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볕을 뚫고 답사 나들이에 나섰다.
완주 김제, 나의 고장, 차창을 스쳐 가는 들녘은
사정없이 퍼 붙는 햇살에 “ 오매~~징헌거이!!”
그러면서 익어가고 있다. 가지런히 자라 이삭을 펴고
있는 볏모가지들이 단단히 여물 채비를 하고, 그 들녘을
건너오는 바람은 處署에 다다른 절기답게 언뜻 서늘함이
묻어 있다.
김제는 이름 그대로 금이 많이 나오는 고을이다.
금구, 금평, 등 금산사 가까이 있는 金자가 들어 있는
마을의 논에서, 밭에서 사금이 반짝거렸고 지금도
그렇다고 한다. 합금석영맥이 발달해서라고 한다.
그늘을 골라 딛으며 금산사 경내를 돈다.
우람하고 당당한 이 가람은 백제 법왕 원년(599) 때
창건 된 뒤, 신라 경덕왕의 명으로 진표율사가
중창하여 대규모의 면모를 갖추게 된 몇 안되는
백제문화 유적중의 하나이다.
국보62호인 미륵전, 그 안에 봉안된 미륵 대불상,
석련대, 대장전, 오층석탑,,,,등
대찰의 면모답게 많은 문화재를 갖고 있는
이 절은 또 그만큼 내력도 많다.
중창을 한 진표율사는 백제인으로 신라에 멸망당한
백제유민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대규모의 미륵전을
세운다. 변산의 不思義房에서 도를 닦아 미륵불의
계시를 받고 여기 금산사에 미륵불을 봉안한 것이다.
금산사의 건물 중 가장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이 미륵전
건축과정은 드라마틱하다.
미륵전이 있는 자리는 방죽이었다고 한다.
( 익산의 미륵사지. 장흥 보림사도 방죽을 메워 지은
절터로, 어쩌면 미륵불은 가장 악조건에서 출발하여
중생 곁으로 오시는 이인지도 모르겠다)
방죽의 주인장인 이무기도 몰아내고 습기도 제거하기 위해
숯으로 메꿔야 했는데 숯을 한꺼번에 대량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때 김제 부안에 아주 불량한 안질이 유행했는데 숯을 한짐
방죽에 넣고 거기 물로 눈을 씻으면 댓방에 안질이 물러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물론 이 지역 주민들이 가만 있었겠는가?
그 때 방죽에 있던 세 마리의 이무기 중 두 마리는 용이 되어
변산으로 이사하고 한 마리는 아직도 미륵전 밑에 산다고 한다.
( 운이 좋으면 금산사 가서 이무기를 만나 볼 수도 있다)
용은 숯을 싫어 하다고 하는데, 숯은 陽이고 용은 陰이기
때문이란다.
이 미륵전은 공사 시작부터 민중의 지대한 관심과 협력 속에서
시작되었다.
아마 정복자인 신라에서도 백제유민을 끌어안아야 할 상황이어서
가만있지는 않았으리라. 경덕왕이 조 7000석 명주500단,
황금 500냥이나 내렸다고 한다.
진표율사는 강하고 개혁적이고 민중적인 미륵불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거대한 철불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이 소문에 역시
김제 부안 민중들이 또 들고 일어났다.
“ 우리 곡괭이랑 보삽이랑 갔다 바쳐야 안쓰까? ”
“ 저 눔의 영감탱이 일허기 실응께 허는 소리 좀 봐!!”
“ 아 열씨미 일만 헌다고 장땡이간디? 신라놈덜이 다
거둬 간당께~~~”
“ 미륵님이 오시면 시세상이 된단 말이 참말잉가? ”
그렇게 만들어 진 이 철불은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녹여지고 말았다. 지금은 소조불인데 이처럼 커다란 불상을
어찌 철로 만들었을까? 그 근거는 불상이 앉아 있던 좌대가
철로 되었고 아직도 미륵전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80년대까지는 누구나 만져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수미좌를
만지면 복이 온다고 믿어서 미륵불 밑의 통로로 들어가
만지고 또 만지고 그랬던 것이다.
( 나도 금산사로 소풍 가면 꼭 만져 보곤 했다.)
이 좌대는 쇠로 만든 솥단지와 같아서 쇠솥이라 불리지만
원 이름은 수미좌라고 한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을
미륵불이 딛고 섰는데 앉은 방석은 당연히 수미좌라야 하지
않겠는가.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계신다,한쪽 검지를 반대편 손이
감싸 쥐고 있는 부처님중의 센터다. 대적광이란 인간의
오감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고요의 빛이라면 어떨까?
금산사의 대적광전은 창건될 때(1686년) 부터 왕실의 기도원찰
로 이용되었다 한다.
상량문에 나타나 있는 글이 그렇다.
후사를 두지 못한 인경왕후(숙종비)가 죽고 왕비가 되어 7년째인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고 싶어 조성한 것이다.
불교를 박대한 조선 왕실도 다급하면 절에 가서 비는게 비밀 아닌
비밀의 전례였다. 그 때 지어진 건물은 86년 화재로 불타버리고
새로 지어진지 오래되지 않았다.
금산사는 고려조에 들어오면서 또 한번의 중흥을 하게 된다.
소현이라는 범상치 않은 스님이 등장하면서다.
소현스님은 고려 최고의 귀족집안 아들로써 御僧이었다.
임금 앞에 나갈 수 있는 중은 어중, 아니면 다리 밑의 가난한
떼중들로 어중이 떼중이는 이 때 나온 말이라 한다.
소현스님을 존경했던 문종의 후원으로 금산사는 중앙정부의
특별사찰로 격상되어 조선조 정여립이라는 인물이 나오기 전 까지는
순탄하게 흘러온다.
정여립은 지나치게 앞선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그 서슬퍼렇던
유교이념 아래 不事二君을 비웃고, 왕권 세습을 반대하고 신분에
상관없이 대동계를 조직해 사회를 조롱하고, 무엇보다 선조를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경멸했던 그 사나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로 그와 눈꼽만치라도 연루된 호남의 선비들
천여명을 몰살하는 기축옥사를 일으킨 장본인, 마이산 근처의 죽도에
들어가 자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 정감록의 정도령? 그가 활동했던
무대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금산사에서 1k쯤 떨어진 구릿골에서 살던 그는 미륵신앙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누구나 평등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는 분이 미륵불이니 금산사의 미륵불의 現顯이 자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충분히 했을 것 같다. 그래서 양반의 신분으로
대동 사회를 이루고자 신분에 상관없이 거지 중 천민들과 어울리다
혁명까지도 꿈 꿨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호남은 정말이지 찬밥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환성지안이라는 화엄학의 제일인자, 전국의 명산 명찰을 안 가본 데가
없는 마당발 스님이 문제를 다시 일으키고 만다.
이 스님이 영조 1년 금산사에서 법회를 열었는데 글쎄 대중들이
구름같이 몰려든 것이다.
차도 없고 핸드폰도 없는데 어찌 알고 1500백명이나 되는 인파가
몰렸단 말인가!!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혼비백산, 스님을 잡아갔다.
“ 네가 네 죄를 알렸다! ” 하고 아무리 족쳐도 나올 것이 없자 풀어주긴
했는데 너무나 걱정된 나머지 제주도에까지 쫓아 가 그를 타살했다고 한다.
그 뿐인가,
고부의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 농민혁명의 상처도 금산사에서 치유를 한다.
증산 강일순, 증산교의 교주를 통해서다.
농민군은 처절하게 패퇴하고 살육 당했다. 증산은 이 싸움이 이렇게 되리라
예견했던 것 같다. 그는 3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9년에 걸쳐 “천지공사”를
행하였다. 혁명 실패 후 곤궁과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살리게 하는 천지공사는
먼저 여성해방부터 시작된다.
“ 고수부” 라는 천민 무당과 하루 전 결혼하여 그녀를 자기 배위에 올려놓고
“ 천지대권” 을 내 놓으라고 협박하게 한 후 “ 네, 모두 드리겠습니다.” 하며
맹세한다. 고수부로 하여금 유불교 경전, 기독교 서적, 채권,
노비문서, 등등을 칼로 찟고 발로 밟고 불을 태워 버리게 한다.
이처럼 남성의 대권이 여성으로 넘어가는 큰 굿을 한 후,
“ 여성주체의 후천개벽” 이 이루어 졌음을 선언 하였다.
아무리 성대하게 공사를 치루었으나 후천개벽은 열리지 않고
민중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병에 시달려 이제나 저제나 개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이 그는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 내 죽거든 금산사로 가리라. 나는 민중의 모든 고름, 창병,
모든 성병, 옴, 풍, 부스럼, 연주창, 두통, 복통, 학질 ,천식등등,,
내 다 가지고 가리라, “ 증산교인들은 특히 미륵전을 애지중지 한다.
아마도 미륵불로 다시 환생하여 오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귀(歸)신(信)사(寺)
“ 지난 가을 귀신사는 우선 이름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종종 그 절을 찾는다고 했다.“
양귀자씨의 “ 숨은 꽃” 일부에 나오는 귀신사다.
말로만 들으면 귀신들이 욱씬거리는 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난다. 실제로 절집은 동네에 다정히 이웃하여 한적하기만 한
큰 절의 암자만한 규모이다.
대적광전 위로 우람하게 솟아 자라는 느티나무 두 그루, 팽나무
한 그루까지 합쳐서 봐야 절집이 당당하게 느껴지는 이 절집은
신라 문무왕16년 의상대사가 세웠다. 창건 당시엔 국신사라 불렸고
삼국 통일 후 정복지의 교화와 회유를 하기 위해 각 지방의 중심지에
세웠던 화엄십찰중 하나로 전주 일대를 관할하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
절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증산도의 분파인 증산대도회의 교인들이
모여 사는 백운동 마을이 있다.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도 감나무가 우거지고 작은 개울이 흘러가는
사이에 마을집들이 무심히 여름에 겨워 할 뿐 인상적인 것은 없다.
왜 이곳이 답사처가 될까?
강진의 무위사와 같은 인상의 대적광전 부처님을 보러온 것일까?
비로자나불은 집이 비좁구나 싶을 만큼 거대하다. 그러니까
원래는 아주 큰 절이었는데 형편이 나빠 지금은 좁은 집에
사신다는 거였다.
이 대적광전과 석수, 석탑, 부도가 있다.
화암사
화암사는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에 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 어머~~~ 두루미 좀 봐요!! 어쩜 저 두루미가, 아니
학인가요? “ 옆 자리의 짧은 머리 아줌마가 두루미라며 탄성을
지르는 중대백로가 몇 마리 앉아 있는 강을 따라 난 외길을
버스는 곡절 많게 가고 있기는 하다. 대추나무 잎새들이
연두 빛으로 반짝이는 길, 대추알에 처서 날 오후3시쯤의
햇살이 묻어 빛나는 길, 바람이 오는 길을 따라 간다.
울창한 숲 속에 그래도 주차할 수 있는 터가 있고 화장실도
있는 화암사 입구길, 그 흔한 점방 하나 없는 절 아래 마을이
화암사와는 아무런 볼 일이 없는 절집 가는 길은 외지고 험하다.
그 길에,,,,,,,,,,서
도둑놈의 갈고리가 꽃을 피워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씨앗을 보고서도 꽃이 예뻐 그게 설마 도둑놈의 갈고리는 아니지~~
여린 식물의 생존은 도둑들이 쓰는 갈고리를 만들며 얼마나 안심했을까?
작은 골짜기를 그렇게 작은 꽃들에게, 낯이 익거나 아리송한 나무들에게
환호하며 올라간다. 십여분 올라가면 나타나는 파란 하늘이 보이고
그리고 아~~~ 내 어머니의 살가죽처럼 낡고 편하고 마른 냄새나는
절집이 나타난다.
단청이 바래고 바랜 빛으로 무심히 이 세상을 보고 있는 절집의 기둥들과
박제되어 고여있는 시간들이 자기들끼리 노는 곳, 雨花屢가 지붕에
풀을 키우고서 맞이해 준다.
오래 오래 잊혀져 있던 이 절집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건축양식으로
얼마 전에 우리에게 왔단다.
극락전이, 단 하나 뿐인 下昻式 구조로 되어 있어서다. 가로로 얹는 도리를
하나 더 얹혀 보가 아래를 향해 길게 나오도록 하는데, 일본이나 중국에선
흔한 양식으로 우리에게 없어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처마가 길게 나오면 비나
눈에 젖어 상할 염려가 적어지는 게 목조건물이다. 그러니까 일본이 중국에서
직수입한 불교라고 우리에게 우길 수 있는 꼬투리였던 그 하앙식이 화암사의
극락전인 것이다.
극락전과 우화루, 요사채인 적묵당, 불명당이 네모 반듯하게 마당을 중심으로 서 있다.
주지스님이 이 절의 역사를 설명해 주시는 마당은 햇살이 네모로 하얗게
채워져 있다.
역사를 왜곡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스님에게선 더할 수 없이 엄격하고
단호한 수행의 의지를 내 보이는 깊이의 품격이 느껴진다.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면서 호화로운 장식미로 흐른 건축의 사례로 극락전을 보면서
답사는 끝이 났다.
(우화루가 왜 雨花屢라고 불리워졌는지, 거기 얼마나 아름다운 꽃들이 비처럼
내리는지,,,,,, )
첫댓글답사여행 후기에 실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었고, 여행기도 이미 지난 여름 완주,김제 지방이어서 망설였지만 답사지의 문화재나 유적뿐만 아니라 설화나 인물, 전설같은 내용도 실어야 한다고 요번 시험공부 중 알게 되어 감히 올립니다. 제가 자란 고장이라 아무래도 소상히 알게되어서요,,,,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연락주세요.
첫댓글 답사여행 후기에 실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었고, 여행기도 이미 지난 여름 완주,김제 지방이어서 망설였지만 답사지의 문화재나 유적뿐만 아니라 설화나 인물, 전설같은 내용도 실어야 한다고 요번 시험공부 중 알게 되어 감히 올립니다. 제가 자란 고장이라 아무래도 소상히 알게되어서요,,,,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연락주세요.
선생님 이렇게 잘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연락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