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은 복권되어야 한다 [권희덕의 정읍문화 뿌리찾기]남곤의 유자광죽이기 지침서 '유자광전'의 진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남곤이 지은 유자광죽이기 지침서 '유자광전'이 있다. 조선에서 호남인물로 유자광 만큼 거대한 세력과 능력을 지닌자가 있을까. 한국음악, 특히 정읍사, 동동, 영상회상 등을 악학괘범에 수록하고 전라도 예술 및 학문 인맥의 방패막이 역할을 한 유자광의 흑백을 가려본다.
이율곡으로부터 유성룡, 최익현에 이르는 주자학파의 계보를 이은 남곤과 김세필이 중종-인조 두 번의 반정으로 대승하여 능력 있는 호남의 양명학파 유자광, 정여립 등은 영원한 역적이 되었다. 그 맥락에서 1950년대까지 전봉준 장군 또한 역적으로 교과서 교육을 받았다.
전봉준-정여립의 복권은 이루어졌으나
1958년에 전북대학교 입학시험문제에서 조심스럽게 출제된 "동학난을 논하라"라는 시험문제가 처음으로 전라도 역적의 누명을 거론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이처럼 여론이 일어 날 때에 1961년에 5.16 박정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민간 이양 후 대통령선거로 들어가면서 박정희는 돌연 역적 전봉준을 충절의 의병대장으로 격상시켜 주었다. 호남 표밭을 관리하고, 자신을 전봉준 장군의 계승자로 이미지화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1967년부터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호남유일의 서원인 칠보면 무성서원에서 유자광 인식정도를 확인하고 유신통치 자료로 철저히 알고 갔다. 덩달아 전북 도지사마저 예고 없이 자주 정읍 칠보면 무성서원을 찾았는데, 그때 서원주변 아동들의 인분이 담 밑에 발견되어 K칠보면장이 파면되는 에피소드도 생겨났다. 그 당시 칠보초-중학생들은 올 때마다 청소하기 바빴다.
거기에다 전두환이 12.12 구테타 후 광주사태를 거치며 정권을 장악한 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세우며 전봉준과 혈통이 같은 완산전씨 의병이란 이미지를 만들려 했다.
영남의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들은 호남의 표밭에 대한 지원으로 선심을 내어 저절로 복권이 된 셈이다.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민주화운동 지도자들도 다투어 동학농민군 전봉준의 계승자로 자처했다. 또한 정여립의 역적 누명은 이모 원광대 교수 등 도내학자들이 거론하고 노력하였다.
지역사람으로부터도 잊혀진 존재가 된 유자광
전통예술의 본고장 전라도, 그 호남예술의 바탕을 지킨 유일한 헌신자 유자광은 남원, 정읍 ,영광사람들에게마저도 추악한 역적으로 인식되고 매장되어 버렸다.
그러나 유자광전의 추악한 음모와 조작을 한 남곤이 누구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남곤의 유자광 죽이기 성공사례는 '김대중 죽이기'에 사용법과 너무나 같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조작은 남곤이 쓴 '유자광전'의 조작과 매우 흡사하다.
'유자광전'이라는 당내(?) 교육책자가 수백년 동안 방방곡공에서 사용됨에 따라 오지에서까지도 유자광은 최악의 역적으로 인식되게 됐다. 이는 모두 남곤의 모략 일뿐 부정한 일이 거의 없었다.
충분한 증거가 조선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남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김종직의 계통이라 하여 무조건 믿어버리는 무지 때문이었다. 남곤은 벼슬하기 위하여 조광조에게 붙었다가 중종반정의 여세로 유자광을 죽이고 또 같은 자기 정파인 조광조를 죽이기 위에서 "조씨가 임금"이라는 뜻의 '주초위왕'이란 나뭇잎 글씨를 조작하여 중종에게 보여주고 훈구파에 붙어서 자기의 모든 동료를 모반혐의를 뒤집어 씌어 죽였다.
그래서 남곤도 죽음에 임하여 자기 글이 거짓임이 사후에 알려질까 두려워 유자광전을 소각시켰다.
김대중 죽이기, 유자광 죽이기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 첫해는 쿠데타로 직후로 몹시 혼란하여 비리가 있어도 반정세력이 두려워서 말을 못했다. 호조판서 박영문이 공주목사 김정간, 민숭 등의 비리내용과 어득강이라는 산음현감이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추천의 글을 유자광에게 보내고, 유자광이 이를 상소한 사건이 유자광의 죽음의 길이 되었다. 이는 올바른 일이었다.
남이의 모반과 사육신의 음모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곤의 음모한 주초위왕은 너무나 거짓이 확실하다. 어득강은 유자광의 예술학문에 감명을 받아서인지 그의 호가 공자의 제자 자유(子遊)다. 자유는 음악도시 중국의 무성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유자광은 이 음악인의 능력을 알고 장악원장에 추천하려했고, 중종의 강한 신임을 시기한 반정공신들이 합심하여 유자광을 축출하여 죽음으로 끝난다.
반정직후 종종 1년에 불안한 시점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로 어득강을 추천하니 남곤과 대간들이 유자광 죽이기 합심하여 부추겼다. 끈질긴 대간의 농성으로 중종이 무죄라고 수없이 하교하였으나 결국은 유배되었다.
어득강은 중종20년 유자광을 밀어낸 남곤이 이문학관을 설치하고 어득강의 친족들은 도리어 어숙권을 교육시켜서 남곤의 예술파괴에 이념에 어울리고 결국은 어득강의 친족 어숙권이 불교신자 이율곡을 장원에 부적절한 급제를 시킨다.
이율곡의 후계 세력이 최근까지 반역자 남이를 충신으로 만들고, 반역을 고발한 유자광이 악인이라고 남곤의 유자광전을 이용하여 교육시켰다. 사육신들과 남이가 자기들 학통이라고 하여 "확증이 없으니 반역이 아니라"는 애매한 주자학의 논리만 기록였다. 유자광은 어득강이라는 호랑이 새끼를 기른 셈이다.
유자광의 아버지 유구의 이력, 그리고 남곤의 '유자광전'
유자광은 청백리 유규의 아들이다. 유규(柳規)의 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등 종합적인 이력을 알아보자.
1426년(세종 8)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권지훈련녹사·군기시녹사-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진주판관-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또 평양소윤-한성부소윤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사헌부장령을 지낼 때 권력층에 대한 불굴의 언사가 격하여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으로 좌천되었으나 이듬해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457년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소송을 제기한 자가 뇌물을 바치매 그를 장살(杖殺)하여 파직당하고, 남원에 돌아가서 오랫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468년(예종 즉위년) 아들 자광(子光)이 익대공신이 되자, 행첨지중추부사 자헌대부로서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늙음을 이유로 물러날 것을 요청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성품은 곧고 절도가 있으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능이 뛰어나 부임하는 고을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집안생활도 엄격하여 자식을 대할 때에도 반드시 관대를 갖추었고, 아들 자환(子煥)이 귀하게 되었어도 오히려 종아리를 때렸다. 죽음에 임해서는 자신의 상사(喪事)를 일체 주자의 《가례 家禮》에 의하도록 유언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청렴강직한 성격으로 당대의 군왕 세조에 충성을 다했으나, 세조를 악인으로 모는 이율곡 후계의 편에서 적으로 만들었다.
아래는 남곤의 '유자광전' 기록을 간추린 내용이다.
"유자광은 여종 아들로 애들을 마구 때렸다... 건춘문 갑사 따위... 경상감사 재임시 함양조씨 집에 시집간 누나에게 갔더니 마당에서 절하라고 천시했다...
유자광은 옥사가 완화될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만들기를 계획하였다. 하루는 소매 속에서 김종직의 문집을 내놓으면서 〈조의제문 吊義帝文〉을 들추어 여러 추관(推官)에게 보이고 “이것은 세조를 가리켜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만든 것이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주석을 달아 글귀마다 해석하여 연산군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이어 “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마땅히 대역부도로서 논죄하고 그가 지은 글은 세상에 전파되어서는 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 하고 건의하였다.
이때 유자광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노사신이 반대하자 불쾌한 기색으로 힐난하였다. 이후 유자광의 권세가 조정과 민간에 군림하였으며, 조정에서는 그를 독사처럼 대하여 감히 그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대간과 홍문관-예문관의 잇따른 탄핵으로 훈작을 삭탈당하고 관동으로 유배되었으며, 이어서 경상도의 변군에 옮겨졌다가 눈이 먼 뒤 두어해 만에 죽었다.
유자광이 죽은 뒤에 조정에서 그의 자손에게 장사지내기를 허락하였으나, 아들 진(軫)은 슬픔을 잊고 여색에 빠져서 끝내 가보지도 않았고, 아들 방(房) 또한 병을 칭탁하고 손님들과 함께 술마시면서 장사를 외면하였다."
여기서 유자광의 아들까지 유배시킨 자가 자식의 장례식을 문제 삼고 있다.
그리고 김일손이 사초에 쓴 악의에 찬 기록은 자기들이 만든 연산군일기에 자세하게 전한다.
세조가 며느리를 겁탈했다느니, 궁녀를 범했다느니... 세조는 김종직이 쓴 풍자소설 조의제문에서 항우가 조카를 죽여서 강물에 버린 것으로 쓴 것을 단종으로 해석하는 글로 후세에 세조를 매장시키기 위한 사초기록으로 모두가 국문에서 잘못을 시인했다는 내용은 빠져있다.
세조는 세종대왕 다음으로 업적이 많다. 유자광은 연산군시대의 주역으로 탁월한 예술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남곤의 유자광죽이기를 모르기에 호남인 마저도 김대중죽이기 선전에 넘어갔던 것이다.
다음 글에는 유자광의 김일손과 김종직 남곤에 대한 항변과 중종의 유자광 옹호발언으로
정반대의 내용을 올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