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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 논문은 고구려연구회 Site에서 스크랩하였음을 알려드림..
구리시 고구려 유적의 지역문화 활성화 방안
서길수
Ⅰ. 머리말
Ⅱ. 구리시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적과 유물
Ⅲ. 고구려 유적의 지역문화 특성화 방안과 그 의의
Ⅳ. 맺는말
Ⅰ. 머리말
경주에 가면 신라문화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고, 부여와 공주에 가면 백제문화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뿐만이 아니다. 매년 각지에서 열리는 문화축전이나 전시회에서는 각기 신라와 백제시대의 유물이나 전통문화가 재현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박물관도 없고 고구려 문화를 주제로 되살리는 행사도 거의 없다. 우리가 삼국시대라고 하면서 실제로 두 나라의 전통과 문화만 이어받고 한 나라는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고구려는 만주와 북한', 그리고 '남한은 신라와 백제'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앞으로 통일을 앞두고 남북이 편을 가르는 대표적인 잣대가 될 것이고, 중국과의 영토 문제에서도 매우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고구려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복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구리시 아차산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적과 문화를 복원하고 그것을 일반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 우선 구리시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개관하고 이러한 유적을 어떻게 지방문화로 특성화할 것인가 하는 방법과 문제점을 짚어보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특성화가 가져다 주는 의의를 정리하였다.
Ⅱ. 구리시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적과 유물
1. 구리시의 고구려 유적
가. 1994년 아차산 종합학술조사
1) 조사 경위
아차산 일대의 유적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1916년부터였다. 그 뒤 신.구석기, 청동기, 삼국시대의 유적들이 부분적으로 조사되고 그 결과가 고고학계에 계속 보고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보고서를 보면 아차산 주변의 유적들은 대부분 백제나 신라 유적으로 추정해 왔다.
아차산 일대에서 고구려 유적이 처음 확인된 것은 1994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이 아차산에 대한 종합적인 학술조사를 하면서부터이다.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이 아차산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6년 구리시가 남양주군으로부터 독립되고, 1991년 구리문화원이 설립된 이후, 시민들 사이에 구리의 뿌리를 아차산에서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부터이다. 그 무렵 몇 해 전부터 아차산에 관심을 갖고 답사도 하며 관련 문헌 연구를 해 온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이 구리문화원에 참여하면서부터 아차산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차산에 대한 학술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94년 구리시 예산에 아차산 종합학술 조사비가 책정되면서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당시 상황으로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학술조사는 대부분 문화재관리국이나 대학박물관 같은 학술기관이 주도하였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인 시 단위에서 관청과 문화원이 향토 문화유산을 올바르게 조사.보존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학술조사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2) 조사 결과
이 조사에서 아차산 능선 작은 봉우리들을 중심으로 많은 고구려 보루들이 한꺼번에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보루들은 대부분 산봉우리에 있기 때문에 구리시, 성동구, 중랑구와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 많았다. 이 유적들은 대부분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때로는 전투에 참여하는 군사들이 주거하고 있는 산성들인데 그 규모가 둘레 200m 이하이기 때문에 보루(堡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들 고구려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기존의 백제나 신라토기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의 토기이다. 이러한 고구려 토기의 특징적인 속성은 우선 표면색이 흑색, 흑회색, 명갈색, 황갈색 또는 회백색 등의 부드러운 색조를 띠고 있으며, 바탕흙은 아주 고운 진흙으로 되어 있고 안쪽에는 붉은 빛을 띠는 직경 2∼3㎜ 크기의 독특한 보강재가 첨가되어 있다. 표면은 물손질을 하거나 갈아서 매우 매끄러운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토기는 문양이 없으며 부분적으로 어깨부분이나 몸통부에 한두 줄의 바느실무늬(針線紋)를 돌리고 있다. 고구려 토기의 기형에는 대표적인 것이 廣口長頸四耳甕(아가리가 넓고, 목이 길고, 손잡이가 넷인 독)이라고 불리는 대형 항아리가 있고 장동호, 동이, 시루, 접시, 병 등 매우 다양하지만 지표조사에서는 장동호와 동, 접시, 토기 뚜껑 등이 채집되었다. 이 지표조사에서 수집된 고구려 토기는 8개 기종 19개채 뿐이었다.
<표 3> 1994년 발견된 고구려 유적
심광주 등,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 구리문화원 학술총서(1), 1994
나. 1997∼1998년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1997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 유적 발굴을 의뢰해 1997년 9월 22일부터 11월 5일까지 1차 발굴조사를 하였다. 1차 발굴조사 결과 예상외로 많은 유구가 복잡한 상황을 이루고 출토되는 관계로 유적의 북쪽 구역에 대해서만 조사를 실시하고 남쪽 구역에 대해서는 1998년에 2차 조사를 실시하였다.
아차산 제4보루 성벽은 타원형으로 둘레 210m, 높이 4m 쯤 되며, 보루 안에는 모두 7기의 건물이 축조되어 있었다. 건물터 안에는 1기 이상의 온돌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규모가 가장 큰 3호 건물터는 광장을 포함하여 3칸의 온돌방과 2기의 집수시설 및 배수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밖에 3호 건물터 서북모서리 바깥에 간이 대장간 시설 1기도 설치되어 있었다.
다. 시루봉 보루(구리시 교문 1동) 발굴
시루봉은 서울과 구리시를 나누는 경계에서 능선을 따라 구리시 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 위에 있다. 1999년과 2000년, 2년간 서울대 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시루봉 보루는 둘레 220m 남짓 돌로 성벽을 쌓았고, 그 안에 성벽과 평행하게 대형 건물을 지었다. 남동쪽 성벽에는 성두(城頭, 치)를 설치하여 방어력과 공격력을 높였다. 현재 남서쪽에 13단 높이 1.7m쯤 되는 성벽이 남아있다. 온돌은 총 6기가 조사되었는데 비교적 양호한 것을 보면 모두 직선형의 평면형태이며 아궁이는 온돌의 장축방향과 수직이다.
라. 2000년 구리시 지역 지표조사
1999년 11월 20일부터 1년간 구리시 전역의 문화유적과 역사.민속에 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때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매장문화재를 포함한 국가지정문화재 및 시도지정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 때 고구려 유적으로 확인된 것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4>에 나타난 고구려 보루 9개 가운데서 두 개는 이미 서울대에서 발굴하였고, 나머지 7개는 1994년 지표조사와 이미 구리시지에 나왔던 것을 정리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표 4> 구리시 지역의 고구려 보루(2000년)
자료 : 서울대학교 박물관.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구리문화원,
{구리시의 역사와 문화-지표조사보고서-}, 2000. 12. 74∼91쪽에서 뽑아 작성함
2. 구리시에서 발굴된 유물
가. 아차산 제4보루(1997, 1998)에서 발굴된 유물
아차산 제4보루에서는 모두 26개 기종 538개체 분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류는 주로 온돌유구 주변에서 많이 출토되어 실생활과 관계를 잘 보여준다. 기능상으로 저장용, 운반용, 조리용, 배식용(配食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형 옹기(甕器)류와 직구(直口) 옹기류는 저장용이라고 분석되며, 양이부(兩耳附)장동(長胴) 옹기류는 운반용으로 분석된다. 동이류와 광구호(廣口壺)류 및 이부호(耳附壺)류는 조리 준비용으로 추정되고, 완( , 주발)류 및 종지(盞)류, 반(盤, 소반)류, 구절판(九折坂)류, 접시류 등은 배식용기로 추정된다. 구성비를 보면 옹기류가 109점으로 20.3%를 차지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장동호(長胴壺), 호(壺), 접시가 각각 10%를 넘는다.
아차산 제4보루에서 출토된 철기류는 총 319점으로 무기류, 마구류, 농공구류, 용기류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 가운데 무기류가 모두 80개체, 197점으로 전체 철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9,38%로 가장 높은데 이것은 이 유적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한 보루이기 때문이다. 주로 칼(대도), 창고달( ), 도끼, 쇠살촉 같은 것들이다. 발걸이( 子), 재갈( ), 재갈멈치(鏡板) 같은 마구들이 나왔고, 수레에 쓰인 굴통(車軸頭)도 한 점 나왔다. 쇠로 만든 농공기구로는 도끼(有 鐵斧)가 23점으로 가장 많고, 호미(鋤)가 17점으로 다음을 차지한다. 쇠스랑(5점), 망치, 손칼(刀子), 삽날, 정( )끌(鑿), 보습(犁) 같은 농공기구들이 출토되었다.
나. 시루봉보루 발굴조사에서 발굴된 유물
유물이 약 300여점 출토되었는데 토기는 대형 옹과 호, 동이 접시, 장호, 완 직구호 뚜껑등이며 철기는 화살촉과 철모, U자형 삽날 등이다.
유물은 주로 토기류인데 유적의 훼손 상태가 심해 대부분 깨진 채로 수습되었다. 토기는 고구려 토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바탕흙은 고운 진흙으로 되어 있고, 표면색은 황갈색이나 흑색을 띠고 있으며, 소성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나 표면은 만지면 손에 묻어날 정도로 연질이다. 출토된 토기의 기종은 큰 옹기와 호(壺), 시루, 접시, 완( ), 장동호(長胴壺) 같은 것들인데 모두 납작바닥(平底器)이다.
철기는 100점 남짓 출토되었는데 무기와 공구로 나눌 수 있다. 무기로는 화살촉과 철모, 창고달 같은 것이 있는데 화살촉은 모두 가늘고 길다. 공구로는 정과 도끼, 삽날 같은 것이 나왔다. 토기와 철기는 아차산 제4보루에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중심연대는 대략 6세기 중엽으로 본다.
Ⅲ. 고구려 유적의 지역문화 특성화 방안
1. 구리시와 고구려 문화 특성화
구리시에는 청동기 때의 유적부터 현대까지 많은 문화유적이 존재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면 동구릉과 고구려 유적이다.
동구릉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능침지로 조선시대 왕과 왕비 17위의 유택을 모신 왕릉군이다. 동구릉에 조성된 9릉은 1대 태조, 14대 선조, 18대 현종, 21대 영조, 24대 헌종 같은 조선시대 왕릉이 있어 문화적 가치가 대단히 큰 것이다. 현재 구리시의 문화자원으로서 동구릉의 위치는 확고한 것이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구리시 문화로 특성화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표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조 27대 왕릉은 서울, 경기, 충청 등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여주시, 수원시 같은 여러 시에서 비슷한 축제들을 열고 있는 형편이다. 특성화란 그 문화가 아직 다른 지방에서 특성화가 되지 않았고, 구리시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추진할 수 있는 문화여야 하기 때문이다.
[구리시는 조선시대의 역사를 일견할 수 있는 동구릉을 보유하고 있으나 고구려 중심도시란 컨셉 소구시 이 능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문제 제기도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문화를 특성화한다고 해서 동구릉의 문화적 가치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 문화와 잘 연계시켜 관광동선을 짠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문화재는 서로 대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표 5> 조선조 27대 왕릉의 현황
한편 고구려 문화를 특화하기 위해 바탕을 삼고 있는 구리시의 고구려 유적은 그 질과 양에서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발굴한 어떤 고구려 유적보다 큰 성과였다. 구리시에서 발굴된 유물의 역사적 가치는 서울대 박물관이 실시한 특별전 {고구려 - 한강 유역의 고구려 요새 -}에서 증명되었다. 전시회에서 전시한 유물은 아차산 제4보루와 시루봉 보루 등 구리시 지역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전시는 학계와 일반의 깊은 관심아래 지방 순회전시로 이어져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1994년 아차산 지표조사를 할 때부터 조사를 담당한 학자들은 이 지역의 유적과 유물의 보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대책을 건의하였다. 1994년 조사단은 '아차산 유적을 중심으로 한 박물관의 건립은 특색 있는 지역 박물관으로서 또한 국민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될 것이며 아울러 문화재 보호를 위한 귀감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제안했고, 2000년 아차산 제4보루 발굴단은 '유적 아래 쪽(예들 들면 동사골)에 유적 기념관을 건립하고, 출토유물 및 유적 모형을 복원.전시하여 인근의 아차산성 및 백제 유적과 연결되는 관광코스를 개발한다'는 정비.복원에 대한 제언을 하였다.
이와 같은 학계의 요청과 구리시의 의지가 반영되어 최근 구리시의 향토문화진흥계획에 '구리시 고구려 문화타운'과 '고구려 테마파크'를 포함시켰다. 계획을 구체화 해 추진해 가는 것은 관계된 전문가들이 있기 때문에 필자는 {구리비젼 21}에서 제기한 문제점을 검토하고, 고구려 문화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어떤 내용들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주제만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고구려 유적의 지역문화 특성화 방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 문화 타운이나 테마 파크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들을 제시하여 보기로 하겠다. 사실 여기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주제들은 대부분 북한과 남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관련된 자료를 입수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에 있는 현장은 수시로 가 볼 수 있고, 최근 북한의 유적도 상당수 남한 학자들이 다녀오고 있어 복원을 위한 자료들이 축적되어 있다.
가. 고구려 성벽(현재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
1) 고구려 타운 입구에 고구려식 성문과 서벽을 쌓아 벽을 만든다.
* 지금까지 고구려 성벽을 복원한 곳
(1) 평양 대성산성 소문봉 성벽
(2) 중국 심양 석대자산성 남벽
2) 성벽은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고구려 갖추도록 한다.
(1) 성문 - 복원된 대성산성 남문 참조
(2) 옹성 - 문의 방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문을 2중으로 하는 것
(3) 적대 - 문 양쪽을 앞으로 내쌓아 양쪽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
(4) 수구문 - 계곡에 흐르는 물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한 문
(5) 장대 - 장수가 올라 성 안팎을 바라보며 지휘하던 곳
(6) 치(또는 치성) - 성에 다가오는 적을 앞면과 좌우에서 공격하기 위해 밖으 로 불쑥 내밀어 쌓은 성벽의 시설
(7) 암문 - 유사시 사용하기 위해 작은 문으로 적에게 잘 뜨이지 않도록 설치 한다.
(8) 성가퀴 - 성벽 위에 몸을 감추고 활을 쏠 수 있도록 올려 쌓은 곳
(9) 기둥구덩이 - 성가퀴 안에 쌓아 만든 구덩이로 용도는 학설이 다양하다.
(10) 내성(아성) - 산꼭대기에 장수가 기거하는 성
나. 고구려박물관
1층에서 고구려 전반적인 역사를 사이버로 재현
2층에 전시장 - 아차산성 및 국내외에서 나온 유물(복제품)
3층에 박물관 사무실 및 고구려 연구단체
다. 광개토태왕비, 중원고구려비 재현
1) 광개토태왕비
있는 곳 :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대비가
세운 해 : 414년(고구려 장수왕)
높이 : 6.39m
너비 : 1.34∼1.97m(밑부분)
2) 중원고구려비
있는 곳 : 충북 충주시
세운 해 : 고구려 장수왕 때
높이 : 2.03m
너비 : 0.55m
라. 고구려 국내성 재현(성문, 성벽, 궁성, 성내 생활모습)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을 되살린다. 일제시대 조사한 국내성 기록이 있어 성벽은 복원이 가능하다. 그러나 궁궐의 규모나 형태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가 되지 않아 복원이 불가능하다. 가능하면 조사를 마친 평양의 안학궁을 복원한다. 성안 또는 성밖에 들어갈 수 있는 시설로 정능사가 있다. 고구려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불교가 들어와 흥성했다. 정능사는 이미 북한에서 복원했기 때문에 복원이 가능하다.
1. 안악궁
규모 : 622×620m
건물지 : 25개소
2. 정능사
규모 : 132×223m
건물지 : 집터 18채, 회랑터 10개
3. 거리모습
벽화를 통해서 재현한다.
마. 고구려인의 사후세계 - 고구려 무덤떼
1. 적석총 - 상고성자, 태왕능, 장수왕릉(장군총),
1) 돌무지무덤 - 돌을 모아 쌓아올린 무덤(상고성자)
2) 돌각담무덤 - 주위에 네모난 각담을 쌓고 그 안에 돌을 쌓고 위에 널방
(태왕릉)
3) 돌각담계단무덤 - 계단식으로 돌감담을 쌓은 것(장수왕릉)
2. 벽화무덤 - 춤무덤, 다섯무덤 4호, 덕흥리무덤, 안악3호무덤
1) 국내성 지역 벽화무덤
춤무덤(무용총) - 초기 벽화무덤(석회 바르고 그린 그림)
다섯무덤 4호 - 후기 벽화무덤(돌 위에 직접 그린 그림)
2) 평양지역 벽화무덤
덕흥리무덤
안악3호무덤
끝으로 '장기적으로 남북교류의 활성화 및 통일 등 주변 여건 변화에 따라 구리시와 고구려의 연계성이 퇴색될 가능성이 있고, 고구려를 활용한 수익성이 있는 테마파크시설 개발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고구려라는 소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고구려 705년 동안 평양이 수도였던 것은 241년이고 만주지역에서 통치했던 기간이 464년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이 된다고 해서 중국 요령성의 환인(첫 수도)과 길림성 집안(두 번째 수도)을 비롯하여 요동지방에 산재한 많은 고구려 유적을 쉽게 접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다 현지의 문화재들은 대부분 입장이 통제되고 더구나 벽화 같은 문화재는 현장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모든 문화재를 한 군데 재현하는 것은 전체적인 문화를 한꺼번에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고구려 타운이나 테마파크는 통일이 되어도 그 가치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현재 청주에 서있는 중원고구려비보다 고구려 타운에 서있는 모조 중원고구려비를 수 십배, 아니 수 백배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3. 고구려 문화의 특성화에 따른 문제점과 극복안
구리시에서 고구려 문화를 특성화하기 위해 시 구역 안에서 발굴된 유물만 가지고 전시관이나 박물관을 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박물관 자체 운영도 어렵지만 새로운 유물을 계속 구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방재정을 축내지 않고 운영이 되어야 하며, 더불어 지방재정에 도움이 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 보탬이 되는 계획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타운이나 테마파크 같은 계획이 추진되는 것으로 안다.
{구리비젼21}에서는 이러한 개발계획을 추진하는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들고 있는데 그에 대한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문제점으로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구리시가 고구려와 역사적인 관련성은 있으나 고구려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고구려라는 주제의 의미가 퇴색될 가능성이 크다.
2) 고구려 역사.문화를 강조한 테마파크 조성 시 시설도입에 한계를 가져올 수 있다.
- 구리시가 고구려 문화의 중심지가 아닌 관계로 문화재 발굴에 한계가 있으며, 복원하여 테마파크의 매력을 높일 수 있는 소재도 제한적이다.
- 조선시대 후기의 문화특징을 살린 전통가옥과 기타 시설물을 복원한 민속촌 등의 경우와는 여건이 다르다.
3) 고구려를 소재로 한 테마파크 건립 시 실제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매력물 개발에 장해 요인이 될 수 있다. 관광객의 욕구는 점차 다원화 되어가고 있고 다원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시설의 공급은 수익성 확보의 기본 요건이다. 하지만 고구려라는 주제 하에 다원적 시설의 공급은 한계가 예상된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고구려 역사와 문화를 조금만 깊이 연구하면 바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 우선 구리시와 고구려 문화의 연관성이 약하는 지적이다. 그러나 구리시는 남한의 고구려 유적 가운데는 한 가운데 서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남방 경영에 있어서 아차산이 차지한 역사적 가치는 대단히 컸다. 앞에서 보았지만 아차산은 고구려 남진에서 발생한 커다란 사건 가운데 세 가지 사건의 마당이었다.
영락 6년(丙申, 396년) : 광개토태왕이 직접 이끈 고구려 군이 지금의 한강인 아리수를 건너 백제의 왕도를 치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다. 이 때 백제의 왕도는 바로 한강 건너이고, 광개토태왕은 바로 아차성에 진을 쳤던 것이다. 장수왕 63년(475) 장수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수도인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蓋鹵王)을 잡아 처단한 곳도 바로 아단성(阿旦城), 즉 지금의 아차산이다. 고구려 영양왕 원년(590) 신라에게 잃어버린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찾기 위해 온달 장군이 출정하였다 전사한 곳도 바로 아단성(阿旦城), 즉 아차성이다. 남한에서 이처럼 고구려와 깊은 역사적 관계를 갖는 곳은 아주 드물다.
2) 고구려 문화의 중심지가 아닌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집안이나 평양처럼 고구려의 유적이 많은 곳에는 집약적인 테마파크를 만들 수 없다. 광개토태왕비가 서 있는 곳에 다시 광개토태왕비를 만들어 세우고, 평양에다 평양성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곳은 일체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최고의 길이다. 고구려 문화타운이나 테마파크는 오히려 그런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빛을 발휘한다. 그리고 오리지널의 깊이와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해 현장보다 훨씬 가깝게 고구려 문화를 만날 수 있게 할 수 있다.
3) 발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소재도 제한적이라는 것은 고구려 문화의 테마를 구리시에서 발굴한 유물만 가지고 보려는 데서 오는 단견이다. 우리가 [온달전]을 상영한다고 할 때 그 온달전에는 온달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평강공주, 왕과 왕후, 온달의 어머니, 시장 상인, 농민 등 온달과 관계되는 모든 인물이 나오듯, 고구려 문화타운에 구리시에서 발굴된 것만 나와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전시관 하나로 충분하다.
고구려를 주제로 하는 문화타운에는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고구려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가 모여 있어야 한다. 그렇게 범위를 넓힌다면 고구려 705년의 문화는 결코 소재가 빈곤하지 않을 것이다.
4) 고구려는 시대가 오래 되어 조선 후기의 문화처럼 복원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물론 1500년 전의 문화를 100∼200년 전의 문화처럼 복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문화의 복원은 신라나 백제, 심지어는 고려 때의 문화보다도 복원이 쉽고 소재도 다양하다. 그것은 100기가 넘는 고구려 고분 벽화가 있기 때문이다. 사료에 나온 기록들이 오늘날의 메스컴에서 신문에 해당한다면, 벽화는 텔레비전 영상이다. 고구려 벽화는 세계 어떤 벽화보다도 당시의 생활상을 총 천연색으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복원을 위한 텍스트로 손색이 없다.
3. 고구려 문화 특성화의 의의
1) 민족사 복원
우리는 흔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다시 통일한 영토를 따져보면 그 넓은 만주와 대동강 이북의 땅을 모두 당나라에 내주어야 하는 우리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기도 했다. 다행히 고구려 후예들이 당나라를 몰아내고 발해를 세우므로 해서 당나라는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고 '남쪽은 신라, 북쪽은 발해'라는 남북국시대가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 땅을 중국이 차지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것은 우리 민족사를 연구하지 않고 중국의 사서를 그대로 뱄긴 당연한 결과였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 승전국인 신라 위주의 역사 서술도 한몫을 했다.
이러한 고구려.발해사에 대한 복원 작업은 그 동안 여러 가지 국내외 사정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해방 뒤 남북으로 갈린 뒤 고구려 옛 땅이 주로 북한에 들어간 뒤 남한에서는 고구려사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북쪽에서는 고구려사와 발해사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어 학문적으로 지역성을 강하게 띠므로 해서 통일 뒤 양쪽의 역사인식 차이를 극복하는 일이 큰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근년에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어 현장 접근이 가능하고 북한에 있는 고구려 유적도 일부 공개되어 고구려사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이 일반화되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 타운이나 테마파크는 이러한 역사복원의 결과를 모든 국민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며, 고구려사는 우리의 역사라는 것을 나라 안팎으로 보여주는 우리의 강력한 표현이 될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고구려사가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고구려가 한국사'라는 것을 동의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고구려의 문화를 재현하고 생활 속에서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민족사 교육의 현장
고구려의 첫 수도는 어디인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는 어디인가?
고구려 수도가 평양이라는 것은 알아도 대부분 그 이전 수도가 지금 어디인지는 잘 모른다. 그만큼 고구려사는 우리에게 낯설다. 더구나 고구려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문화적 우수성은 접해 보지 못했다. 고구려 첫 수도와 두 번째 수도는 중국에 있고, 세 번째 수도는 가 볼 수 없는 북한 땅에 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고구려 유적을 한 군데 모아 놓으면, 바로 여기가 고구려사 교육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흔히 '한국인은 size complex가 있다'고 한다. '한국은 작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역사를 우리는 고구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는 스케일이 크기 때문이다. '고구려' 하면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보유했던 나라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현재 중국 땅에서 가장 큰 비석인 광개토태왕비, 한 변의 길이가 85m나 되는 천추릉, 둘레가 14㎞나 되는 봉황산성 같은 대형 고구려 문화와 당시의 생활상을 섬세하게 그려놓은 벽화를 일부라도 접해 본다는 것은 우리 문화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국내외 관광객 유치
흔히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진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서울에 온 외국 관광객들은 조선시대의 역사만 보고, 그것을 우리 역사의 전부로 알고 돌아간다. 또한 서울은 현대적 건물만 있지 옛날 역사를 맛 볼 수 있는 멋이 없다는 것이 외국 관광객들의 인상이다. 외국 관광객들은 현대적 건물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몇몇 고궁을 제외하고는 서울과 그 주변에는 볼만한 것이 없다는 혹평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관광자원이 부족한 수도권에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구려를 테마로 한 새로운 명물이 들어선다면 반드시 외국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 것으로 본다.
국내에서도 경주와 부여로만 가던 수학여행을 고구려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을 택하게 될 것이고, 더구나 2000만 인구의 수도권 자체가 무한한 수요처가 될 것이다.
4) 구리시민의 문화적 자긍심과 정신적 구심점이 되고, 시민의 문화공간과 휴식 공간이 될 것이다.
구리시가 구리면(九里面)이었던 1963년, 구리면의 인구는 10,595명이었다. 그 뒤 구리의 인구 성장추이를 5년 단위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65년 - 11,559명
1970년 - 28,069명
1975년 - 45,364명
1980년 - 66,541명
1985년 - 84,015명
1990년 - 109,418명
1995년 - 142,742명
1999년 - 166,751명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리 인구는 1963년 1만 명 남짓 되던 인구가 40년도 안 되는 사이에 15.7배가 늘었다. 이와 같은 급격한 인구증가는 출산 때문에 생기는 자연적 증가가 아니고 대부분 사회적 증가가 그 원인이다. 1965년부터 75년까지 10년 사이에 인구가 4배로 증가한 것은 경제개발을 계기로 농촌인구가 도시로 몰려든 것이 원인이고, 80년대 이후 인구가 다시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택지개발에 따른 서울 인구의 역류 때문이다.
이런 인구 증가 추세를 볼 때 원래 구리면에서 살던 토박이들은 자연적 증가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그 숫자가 대단히 미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현재 구리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대부분 다른 데서 옮겨온 사람들이고 그만큼 구리시에 대한 애착심이 적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연령별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령별 인구를 보면 0세부터 30대(39살까지)까지가 무려 69.9%이고 40대까지는 84.5%나 된다. 대부분 새로 이사 온 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몸에 벤 전통이나 문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에게 구리시민으로서 문화적 자긍심과 정신적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강력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강하고 국내에서 유일한 '고구려 문화'라는 이미지는 그런 면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파리 에펠탑', '동경 디즈니렌드', '용인 민속촌'처럼 그 지방의 특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듯 '구리 고구려타운'이란 이미지 창출이 가능해지면 모든 시민들이 '나는 고구려타운이 있는 구리시에서 산다'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며 온 시민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구심점과 대명사가 될 것이다.
한편 구리시는 40%쯤이 임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시민들이 휴식할 수 있는 시민공원이 조성되지 못했다. 고구려 타운이 완성되면 자녀들의 교육장은 물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도 훌륭한 몫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리시민을 위해서는 입장료의 대폭적인 할인 같은 우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
Ⅴ. 맺는말
이상에서 '구리시 고구려 역사유적의 지역문화 특성화 방안'을 몇 가지 측면에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왔다.
1. 첫 번째는 구리시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갖는 가치와 위치 문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남한 내 고구려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고구려 문화를 특화하기 위해 바탕을 삼고 있는 구리시의 고구려 유적은 그 질과 양에서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발굴한 어떤 고구려 유적보다 큰 성과였다. 구리시에서 발굴된 유물의 역사적 가치는 서울대 박물관이 실시한 특별전 {고구려 - 한강 유역의 고구려 요새 -}에서 증명되었다. 전시회에서 전시한 유물은 아차산 제4보루와 시루봉보루 등 구리시 지역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전시는 학계와 일반의 깊은 관심아래 지방 순회전시로 이어져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 남한은 물론 북한까지 합쳐 가장 많은 토기가 출토된 구리시가 고구려 문화를 특성화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 두 번째, 구리시에서 고구려 문화를 특성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다.
고구려 문화를 특성화하기 위해서는 시에서 발굴된 유물만 가지고 전시관이나 박물관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시에서는 [고구려 문화타운]과 [고구려 테마파크]라는 계획안을 {구리 비젼 21}(2001년)에 발표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그 기본 안에서 제기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고, 한 걸음 나아가 문화타운이나 테마파크에 재현할 수 있는 고구려의 유적들을 간추려 제시하므로 해서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3. 끝으로 이처럼 고구려 타운을 만드는 것이 어떤 의의가 있는지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 민족사 복원
구리시에서 고구려 문화를 복원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렸던 민족사를 복원하고 그것을 일반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남한에서는 신라와 백제사 연구, 북한에서는 고구려 발해사 연구를 중점적으로 연구한다는 강한 지역성 때문에 통일 후 생길 역사인식의 차이를 미리서 해소하는데도 크게 공헌할 것으로 판단된다.
2) 민족사 교육의 현장
한편 고구려의 강한 기상과 섬세한 예술성을 국민 정서에 심기 때문에 '한국은 작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갖는 교육장이 될 것이라고 본다.
3) 훌륭한 관광상품
외국 관광객에게 한국의 장구한 역사와 웅대한 유적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의미이다. 몇몇 고궁을 제외하고는 서울과 그 주변에는 볼만한 것이 없다는 혹평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관광자원이 부족한 수도권에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구려를 테마로 한 새로운 명물이 들어선다면 반드시 외국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 것으로 본다. 국내에서도 경주와 부여로만 가던 수학여행을 고구려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을 택하게 될 것이고, 더구나 2000만 인구의 수도권 자체가 무한한 수요처가 될 것이다.
4) 구리시민의 문화적 자긍심과 정신적 구심점이 되고, 시민의 문화공간과 휴식 공간이 될 것이다. 구리 인구는 1963년 1만 명 남짓 되던 인구가 40년도 안 되는 사이에 15.7배가 늘었다. 이와 같은 급격한 인구증가는 출산 때문에 생기는 자연적 증가가 아니고 대부분 사회적 증가가 그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토박이는 아주 적고 대부분 다른 데서 옮겨온 사람들이고 그만큼 구리시에 대한 애착심이 적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에게는 몸에 벤 전통이나 문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구리시민으로서 문화적 자긍심과 정신적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강력한 이미지가 필요하고, 강하고 국내에서 유일한 '고구려 문화'라는 이미지는 그런 면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