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주제로 한 소설입니다. 이런 소설은 정말 공부를 많이 하지 않으면 어설프게 되죠. 인물의 전형성이 두드러지는 70년대 소설과도 흡사합니다. 미 제국주의와 그 당시의 국가안보에 관한 내용이 전체의 내용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중간에 들어가는 이야기들이야 인물을 묘사하기 위한 내용이구요. 어쨌든 읽어보시면 꽤 익숙한 내용임을 아실 수 있을겁니다. 별 달리 할 말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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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레 전이었다. 잠이 든 한밤중에 누군가가 점잖게 초인종을 눌렀다. 정인이 문을 따자, 낯선 남자 둘이 난폭하게 문을 열어 젖히더니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남편은 그들에게 떠밀려 집을 나갔고, 그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금방 돌아올 것 같았던 남편은 월요일이 개학날인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정인은 남편이 잡혀간 것도 또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이라 생각되어 답답하기만 했다. 나 때문이다, 그이가 나같은 것과 결혼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당신 나 때문이지요? 그러게 내 미리 말했잖아요. 더럽게 굴러다닌 것뿐만 아니라고. 내 아버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고백했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죠?
상우는 정인이 거절할 것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청혼을 해대었다. 결국, 상우는 그녀의 허락을 얻어,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정인이 상우의 집을 다녀온 그날 밤, 상우가 부모님을 뵙던 자리에서 불쑥 사라져 버린 정인의 집을 찾아왔을 때, 정인은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상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빨갱이이고,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을 잡으러 다니는 첩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갔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동생 '해인'이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하지만 상우는 그 모든 사실들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그녀와의 결혼을 추진해 나갔다.
오후, 정인은 검찰청 5층 복도를 서성이고 있다. 정인은 세 시간쯤 전에 낯선 여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자신도 구속자 가족이라고 밝힌 그 여성은 댁의 남편이 검찰로 넘어왔다는 소식이 있으니 곧 5층으로 가서 기다려 보라고 일러주었고 정인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하게 절뚝거리는 남자. 저 안경! 그녀는 황급히 그에게로 달려간다. 아아 남편! 호송원이 남편의 팔을 이끈다. 정인도 남편의 팔을 부여잡고 따라 걷는다. 남편은 정인에게 곧장 재야단체나 인권협회를 찾아가라고 당부하고는 사라졌다. 정인은 시누이와 함께 남편의 부탁대로 민가협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정인과 비슷한 처지의 가족들이 서로의 처지를 나누며 도와주고 있었다. 그 후, 남편은 두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정인은 재판장에서야 남편의 죄목을 알 수가 있었다. 남편은 노동자들에게 불경한 사상을 주입시켰다고 했다. 남편은 재판장에서 어느 누구보다 더 당당했고 이 나라의 정치현실과 노동현실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남편이 말을 마치자 재판장에는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방청객의 그 노래가 어지러운 그녀의 머리 위로 힘차게 끓어올랐다.
홍운(紅雲)의 꿈을 안고 서울행 밤열차를 탄 것은 66년 3월이었다. 정인은 부산의 온천장 생활이 지겨웠다. 생활비를 타려고 밤이나 낮이나 엄마의 일터로 죄인처럼 기웃거리는 짓도 더 이상은 하고싶지 않았다. 정인이 서울로 가겠다는 뜻을 비췄을 때, 엄마는 선뜻 응낙을 하면서 선뜻 해인이도 데리고 가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정인은 방이 구해지는 대로 해인을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먼저 밤열차를 타게 되었다. 이른 새벽 서울역에 내린 정인은 50원 짜리 방이 있다는 뚱보 아줌마를 따라 나섰다. 그곳은 판자촌으로 하숙이나 여인숙, 또는 창녀집들이었다. 뚱보 아줌마는 좋은 사람이었다. 정인이 일자리를 알아보아야 한다고 말하자, 한 소개소를 일러주었다.
처음에 정인은 흑석동의 초라한 술집에서 일하다가, 곧 명동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정인은 돈을 벌려면 여대생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어느 대학을 찾아갔다. 그 학교 배지를 구하게 되었을 때, 정인은 다니던 관광센터를 그만두고 술집을 옮겨 여대생 행세를 하였다.
정인이 교포에게 단 만원으로 몸을 팔아 버렸을 때였다. 정인은 명동바닥을 느릿느릿 헤매고 다녔고, 그곳에서 낯익은 청년을 만났다. 정인이 대학에 가서 몇 차례 도강을 했을 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 보았던 청년이었다. 정인은 그에게 아는 척을 했고 그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여관이었다. 상우가 먼저 눈을 뜨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술김에 우리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았나봐. 미안해. 나 없는 동안… 열심히 살아라."
정인은 대답도 않고 여관을 나왔다.
그해 겨울, 정인은 종로 3가에 있는 무허가 소개소를 찾아갔다. 정인은 탄광촌에서 스트립 걸로 일할 것을 자청했다. 정인은 동생만은 제대로 공부시킬 것을 결심하며 동생을 데리러 가려고 그날밤 부산행 열차를 탔다. 그런데 해인이는 그새 권번 동기가 되어 긴소리를 배우며 동기수업을 하고 있었고 정인은 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데리고 왔다. 서울로 와서 해인이와 함께 곧장 그 애 학교로 갔다. 해인이 담임은 지난 학기에 이미 해인을 제적시켜 버렸다고 말했다. 정인은 동생이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 길로 곧장 헐리우드 극장 부근의 어느 음악학원에 동생을 입학시켰고 해인에게 3개월 후면 돌아온다는 기약을 남긴 채 철암행 열차를 탔다.
3개월 후인 3월 23일, 정인은 마침내 서울행 열차를 탔다. 원주를 지날 때였다. 한 군인이 화장실에서 나와 정인의 옆으로 지나갔다. 그 군인은 다시 돌아와 그녀 앞에 우뚝 멈춰섰다.
그는 한상우였다. 청량리역에 도착하자, 상우는 정인의 뒤를 뒤쫓아왔다. 정인은 그를 외면하며 동생이 있는 하숙집으로 갔다. 정인은 동생과의 뜨거운 만남을 가졌다.
다음날 정인은 3만 원에 3천 원 짜리 달세방을 얻었다. 정인이 동생과 함께 이사짐을 꾸리고 있을 때였다. 상우가 하숙집 판자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조용히 이사짐을 옮겨 주었다. 저녁이 되자, 상우는 정인을 한적한 대포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 건배하자. 우리들의 사랑을 위해서. 내 마음의 눈은 2.0이야. 난 상대를 절대로 혼돈하지 않아. 고맙다, 정인아. 이렇게 만나서."
그날 두 사람은 결국 여관 잠을 잤다. 정인은 그에게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사랑을 느꼈다.
정인은 한솔이의 손을 잡고 외인주택 정문으로 들어선다. 6년 전 동생 해인이 갓난쟁이 리즈를 안고 귀국했을 때 진솔은 리즈가 움직이는 인형이냐고 물었다. 연립주택을 지나 고층 아파트 지대로 접어든다. 마침내 M동 11층. 정인은 초인종을 누른다. 해인이 문을 열어 준다. 파출부 아줌마가 이모 오셨다고 소리치자 안쪽 아이들 방에서 다니엘과 리즈가 뛰어나온다.
정인은 침대에 앉아 머리맡에 놓인 사진을 바라본다. 웨딩드레스와 면사포를 쓴 해인과 미군복을 정장한 페트로. 해인이 페트로를 만난 것은 부산 하야리아 부대에서라고 했다. 정인에게 얻어맞고 열 일곱에 집을 나간 해인은 소개소를 찾았고 그 소개소에서 용주골로 팔려 갔다고 했다. 해인은 술을 마시고 아무한테나 시비를 걸었다. 그때 걸린 남자가 페트로였다. 페트로는 그즈음 여자의 술주정을 귀엽게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 역시 복무 중에 본국의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한 서러운 남자였다. 그는 진대붙는 해인을 뿌리쳤고 해인은 그 건방진 남자의 따귀를 갈겼다. 둘은 볼링장 앞 잔디밭까지 나와서는 치고 받고 하다가는 나중엔 한데 엉겨 뒹굴었다. 갑자기 페트로가 해인을 저만치 떠다밀고는 혼자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왼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허공에 던졌다. 해인은 그 사내의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자신의 상처를 꾸욱 동여매듯이. 히야리아 부대에서 서산 맹길산으로 복무지를 옮기면서 페트로는 해인에게 결혼 수속을 시작하자고 했다. 거기서 다니엘을 낳았다는 소식을 엄마로부터 전해 듣고 정인이 달려갔을 때 해인은 마침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는 중이었다.
여덟 시 반. 정인은 지갑을 챙기며 가 봐야지, 하고 일어선다. 해인은 내일 모레 미국으로 떠나면 언제 다시 언니를 볼 수 있겠느냐며 정인을 붙든다. 정인은 해인과 술을 마셨다. 정인은 술이 취한다. 더 이상 마시지 말아야지. 해인은 왜 저렇게 답답한가. 내가 너무 남편의 말만 옮기고 있는가. 해인은 다시 자신에 찬 얼굴로 말한다. 미국은 부자나라고, 그래서 가난한 나라를 돕고 있다고. 정인은 깊은 절망을 느낀다.
"배운 것이 없으면 알려고 애라도……."
"뭐, 못 배워? 넌 얼마나 배웠니?"
해인이 갑자기 독오른 고양이로 변한다. 해인의 주먹이 날아온다. 해인은 정인에게 발길질을 해대었다. 마치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언니의 탓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 그때 언제 나왔는지 페트로가 거친 손길로 진솔이의 뒷덜미를 잡아 현관으로 끌고 나갔고 정인도 그들을 뒤따라 나갔다. 한밤중의 소란으로 인해 정인은 카투사에 의해 끌려 나온다.
한국의 즉결 재판소 비슷한 실내.
" 당신은 우리 미국인들 아파트에서 난동을 부렸죠?"
미국인 소령이 말했다.
" 이것보세요. 거긴 우리 땅이예요. 당신들 성역이 아니라구요. 당신은 당신 나라로 돌아가 당신들 군인이나 심판해요. 당신들이 뭔데 남에 땅에 와서 우리 국민들을 괴롭히고 간섭인가요? 여기서 꺼지라구요! 제국주의 철면피들."
통역을 하던 카투사의 눈이 화등잔만해진다. 소령이 뭐라고 소리치자 카투사가 더듬거리며 통역한다. 소령이 아이를 쏘아보며 둘 다 쫓아내라고 소리친다.
정인은 아들을 꿰차고 휭 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간다. 민가협 한 어머님의 말이 떠오른다. 주권은 싸워야만 찾을 수 있어요. 우리는 이 땅에서 미군을 몰아내야 해요. 그때 발목에서 툭 끊겨 나가는 것 같다. 해인이. 아, 그래 미군의 부인. 식민지를 용이하게 지배하기 위해 GI들에게 현지여성들과의 국제결혼을 묵인한다는 미국. 그런 그들에게 완전히 돌아선 해인. 정인은 아들에게 다짐하듯 이야기한다. 솔아, 여기는 우리 땅이란다. 그리고 이번 남편 면회엔 아들도 데려가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