. 정호섭, ‘동북공정 이후 중국의 고구려사 관련 동향과 전망’, 『한중 관계와 한반도』(제8차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학술대회), 197쪽.
이것은 동북공정에서 고구려와 대진을 중국사에 예속시킨 것보다 한 술 더 뜬 역사 강탈이다. 고구려와 그의 후계자인 대진을 금‧청의 밑거름이 된 일개 북방족의 역사로 전락시켜 이 두 나라와 한민족과의 연결 고리를 더욱 철저히 단절시키고 있다. 현재진행형인 중국의 역사 침탈과 왜곡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동북공정의 후속사업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 유물을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만리장성 경계선을 고구려와 발해 강역까지 연장하고 있다.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을 동쪽 끝으로 하는 만리장성을 2009년에 압록강 하구 지역까지 연장하였고, 2012년에는 동북 3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흑룡강성의 목단강牡丹江 유역까지 연장하였다.
중국이 한민족사 강탈을 통해 노리는 최종 목표는 후일 한반도에 정치적 변고가 생겼을 경우 북한을 점령하고, 그 후 넓어진 정치적 입지를 바탕으로 세계의 최강자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탐원공정, 동북공정, 장백산 문화론 등은 단순한 역사 침탈 공작이 아니라 영토 침탈 공작이며 한국의 앞날을 위협하는 무서운 정치 음모인 것이다.
한편 일본도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영토 침탈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일본의 ‘독도 도발’ 사건이다. 대중가요에서도 말하듯, 울릉도에서 뱃길 따라 2백 리에 위치한 독도는 원래 우산국于山國이었다가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신라에 귀속되었다. 최소한 신라 때부터 공식적인 한국 영토였던 이곳을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와중에 자신들의 영토로 무단 편입시키고, 다케시마[竹島]라 명명하였다. 그 100년이 되던 2005년에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고, 일본의 국가 안보 전략서인 방위백서防衛白書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난 달 8월에 일본 외무성은 독도가 일본 땅이란 것을 세계에 알리는 홍보 영상을 제작‧배포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다. 정부차원에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영상물을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경향신문>, “일日 외무성, ‘독도는 일본땅’ 홍보영상 만든다”, 2012.8.29.
갈수록 거세지는 일본의 독도 도발은 그저 섬 하나를 차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독도를 차지함으로써 한국의 코앞에서 군사력을 행사하여 한국의 안보를 좌지우지하며 동북아 역사를 주도하겠다는 야심의 표현이다. 일본의 독도 도발도 알고 보면 중국의 동북공정과 마찬가지로 동북아에 대한 주도권 분쟁이며 역사전쟁인 것이다.
서로 동북아의 주인이 되고 지구촌의 패자覇者가 되겠다는 중국과 일본의 야욕 앞에서 동방 한민족은 어떻게 역사와 미래를 지킬 것인가? 그리고 한·중·일 삼국의 관계는 진정 약육강식의 틀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인가?
고구려, 발해 땅까지 연장한 중국의 만리장성_역사적으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이 정설이다. 그런데 2009년 압록강 하구인 단동의 고구려성을 호산虎山산성이라 바꾸고 만리장성 동단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엔 동쪽 끝과 서쪽 끝을 모두 연장했다. 동쪽의 경우 흑룡강성과 길림성까지, 서쪽은 감숙성 가욕관보다 더 서쪽인 신강위구르자치구까지 장성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한마디로 정치적 목적의 역사 왜곡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2)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한민족
1988년 일본 나라[奈良]시에서 박람회가 열리던 때, 필자는 큐슈[九州]의 문화 유적을 탐방하던 길에 나라국립공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동북아 역사부도’라는 홍보용 책자를 하나 구입하여 펼쳐 보면서 우리 역사부터 찾아보았다. 그런데 역사 연표 어디에도 대한민국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훑어보니 어이없게도 중국 역사 연표 끝자락에 조그맣게 한국사 연표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 한국은 황하문명권에 속한 나라로, 겨우 2천2백 년의 역사를 가진 보잘 것 없는 나라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를 본 순간 필자는 철저히 거세된 한국사에 큰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마치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동북아 역사 부도 속에 그려진 초라한 한민족사의 실상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각성해서 잃어버린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서 불끈 솟아올랐다.
자신의 시원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사는, 혼 빠진 한민족!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제는 한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그 진실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한민족사의 진실을 알 때, 한국 사회의 갖가지 갈등과 모순을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밝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한 등불을 환히 밝힐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한민족의 역사 체계가 이토록 망가지게 되었는가?
3) 한국사 왜 이렇게 파괴되었나
중국이 왜곡한 한국사
“낙양洛陽은 천하지중天下之中”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은 예로부터 낙양, 북경, 남경, 서안(장안) 같은 자신들의 도읍지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겼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으로서 곧 중화中華라는 것이다. 이 중화 사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 중국의 정식 국호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이다. 그들이 동북아의 중심 국가이자 동북아 문명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중화 패권주의 사관에 따라 중국은 대대로 한국 역사를 자신들에게 예속된 속국屬國의 역사로 왜곡하였다.
그 대표적인 기록이 한나라 때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의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기자를 조선에 봉하다)”이다.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한 역사책은 『사기』 외에 BCE 2세기경 복생伏生이 쓴 『상서대전尙書大傳』, 후한시대 반고가 쓴 『한서漢書』 등이 있다.
‘주周나라 무왕이 상商나라의 성인이었던 기자箕子 기자는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더불어 상나라 삼현三賢으로 불린다. 비간은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에게 정치正治를 간하다 사형당했고, 미자는 비간의 죽음을 보고 멀리 도망쳤다.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해서 왕의 미움을 사 감금되었지만 주 무왕에 의해 풀려났다(『사기』 「송미자세가」).
를 조선이란 곳의 왕으로 봉함으로써 조선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주나라의 보살핌 덕분에 조선이란 나라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나라 이후로도 계속 역사를 왜곡하였다. 중국 25사 가운데 무려 6권에 달하는 사서를 편찬한 당 태종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구려 정벌을 도모했다가 패망한 수나라를 뒤이은 당의 창업자인 태종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수많은 군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 장군의 화살에 한쪽 눈을 잃는 치욕을 당하였다. 비참하게 당으로 돌아간 당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 후유증을 수습하지 못하고 멸망한 수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전대前代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위진남북조시대 진晋, 양, 북제, 북주, 진陳의 역사를 각각 기록한 『진서晋書』, 『양서梁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진서陳書』 그리고 수나라의 정사인 『수서隋書』 등 총 6권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 6권 어디에도 수나라의 패배를 비롯하여 중국이 한민족에게 당한 굴욕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은 한국사를 왜곡하여 기록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서에서 한민족 국가의 정식 국호를 사용하지 않고, 여러 가지 별칭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옛 역사를 부정함과 동시에 한민족을 중국 주변의 야만인 집단으로 비하하였다.
예를 들면, 고조선을 구이九夷(『논어』), 이예夷穢(『여씨춘추』), 직신稷愼(『일주서』), 숙신肅愼(『산해경』), 전국 시대부터 전한 말기까지 여러 사람이 쓴 것을 하나의 책으로 합친 중국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서는 고조선을 숙신 외에 조선朝鮮·맥국貊國·개국蓋國 등으로 혼용하여 부른다.
맥貊(『논어』), 예맥穢貊, 산융山戎, 동호東胡, 발發조선( 『관자』), 『관자管子』(BCE 7세기경 제나라의 재상이며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管仲이 쓴 책)에 기록된 발조선은 고조선에 대한 중국의 최초 기록이다.
청구靑丘 등으로 기록하였다. 숙신이나 직신은 조선을 발음대로 적은 것이라 하더라도, 맥·예맥·산융·동호 등은 편견으로 가득찬 말이다. 예穢는 더럽다는 뜻이고 맥貊은 짐승의 한 종류를 가리킨다. 산융은 ‘산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이고, 동호는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는 말이다. 그리고 발조선은 고조선을 구성한 삼조선 중의 하나인 번조선을 우회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서 중화주의에 빠진 중국의 자기중심적인 세계관과 역사관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한국사의 밑뿌리를 잘라 낸 일본
일본은 자신들의 나라를 ‘태양이 떠오르는 근원[日出之本]’이라 부른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동북아의 주인이자 인류의 중심으로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에 의한 한국사 파괴는 언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세계 제패의 꿈을 키우며 조선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한 조선 침략에 앞서 일본은 먼저 식민주의 사관을 확립하였다. 일제 식민주의 사관은 조선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생겨난 것이다. 조선의 역사 전체를 식민지 역사로 꾸며 조선인 스스로를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빠지게 하여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요지이다.
식민사관의 확립을 위하여 일제는 19세기 후반에 자국의 사학자들로 하여금 한국사를 연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대학에는 ‘조선사 강좌’가 설치되고 논문과 저서가 속속 간행되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480쪽, 497쪽.
일본인이 한국사를 이른바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내세워 주관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 연구를 반석에 올려놓은 일본 학자는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동경대학을 졸업한 하야시(1854~1922)는 서양사학의 편찬체제를 모방하여 1892년에 『조선사』 5권, 1901년에 『조선근세사』 2권을 저술하였다. 한국사를 철저히 유린한 하야시의 저서는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한국사 연구의 지표적 존재이다.
,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동경대학 사학과 출신인 시라토리(1865~1942)를 사가史家로 대성시킨 사람은 당시 동경대 초빙교수이던 독일인 리스L. Riess이다. 리스는 실증사학의 거두인 랑케의 제자로 사료비판적인 독일사학의 방법을 일본에 이식시켰다. 시라토리는 일본 사학계를 주름잡는 거물이 되어 한국사에 관한 식민주의 역사학을 수립하였다.
,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후쿠다(1874~1930)는 독일에서 경제학을 배워 경제학 측면에서 식민사학을 수립하였다. 한국인의 민족성을 소멸시키고 일본에 동화시켜야 할 사명이 일본인의 운명이라고 주장하였다.
등이다. 세 사람은 독일에 직접 유학을 하거나 일본 내 대학을 다니면서 실증주의 사학을 공부하였다. 실증주의 사학은 조상의 무덤과 집터에서 나온 유물을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한다. 그리고 고증되지 않은 기록은 불신한다. 실증사학을 배운 이들은 한민족의 시원역사인 환국·배달·옛[古]조선 시대를 신화 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BCE 2세기 때의 ‘위만정권과 한사군漢四郡’ 시대를 한민족의 첫 역사라 정의하였다.
일본은 또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거기에 조사부를 설치하여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조사를 하였다. 이마저도 그 목적은 한국인의 뿌리 역사를 말살하고 그 자리를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채우는 데에 있었다.
1910년에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제는 자국의 학자를 대거 조선으로 데려왔고, 1920년대에 그들을 중심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사편수회를 내세워 일본은 ‘조선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이론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한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하였다.
또한 상고 이래의 한일교섭사 중에 일본에 불리한 내용은 기록과 유물을 조작하여 모두 은폐하였다. 임진왜란을 마치 일본이 승전한 것처럼 기술하고, 광개토대왕비의 비문과 칠지도七枝刀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조작하였다.
일본이 변조한 역사 기록 중에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한민족사의 밑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린 네 글자, “석유환인昔有桓因”이다. 1903년 동경제국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후 조선에 파견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고려 시대 사서인『삼국유사』의 기록을 변조하여 만들어냈다. 그는 『삼국유사』 임신壬申본에 적힌 “석유환국昔有桓国”의 ‘국国’ 자를 ‘인因’ 자로 변조시켰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을 ‘옛적에 환인이 있었다’는 불교 신화 속의 인물 이야기로 바꾼 것이다. 이리하여 환국이 사라지고, 그에 따라 환국을 계승한 배달과 고조선도 허구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실로 ‘한국 고대사의 핵을 도려낸 사건’으로, 이로써 한국사의 영혼이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되었다.
일제의 만행으로 우리의 7천 년 상고사가 통째로 잘려 나갔다! 하지만 더욱 가슴 아픈 일은 해방 이후 한국 사학계마저 식민사학을 추종하여 환국·배달·고조선 시대를 부정하였고, 지금도 한국의 역사학에 식민사학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삼국유사』 판본 비교_왼쪽『 삼국유사』는 조선 중종 때 간행한 임신본(壬申本, 명나라 황제의 연호인 정덕正德을 따서 정덕본이라고도 함), 중앙은 이마니시 류가 변조하여 세간에 퍼뜨린 경도제대 영인본, 오른쪽은 석남 송석하 소장『 삼국유사』 필사본이다. 학계에서는 송석하 소장 필사본을 임신본 이전의 고판본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이도학, 김상현 등)은 오른쪽 고판본에 표기된‘ ’자(지금의 옥편에는 없는 한자)를 근거로 원래‘ 桓國(桓囯)’이 아니라 기존의 통설대로 桓因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임신본 목판본을 인쇄할 당대까지‘ ’자는‘ 囯’자와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간행과정에서‘ 囯’자로 판각한 것이 분명하며‘, 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뚜렷이 입증된다(사진 출처: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우리 손으로 파괴한 우리 역사
중국의 중화사관과 일제의 식민사관의 덫에 아직도 갇혀있는 한민족!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동방 한민족이 시원역사를 잃어버린 데에는 외세에 의한 역사 침탈과 왜곡만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자행한 역사 파괴가 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서로 공인받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한국사의 실상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점이다.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에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책으로, 삼국 시대를 기록한 정사正史이다. 하지만 김부식은 고려 중기의 유학자로 중화주의와 사대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때문에 북방을 다스리며 중국을 제압하던 고구려를 “진한秦漢 이후로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었던” 高句麗, 自秦漢以後, 介在中國東北隅(『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보장왕 조).
나라로 정의하고 ‘중국의 국경을 침범하여 중국을 한민족의 원수로 만든’ 적대국으로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라 귀족의 후손인 김부식은, 멸망한 신라를 한국사의 정통 계승자로 만들기 위해 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대진大震의 역사를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삼국사기』가 대진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사실을 두고 신채호는 “동·북 양 부여사를 빼 버려 조선 문화의 근원을 진흙 속에 묻어 버리고, 발해를 버려서 삼국 이래 결정結晶된 문명을 짚더미에 내던져 버렸다”(신채호 저, 이만열 역주, 『조선상고사』, 40쪽)라고 통탄했다.
그리하여 한민족의 상고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된 반 토막 역사로 축소시켰다. 고조선과 부여를 비롯한 상고사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삼국 시대만을 기록한 『삼국사기』가 어찌 한국을 대표하는 사서가 될 수 있는가!
『삼국유사』는 1281년(고려 충렬왕 7)경에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책으로 저자 개인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역사를 기술한 야사野史이다. 때문에 『삼국유사』는 한민족의 왕조사를 그 흥망성쇠와 관련된 신화와 전설에 비중을 두어 기록하였다.
고조선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기이紀異」편의 고조선 조를 보면, 아버지 환인의 허락을 받아 백두산으로 내려온 환웅이 신시를 열어 세상을 다스렸는데, 그때 ‘곰 한 마리一熊’와 ‘호랑이 한 마리一虎’가 사람이 되고자 환웅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 리고 백 일 시험 기간을 무사히 통과한 곰이 여자가 되어 환웅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단군왕검으로서 고조선을 세워 약 1,900년 동안 다스리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환국·배달·옛[古]조선이라는 7천 년 상고사를 환인·환웅·단군 3대에 걸친 인물사로 잘못 기록하였다. 둘째, ‘배달의 백성으로 귀화하고자 한 두 부족’인 웅족과 호족을 ‘사람 되기를 갈망한 두 마리 동물’로 묘사하였다. 셋째, 마흔일곱 분 단군이 다스린 고조선을 단 한 명의 단군이 다스린 것으로 오기하였고, 그 단군왕검도 산신이 되었다고 하여 고조선 역사를 신화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 고조선 역사가 신화로 오인될 여지를 만들었다.
더구나 『삼국유사』는 불교사관으로 덧칠이 되어 있다는 점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불법의 일자一字도 유입되지 않은 왕검시대부터 인도의 범어로 만든 지명·인명이 충만하여(신채호 저, 이만열 역주, 『조선상고사』, 33쪽)”라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일연은 화랑도의 미시랑未尸郞을 미륵선화彌勒仙花의 재생자라 하였고, 한민족 고유의 제천행사인 팔관회를 황룡사 9층탑에 결부시켰다.
일연은 ‘현 인류 문명의 최초 나라’인 환국을 불교 신화 속의 나라로 변질시켰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라고 기록하면서 이 구절에 “제석을 말한다[謂帝釋也]”라는 주석을 붙여, 환국을 불교 신화에 나오는 제석신의 나라로 풀이한 것이다.
만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자신의 고대사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사 해석의 푯대가 되는 두 사서가 한민족의 정통 사관이 아니라 사대주의 사관과 유교·불교라는 외래 종교의 관점에서 쓰여지는 바람에 한韓 문화와 역사의 참모습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손으로 우리 역사를 파괴한 것이다.
: ‘삼국유사에 우리 역사의 원형이 담겨있다’는 내용은 ‘삼국유사도 우리 역사를 파괴한 책이다’는 말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이 내용은 이 자리보다 다른 자리가 더 좋겠습니다.
4) 한·중·일의 서로 다른 조선관
중국과 일본에 의한 역사 왜곡의 결과, 한국·중국·일본은 서로 다른 ‘조선관觀’ 오늘날 일본과 중국은 아직도 조선, 조선인, 조선반도 같은 용어를 쓴다. 최근에 우리와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한국, 한국인 등의 표현도 쓰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선이다.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명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 조선이라 칭한다. 한 걸음만 바깥으로 내딛으면 대한민국보다 조선이라는 용어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근우, 『고대 왕국의 풍경 그리고 새로운 시선』, 46쪽).
을 가지게 되어 고조선의 실체에 대해 서로 다르게 해석을 한다. 한국은 단군왕검이 세운 ‘단군조선’을 말하는 반면, 중국은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을, 일본은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을 말한다. 동북아 삼국이 말하는 세 조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중국이 주장하는 조선, ‘기자조선’의 실체
중국인들은 한대漢代 이래 기자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 왔다. 이러한 중국의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1973년 요령성 객좌현에서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솥[方鼎]이 발굴되었다. 기후방정에는 기후라는 명문 외에 고죽孤竹이란 명문도 함께 있었다. 이것을 근거로 기자가 현 난하 유역의 고죽국으로 망명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고죽국이 고조선의 제후국인 것을 생각하면, 결국 기자는 『환단고기』의 기록과 같이 고조선으로 귀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유물은 기자가 살던 상말·주초(BCE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산동성 황현에서 출토된 8점의 기기箕器(1951년), 산동성 연대시에서 출토된 기후정箕侯鼎(1969년) 등은 기자가 죽고 수백 년이 지난 주나라 후기나 춘추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216쪽.
이러한 유물의 발굴은 기자가 실존 인물이며, 그와 그 후손들은 상당한 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기자는 중국이 주장하듯 과연 조선이란 나라의 왕이었을까?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기자를 상나라의 왕족 『사기색은』에서 “마융과 왕숙은 기자를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제부諸父, 즉 왕과 성이 같은 제후라 하였고, 복건과 두예는 기자를 주의 서형, 즉 서모에게서 난 형[馬融·王肅以箕子爲紂之諸父, 服虔·杜預以爲紂之庶兄]”이라고 하였다.
이라 하면서 “기자箕子의 기箕는 국명國名이고 자子는 작위의 명칭이며 기자의 이름은 서여胥餘이다” 箕, 國; 子, 爵也. 司馬彪曰 箕子名胥餘(『사기색은』).
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기자는 기국箕國이란 나라의 통치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기국은 상나라의 제후국 주족周族은 서주 왕국을 건립하고, 종래 상족商族의 지배 아래 있던 옛 부족을 봉국(제후국)으로 삼아 상商 왕국의 잔여세력에게 대항하는 데 이용하였는데 진陳, 기杞, 초焦, 축祝 등이 여기에 속한다(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221쪽).
이었다.
그런데 『사기』의 기록을 보충 설명한 주석서로서 기자의 신분을 밝혀 준『사기색은』은 사마천이 말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기국의 통치자였던 기자가 정말 조선의 왕으로 봉해졌다면 사마정司馬貞이 그에 대한 보충 설명도 하였을 법한데 말이다. 이 점이 기자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 이러한 점이 기자조선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기자가 설사 왕이었다 하더라도 기국箕國을 다스린 왕이었을지언정 고조선을 다스린 왕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사기』와 『사기색은』에서 불분명한 기자조선이 그 후 『삼국지』(3세기 진晉나라의 진수陳壽가 지음)에서 확고한 사실로 나온다. 진수는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고조선 말기에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기준箕準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다. 『삼국지』에 따르면, 고조선의 서쪽 강토인 번조선 말기의 여섯 왕(70~75세: 기후箕詡, 기욱箕煜, 기석箕釋, 기윤箕潤, 기비箕丕, 기준箕準)은 기자의 후손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이들의 조상인 기자부터 조선의 왕이었다고 보는 것은 과도한 비약이다.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중국이 날조한 기자조선을 한민족사의 뿌리로 여기고 기자를 은인恩人으로 받들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상나라가 망한 후 기자는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의 국경지역인 현 산서성 태원太原으로 이주하여 6년 정도 살다가 고향 땅 서화(지금의 하남성 서화현西華縣)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각주에서 본문으로) 즉 기자는 고조선의 서쪽 변두리를 맴돌았을 뿐 한반도 지역으로 넘어 온 적이 전혀 없다. 그렇건만,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그대 나라에 기자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고려 조정은 황급히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와 기자사당을 만들었다. / 만드는 해프닝을 연출하였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을 기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북한 역사학계에서 기자 정전 터로 주장되던 곳과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 터는 고구려 시대에 도시를 구획한 흔적으로 판명되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다. 요즘 국내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중화주의 사상에 빠진 중국이 지어낸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한번 잘못 쓴 역사 기록의 폐해는 쉽게 걷히지 않는 법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조선, ‘위만조선’의 실체
일본은 왜 기자조선이 아닌 제3의 또 다른 조선을 만든 것일까? 중국의 기자조선은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던 BCE 12세기를 시대 배경으로 한다. 중국의 제후국이라 하더라도 BCE 12세기부터 조선이 존재했다는 것을 일본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아직 일본이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로서 조선을 CE 7세기(670년)에 건국한 일본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 한일병탄 후, 일본은 BCE 2세기 때 인물인 연나라 사람 위만을 조선의 건국자로 만들었다. 위만은 원래 노관盧綰의 부하였다. 연왕燕王 노관은 한고조 유방과 동향이자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인물로 한고조가 나라를 개창하는 것을 도와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BCE 195년 노관이 여태후呂太后의 숙청을 피하여 흉노 땅으로 도망가자, 위만은 고조선 땅으로 피신하였다. 위만은 상투를 틀고 조선인으로 변장하여 당시 고조선의 서쪽 강토인 번조선으로 넘어왔다. 번조선 왕 기준은 위만을 불쌍히 여겨 국경의 수비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위만은 은혜를 배신하고 모반을 일으켰다. 급습을 당해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도망한 준왕의 자리를 찬탈하여 위만은 번조선의 왕이 되었다(BCE 194). 위만정권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손자 우거右渠가 한무제에게 망할(BCE 108) 때까지 약 90년간 존속한 이 위만정권을 일본은 위만조선으로 격상시키고 이것을 조선 역사의 시작으로 정하였다. 게다가 일본은 위만조선의 위치를 요동반도가 아니라 한반도의 평양 이북으로 비정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일본보다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일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빌미를 제공한 사서가 『삼국유사』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을 인용하여,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이 세력을 규합하여 왕이 되어 왕검성에 도읍하였다”고 하고, 그 제목을 ‘위만조선’이라 붙였다. 조선 역사를 깎아내린 『사기』에서도 “위만이 왕이 되어 왕검성에 도읍하였다”라고만 한 것을 한국인 스스로 위만조선이라고 하여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일본은 위만조선이 망한 후의 한국사도 뜯어고쳤다. 우거를 멸하여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한무제가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하여 조선인을 식민 통치한 것으로 기술하였다. 위만조선에 한사군 설이 결합되면서 고대 조선은 중국인이 세운 나라로, 나아가 중국의 식민지로 왜곡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에서 해방되어 대한민국이 된 지금, 위만조선의 망령은 깨끗이 사라진 것일까? 마땅히 그러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위만조선의 망령은 한국 교과서에 여전히 살아 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거의 모든 역사 교과서가 위만을 말하고, 위만을 언급한 역사 교과서 전부가 ‘위만이 고조선 말기에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심지어 ‘위만이 집권하면서 고조선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고조선은 그 후 연의 침략으로 서쪽 지역을 잃기도 하였으나,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집권하면서 고조선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비상교육, 『중학교 역사』(상), 2010, 41쪽).
고 하여 위만을 조선인의 영웅으로까지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위만이 연나라 출신이란 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집권하였다’고 하거나 ‘유민流民 집단 중에 위만이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왔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 중에서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2009, 34쪽).
고만 한다. 조선의 한쪽 변방을 강탈한 도적이며 침략자 신채호는 위만정권을 “우리의 변강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라고 하였고,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으며,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李相龍(1858~1932)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Ë盜]”라고 하였다.
에 불과한 위만에 관한 이러한 기록은 반드시 역사 정의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조선, 단군조선
한국인의 진정한 조선은 국조인 단군왕검이 고유문화인 신교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세운 단군조선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정작 단군조선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오롯이 전하는 유일한 사서인 『환단고기』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2,096년에 걸쳐 마흔 일곱 분의 단군이 다스린 나라이다. 초대 단군왕검은 신교의 삼신三神 사상에 따라 하나의 나라 조선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라는 이 독특한 제도에 따라, 대단군이 중앙의 진한辰韓을 다스리고, 두 명의 부단군이 대단군의 통솔 아래 번한番韓과 마한馬韓을 각기 맡아 다스렸다.
단군조선은 삼한관경제의 흥망성쇠와 그 운명을 같이하였다. 초대 단군 때부터 시작된 삼한관경제는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22세 색불루단군 때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도읍지 이전과 더불어 단군조선의 삼한 체제가 삼조선 체제로 바뀌었기(BCE 1285) 때문이다. 그러다가 삼한관경제는 44세 구물단군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대단군만 가지던 병권을 부단군들도 동등하게 가지게 되어 삼조선은 독립적인 세 나라가 되었기(BCE 425) 때문이다. 이때 구물단군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로 고치고 국가 재건을 도모하였으나 그 후 2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47세 고열가단군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이 땅의 역사 교과서는 하나같이 단군조선의 건국 사실만 말할 뿐 마흔일곱 분 단군의 치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초대 단군인 단군왕검, 고조선 말기 번조선의 준왕, 그리고 준왕을 쫓아낸 위만, 이 세 사람만 고조선의 왕으로 거론된다. 광복 70년이 다 되도록 우리는 아직 빈껍데기 역사만을 가르치고 배울 따름인 것이다.
유교사관으로 쓴 국내 사서들은 한민족의 국통 맥을 삼조선 즉,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야기한다. 이것을 답습한 한국의 교과서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우리 역사의 정통 맥으로 잡고 있다. “문헌에 나타나는 고조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정치적 변화를 거친다”(국사편찬위원회, 『중학교 국사』, 2010, 19쪽). “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2009, 34쪽).
그리고 이러한 교과서를 만들고 가르치는 강단사학자들은 한국사의 계보가 단군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 기자조선에서 위만조선으로, 위만조선에서 한사군으로 이어졌다고 말하고, 그 한사군의 꼬리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를 붙여 말한다. 이것이 한국 고대사 교육의 현주소이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한국 역사는 우리의 시원역사가 거세된 반쪽짜리 역사이다. 그리고 이 그릇된 한국사를 대부분의 한국인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진실 된 것으로 믿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의 한국인은 조국의 역사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문제인가! 학문적으로 한 번 굳어지고 나면 이것이 회복되는 데 100년, 2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식민사학의 수렁에 빠져 우리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현실이니, 민족사의 혼령이 / 나라를 지키고 역사를 수호코자 목숨을 바친 수많은 혼령들이 통곡할 지경이다. 때문에 오늘날 한국사가 안고 있는 대명제는 무엇보다 먼저 왜곡된 한국사의 면모를 바로잡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민족의 역사를 새로 써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를 새로 써 비뚤어진 한국사를 바로잡는 길을 과연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 길을 찾으려면 무엇보다도 한민족의 뿌리역사와 인류의 시원역사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학, ‘제3의 역사학’이 정립되어야 한다.(추가함)
우리 역사를 되찾아 줄 유일한 사서, 『환단고기』
역사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역사를 잃으면 그 민족 고유의 정신과 민족혼이 사라지고, 종국에는 가치관이 무너져 국가와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험에 처하고 만다. 한국인의 잃어버린 역사와 사라진 민족혼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이다. 『환단고기』는 파괴된 한국사의 원형을 복구시켜 줄 유일한 역사책이다.
또한 『환단고기』는 한국의 뿌리 역사가 왜곡되면서 똑같이 역사의 근원을 잃어버린 중국과 일본의 시원 역사까지 되찾아 준다. 왜냐하면 상고 시대 동북아의 정치, 경제, 종교, 지리, 풍속, 언어, 음악, 건축, 국제 관계 등에 대한 폭넓은 기록을 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동북아 삼국이 모두 읽고 연구해야 할 소중한 역사서인 것이다.
최근 한류 문화가 중국, 일본, 동남아를 비롯하여 유럽까지 퍼져 나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한류 문화를 인기 있는 연예인들이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절단이 세계에 보여 주는 한류 문화는 김치와 막걸리, 한글, 한복, 한국 영화 정도에 머물러 있다. 먹고 입는 생활 문화, 놀고 즐기는 대중문화가 한류의 모든 것인 양 굴절되어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한류 문화의 핵심은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정신문화이다. 고대 동북아의 구심점이자 주역이었던 한국의 장구한 역사 속에 면면히 전해 온 정신문화를 드러낼 때, 우리는 진정한 한류를 개척할 수 있다. 그 정신문화의 원형인 신교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기록한 사서가 다름 아닌 『환단고기』이다.
『환단고기』는 또한 ‘신, 인간, 역사란 무엇인가,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와 같은 궁극의 진리 명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인간에 대해『환단고기』는 대한과 태일의 존재로 정의한다. 천지의 아들딸로서 우주를 가득 채운 천지광명 속에 살았던 태곳적 인간을 그린 『환단고기』 곳곳의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환단고기』는 곧 ‘환단의 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옛 조상들의 역사 이야기’인 것이다. 달리 말해서 『환단고기』는 천지 광명 속에 계신 삼신이 하늘·땅·인간 삼재와 혼연일체가 되어 연주한 우주 역사의 교향곡이다.
그러면 이제 『환단고기』는 과연 어떤 책인지, 『환단고기』 역사관의 참 면목이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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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대한사관으로 보아야 한다
『환단고기』가 담고 있는 인류 시원사와 한민족의 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대한사관大韓史觀이다.
대한사관은 온 인류를 한 뿌리에서 뻗어 나온 한 겨레로 인식하는 사관이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중국과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과 다르지 않고, 동양인이 서양인과 다르지 않다고 밝히는 인류 대통일의 사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쓴 유일한 정통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이다. 그래서 『환단고기』를 읽다 보면, ‘인류의 창세 민족인 환(대한)족이 지구에 첫 문명을 열었고 그 문명이 동서의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 세계 곳곳의 다양한 문명을 일구었음’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것은 바로 필자가 『환단고기』를 지난 30여 년 동안 암송하고 묵상하며 얻은 깨달음이다. / 묵상하며 깨친 바이다.
대한민국 강단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이들은 대개 『환단고기』가 전하는 역사의 진실을 무작정 배척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 심어놓은 중화사관이나 일본이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비뚤어진 관점에서 『환단고기』를 대하여 우리의 시원 역사를 신화로 치부하고 부정한다. 하지만 대한사관으로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해석하다 보면, 한민족 역사와 문화의 참 모습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역사에 담긴 웅장한 모습과 기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에 필자는, 지금까지 역사학을 이끌어 온 구사학과 신사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민족사와 인류사를 대한의 울타리로 묶어주는 대한사관의 보편적 시각으로 『환단고기』를 해석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리하여 『환단고기』에 대해 이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다. 『환단고기』는 동북아 한민족과 인류의 창세역사와 원형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지구촌 유일의 역사서’이자 동서양 종교의 모체로서 인류의 시원종교urreligion인 신교의 전모를 기록한 ‘종교 경전’이다. 또한 상고 시대 한민족의 나라 경영 원리와 그 구체적 내용을 기록한 ‘통치 법전’이다. 한마디로 『환단고기』는 ‘온 인류의 역사와 문화 교과서’이다.
이러한『환단고기』에서는 인류의 첫 조상인 광명의 환족이 어떻게 시원역사를 열었고 그 시원문명이 어떻게 세계 각처로 퍼져 나갔는지를 확연히 보여 주고, 환국 이후 고려에 이르기까지 무려 9천 년에 걸친 한민족의 역사 개척 과정도 한눈에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장차 ‘대한’으로 하나 된 인류가 맞이하게 될 새 세상에 대한 전망까지도 제시한다. 『환단고기』는 ‘한韓의 뿌리와 미래’를 밝힌 보배로운 역사서인 것이다.
출처 :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