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빚을 땅문서로 갚다
글 김덕호
1997년 1월 신년 교례회에서 인애가의료복지타운 부지중 약 7000평(22,606m²)를 영주시에 헌납하기로 결심했다.
명분은 영주에서 우리가문이 한의원을 60여년간 경영해오면서 영주시민의 사랑을 많이 받은데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조부와 부친이 영주시민들과 동거동락하며 애환을 오랫동안 겪어왔다.
한의원은 항상 환자들로 붐볐다.
당시는 농촌지역에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농촌에 잘 생기는 몇몇 응급질환은 잘 다루셨던 것 같다.
특히 소아 경기(驚氣, 또는 경풍), 중풍, 급체, 복통, 설사, 쇼크, 야생동식물로 인한 상해 응급처치는 잘하셨다.
당시 응급치료 받은 지인들의 얘기다.
부인과 내과는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서 자가용 차가 도로에 즐비하게 서있을 정도였다.
특히 새벽이나 밤중이라도 찾아오는 환자에게 피곤한 노구를 이끌고 성실히 진료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신뢰하고 교통수단이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찾아준 분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 같은 모습이셨고
책임감과 행복감이 얼굴에 동시에 나타나 있는 듯 했다.
60여년간을 대도시로 이주하시지 않고 오로지 영주골짜기를 지킨 것은
한편 선비정신의 올곧은 성품 때문이시기도 하다.
대도시에서 개업하면 명성도 한꺼번에 나고 수입도 좋고 자녀교육도 잘 시킬 텐데
영주시내도 아닌 면단위에서 번듯한 건물도 아니고 주택을 개조해서 경영하시는 이유를 학생시절에는 이해가 안되었다.
하지만 성장해가면서 느낀 점은 그분의 생각은 환경과 위치와 장소의 크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고 실력있는 진료에다 환부에 얼마나 따스한 약손이 되어 주느냐를 생각했던 것 같다.
달구지타고 오는 이도 있고 소타고 오는 이도 있고 12km 이상을 도보로 오는 이도 있고 등에 엎혀서 오는 이도 있었다.
침술이나 뜸술이나 습식이나 자락술을 받고 즉석에서 덜해지면 큰절을 하고
나중에 계란 몇 개, 콩 한봉지, 땅콩이나 밤 한줌을 꼭꼭 싸가지고 와서 고마움 표시를 하는 분이 많았다.
어떤 경우는 소가 병이 생겨 여물도 안먹고 설사를 한다치면 왕진 요청을 받고 소를 치료하는 수의사가 되기도 했다.
사람에게처럼 침도 놓고 약도 지어 먹이면 나았다고 고맙다고 인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뱀에 물리거나 벌에 쏘여서 오거나 악창이 나서 오면 메스로 긋고 직접 입으로 피를 빨아내는 모습은 참 인술이었다.
멀리서 오거나 형편이 어렵다고 하면 치료비를 받지도 않던가 여비를 쥐어 보냈다.
이런 소문이 나니까 번호표를 나누어 주기까지 할 정도로 진료가 밀렸다.
아침에 온 환자가 오후에 돌아가는 일이 계속되자 예약 제도도 도입했다.
불임 환자가 약을 지어 먹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백일도 안 되었는데도 데리고 와서
보이면서 기뻐서 산모가 큰 절을 하는 일은 허다했다.
시골 면단위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조부의 경험 방법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분명 찾아오는 클리닉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분주하게 보람 있게 살아간다는 것은 시민들이 한의원 이용을 많이 한다는 것이고
이에 대해 시민들에 대한 고마움을 알고 더욱 친절하고 겸손하게 맞이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들려주시곤했다.
나 또한 가업을 3대째 이어 받은 것도 시민들이 우리 가문을 믿어 주고 몸을 맡겨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1990년 조부가 몸져 누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아버지는 효자로서 조부 병 간호를 극진히 하다가 어깨 주위 인대와 힘줄이 끊어져 3차 수술까지 받았다.
두 분다 몸져누울 때까지 진료와 노인 회관에서의 복지에 온 힘을 다 하시다가
각각 1994년, 1996년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토록 환자를, 영주를, 하나님을 사랑하시다가
내게 못다한 복지관련 유지를 남기셨던 것이다.
1996년 1월 18일 아버지가 세상뜨신 뒤 한동안 묵상에 잠겼다.
두분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 대학이나 경희의료원에서 월급 생활해서는
도저히 안되었기에 이미 1992년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 교수직을 학기 시작전인 2월경 사직하고
대학에서 나와 독자적으로 개업을 해왔었다.
두분 입장에서는 내가 대학에서 명예를 갖고 더 빛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다가도
어떤 때는 나와서 개업하는게 좋겠다고 하시기도 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유언을 해놓으셨으니 미안하기도 하셔서 대학의 명예직이 더 낫기는 한데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였을 것 이다. 두분은 많은 재산으로 유산을 물려 주신 것이 아니라 복지 마인드를 남기셨던 것이다.
지난날 엄격하게 가정교육을 시키셔서 오히려 세파를 신앙으로 도전하고 이기고 자립할 수 있도록 계획하셨던 것 같다.
1996년 5월경 타운부지를 찾다가 몇 곳이 추천되었는데
그 중 계약진행 땅 소유주는 인천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오래전 예천 제16비행단 소속 영주 비행 활주로 공사차 본인이 현장 소장으로 있을 때 임야를 매입하였던 것이다.
구릉지 임야였던 이곳의 일부 흙이 활주로 공사장에 사용되어 토지정리가 저절로 이루어졌고
여러해동안 축사로 임대했던 곳이었다.
나와는 면식도 없었지만 계약 전날 소유주가 이미 다른 계약 예정자와 협상을 하는 중이었으나
원만치 않아 우리쪽 의견과 조절하게 되었다.
묵고 있는 모텔 옆방을 잡고 동태를 살핀 후 우리쪽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치밀하게 작전을 폈다.
이튿날 아침 동생 김대호와 친구 안보근이 은행 문이 열리기 전에
소유주와 마지막 단판을 짓기 위해 합석했다. 의료, 복지관련시설을 조성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람 생명을 살리는 곳을 세울려고 하니 우리에게 팔라고 졸랐다.
결국 매도자는 축사를 짓는 것보다는 병원과 복지기관을 짓는 것이 매도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보람된 일이라고 하면서 최종적으로 우리와 계약했다.
계약금을 주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보니 매도자의 부인이 권사이고
경희의료원 재직시와 송파구 오금동 당시 영생한방병원의 고객이었고
인천서 1주일에 1회씩 치료 받으러 한동안 다니셨다는 것이다.
자신은 아직 교회 안나가고 있지만 여러면에서 김박사님과 인연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 소식을 서울에서 진료하면서 전해들은 나는 참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고 생각하고 감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은 타운 대지를 준비해 달라고 1년 이상 온가족과 교우들과 신우회원들이 합심하여 기도해왔던 것이다.
중도금 건넬 때 잔금 지불 전 사전 등기 이전까지 편리를 봐 준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장수면 I.C예정 지역 주위 땅과 풍기 IC인접 땅과 봉화 통로 땅 등은 협상 중 이상하게 꼬이고
소유주들이 여러명이었기에 협상이 진행이 잘 안되었었다. 또한 분묘 숫자와 접근성, 면적, 주위경관 등 이만한 것이 없었다.
장기간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 아니라
영주시민 들에게도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조부와 아버지의 평소 기도와 매입을 위한 준비 기도가 매입 과정이 너무나 드릴 넘치게 진행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시며 하나님 중심적인 계획에는 철저히 간증 거리를 주시고
그를 오히려 들어 쓰시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이유원 회계과장, 조창현 부시장, 김진영 시장과 협의 끝에 나는
진입 도로 옆 오뚝솟은 가장 좋은 땅 7000여 평을 시민들의 보건 및 복지관련시설 조성을 위해 헌납하기로 하였다.
1997년 1월 30일 영주 시청에서 영주시 지도자들과 시민들이 모인 교례회 겸 신년 보고회에서 공식 기부 절차를 가졌다.
그동안 빚진 사랑을 조금이나마 상징적으로 우리 가문을 대표하여 헌납하는 마음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