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시대 군주들은 예술과 문학을 보호하고 사회개혁 과정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고전파 음악이 발흥하던 시기는 프러
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 러시아의 카타리나 대제,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프랑스 루이 16세 등 계몽주의 성향의 군주들이
할거하던 시대였다. 이들이 내세운 인도주의,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기를 바라는 이념은 프리메이슨 운동으로 구
체화되었으며, 고전파 음악의 핵심정신으로도 반영되었다. 프리메이슨은 지금까지도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화두다. 당대에
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군주, 괴테를 비롯한 시인들, 모차르트를 비롯한 작곡가들이 가담한 세계시민주의적 단체였다. 잘
알려 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실러의 [환희의 송가] 그리고 실러의 작품을 텍스트로 사용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이
프리메이슨 혹은 18세기 인도주의 운동의 산물이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계몽주의의 전성기에 ‘개성의 해방’을 외치고 나타난 문
학적 혁신운동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 독일에서 일어났던 문학운동인 질풍모도(Strum und Drang)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
르의 슬픔]이 그 신호탄이 되었다. 질풍노도 운동은 무르익은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가는 길목에서 방점을 찍은 사례라 하겠
다.
예술의 대중화를 요구한 시민사회 - 간명한 음악의 등장
고전파 음악은 바로크 음악에 대한 변증법적인 결과물로 볼 수도 있다. 1737년경에 작성된 당시 기록에는 바흐의 대규모적 합창
음악과 엄격한 대위법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는 반응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감수성의 변화는 시대적인 흐름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자크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설파했다. 여기서 자연이란 숲이나 바다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장식을
벗은 원래 모습을 의미한다. 당시 사람들은 바흐의 대위법과 같은 바로크 음악의 복잡한 형식보다는 간명하고 명쾌한 것을 바라고
있었고, 이해하기 힘든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과 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고전주의와 ‘대중화’가 결합
하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의 대중화는 당시 급격하게 변해가던 시민사회와도 관련이 있었다. 18세기 무렵 신흥 시민계급이 대두해 각 지역에서
시민 혁명이 일어났다. 1776년 자유와 독립을 내건 미국이라는 신생국가가 탄생했고, 1789년에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상을 타고 신흥 중산계급이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올라섰고 예술과 학문
은 대중화의 단계로 들어선다. 작가와 예술가의 작품을 소비할 수 있는 대규모 시장이 만들어졌고, 철학과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상아탑의 성곽을 높이 쌓아올리기 보다는 평범한 일반대중을 의식하게 되었다. 대중을 위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바야흐로 문화
가 널리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음악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귀족 후원자의 손길이 점차 멀어지면서 청중의 성격
이 귀족에서 현대적 의미의 일반 서민들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한 음악’을 쓰던 작곡가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의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