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牛公)에 대하여
2020년 8월 26일 제주도를 거쳐서 육지에 상륙하여 많은 피해를 남기고 8월 27일 북한 황해남도 옹진지역으로 빠져나간 제8호 태풍 ‘바비(BAVI)’는 베트남의 ‘바비 산맥’에서 따온 이름으로 많은 비와 바람을 몰고 와서 합천지역 일부와 섬진강줄기에 자리한 하동의 화개장터가 침수를 당하는 피해를 입었고, 구례의 일부지역이 물에 잠기는 등 곳곳에 산사태와 심한 침수피해를 남기고 동해바다에서 소멸이 되었다.
이러한 재난 속에 TV화면을 통하여 특별히 시청자들의 시선을 모은 주인공은 ‘우공(牛公)’들로 전남 구례에서 갑자기 불어난 물에 피할 곳이 없어진 소들이 축사의 지붕위로 피신을 하거나 해발 530m의 오산(鰲山)에 위치한 사성암(四聖庵)으로 무리를 지어서 올라가기도 하고, 경남 합천에서는 농가에서 기르던 소가 불어난 물길을 따라 80㎞를 떠내려가 밀양에서 구조되어 이런바 ‘우생마사(牛生馬死)를 증명하였고, 축사의 지붕에 올라가 침수의 피해를 입지 않은 소들을 중장비를 동원하여 안전하게 내려놓았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의 소가 2마리의 건강한 쌍둥이 송아지를 순산하여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
한우(韓牛. Korean native cattle. Hanwoo)는 오랜 세월을 한민족(韓民族)과 고난과 역경을 함께하면서 살아온 세계유일의 우리나라 고유품종으로 수해를 당하여 보여준 소들의 본능적인 행동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우리선조들은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2009년 1월 개봉되어 많은 관람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준 영화 ‘워낭소리’에서 노부부와 늙은 소의 이야기는 한편으로 밀쳐 두고서라도 우리 조상들은 소를 단순히 가축으로만 보지 않고 가족처럼 생각하여 ‘생구(生口)’ 혹은 ‘우공(牛公)’이라는 경칭을 붙이기도 하였는데, 우리민족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고락(苦樂)을 함께하며 살아온 만큼 한우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고기를 제공하거나 환금(換金)과 노동력을 위한 목적만이 아니라 불교와 유교에 더하여 도교적인 요소마저 가미되어 정신세계에까지 스며들어 풍요의 상징 외에도 세시풍속과 민속놀이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주술(呪術)이나 신앙적인 존재로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유유자적의 의미로 혹은 예술과 문학의 소재로 그려지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우리민족의 정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조선시대 서거정(徐居正 1420~1488)과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송질(1454~1520), 김백련(1707~1795) 등은 도가(道家)적 사상으로 소를 타고 다니는 기우행(騎牛行)을 즐겼다고 하며, 권근(1352~1409), 이덕무(1471~1793) 등의 기우설(騎牛說), 김홍도(1745~1806)의 ‘선인기우도’를 비롯하여 정선(1676~1759), 종실출신의 화가인 이경윤(1545~1611), 실학자인 박제가(1780~1856) 등이 ‘목동기우도’를 즐겨 그렸다.
금세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화가 이중섭(1916~1956)은 짧은 통영생활에서 그의 분신처럼 그려낸 ‘흰 소’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대변하고 있으며, 오늘날 진주에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우촌(牛村) 최태문’ 화백은 소의 역동적이고도 다양한 모습을 전문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소와 관련한 전설과 설화들도 많아서 황희 정승(1363~1452)과 밭갈이 노인의 이야기,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풀을 뜯는 소를 설법을 듣는 불자(佛者)로, 삼강행실도에서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소, 개성지방에서 눈먼 주인을 구한 소를 기리는 설화에 근거한 ‘우답동’ 마을, 경북 상주지방에 호랑이로부터 주인을 구한 소의 무덤전설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충남 공주 갑사의 ‘공우탑’, ‘충북 제천 무암사의 ’우부도(牛浮屠), 전남 해남 미황사 창건설화, 경북 봉화 청량사의 ‘삼각우총’, 월악산 덕주사 ‘우탑’, 경남 함양 영원사 ‘황소목 전설’, 경북 문경 대승사 ‘우부도’, 속리산 법주사의 마애불 관련 설화, 경남고성의 옥천사 위쪽에 자리한 청련암 ‘황소바위 전설’, 계룡산 개태사 ‘암소바위’ 설화 등이 전해오고 있으며 충북 충주 살미면 암소바위 전설 외에도 각지에 많은 소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소와 관련한 풍습으로 정초(正初) 첫 번째 축일(丑日)을 ‘첫 소날(上丑日)’이라 하여 소의 명절로 정하여 이날만큼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방아질을 하지 않았는데 방아질을 하지 않는 이유는 소가 멍에를 매고 연자방아를 돌려야 하기 때문으로 소의 마음을 고려한 조치이며, 쇠붙이가 달린 농기구를 다루지 않았고 도마질을 하지 않음으로서 소를 잡아 고기를 써는 것과 같은 일에 대한 소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해마다 정월과 8월 한가위에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놀이로 ‘소 먹이 놀음’, ‘소 놀이 굿(경기 양주)’, ‘나무 쇠 놀음(木牛戱. 경남 창녕)’ 등이 고려를 거쳐서 조선에까지 이어져 왔으며 동국세시기에서 제주지방과 함경도지방에서 입춘을 중심으로 소와 관련한 행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소를 기르는 외양간에는 ‘외양간 굿’을 하여 소를 수호하고 돌보는 ‘구능신’ 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소나 소의 구유(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으로 큰 나무나 큰 돌을 길쭉하게 파내어 만든다.)를 닮은 장소에 집을 짓거나 묏자리를 쓰게 되면 발복(發福)을 한다는 풍수지리설을 비롯하여 섬의 형상이 소를 닮았다 하여 우도(牛島), 산마루를 넘나드는 고갯길이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하여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기구인 길마의 형상이라고 하여 길마재 혹은 질메(길마의 방언)재와 같은 이름을 붙였으며, 소가 주인집 어린 아들을 호랑이로부터 구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경남 거창의 ‘우혜리’마을, 충남 천안에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당하여 피난길에 올라 말을 구하지 못하여 소를 타고 가다가 소에게 물을 먹였다는 ‘우정(牛井. 牛泉. 소 우물) 등과 같이 소와 관련한 지명을 가진 고장이 많은 것에서 소에 대한 정서를 알 수 있으며, 우리말에 고집이 세고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을 ‘벽창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벽창우(碧昌牛) 즉 벽동창성지우(碧潼昌城之牛)의 줄인 말로서 자연환경이 열악한 평안북도지방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만큼 성질이 거칠어 길들이기가 어렵다는 벽동과 창성지방의 소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태풍 ‘바비’로 죽거나 부상당한 700여 마리 소의 혼을 위로하는 ‘소 위령제(慰靈祭)’가 전남 구례의 양정마을에서 있었는데(2020. 9. 15.), 우리나라 대부분의 축산‧수의 관련기관이나 대학 등 연구기관 등에서 축혼비(畜魂碑) 혹은 수혼비(獸魂碑)를 설치하여 연중 특정한 날을 정하여 인간의 복지나 관련 시험연구 등을 위하여 희생된 소를 비롯한 동물들의 혼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한 축혼제(畜魂祭) 혹은 수혼제(獸魂祭) 행사를 하고 있다.
소에 대한 의로움을 노래한 시와 그림으로는 조선 인조(1595~1649) 8년(1630) 경북 선산에서 있었던 의로운 소를 높이 생각한 그림으로 의우도(義牛圖) 등이 있으며, 현종(1641~1674) 6년에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1~1678)는 의우도를 보고 시를 지어 노래하였고, 조선 후기 문인인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이 지은 기우가는 ‘소타는 노래’라는 뜻으로 ‘옥소고(玉所稿)’에 전한다.
한편, 근대에 와서는 “… 얼룩 배기 황소가 헤설피 금빛 울음을 우는 곳 …(정지용의 향수)”,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 황소처럼 일만하셔도 살림살이는 마냥 그 자리 …(막걸리 한잔)” 등 다수의 동요(童謠), 시와 노랫말에까지 감정이 녹아들어 우리국민의 정서 속에 깊게 스며있는 소에 대한 관념을 알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