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 4년(1404)에 제작된 모포줄은 당시 장기현감이 현몽(顯夢)하기를 뇌성산(磊城山)에서 장군이 용마(龍馬)를 타고 내려와 장군수(將軍水)를 마시고 난 후 만인(萬人)이 이 곳을 밟아야 좋다고 말한 후에 사라졌다고 한다. 이 날이 2월 16일 이었는데, 이에 현감은 「줄」을 제작하게 한 후 격년제로 8월 16일에 남 · 북으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게 되었는데, 북으로는 구룡포 · 대보, 남으로는 양남 · 양북주민들로 구성되었다. 이 줄은 모포리(牟浦里)의 수호신으로 신성시 하고 있으며, 구 영일군의 일월문화제 행사시 강남과 강북으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였으며 포항시 영일군이 통합된 뒤 제1회 영일만 축제 행사에서 모포줄다리기가 다시 재현되었다. 칡넝쿨과 구피껍질로 제작된 이 줄은 둘게 150cm, 길이 58m이며 한 쌍으로 된 국내 최고(最古)의 줄이다.
오어사 동종은 1995. 11. 16 오어지 상류준설 작업중 굴삭기 기사 이욱형(李旭炯:1960. 5. 8생, 포항시 남구 송도동 거주)씨에 의해 발견되었다. 오어사 동종은 신라 동종(銅鐘)의 주양식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성연대가 분명하고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한 고려 동종(高麗 銅鐘)으로서 양주(陽鑄)된 각종 장식문양과 더불어 주성(鑄成)이 우수한 작품이다.
즉 종(鐘) 정상에 신라종(新羅鐘)의 특징인 각통(角筒)을 등지고 있는 용두(龍頭)가 갖추어져 있고 종신(鐘身)은 편상(扁上)에 연화변(蓮華辨)을 일렬로 세워 돌린 입상화대(立狀華帶)가 있고 그 아래에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된 편대(扁帶)가 돌려 있으며 종신하록(鐘身下綠)에도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한 구록대(口綠帶)를 돌렸다.
또 편대(扁帶) 아래쪽에 붙혀서 4개소에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된 유곽(乳廓)이 있고 유곽내구(乳廓內區)에 연화(蓮花)를 세주(細鑄)한 돌기(突起)된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그리고 종신(鐘身)의 남은 공간에는 전후(前後)에 연화문(連花文)으로 양주(陽鑄)한 당좌(撞座)를 배치하였고, 당좌(撞座) 위에는 육자(六字)로된 범자문(梵字文)이 양주(陽鑄)되어 있으며 또 양 당좌(撞座)사이의 남은 공간에는 운상(雲上)의 비천상(飛天像)을 세명(細明)하게 양주(陽鑄)하였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과 당좌(撞座)사이에 각도로 새긴 조성명문(造成銘文)이 있다.
■ 교통안내 [일반버스] 시내에서 오천행 102번 시내버스 이용(12분 간격으로 운행), 오천 구종점에서 하차 후, 오어사행 버스 탑승 (1일 4회 10:00~18:00) [좌석버스] 300번 (12분 간격으로 운행)
■ 주차대수 : 50대
■ 찾아가는 길 * 경주-포항간 7번 국도(산업외곽도로·준고속도로)를 타고 포항에서 신형산교를 건너 구룡포 방면 31번 국도를 이용한다. 신형산교 앞 6거리로부터 3.9km 지점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가 3.6km지점에서 우회전하여 6.5km만 가면 오어사 입구 주차장이다.
* 오어사 입구 주차장에서 오어사까지는 1.1km를 더 가야 하지만 원칙적으로 차량 통행은 금지된다. 설령, 차량 출입이 허용되더라도 노폭이 좁아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난처해지므로 호반을 산책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
보경사 서운암 동종은 높이 54.3cm, 반지름43.0cm이며, 지금까지 알려진 시인비구가 주성한 종 가운데 조성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비록 종의 규모는 작지만 시인비구의 초기 종 연구에 사료적인 가치가 있다.
둥근 고리모양의 종뉴를 갖추었으며, 立上席에 이어 마련된 상대를 비롯, 미모꼴 유곽과 하대가 잘 남아있다. 상대는 인화보상화문을 정교하게 동을 새김하였으며, 하대는 다소 간략한 형태의 당초문을 장식하였다.
입상대는 모두 40개의 세운 연꽃잎모양으로 각 잎마다 인물상을 안치하였으며, 유곽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9개의 유두대신 5개의 유두를 설치하였다. 유곽사이의 각 여백에도 보살상이나 위패모양이 아닌 '八字大命王眞言'을 배치함으로써 다른 종들과는 달리 '진언'을 문양화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邑內里)에 자리한 장기읍성(邑城)은 이 고장의 진산(鎭山)인 동악산(東岳山)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그 구릉(丘陵)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縣內)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일제(日帝)의 잔혹함은 이 읍성(邑城)에도 밀려 들어와서 성(城)안의 모든 관아(官衙)등 시설이 파괴되고 단지 향교(鄕校)만이 이 고장 주민들에 의해 복원 유지되고 있을 뿐, 잡초에 묻힌 성벽(城壁)은 허물어진 곳이 대부분이다. 이 읍성(邑城)은 일찍부터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 읍성(邑城)들과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이 그 특성이라 하겠다. 동해안의 중요 진성(鎭城)을 들면 울산(蔚山)의 처용암(處容岩)지방, 울주군 강동면(蔚州郡 江東面) 정자리지방, 양남면(陽南面)의 수념(水念)지방, 감포(甘浦),이곳 장기·포항·영일지방, 흥해 칠포지방들인데 이들 지역은 해안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펼쳐져 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서라벌(慶州)을 침공하는 왜구(倭寇)를 방어한 군사기지였고, 고려(高麗), 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같은 역할을 다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하는 것은 이들 지역과 경주(慶州)사이에는 산성(山城)들이 있는데 가령 관문성(關門城) 속칭 만리성은 울산·울주·양남(蔚山 · 蔚州 ·陽南)지역, 양북면(陽北面)의 팔조리산성(八助里山城)은 감포(甘浦)지방, 시령(枾嶺:감재) 산성(山城)은 장기지방, 북형산성(北兄山城)은 포항·흥해지방의 후방방어(後方防禦)의 군사거점이였다고 할 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본다.
더우기 시령산성(枾嶺山城)은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경주시 양북면(陽北面)의 경계지점인데 경주에서 옛길을 따르면 감포길을 가다가 추령(楸嶺:관해동재)에서 부처재(佛嶺)를 거쳐 기림사(祇林寺)계곡을 건너면 감재에 이른다. 이곳에 산성이 있고 장기와의 거리는 불과 5∼6km 밖에 되지 않는 직행길로 80∼90里 정도이다. 이 길은 경주에서 동북방향으로 포항과 감포의 중간지점이 된다. 이러한 지리적인 형국(形局)은 장기지방이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장기는 역대에 걸쳐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곳 장기의 신라시대 행정구역은 양주 의창군(良州 義昌郡)에 속한 지답현(只沓縣)이었다. 양주는 원래 삽량으로 지금의 양산(梁山)이고 그 관할구역은 낙동강 하류지방과 동해 남부지방이다. 의창군은 본래 퇴화군(退火郡)인데 경덕왕대(景德王代)에 의창(義昌)이라 개명(改名)되고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흥해군이라 하였다. 의창군(義昌郡)은 여섯 현(縣)으로 이루어지고 그 관할 지역은 지금의 포항시에 안강읍(安康邑)지방이 포함된 것이다. 육현중(六縣中)의 지답현(只沓縣)은 경덕왕대(景德王代)에 기립현으로 개명(改名)되고 고려조에는 장기현으로 불리웠다. 현종(顯宗) 2년(1011)에는 동해안(東海岸)의 청하(淸河), 흥해(興海), 영일(迎日), 울주(蔚州) 등과 같이 성(城)을 쌓았고 경주부 속현(慶州付 屬顯)으로 공양왕대(恭讓王代)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이 때의 축성(築城)은 북방의 계원(契圓)세력과 왜구(倭寇)에 대비한 것으로 장기읍성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 태종(朝鮮 太宗) 15年(1415)에 장기읍성의 지리적 중요성에 따라 수령(守令:현감(顯監)의 위계(位階)를 사품이상9四品以上)으로 높여 무신(武臣)으로 고관(高官)을 임명(任命)하여 지현사(知縣事)라 하였다가 세조(世祖) 5年(1460)에는 독진(獨鎭)으로 되었다가 동왕(同王) 12年(1467)에 독진(獨鎭)으로 파하였다. 뒤에 현감(顯監)으로 고치고 그 밑에 훈도9訓導)를 두었다. 축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1. 단종(端宗) 2년(145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는 성(城)의 둘레가 174보(步)이고 성안 에 우물 두 곳이 있다. 2. 예종(睿宗) 1년(1469)에 지은 경상도속선지리지(慶尙道續選地理誌)에는 세종 21년(1439)에 돌로 쌓고 둘레 가 3,664尺이고 높이는 12尺이며 샘(泉)이 두 곳이고 못(池) 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고, 군 창(軍倉)도 있다. 3. 중종(中宗) 25년(1530)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석축(石築)을 하고 둘레가 2,980尺이고 높이는 10尺으로 우물이 네곳이고 못이 두 곳이다. 4. 구읍성이 현의 남쪽 2里에 있으며 돌로 쌓아 그 둘레가 468尺이고 높이는 12尺이고 샘이 두 곳 있다 . 이상의 네 가지 기록에서 성의 규모를 보면 모두 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같은 위치의 성(城)을 여러대에 걸쳐 중축(重築)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성(城)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4의 구읍성(舊邑城)은 뚜렷이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분명히 고려시대(高麗時代)이전의 고성(古城)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조선조말기(朝鮮朝末期)인 고종(高宗) 23년(1895)에는 장기군으로 바뀌고 감포, 양남, 양북면(甘浦,陽南,陽北面)을 흡수하고 군수, 좌수(郡守,座首)와 별감(別監) 2人의 관원(官員)을 두었다. 이때의 읍성(邑城)의 군병(軍兵:병력(兵力))은 훈련도감포수(訓練覩監砲手)74人, 어영정군9御營正軍) 26人등 총 2,889人이었고, 이에 걸맞는 장비도 보인다. 특히 수군(水軍) 420人이 있는 것을 보아 수륙군9水陸軍)을 군수9郡守)가 지휘(指揮)하였다. 이후 일제하(日帝下)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감포읍, 양남면, 양북면(甘浦邑,陽南面,陽北面)이 경주군(慶州郡)에 귀속되고 창주면(滄州面)과 서면(西面)을 합하여 봉산면(峯山面)으로 개명(改名)되고 현내면(顯內面)을 장기면으로 고쳐 영일군(迎日郡)에 편입 되었다가 1934년에는 일제에 의해 봉산면(奉山面)과 장기면을 합하여 지행면(只杏面)으로 바뀌어 면(面)으로 격하(格下)되고 치소(治所)도 성 아랫마을인 하성(下城)마을로 옮겨졌으며, 1990년 12월 1일자로 지행면(只杏面)이 장기면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읍성(邑城)은 쇠퇴하여 잡초가 우거진 고성지(古城址)로 허물어진 성벽(城壁)만 잠자고 있다.
한편 이 곳은 벽지로 인정되어 귀양지로도 되었으니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과 실학파(實學派)의 태두(泰斗)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세워져 이 고장은 글을 읽는 마을이 되었으며, 이 고장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특성이 있는 곳이 아니고 오로지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 군사기지로 그 역할을 다 하였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포항은 신라시대부터 경주를 끼고 있는 해변 지역으로 왜적의 습격을 수시로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군사적인 요새였다.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육군과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곳엔 순 도감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영일군 무기고에는 弓이 143장 궁가가 43조, 궁현이 144조, 長箭(장전: 화살) 309矢등이 소장되어 있고 흥해에 주둔한 상비군과 함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武人들이 예부터 많이 살고 있었다. 이와 같이 흥해는 무인 도시로서 주변에 있는 권무정에서 무술을 익혔는데 김동학씨의 조부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전통제작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전통의 제작은 어디까지나 직업에 의한 제작이 아니고 무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활동을 취미에 의하여 직접 제작한데서부터 발달되어 후대에 까지 이어져서 현재는 김동학씨가 이것을 본업으로 하고 있다. 본래 김동학씨는 부친 밑에서 전통제작하는 것을 눈에 익혔지만, 그러나 부친은 김동학씨로 하여금 절대로 화살통이나 화살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6·25가 진고 17세 무렵 김동학씨는 뚜렷한 직업도 없고 학교도 다니지 못해서 아버지의 일을 틈틈이 배워서 화살통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김동학씨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남달리 특출하여 아버지가 만드는 일을 거들어 주었으며 그때 대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화살등의 고리를 조각하는 기법등을 틈틈이 익혔다. 그러나 부친은 철저하게 기술을 배우지 못하게 하였으나 몰래 한두 개 씩 만들어 주변의 활 사정터에 가지고 가서 팔기 시작하였다.
김동학씨가 본격적으로 활통을 제작하기 시작한 때는 1958년경 부산에서 고학으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돌아온 후부터였다.
김동학씨가 처음 화살통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은 1960년경에 전국에 활쏘는 운동이 일어나 화살통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고, 또한 아버지가 고령으로 일을 못하게 되자 가업인 화살통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경상북도 예천읍에 있는 권영록영감님에게 찾아갔다. 물론 아버지의 소개를 받아 찾아갔다. 당시 권영록씨는 경상도 내륙지방의 활과 화살을 사정마다 다 대주고 있어 화살통 역시 잘 소개하여 당시는 만드는 일이 바빠져서 생업에 지장이 없었다.
1970년부터 김씨는 전국을 다니면서 화살통을 주문받아 그런대로 작업을 하였으나 화살통이 워낙에 섬세한 세공이고 사치스러운 조각과 장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별로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의욕이 없어지고 또 화살통은 소비성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 사면 평생을 사용할 수 있어 가업이 점점 쇠퇴하여 졌다. 그러나 김동학씨는 그 직업을 버리지 않고 꾸준히 계속하고 있어 현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전통장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궁시제작은 그 역사가 매우 깊어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발달해 오기 시작하였다. 활에는 세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활 그 자체이고 둘째는 화살이며 세째는 화살을 넣어가지고 다닌는 통개이다. 활로 무기를 사용했을 때에는 이 통개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신무기인 총포의 화약의 발전으로 활이 무기에서 그 기능을 잃게되자 화살통을 만들었던 사람은 모두 직업을 바꾸고 사라진지 오래지만 운동용으로 아직도 전국에 사정이 남아 있어 이곳에서 소요되는 전통제작은 남아있다. 김동학씨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김동학씨의 전통제작 기술은 조선조말 각 사정 주변에서 있었던 전통적인 기법에 의하여 기교가 전승되고 있다. 왜냐하면 본래 그의 증조부는 활을 잘 쏘는 무인출신으로서 사정 주변에서 활을 만들어 쏘고 또 화살통을 손수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것이 가업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둘째 김동학씨의 전통제작기술은 일가를 이루는 전통 가업으로서 문양이나 조각 장식에 있어서 붓으로 직접 문양을 그리고 각도를 사용하여 자유자재로 하기 때문에 기교가 능란하고 속기가 없다.
셋째로 그의 각도는 각법이 원활하고 정교하며 칼 움직임이 매우 빨라 기술이 이미 신묘해졌다.
넷째 김동학씨의 전통제작은 일반생활에 관계되지 않는 특수분야이기 때문에 그것을 업으로 생활이 어려워 전업을 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있기 때문에 조선조의 공전에 통개장의 전통을 이어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모감주나무는 무환자과에 속하고 일명 염주나무로 불리워지며, 세계적인 희귀종으로 충남 안면도와 강원도 일부 해변에 몇 그루씩 자생하고 있으며, 여름철에 황금빛꽃을 감상할 수 있다. 세모꼴의 초롱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루비빛으로 물드는 단풍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도심지의 가로변이나 공원녹지대 조경수로 적합하며, 동해면 발산리 주변에 해안과 접한 임지로 약 30도 경사진 곳에 서북방향으로 자생하고 있다.
큰 나무의 높이가 15m, 수목 4m, 둘레 1.2m가 되고, 수령이 80∼100년 정도되는 것도 있으며, 생육지는 해안과 접하고 있는 접하고 있는 마을권 내의 임지로 분포상태는 산록부에서 20∼30m내에 팽나무, 느티나무, 귀똥나무, 떡갈나무 등 활잡목과 함께 생립하고 있는 낙엽 활엽교목이고,잎은 달걀모양이다.
모감주나무는 암바위 토심이 얕은 사양토 위에 자생하며, 단일 임지의 집단으로 자생하는 것은 드문 예이나 이곳은 동일 지번내에 약 300여본이 다른 잡목과 섞여 생장하고 있다.
■ 병아리 꽃나무 황해도 이남에서 자라는 낙엽관목(落葉灌木)으로서 높이가 2m에 달하고 가지에 털이 없다. 잎은 대생(對生)하며 난형 또는 긴 난형(卵形)이고 점첨두(漸尖頭) 원저(圓底)이며 길이 4∼8cm, 나비 2∼4cm로서 복예치(複銳齒)가 있고 표면은 짙은 녹색이며 주름이 많고 뒷면은 연한 녹색이며 견모(絹毛)가 있다. 엽병(葉柄)은 길이 3∼5mm이고 탁엽(托葉)은 가늘며 일찍 떨어진다
꽃은 5월에 피고 지름 3∼5cm로서 새가지 끝에 1개씩 달리며 꽃받침은 편평하다. 꽃받침열편은 4개로서 좁은 난형이고 톱니가 있으며 4개의 작은 부과편(副萬片)과 대생(對生)하고 꽃잎은 4개로서 백색이며 거의 원형(圓形)이다. 수술은 많고 짧으며 심피(心皮)는 4개이고 꽃받침열편 내부에서 성숙하여 흑색(黑色)윤채(潤彩)가 있는 타원형(楕圓形)의 견과(堅果)로 된다. 열매는 길이 8mm정도로서 9월에 익으며 관상용(觀賞用)으로 심을 만하다. 해안에 인접한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발산리의 모감주나무?#48337;아리꽃나무 군락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모감주나무 군락지 중 크기와 면적, 개체수가 가장 크고 많은 곳이며, 병아리꽃나무와 함께 생태적?#54617;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한여름에 피는 노란꽃은 황금빛으로 장관을 이루고 서양에서는 「황금비」를 뿌리는 나무로도 불린다. 열매는 세모꼴의 초롱같은 모양으로 10월에 익고 둥글고 검은색 윤기가 나는 단단한 종자가 3개 들어있다. 이 열매는 염주로도 사용한다.
하층식생으로 자라고 있는 병아리꽃은 봄에 피는 하얀 꽃이 색상이나 모양은 화려하지 않으나, 4장의 꽃잎이 둥글게 핀 모습이 은은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준다. 순백의 하얀꽃은 병아리에 비유해 붙여진 예쁜이름이다.
포항 달전리의 주상절리는 5각형 내지 6각형의 감람석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돌기둥이 여러개가 이어져 높이 20m, 폭 약 100m 규모의 암벽을 이루고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냉각되는 도중 수축작용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으로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제주도 기념물 제50호), 울릉도 등지에 일부 분포하고 있다.
포항 달전리의 주상절리는 그 형성시기가 신생대 제3기(약200만년전)로서 국내 다른 지역의 주상절리의 형성시기가 신생대 제4기(약30만년전)인 점을 고려할 때 특이성이 있으며, 또한 약 20m 수직방향으로 연장되어 있는 돌기둥의 모습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규모이다.
가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앞면은 12행 152자, 뒷면 7행 59자, 윗면 5행 20자로 총 231자
가 새겨져 있다. 신라 지증왕 4년(50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현존 최고의 신라비로
신라초기 율령체제를 알 수 있게 하며,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 신라비(524년)와 더불어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현존 비각건립은 1993년 6월 착공하여 8월
에 완공하였다.)
종별
중요민속자료
명칭
장기모포줄
지정번호
중요민속자료 제 187호
지정일시
1984-04-17
소재지
포항시 남구 장기면 모포리
시 대
조선 태종 4년(1404)에 제작된 모포줄은 당시 장기현감이 현몽(顯夢)하기를 뇌성산(磊城山)에서 장군이 용마(龍馬)를 타고 내려와 장군수(將軍水)를 마시고 난 후 만인(萬人)이 이 곳을 밟아야 좋다고 말한 후에 사라졌다고 한다. 이 날이 2월 16일 이었는데, 이에 현감은 「줄」을 제작하게 한 후 격년제로 8월 16일에 남 · 북으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게 되었는데, 북으로는 구룡포 · 대보, 남으로는 양남 · 양북주민들로 구성되었다. 이 줄은 모포리(牟浦里)의 수호신으로 신성시 하고 있으며, 구 영일군의 일월문화제 행사시 강남과 강북으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였으며 포항시 영일군이 통합된 뒤 제1회 영일만 축제 행사에서 모포줄다리기가 다시 재현되었다. 칡넝쿨과 구피껍질로 제작된 이 줄은 둘게 150cm, 길이 58m이며 한 쌍으로 된 국내 최고(最古)의 줄이다.
오어사 동종은 1995. 11. 16 오어지 상류준설 작업중 굴삭기 기사 이욱형(李旭炯:1960. 5. 8생, 포항시 남구 송도동 거주)씨에 의해 발견되었다. 오어사 동종은 신라 동종(銅鐘)의 주양식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성연대가 분명하고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한 고려 동종(高麗 銅鐘)으로서 양주(陽鑄)된 각종 장식문양과 더불어 주성(鑄成)이 우수한 작품이다.
즉 종(鐘) 정상에 신라종(新羅鐘)의 특징인 각통(角筒)을 등지고 있는 용두(龍頭)가 갖추어져 있고 종신(鐘身)은 편상(扁上)에 연화변(蓮華辨)을 일렬로 세워 돌린 입상화대(立狀華帶)가 있고 그 아래에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된 편대(扁帶)가 돌려 있으며 종신하록(鐘身下綠)에도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한 구록대(口綠帶)를 돌렸다.
또 편대(扁帶) 아래쪽에 붙혀서 4개소에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된 유곽(乳廓)이 있고 유곽내구(乳廓內區)에 연화(蓮花)를 세주(細鑄)한 돌기(突起)된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그리고 종신(鐘身)의 남은 공간에는 전후(前後)에 연화문(連花文)으로 양주(陽鑄)한 당좌(撞座)를 배치하였고, 당좌(撞座) 위에는 육자(六字)로된 범자문(梵字文)이 양주(陽鑄)되어 있으며 또 양 당좌(撞座)사이의 남은 공간에는 운상(雲上)의 비천상(飛天像)을 세명(細明)하게 양주(陽鑄)하였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과 당좌(撞座)사이에 각도로 새긴 조성명문(造成銘文)이 있다.
■ 교통안내 [일반버스] 시내에서 오천행 102번 시내버스 이용(12분 간격으로 운행), 오천 구종점에서 하차 후, 오어사행 버스 탑승 (1일 4회 10:00~18:00) [좌석버스] 300번 (12분 간격으로 운행)
■ 주차대수 : 50대
■ 찾아가는 길 * 경주-포항간 7번 국도(산업외곽도로·준고속도로)를 타고 포항에서 신형산교를 건너 구룡포 방면 31번 국도를 이용한다. 신형산교 앞 6거리로부터 3.9km 지점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가 3.6km지점에서 우회전하여 6.5km만 가면 오어사 입구 주차장이다.
* 오어사 입구 주차장에서 오어사까지는 1.1km를 더 가야 하지만 원칙적으로 차량 통행은 금지된다. 설령, 차량 출입이 허용되더라도 노폭이 좁아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난처해지므로 호반을 산책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
보경사 서운암 동종은 높이 54.3cm, 반지름43.0cm이며, 지금까지 알려진 시인비구가 주성한 종 가운데 조성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비록 종의 규모는 작지만 시인비구의 초기 종 연구에 사료적인 가치가 있다.
둥근 고리모양의 종뉴를 갖추었으며, 立上席에 이어 마련된 상대를 비롯, 미모꼴 유곽과 하대가 잘 남아있다. 상대는 인화보상화문을 정교하게 동을 새김하였으며, 하대는 다소 간략한 형태의 당초문을 장식하였다.
입상대는 모두 40개의 세운 연꽃잎모양으로 각 잎마다 인물상을 안치하였으며, 유곽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9개의 유두대신 5개의 유두를 설치하였다. 유곽사이의 각 여백에도 보살상이나 위패모양이 아닌 '八字大命王眞言'을 배치함으로써 다른 종들과는 달리 '진언'을 문양화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邑內里)에 자리한 장기읍성(邑城)은 이 고장의 진산(鎭山)인 동악산(東岳山)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그 구릉(丘陵)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縣內)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일제(日帝)의 잔혹함은 이 읍성(邑城)에도 밀려 들어와서 성(城)안의 모든 관아(官衙)등 시설이 파괴되고 단지 향교(鄕校)만이 이 고장 주민들에 의해 복원 유지되고 있을 뿐, 잡초에 묻힌 성벽(城壁)은 허물어진 곳이 대부분이다. 이 읍성(邑城)은 일찍부터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 읍성(邑城)들과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이 그 특성이라 하겠다. 동해안의 중요 진성(鎭城)을 들면 울산(蔚山)의 처용암(處容岩)지방, 울주군 강동면(蔚州郡 江東面) 정자리지방, 양남면(陽南面)의 수념(水念)지방, 감포(甘浦),이곳 장기·포항·영일지방, 흥해 칠포지방들인데 이들 지역은 해안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펼쳐져 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서라벌(慶州)을 침공하는 왜구(倭寇)를 방어한 군사기지였고, 고려(高麗), 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같은 역할을 다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하는 것은 이들 지역과 경주(慶州)사이에는 산성(山城)들이 있는데 가령 관문성(關門城) 속칭 만리성은 울산·울주·양남(蔚山 · 蔚州 ·陽南)지역, 양북면(陽北面)의 팔조리산성(八助里山城)은 감포(甘浦)지방, 시령(枾嶺:감재) 산성(山城)은 장기지방, 북형산성(北兄山城)은 포항·흥해지방의 후방방어(後方防禦)의 군사거점이였다고 할 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본다.
더우기 시령산성(枾嶺山城)은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경주시 양북면(陽北面)의 경계지점인데 경주에서 옛길을 따르면 감포길을 가다가 추령(楸嶺:관해동재)에서 부처재(佛嶺)를 거쳐 기림사(祇林寺)계곡을 건너면 감재에 이른다. 이곳에 산성이 있고 장기와의 거리는 불과 5∼6km 밖에 되지 않는 직행길로 80∼90里 정도이다. 이 길은 경주에서 동북방향으로 포항과 감포의 중간지점이 된다. 이러한 지리적인 형국(形局)은 장기지방이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장기는 역대에 걸쳐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곳 장기의 신라시대 행정구역은 양주 의창군(良州 義昌郡)에 속한 지답현(只沓縣)이었다. 양주는 원래 삽량으로 지금의 양산(梁山)이고 그 관할구역은 낙동강 하류지방과 동해 남부지방이다. 의창군은 본래 퇴화군(退火郡)인데 경덕왕대(景德王代)에 의창(義昌)이라 개명(改名)되고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흥해군이라 하였다. 의창군(義昌郡)은 여섯 현(縣)으로 이루어지고 그 관할 지역은 지금의 포항시에 안강읍(安康邑)지방이 포함된 것이다. 육현중(六縣中)의 지답현(只沓縣)은 경덕왕대(景德王代)에 기립현으로 개명(改名)되고 고려조에는 장기현으로 불리웠다. 현종(顯宗) 2년(1011)에는 동해안(東海岸)의 청하(淸河), 흥해(興海), 영일(迎日), 울주(蔚州) 등과 같이 성(城)을 쌓았고 경주부 속현(慶州付 屬顯)으로 공양왕대(恭讓王代)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이 때의 축성(築城)은 북방의 계원(契圓)세력과 왜구(倭寇)에 대비한 것으로 장기읍성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 태종(朝鮮 太宗) 15年(1415)에 장기읍성의 지리적 중요성에 따라 수령(守令:현감(顯監)의 위계(位階)를 사품이상9四品以上)으로 높여 무신(武臣)으로 고관(高官)을 임명(任命)하여 지현사(知縣事)라 하였다가 세조(世祖) 5年(1460)에는 독진(獨鎭)으로 되었다가 동왕(同王) 12年(1467)에 독진(獨鎭)으로 파하였다. 뒤에 현감(顯監)으로 고치고 그 밑에 훈도9訓導)를 두었다. 축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1. 단종(端宗) 2년(145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는 성(城)의 둘레가 174보(步)이고 성안 에 우물 두 곳이 있다. 2. 예종(睿宗) 1년(1469)에 지은 경상도속선지리지(慶尙道續選地理誌)에는 세종 21년(1439)에 돌로 쌓고 둘레 가 3,664尺이고 높이는 12尺이며 샘(泉)이 두 곳이고 못(池) 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고, 군 창(軍倉)도 있다. 3. 중종(中宗) 25년(1530)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석축(石築)을 하고 둘레가 2,980尺이고 높이는 10尺으로 우물이 네곳이고 못이 두 곳이다. 4. 구읍성이 현의 남쪽 2里에 있으며 돌로 쌓아 그 둘레가 468尺이고 높이는 12尺이고 샘이 두 곳 있다 . 이상의 네 가지 기록에서 성의 규모를 보면 모두 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같은 위치의 성(城)을 여러대에 걸쳐 중축(重築)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성(城)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4의 구읍성(舊邑城)은 뚜렷이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분명히 고려시대(高麗時代)이전의 고성(古城)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조선조말기(朝鮮朝末期)인 고종(高宗) 23년(1895)에는 장기군으로 바뀌고 감포, 양남, 양북면(甘浦,陽南,陽北面)을 흡수하고 군수, 좌수(郡守,座首)와 별감(別監) 2人의 관원(官員)을 두었다. 이때의 읍성(邑城)의 군병(軍兵:병력(兵力))은 훈련도감포수(訓練覩監砲手)74人, 어영정군9御營正軍) 26人등 총 2,889人이었고, 이에 걸맞는 장비도 보인다. 특히 수군(水軍) 420人이 있는 것을 보아 수륙군9水陸軍)을 군수9郡守)가 지휘(指揮)하였다. 이후 일제하(日帝下)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감포읍, 양남면, 양북면(甘浦邑,陽南面,陽北面)이 경주군(慶州郡)에 귀속되고 창주면(滄州面)과 서면(西面)을 합하여 봉산면(峯山面)으로 개명(改名)되고 현내면(顯內面)을 장기면으로 고쳐 영일군(迎日郡)에 편입 되었다가 1934년에는 일제에 의해 봉산면(奉山面)과 장기면을 합하여 지행면(只杏面)으로 바뀌어 면(面)으로 격하(格下)되고 치소(治所)도 성 아랫마을인 하성(下城)마을로 옮겨졌으며, 1990년 12월 1일자로 지행면(只杏面)이 장기면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읍성(邑城)은 쇠퇴하여 잡초가 우거진 고성지(古城址)로 허물어진 성벽(城壁)만 잠자고 있다.
한편 이 곳은 벽지로 인정되어 귀양지로도 되었으니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과 실학파(實學派)의 태두(泰斗)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세워져 이 고장은 글을 읽는 마을이 되었으며, 이 고장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특성이 있는 곳이 아니고 오로지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 군사기지로 그 역할을 다 하였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포항은 신라시대부터 경주를 끼고 있는 해변 지역으로 왜적의 습격을 수시로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군사적인 요새였다.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육군과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곳엔 순 도감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영일군 무기고에는 弓이 143장 궁가가 43조, 궁현이 144조, 長箭(장전: 화살) 309矢등이 소장되어 있고 흥해에 주둔한 상비군과 함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武人들이 예부터 많이 살고 있었다. 이와 같이 흥해는 무인 도시로서 주변에 있는 권무정에서 무술을 익혔는데 김동학씨의 조부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전통제작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전통의 제작은 어디까지나 직업에 의한 제작이 아니고 무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활동을 취미에 의하여 직접 제작한데서부터 발달되어 후대에 까지 이어져서 현재는 김동학씨가 이것을 본업으로 하고 있다. 본래 김동학씨는 부친 밑에서 전통제작하는 것을 눈에 익혔지만, 그러나 부친은 김동학씨로 하여금 절대로 화살통이나 화살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6·25가 진고 17세 무렵 김동학씨는 뚜렷한 직업도 없고 학교도 다니지 못해서 아버지의 일을 틈틈이 배워서 화살통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김동학씨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남달리 특출하여 아버지가 만드는 일을 거들어 주었으며 그때 대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화살등의 고리를 조각하는 기법등을 틈틈이 익혔다. 그러나 부친은 철저하게 기술을 배우지 못하게 하였으나 몰래 한두 개 씩 만들어 주변의 활 사정터에 가지고 가서 팔기 시작하였다.
김동학씨가 본격적으로 활통을 제작하기 시작한 때는 1958년경 부산에서 고학으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돌아온 후부터였다.
김동학씨가 처음 화살통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은 1960년경에 전국에 활쏘는 운동이 일어나 화살통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고, 또한 아버지가 고령으로 일을 못하게 되자 가업인 화살통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경상북도 예천읍에 있는 권영록영감님에게 찾아갔다. 물론 아버지의 소개를 받아 찾아갔다. 당시 권영록씨는 경상도 내륙지방의 활과 화살을 사정마다 다 대주고 있어 화살통 역시 잘 소개하여 당시는 만드는 일이 바빠져서 생업에 지장이 없었다.
1970년부터 김씨는 전국을 다니면서 화살통을 주문받아 그런대로 작업을 하였으나 화살통이 워낙에 섬세한 세공이고 사치스러운 조각과 장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별로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의욕이 없어지고 또 화살통은 소비성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 사면 평생을 사용할 수 있어 가업이 점점 쇠퇴하여 졌다. 그러나 김동학씨는 그 직업을 버리지 않고 꾸준히 계속하고 있어 현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전통장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궁시제작은 그 역사가 매우 깊어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발달해 오기 시작하였다. 활에는 세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활 그 자체이고 둘째는 화살이며 세째는 화살을 넣어가지고 다닌는 통개이다. 활로 무기를 사용했을 때에는 이 통개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신무기인 총포의 화약의 발전으로 활이 무기에서 그 기능을 잃게되자 화살통을 만들었던 사람은 모두 직업을 바꾸고 사라진지 오래지만 운동용으로 아직도 전국에 사정이 남아 있어 이곳에서 소요되는 전통제작은 남아있다. 김동학씨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김동학씨의 전통제작 기술은 조선조말 각 사정 주변에서 있었던 전통적인 기법에 의하여 기교가 전승되고 있다. 왜냐하면 본래 그의 증조부는 활을 잘 쏘는 무인출신으로서 사정 주변에서 활을 만들어 쏘고 또 화살통을 손수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것이 가업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둘째 김동학씨의 전통제작기술은 일가를 이루는 전통 가업으로서 문양이나 조각 장식에 있어서 붓으로 직접 문양을 그리고 각도를 사용하여 자유자재로 하기 때문에 기교가 능란하고 속기가 없다.
셋째로 그의 각도는 각법이 원활하고 정교하며 칼 움직임이 매우 빨라 기술이 이미 신묘해졌다.
넷째 김동학씨의 전통제작은 일반생활에 관계되지 않는 특수분야이기 때문에 그것을 업으로 생활이 어려워 전업을 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있기 때문에 조선조의 공전에 통개장의 전통을 이어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모감주나무는 무환자과에 속하고 일명 염주나무로 불리워지며, 세계적인 희귀종으로 충남 안면도와 강원도 일부 해변에 몇 그루씩 자생하고 있으며, 여름철에 황금빛꽃을 감상할 수 있다. 세모꼴의 초롱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루비빛으로 물드는 단풍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도심지의 가로변이나 공원녹지대 조경수로 적합하며, 동해면 발산리 주변에 해안과 접한 임지로 약 30도 경사진 곳에 서북방향으로 자생하고 있다.
큰 나무의 높이가 15m, 수목 4m, 둘레 1.2m가 되고, 수령이 80∼100년 정도되는 것도 있으며, 생육지는 해안과 접하고 있는 접하고 있는 마을권 내의 임지로 분포상태는 산록부에서 20∼30m내에 팽나무, 느티나무, 귀똥나무, 떡갈나무 등 활잡목과 함께 생립하고 있는 낙엽 활엽교목이고,잎은 달걀모양이다.
모감주나무는 암바위 토심이 얕은 사양토 위에 자생하며, 단일 임지의 집단으로 자생하는 것은 드문 예이나 이곳은 동일 지번내에 약 300여본이 다른 잡목과 섞여 생장하고 있다.
■ 병아리 꽃나무 황해도 이남에서 자라는 낙엽관목(落葉灌木)으로서 높이가 2m에 달하고 가지에 털이 없다. 잎은 대생(對生)하며 난형 또는 긴 난형(卵形)이고 점첨두(漸尖頭) 원저(圓底)이며 길이 4∼8cm, 나비 2∼4cm로서 복예치(複銳齒)가 있고 표면은 짙은 녹색이며 주름이 많고 뒷면은 연한 녹색이며 견모(絹毛)가 있다. 엽병(葉柄)은 길이 3∼5mm이고 탁엽(托葉)은 가늘며 일찍 떨어진다
꽃은 5월에 피고 지름 3∼5cm로서 새가지 끝에 1개씩 달리며 꽃받침은 편평하다. 꽃받침열편은 4개로서 좁은 난형이고 톱니가 있으며 4개의 작은 부과편(副萬片)과 대생(對生)하고 꽃잎은 4개로서 백색이며 거의 원형(圓形)이다. 수술은 많고 짧으며 심피(心皮)는 4개이고 꽃받침열편 내부에서 성숙하여 흑색(黑色)윤채(潤彩)가 있는 타원형(楕圓形)의 견과(堅果)로 된다. 열매는 길이 8mm정도로서 9월에 익으며 관상용(觀賞用)으로 심을 만하다. 해안에 인접한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발산리의 모감주나무?#48337;아리꽃나무 군락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모감주나무 군락지 중 크기와 면적, 개체수가 가장 크고 많은 곳이며, 병아리꽃나무와 함께 생태적?#54617;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한여름에 피는 노란꽃은 황금빛으로 장관을 이루고 서양에서는 「황금비」를 뿌리는 나무로도 불린다. 열매는 세모꼴의 초롱같은 모양으로 10월에 익고 둥글고 검은색 윤기가 나는 단단한 종자가 3개 들어있다. 이 열매는 염주로도 사용한다.
하층식생으로 자라고 있는 병아리꽃은 봄에 피는 하얀 꽃이 색상이나 모양은 화려하지 않으나, 4장의 꽃잎이 둥글게 핀 모습이 은은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준다. 순백의 하얀꽃은 병아리에 비유해 붙여진 예쁜이름이다.
포항 달전리의 주상절리는 5각형 내지 6각형의 감람석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돌기둥이 여러개가 이어져 높이 20m, 폭 약 100m 규모의 암벽을 이루고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냉각되는 도중 수축작용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으로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제주도 기념물 제50호), 울릉도 등지에 일부 분포하고 있다.
포항 달전리의 주상절리는 그 형성시기가 신생대 제3기(약200만년전)로서 국내 다른 지역의 주상절리의 형성시기가 신생대 제4기(약30만년전)인 점을 고려할 때 특이성이 있으며, 또한 약 20m 수직방향으로 연장되어 있는 돌기둥의 모습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규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