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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곶문학>3 해설)
시인의 특권을 누리고 싶은 자, 시를 써라!!
김미향(문학평론가, 인천대 강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조금 지난 소식이지만 한국고용정보원이 제공한 자료를 보면 시인의 평균소득은 2015년 1,864만 원에서 542만 원으로 1,300만 원 가까이 줄었다. 시인 말고는 천주교 성직자인 수녀와 신부가 그 뒤를 이어 박봉이었다. 시인이라는 직업의 사회적 지위는 어떤지 몰라도 그 경제적 지위는 사명감을 생명으로 하는 가톨릭 사제인 성직자와 같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와 상관없이 아직도 문학청년, 시인이기를 꿈꾼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시가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자아화’로 세상과 자아의 대결에서 자아가 우위에 있는 유일한 문학 장르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시 안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긴 설명 늘어놓지 않아도 시 안에서 시인이 조물주이고, 하느님이고, 창조주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은 세상, 시 안에서만은 내 마음대로 뜻을 펼칠 수 있는 신세계가 열린다. 무엇보다 그것이 많은 이가 아직도 시인의 꿈을 갖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하면 허구와 진실을 넘나들며 그 경계에서, 세상에 대해 깊숙하게 개입하지 않으면서 한마디씩 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은 시인만의 특권이다. 이러한 시인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세속적 고난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시를 쓰는 것이다.
1, 박영옥 - 공간이 장소가 되는 순간
박영옥 시인의 시적 자아는 끊임없이 공간을 이동하고, 머무르며 의미를 부여하여 장소화한다. 그리고 그가 머무르는 장소는 시에서 시각적 이미지로 제공된다. 그 장소에는 그의 경험과 사랑하는 풍경과 사람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여행의 서사이다. 시적 자아는 머무르지 않고 묵호항을 거쳐 마시란 해변으로 덕유산 어사길을 거쳐 칠갑산 외딴집으로 향한다. 다시 광양 매화를 보고 구례를 향하며 시인이 지나치는 모든 공간을 장소로 바꿔버린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대표 저서인 공간과 장소에서 그리스어 ‘토포스(topos)’와 사랑이라는 ‘필리아(philia)’를 합쳐 ‘토포필리아(topophilia)’ 즉 ‘장소애(場所愛)’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공간’은 움직임이 일어나는 곳이며 ‘자유’를 상징한다. 반면 ‘장소’는 정지가 일어나는 곳이며 ‘안전’을 상징한다. 따라서 우리가 공간에 가치를 부여할 때 그것은 장소가 된다. 그리하여 추상적이고 낯선 공간은 개개인 삶의 경험과 감정을 통해 의미로 가득 찬 애틋하고 구체적인 장소로 전환된다. 장소는 결국 인간화된 공간이다.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된다. 공간을 ‘움직임’이 허용되는 곳으로 생각한다면, 장소는 ‘정지’가 일어나는 곳이 된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난다면 바로 장소로 바뀔 수 있다.
바람에 이끌려 덩그러니 혼자가 되는
이 콘크리트 숲
눈을 감으면 측백나무 스쳐가는 바람소리 들려온다
모퉁이에 내가 보인다
한발을 내딛으면
길은 희미해지다가 낭떠러지가 된다<나에게로 가는>
차문을 열자
파도가 출렁 발밑으로 달려들어 놀란다
점퍼를 단단히 여미고
호텔 전망대 난간을 붙잡고 선다
하얗게 밀려오는 포말들<묵호항>
벼르고 찾아 온 칠갑산 그 아래
외딴집
친구 손을 놓지 못한다
우리 선녀탕 가자
그런데 묵정밭에 묵정뱀 있어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꺼내 놓는다<푸른 산, 덩굴>
귀밑머리가 하얀 그와
아홉시가 넘어서야 마주 앉는다
한 때는 이웃사촌으로 살았던 그<구례에 가다>
시적 자아의 여행은 지난하면서도 신이 난다. 반가운 이를 만나기도 하지만 외롭기도 하다. 그는 바람에 이끌려 덩그러니 혼자가 되는 콘크리트 위에 선다. 나에게로 가는 길은 낭떠러지 길이지만 나는 여행을 떠날 것을 다짐한다. ‘묵호항’에서 꿈을 잃은 가슴처럼 얼굴이 시리지만 점퍼를 단단히 여미고 차 문을 연다. 그는 진눈깨비가 예상되는 ‘마시란 해변’으로 향하고, 그곳에서는 기억을 등져본다. 비 내리는 ‘덕유산’ 카페에서는 카페모카도 마시며 노래 속에서 추억에 취해 본다. ‘칠갑산’ 외딴집에는 그의 친구가 있다. 가슴 시린 이야기로 밤을 새우는 친구가 있는 그곳에는 처마 끝에 별이 내려앉는 아름다운 밤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그녀는 짐을 트렁크에 싣고 매화 피는 ‘광양’으로 향한다. 광양에는 그보다 기억들이 먼저 길을 나선다. 한때는 이웃사촌으로 살던 귀밑머리 하얀 그와 만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의 여행은 여기서 끝난다. 그 후의 여정을 더 알 수 없지만, 이 여행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시인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낀 추억과 아름다운 사람이 수많은 공간에서 장소화 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송선영 - 고향, 그 쓸쓸함과 외로움에 대하여
송선영 시인의 시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인천은 논과 밭이 심지어 갯벌까지도 아파트가 들어서는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인구가 늘어가는 도시가 된 것이다. “모든 길, 모든 언어, 모든 문화가 통하는 인천! all ways INCHEON”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 아래 한국을 너머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고 있다. 반면에 많은 사람이 급격한 도시화로 고향을 잃고, 뿌리를 잃고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인천이다. “꿈에 그리던 아파트 살아도” 이웃이 없는 삶은 쓸쓸하다. “저녁이면 들려오던 항구 뱃고동 소리” 가로막은 아시아드 선수촌은 답답하다. 그러므로 시인은 인천의 도시화와 그 이면의 쓸쓸함과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꿈에 그린 아파트에 살아도
이불 덮고 눈 감으면 고향집인데
오늘은 무얼 먹고 사는지<배래터>
저녁이면 들려오던
항구 뱃고동 소리
달산 언덕 가로막은
아시아드 선수촌에 갇혀있다<듣고 싶은 그 소리>
고려 말 조선 초 학자인 길재가 조선이 개국한 후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방문할 때 지은 시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서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 어즈버 태평 년월이 꿈 이런가 하노라”가 문득 생각난다. 물론 이 시는 개성의 쇠락을 말하는 것이고, 시인의 시는 인천 발전의 이면을 말한다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이 소외되었다는 사실은 똑같다. 발전이든 쇠락이든 인간이 빠진 모습은 쓸쓸하기에 더 가슴에 와 닿기도 한다.
시인은 변화와 혼란의 상황 속에서도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 그리고 아름다움이 시의 여러 부분에 나타난다. 토박이를 찾기 힘든 인천에 고향의 자부심으로 가득 찬 시인의 시는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반갑다. 더구나 시인은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인천의 옛 지명인 배래터, 구수곡, 물무리재, 범마을, 돌박재, 황골, 상식재 등의 지명을 사용하며 자신이 진짜 인천 토박이임을 증명하고 있다.
소래포구 드나들던 작은 배 있어 배래터라 불렀지
돌다리 지나 구수곡 넘어가는 물무리재
범마을 사람 들고나는 돌박재
황골을 찾아가는 상식재
재 넘어가는 길마다 들려오던 이야기
길 찾아 나서는 분 따라 잊히지<배래터>
<시인의 말>을 통해 시인은 배래터에 살았고 여름방학이면 갯골에서 헤엄을 쳤으며 지금은 그린벨트에 묶여있는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수목원의 꿈을 이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인의 수목원 꿈이 이뤄지기를, 인천의 옛것이 남아 새로운 것, 새로운 사람과 어우러지기를, 또 그 안에서 시인의 시가 샘솟기를 응원한다.
3. 박경분 - 삶을 밝히는 찬란(燦爛)한 생명력
박경분 시인은 모든 존재의 고단한 삶을 말한다. 그 고단함을 동물인 개, 흰둥이와 식물인 잡초의 생명력으로 말하고 있다. 제 새끼 팔아치운 주인이 준 밥을 흰둥이는 그냥도 아니고 우걱우걱 먹는다. 우걱우걱 먹는 이유는 남아있는 새끼를 위함이고, 앞으로 태어날 새끼를 위함이고, 상처받은 자신을 위함이다. 슬프면서도 찬란한,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생명력이다. 슬픔에 삶을 소비하지 않는 현명함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살고자 하는 모든 것은 위대하다. 고단하고 서러운 삶이지만 동물들은 웬만해선 우울해하지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는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의지는 어쩌면 사람보다도 동물에게 더 잘 드러난다. 삶에 대한 정직성은 인간이 동물에게 배워야 할 유일한 미덕(美德)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것을 비굴함이란 단어로 표현하면서 동물의 열등함이라 할지 모르지만, 인간도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아이를 낳고, 사람이 죽어 나간 자리에도 집을 짓고 삶을 영위해나간다. 식물인 잡초 역시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오히려 잡초는 누군가 봐주는 즉시 뽑혀나가 생명을 다하게 된다. 잡초의 생명력은 눈에 띄지 않음에 유지되며 잡초는 최선을 다해 ‘눈에 띄지 않음’을 실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잡초는 인간은 물론 바람의 기분까지도 헤아리고 있다. 이것 역시 비굴함이나 열등함이 아니다. 삶의 지혜이거나 건강한 생명력이다.
흰둥이젖가슴 덜렁거리며제 새끼 팔아치운 주인이 준 밥을
먹는다 우걱우걱 먹는다<밥>
오늘,바람의 기분빨리 헤아려야 한다 납작 엎드려야겠다<잡초>
개의 쓸모, 잡초의 쓸모 이러한 쓸모는 누가 규정하는가? 우리는 가끔 ‘쓸모없음의 쓸모’를 잊고 살기도 한다. 몽당 빗자루처럼 달은 육체로도 어머니는 마당을 쓸고(<아침기도>), 앵두를 파는 할머니는 두 컵을 사자 굳이 묶어 두었던 까만 비닐봉지까지 풀어 덤을 주며, 덤의 쓸모를 상기시킨다.(<덤>) 힘든 세상살이,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 동물, 식물은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쓸모를 상기시킨다. 그 모습이 권모술수 속에 남을 속이는, 약한 자를 짓밟는 사람의 세계보다 훨씬 찬란하고 아름답다. 그들의 쓸모와 최선이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있다.
4. 박진 – 소외를 통해 발견하는 인간의 잠재성
박진 시인은 ‘돈 대신 받은 것’, ‘버려진 것’, ‘오래된 것’, ‘쓸모없는 것’ 등을 이야기한다. 이런 것들의 공통점은 세상에서 소외되었다는 사실이다. 소외의 양상은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먼저 소외의 의미가 매우 다양하여 그것을 사용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결핍, 상실, 부정, 분리, 상품성, 물화, 불안 등을 나타내는 포괄적 개념’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외는 주체 혼자만의 개별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공동의 문제로 주체와 사회는 상호소통하면서 다양한 소외의 양상을 끊임없이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를 이해, 비판, 전망하는데 소외라는 개념이 적용된다면, 이것은 또 다른 측면으로 그 사회가 상실한 건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현상에는 양가적 측면이 존재하는데 소외를 통해 인간과 사회적 문제를 말할 수 있다면 대응의 방안을 통해 인간의 극복 잠재성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꼭대기 판잣집 주인 김 씨
수산 시장 품삯 대신 고등어
지게에 지고 끝없는 계단 오르면
바람에 흘러오는 비릿한 내음
들락날락 꾸득하게 말려
아랫동네 정원 넓은 집에 팔러 갈 때
갈아 입은 옷깃 연신 코에 대고 맡는다<노량진 수산시장>
아파트 분리수거일
쓰레기들 운동회
구겨진 티에 슬리퍼 차림 아저씨
눈인사도 없이
데려온 놈들 줄 세우기 바쁘다<호모쓰레기쿠스 >
마을 터줏대감인 그에게는 아주 오래된 것이 있다. 비탈진 돌밭 가 두엄더미다. 코앞에 소똥이 있으니 파리떼 꼬인다며 주택지 사람들은 불만이다.<오래된 것>
먼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산꼭대기 판잣집 주인 김 씨는 품삯 대신 고등어를 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건강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돈 대신 고등어를 받아오지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고등어를 아랫동네 정원 넓은 집에 팔러 갈 것이며, 그때 옷도 제대로 갈아입고 갈 예정으로 전혀 비굴하지 않다. <호모쓰레기쿠스>에서는 아파트 분리수거일 구겨진 티에 슬리퍼 차림의 아저씨가 데려온 놈들을 줄 세우기 바쁘다. 그는 지구에서 쓰레기를 만드는 유일한 생명체인 호모사피엔스에 대항하여, 쓰레기를 없애기 위해 진화한 신인류인 호모쓰레기쿠스인 것이다. <오래된 것>에서 터줏대감과 외지인은 대립한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대립한다. 하지만 그 틈새에 오래된 것의 새로운 존재인 아들이 존재한다. 그는 꽥꽥거리지만 주말에도 아버지의 말을 거슬리지 않고 외지인과 직접 대립하지도 않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 그의 시 안의 세상은 온갖 소외된 것으로 가득하지만 이러한 소외를 통해 끊임없이 대응의 방안을 발견하기에 절망적이지 않다. 진짜 문제는 자신이 소외의 대상인지, 주체인지도 모르면서 소외에 소비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일 것이다.
5. 최병관 - 어울림과 너그러움의 미학
최병관 시인의 <경신마을 소묘>에는 가을걷이로 빈집에 사람 대신 어미 곁을 구르며 집 지키는 기특한 강아지가 사람의 삶 속에 어울리며 살아간다. <담보실, 그집>에는 입동이 지나 날이 추워지자 아버지가 지은 덕석을 입은 소가 너그러운 아버지의 삶 속에 어우러져 살아간다. 이들의 삶에는 딱히 동물과 사람의 경계와 구분이 없다. <어떤 세밑>에는 구세군이 자선냄비를 놓고 종을 울리고 건너편에는 스님이 불전 함을 놓고 목탁을 치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그런데 발길 뜸해진 저녁에 스님이 불전 함에 모은 돈을 자선냄비에 쏟아 넣는다. 그들이 믿고 섬기는 예수님, 부처님이 가난한 이웃, 어려운 인간으로 하나가 되는 것, 동화(同化)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울림과 동화가 있는 계절은 춥지만 따뜻하고, 너그럽다.
가을걷이에
비우고 나간 집들이
웅크리고 있다
누구네 집일까
대추나무 아래
어미 곁을 구르는 강아지들<경신마을 소묘>
입동 지나
소에게
덕석을 지어 입히던 아버지<담보실, 그 집>
스님이
불전 함에 모은 돈을
자선냄비에 쏟아 넣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휘적휘적 걸어간다 <어떤 세밑>
시인의 시는 또한, 자연 친화적이다. 여름이 가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마당귀로 툭 떨어지는 감잎 하나”이고, 가을을 알려주는 것은 절기인 입추보다 먼저 “담장 위를 맴도는 고추잠자리”이다.(<고추잠자리>)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 친화적이기에 더욱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의 시가 주는 전체적인 따뜻함은 어울림, 너그러움과 경계가 아닌 동화되는 마음일 것이다. 자연과 인간, 여기에 신들까지도 경계 없이 어울려 사는 세상은 경쟁이 없고, 다툼이 없고, 혼란이 없다.
6, 손현숙 - 일상 속에서 감지되는 위험
손현숙 시인은 일상 속의 위험을 말하고 있다. 횡단보도, 더욱이 초록불이 켜진 사거리이지만 아무도 서지 않는다. 노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위태롭게 고무 밧줄로 얼기설기 짐을 실은 수레를 밀고 가고, 젊은 여자는 운전석에 말티즈를 안은 채 클랙슨을 울리며 가고, 철가방 실은 오토바이도 잠시 멈추지도 않은 채 휙 지나가 버린다. 규칙은 있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그곳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서늘한 곳이다. 우리 곁에 있지만 안전하지 않다. 어쩌면 ‘초록불 사거리’ 그곳은 우리 일상 속에 도사리며 특별하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기에 더 위험한지도 모른다.
사거리 횡단보도
손수레보다 두 배는 더 높이 쌓아 올린 폐품더미가
꿈틀꿈틀 건너고 있다
고무 밧줄로 얼기설기 묶은 수레를 밀고 가는
노인, 팍팍한 걸음을 옮기며 가쁜 숨 몰아쉬고 있다
그 옆, 하얀 말티즈를 안고 젊은 여자가 지나간다
우회전 차선에 있던 자동차가 클랙션을 울린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뀐다
그라데이션으로 피자 헛 이라고 쓰여 있는
철가방 실은 오토바이가 휙 지나간다
그 곳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서늘하다<초록불, 사거리>
여기 더 위험한 세상이 있다. 일상보다 더 위험한 세상은 가상의 세계이다. 그곳은 인터넷 속에 존재하지만 언제든지 예고 없이, 특별한 절차 없이 불쑥불쑥 순식간에 우리의 일상 속으로 침입하여 일상을 지배하는 랜선 속의 세상이다.
창밖 어둠이 커튼을 친다
그 여자가 오는 시간
그녀, 방으로 들어서며 불을 켠다
흰 블라우스 검은 재킷이 침대 모서리에 던져진다
속옷이 그 위에 얹힌다
욕실에 들어간 나신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컴퓨터를 켠다
키보드를 두드린다
까만 글자들이 커서를 따라 나타난다
밤이 깊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밤 속을 뛰어다닌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얼굴을 잠깐 스치고 간다
그 여자가 불을 끄면 그녀도 사라진다<그녀>
그 여자와 그녀는 누구인가? 그 여자와 그녀는 같은 인물인가? 인터넷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인가? 그 여자는 환한 대낮에 오는 것이 아니라 창밖 어둠이 커튼을 칠 때 찾아오고, 그 여자가 불을 끄면 그녀는 사라진다. 1행에서 들어온 것은 그녀지만 마지막 행에서 불을 끄는 것은 그 여자이고, 마지막 행 그 여자와 그녀는 같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그 여자와 그녀는 분리된 것 같으면서도 일체화된 하나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므로 더욱 기이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모호하기도 하고 애매하기도 한, 일상의 두려움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지배하지 못하는 이러한 모호함, 낯설고 기이함 속에서 온다. 분열되는 시적 자아의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현대인의 비인간화, 물신화, 자본화된 일상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7. 심응식 - 그리움을 심화하는 미각적 시어
심응식 시인의 시의 주요 이미지는 미각적이다. 그의 시에는 10편 중 5편에 음식물에 관한 시어가 나타난다. 음식물이란 무엇인가? 재외 교포들은 고향 말은 잊어도 맛만은 잊지 않은 채, 고향 음식을 먹으며 살아간다고 한다. 입맛은 의식적으로 교육하거나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유전되는 것으로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즉, 미각은 선택이 아닌 본태적 요소로 그들은 현재 사는 장소나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입맛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각인하게 된다. 맛이란 미각의 감각적 결과이다.
돌쟁이 이십오 년 노하우라는 듯 똥개는 개판으로 길러 개꼴 날 때 패잡아야 맛있다는 말씀으로 개다리소반에 상 차렸다 아들 딸 마누라 둘러 앉아 개백숙 통으로 올려놓고 목살 갈빗살 뜯는 맛난 저녁
죽은 자 이름이나 파며 돌가루 마신 사십년 인생길 개고생이라 말 허지먼유, 난 꽃길이유
통개백숙 앞에 의젓했다
된장 푼 국물에 개죽 쑤어 소주 몇 잔 자시고 개다리춤 흥겨웠다<복달임>
개결수에 싸리나무 엮은 통발 쳐 살진 참게 잡고
깊은배미 물꼬 보리새우 한사발 건져
오늘 저녁엔 구수하게 된장 끓입시다
남는 건 겨울밤 주전부리로 말려둡시다<아파트>
서리배병아리처럼
담장아래 댑싸리그림자 모여들고
밭은 기침소리 팽팽해지는 해 질 무렵
외갓집 젓국 끓는 냄새 났다<새우젓국>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맛이라고 할 때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그 외 ‘맵다’든지 ‘싱겁다’란 감각을 흔히 말하게 되는데, 문학적 차원에서는 더욱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또한, 육체적 면에서 정신적 면으로 비약해 보면 쾌, 불쾌의 감정적 차원으로까지 상승할 수도 있다. 보통 맛을 기아, 갈증과 동시에 취급하는데, ‘맛’ 이전 또는 ‘맛’을 향해 나아가는 상태가 곧 기아나 갈증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갈증은 아마도 <시인의 말>에서 언급한 “아버지의 그 위 아버지들로부터 탄생과 죽음의 대를 이어온 투박하고 질긴 쉰 목소리, 그을린 얼굴, 곤쟁이젓 냄새가, 시큼한 김칫국물”에 대한 갈증일 것이다. 이어는 지지만 실체가 없고,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고, 그립지만 곁에 없는 것에 대한 기아와 갈증이 미각으로 변화되어 옛것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을 심화시키고 있다. 즉 미각에 대한 기억이 시각이나 청각보다 더 뚜렷하게 각인되어 현재 자신에게 부재(不在)로 남아있는 고향과 유년, 과거로 이끄는 통로 역할을 해내고 있다.
8. 이은춘 – 삶의 가장자리에 선 노년의 그들
이은춘 시인의 시적 자아는 인생의 가장자리, 그늘 속에 서 있다. 시인의 시 속에는 삶의 노년기에 다다른 그와 그녀가 있다. 그들은 열심히 살아왔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끝이 있다. 젊음이 상이 아니듯 늙음도 벌이 아니지만(“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의 대사 中) 우리의 사회는 대놓고 늙음을 자랑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다. 현대사회의 구조적 특성은 개인의 능력을 중요시하는 성취와 업적 위주의 사회로 노인의 지위 또한 능력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과거의 경험이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노인의 위치가 약화하였고, 사회적 부적응 상태에서 노인은 사회와 가족들에게 소외되면서 심리적 불안감과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거나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 위치의 변화로 겪는 부적응과 경제적 어려움은 노인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숫자 하나 얹었다 평생 몸담았던 자동차회사에서 권고사직과 복직을 겪으면서도 보란 듯 퇴직하고, 아직은 펄펄 날 수 있다고 당당했지만 딱히 발 딛고 설 자리가 없다<가장자리>
병원 침대를 내려서며
한사코 집으로 가겠다던
그녀<해오름요양원>
다시 감색양복을 사고
이력서를 쓰고, 도돌이표를 그리고 있는
등 뒤로
붉은 글자의 현수막이 펄럭인다<그늘 속에서 그늘을 키우는>
시인의 시에는 한편으로는 체념, 한편으로는 새로운 다짐이 용솟음친다. <가장자리>의 그는 자동차회사의 권고사직과 복직을 겪으면서도 당당했지만, 퇴직한 그가 딱히 발 딛고 설 자리가 이 세상에는 없다. 그는 지금, 세상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해오름요양원>의 그녀는 집에서 노년을 보내기 원하지만, 집에는 그녀를 돌봐줄 유휴(遊休) 인력이 없어 요양원을 벗어날 수 없다. 해 오름을 기다리지만, 그녀의 삶은 해가 지는 석양, 해가 들지 않는 그늘 속에 있다. <그늘 속에서 그늘을 키우는>의 그는 새로운 감색 양복도 단정하고, 이력서도 화려하지만 그를 써줄 곳은 없다. 이것이 바로 노년기, 노인이 당면한 삶인데, 이러한 현실과 감정이 담담하게 시 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의 온기를 실어 나른다”(<무용지용(無用之用)>)
노인의 진정한 쓸모는 쓸모없음(無用之用)이 아닐까? 쓸모 있는 것만 존재하는 세상은 너무나도 삭막하고, 무의미하고, 즉자적(卽自的)이다. 내가 지금 바로 열매를 따 먹지 못할지라도 사과나무를 심는 노인의 지혜가 바로 쓸모없음에서 나오는 쓸모이다. 장자는 “대자연(大自然)은 육체를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며,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 주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夫大塊載我以形,勞我以生,佚我以老,息我以死)”라고 했다. 최선을 다해 젊음을 살아온 노인의 쓸모없음이 편안함으로, 자부심으로 느껴지는 노년이기를 바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서곶문학> 동인의 나이, 성품, 성별 등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로지 시만을 읽어야 했다. 처음에는 난감했지만, 시를 계속 읽다 보니 시만을 통해 시평을 쓰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오해의 소지와 실수의 여지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 어떤 선입견 없이 시를 본다는 것이 자유롭고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인을 안다면 망설일지도 모르는 검정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먼저, 시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이 있는데, <서곶문학> 동인의 시들은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중시하는 ‘표현론적 관점’이나, ‘작품과 현실 세계의 관계’를 중시하는 ‘반영론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이들은 ‘독자에게 무엇인가 영향을 미치거나 깨우침을 주겠다는 원대한 포부’에 연연하지 않는다. 또한, ‘작품 자체의 미적 구조’에 천착하며 글자 수를 세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 말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쏟아내면서, 변해가는 세상의 야속함이나 고향의 아름다움, 사람 사이의 따뜻함을 쓰며 끊임없이 자신과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따뜻함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각 시인의 시에 간단한 제목을 붙여 보았다. 박영옥 시인의 ‘공간이 장소가 되는 순간’, 심응식 시인의 ‘그리움을 심화하는 미각적 시어’, 송선영 시인의 ‘고향, 그 쓸쓸함과 외로움에 대하여’, 박경분 시인의 ‘삶을 밝히는 찬란(燦爛)한 생명력’, 손현숙 시인의 ‘일상 속에서 감지되는 위험’, 박진 시인의 ‘소외를 통해 발견하는 인간의 잠재성’, 최병관 시인의 ‘어울림과 너그러움의 미학’, 이은춘 시인의 ‘삶의 가장자리에 선 노년의 그들’이다. 각자 발표한 편수와 내용, 상황도 모두 다르고 다양하여 읽는 즐거움도 그만큼 다양해졌다. 특히 박경분 시인의 ‘덤덤한 흰둥이의 생명력’과 이은춘 시인의 ‘인생의 그늘과 가장자리에 선, 노년의 그와 그녀’에게 많은 응원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시를 쓰는 사람, 시인은 수많은 권리를 누린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무엇일까? 시인에 이름을 올려놓았다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시를 쓰는 것이다. 쓰다 보면 나에게도 위로가 되고, 타인에게도 힘이 된다. 처음부터 세계적인 대문호가 되기 위해, 대작을 쓰기 위해 시를 쓰는 사람은 없다. 쓰지 않으면 살 수 없어서, 쓰고 나면 행복해서 쓰게 되고 결국 그 시가 내게 힘이 되고 타인에게 감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곶문학>의 동인들이 앞으로도 치열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하게 시작(詩作)의 길을 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