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교향곡을 부르던 남자
사)인천뇌병변 장애인인권협회 이명숙
나는 발달장애 아들을 둔 엄마이면서 장애인활동지원사다. 장애아들을 키우며 부모의 쉼이 필요하고 부모만이 이 아이를 돌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가 없는 혼자 남겨진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려서부터 비장애인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장애인활동지원을 위한 요구를 하기 시작하면서 싸웠고 법으로 통과하며 처음 장애인활동지원사 교육을 받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내 아이가 지적장애이고 키워왔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같은 지적장애라도 다른 상황과 성향으로 전혀 알 수 없는 행동에 당황하고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도 서로 다른 생각들로 어려움이 많은 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동안 네 명의 장애인을 지원했고 지금은 자폐 1급을 지원하고 있는데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다.
장애인활동지원사를 한 지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네 명 중 15년 전 처음 만난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의 다운증후군 앓고 있는 수정이었다. 아빠와 언니 셋이 살고 있고 엄마는 집을 나갔다고 했다. 초등학교 특수학급을 다니던 다운증후군의 지적장애 친구, 먹는 것도 잘 먹고 대화도 잘되며 심부름도 곧잘 한다. 수정이네는 강아지도 한 마리 키우는데 집안 살림한 흔적은 없고 배달 음식 쓰레기만 쌓여있다. 돈까스를 좋아하던 친구, 항상 웃고 엄마 따르듯 했던 아이, 집으로 돌아올 때는 눈물이 핑 돌곤 했다.
언니는 친구들과 노느라 동생에 관심이 없다. 가끔 수정이 아빠에게 하루 일과를 들려주거나 특별했던 순간을 전할 때도 있었다. 오후에 하교하면 저녁은 분식집에서 돈까스를 사 먹이고 집에 도착 후 빨래를 돌려준다. 빨래를 널며 활동 보조인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며 분명한 선을 긋는다. 오늘은 수정이 것 해주며 언니와 아빠 것도 해준다고.
어느 날 집에 오려고 신발을 신는 데 쓰레기봉투를 버려달라고 한다. 그 또한 오늘만이라고 약속하며 봉투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활동 보조인이 장애인들에게는 꼭 필요하지만, 활동 영역을 말해주지 않으면 잡부가 되기 쉽겠다는 생각에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활동 지원하던 지난 일이 떠오른다. 삼십 대의 자폐 청년이었다. 월, 수요일엔 수영과 삼종 운동을 체육관에서 한다. 부평구 청천동에서 계양구 서운동에 있는 체육관으로 가면서 일어났던 이야기다.
그 친구는 길게 말하거나 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 했던 방식으로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가랑비에 옷 적시듯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룸미러로 슬쩍 뒷좌석을 본다. 청년이 라디오 뉴스를 따라하는 순간을 피하며 혼자 중얼대듯 말한다. 사거리 오른쪽 건너편 대림아파트에는 이모 남자친구가 살고 있어. 좌회전 후 어둠이 내리는 저녁 풍경을 이야기한다.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싫어할까 쉬어가며 말한다.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7080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슬쩍 묻는다. 이 노래 좋아해. 의외로 좋아한단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물으면 또 싫어할지도 몰라서 하루에 한 가지 이상은 묻지 않는다. 청전동에서 쉐보레 자동차를 지나 효성사거리에서 우회전하려고 하는데 바 봐봐 밤 바 봐봐 밤 봐봐 봐 봐봐 바 바 봐봐 밤 바 봐봐 밤 하며 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이어폰에서 나오는 거를 따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어느 때는 깜빡하고 지나가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빠른 속도로 우회전 끝나는 곳에서 마무리한다. 룸미러로 자세히 살피니 몸과 함께 음률도 꺾는다. 효성사거리 부근에서 우회전을 하는 순간 봐봐 바 밤이 시작된다. 어쩌다 그 순간을 놓치면 속사포 쏘듯 봐봐 바 밤을 빠른 속도로 끝나는 지점을 맞춘다. 곡명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었다.
자폐 성향 장애인은 묻는 말에만 ‘네, 아니요’로 대답하는데 청년의 변화가 조금씩 있기 시작했다. 질문받는 것을 싫어해서 혼자 대화하듯 묻기 시작했었다. 혼자 이어폰으로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아나운서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청년, 대답도 하지 않던 친구인데 묻는 말에, 들릴 듯 말 듯 예 하고 대답한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면 내가 따라 부른다. 그리고 묻곤 한다. “이 노래 좋아?”하면 먼 곳을 보든가 못 들은 척하며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알아듣지 못하게 흥얼거리며 따라 한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비가 “좋아요 싫어요?” 물으면 좋다고 한다. 다시 “눈이 오면 좋아요. 비가 오면 좋아요” 하니 눈이 오면 좋다고 한다. 무심한 척 질문을 점점 늘려갔다. 꽃이 피는 봄이 좋아요. 더운 여름이 좋아요. 낙엽 지는 가을이 좋아요. 눈이 내리는 겨울이 좋아요. 물으니 가을.
이 청년은 7080의 노래 중에서도 기타 소리가 들리는 조용한 노래를 좋아하고, 낙엽 떨어지는 가을을 좋아한다. 비가 오는 것보다 눈이 내리는 것을 좋아한다. 문득 낙엽 지는 가을 길에 때 이른 눈이 내리면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 말은 할 수 있지만 어쩌다 본인이 필요할 때만 ‘네, 아니요.' 손짓으로 가리키는 남자.
청년을 만나 체육관으로 가던 중 아나운서의 말을 따라 하다가 갑자기 바 봐봐 밤∼ 노래하기 시작하면 효성사거리 우회전하는 곳이다. 우회전하면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에 김연아의 맥심 모카골드 선전용 옥외광고 사진이 있다. 커피는 “아메리카노가 좋아 카페라떼가 좋아?” 카페라떼, 나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따뜻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묻는 말에 네, 아니요. 단답형의 대답이지만 그 속엔 긴 문장이 같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친구의 엄마에게 대화 내용을 말하니 처음 듣는 말이라며 좋아하면서도 믿지 않는 눈치다. 그 부모의 말에 난 더 가슴이 뛰었다. 엄마한테 하지 않았던 것을 나에게 해줬다는 기쁨이다.
자폐성 친구들은 묻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 혼자만의 틀 안에서 한번 정해진 루틴대로 생활한다. 그 루틴이 바뀌면 불안해하고 힘들어한다. 처음에는 지적장애아들처럼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갔다. 처음 효성사거리를 지나가지 않았을 때는 집에 도착해서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고 했다. 난 그다음부터는 엄마의 길이 아닌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간다고 미리 이유를 설명했다. 그런 후로는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다 엄마가 가던 길로 갈까, 하고 물으니 아니요. 한다.
루틴을 깨는 것이 힘든 친구들,
어느 날 청년에게서 처음으로 문자가 왔다.
‘수요일 체육관가요’
나랑 같이 가고 싶다는 의미의 문자에 가슴이 떨렸다. 미안하기도 했다. 이모랑 같이 체육관에 가고 싶어 요. 라는 긴 문장이 들어있는 떨리는 문자, 자폐 친구 중에 감성을 이야기하는 친구가 보기 드문데 이 친구에게서 보았다. 계속 말을 끌어내거나 날씨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눈이 내리는 날 하늘을 보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수요일 체육관가요’‧‧‧
나랑 같이 가고 싶다는 의미의 문자에
가슴이 떨렸다.
첫댓글 가슴 뭉클한 훌륭한 글입니다
수상 축하 드려요~~
위대합니다.
감동이고요.
브라보 이명숙!!!
화이팅입니다.
축하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소식 기대할게요.^^
이명숙님의 노고를 알것같네요.
축하합니다. ^^
삶을 살아 냈을 뿐인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