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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 02. 06
경주신문
뉴스특집
마을을 찾아서
■ 경주 동천동(東川洞)
2008년 05월 30일(금) 18:29 [(주)경주신문사]
신라건국과 시조왕 박혁거세 추대의 산실
왕이 먹은 샘 ‘동천(東泉)’ → ‘동천(東川)’
동천동은 신라의 북악으로 불리는 금강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다.
신라건국과 박혁거세의 추대를 위해 여섯 마을촌장(六村長)이 모였던 알천거랑(지금의 북천) 가가 바로 이곳이요.
신라 법흥왕 때 불교공인의 계기가 되었던 이차돈성사의 순교 때 잘린 머리가 날아가 떨어졌던 금강산과 그곳에 이차돈을 추모해 지었다는 자추사(지금의 백율사)도 이곳에 있다.
신라건국과 시조왕 박혁거세를 탄생시켰던 유서 깊은 땅이요. 불교의 공인과 번성을 이끌었던 성스러운 땅이기도 하다. 지금은 택지개발과 경주시청이전 등으로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경주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 경주역사문화도시조성을 위한 기회의 땅으로 또 다시 역사의 중심으로 평가받고 있다. 석탈해왕릉과 헌덕왕릉, 사방불, 숭신전, 표암재, 박바우, 알천수개비 등 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이차돈 순교 때, 목 떨어진 곳
동천은 본래 이 마을에 신라시대 왕에게 떠다 바친 유명한 샘(동천 東泉)이 있었고, 동천사(東泉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 ‘동천(東泉)’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동천(東川)’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 마을 앞 거랑을 동천(東川)이라 부른데서 연유해 ‘동천(東川)’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 거랑은 신라시대 이전부터 ‘알천(閼川)’이라 불렀는데 ‘동천(東泉)’과 혼용하여 알천을 동천(東川)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동천(東川)’으로 표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주로 ‘동치이’라고 불렀다.
동천은 석탈해왕릉이 있는 ‘아랫동천(중리)’과 그 위(동)쪽의 헌덕왕릉이 있는 ‘윗동천(상리)’, 북천다리 북편 도로변에 있는 ‘북천마을’, 철길 위쪽에 조성된 ‘대안마을’ 등이 자연부락에 해당하고 나머지는 1980년대 이후 도시개발에 의해 들어선 건물들이다.
윗동천(1통)은 군부대로 들어가는 길 동편, 헌덕왕릉 주변마을로 168세대에 475명의 주민이 주로 벼농사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다.
아랫동천(2통)은 석탈해왕릉 동쪽의 ‘중리’와 동천지구대 주변의 ‘박바우마을’로 구성되었으며 134세대에서 34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고, 이 가운데 농가는 30가구 정도이고 나머지는 빌라촌으로 대부분 직장인이다.
북천 북쪽에 있는 북천마을과 철길 동쪽의 대안마을의 경우는 도시화되면서 기존 자연마을의 비중은 미미한 실정이다.
현재 동천동은 총 40개 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9천200여 세대에서 2만6천600여명의 주민이 생활하는 큰 마을로 번창했다. 이 마을(웃동천, 아랫동천)의 최고령자는 웃동천에 사는 김정분(92 옥천댁) 할머니로 마을회관에 놀러 나올 정도로 건강하시다.
할배나무, 잎이 한꺼번에 피면 풍년
윗동천 아랫동천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윗동천’, ‘웃마을’, ‘상리(上里)’라고도 한다.
동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월 5일에 동제를 지낸다.
당나무 오래된 느티나무로 마을사람들은 ‘할배나무’라고 부른다. 당나무에 잎이 한꺼번에 활짝 피면 풍년이 들고, 반씩 나누어서 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원 할아버지 나무는 늙어 쓰러지려는 것을 받쳐 놓았고, 그 옆에 후계목이 7그루가 있다.
아랫동천 윗동천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중리(中里)’ ‘샛말’, ‘중말’이라고도 한다.
박바우 박바우 옆에 있는 마을로 ‘박암(朴岩)’, ‘표암(瓢岩)’이라고도 하며 아랫마을의 일부로 현재 동천파출소 부근이다.
동제 아랫동천은 해마다 음력 1월 7일에 동제를 지낸다.
당나무 오래된 땅버들나무로 마을사람들은 ‘할매나무’라고 불렀는데, 고사하여 느티나무를 후계목으로 다시 심었다고 한다. 북천마을 북천교 북쪽에 있는 마을로, 북천 가에 있다고 하여 ‘북천내’, ‘북천마을’이라고도 한다. 솥 공장이 있던 마을이다.
대안동(大安洞) 북천마을 동쪽, 철길 동편에 있는 마을로, 8·15광복을 맞아 일본과 만주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집이 없어 고생할 때, 당시 경주 읍민들이 후생주택을 지어 입주하도록 해서 생긴 마을이다. ‘대안동’은 크게 편안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후생촌(厚生村)’이라고도 한다.
동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동제를 지낸다. 당나무 마을 복판에 있던 수령 500년의 큰 느티나무가 고사하여 우주로얄 뒤에 후계목을 새로 심었으나 다시 죽어, 철도건널목 옆에 느티나무를 새로 당나무로 정했다.
알을 깨고 나온 ‘탈해’
▲신라 제4대 석탈해왕릉(脫解王陵) ⓒ야촌
금강산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 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의 능이다.
탈해왕은 용성국(龍城國 또는 多婆那國) 함달파왕의 아들로 왕비가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간절히 빌어 임신했으나 7년 후에 알을 낳았다.
이를 좋지 않게 여긴 왕이 궤짝에 알을 넣고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아진포(지금의 양남 하서)에 당도해 고기 잡는 할머니에 의해 키워진다. 궤짝을 발견할 때, 까치가 울었다고 까치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버리고 석(昔)으로 성을 삼았고, 궤짝을 열고 알을 깨치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했다고 한다.
탈해는 유리왕의 뒤를 이어 62세의 나이에 왕에 오른 뒤 23년 재위 끝에 죽어 성의 북쪽 양정구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수없지만 성의 북쪽이면 이곳으로 보는것이다. 1969년 사적 제17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석탈해왕릉은 위치와 지형상으로 볼때, 이곳 소금강산 산록에있는 것은 신라 초기의 고분군 권역인 시내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리고 봉분 규모가 신라초기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적을뿐 아니라 이른 규모는 통일신라기 이후의 형태라 볼수있다.
아울러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석탈해왕릉은 문무왕때 무덤을 파서 유골을 소상 만든후 토함산에 봉안하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미루어 능은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추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앞으로 사학자들의 많은 연구고증이 있기를 바란다.
▲숭신전(석탈해왕의 신주를 모신곳=경북문화재자료 제255호) ⓒ야촌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의 비명과 비각. ⓒ야촌
▲신라 제41대 헌덕왕능(사진=문화재 정보에서) ⓒ야촌
헌덕왕릉(憲德王陵)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능이다. 윗동천 동남쪽 동천동 산17에 있다. 이 능은 둘레에 병풍석을 두르고, 그 사이에 십이지신상을 양각하여 기둥을 세웠다. 본래 알천거랑이 이 옆으로 흘러 큰 물에 피해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제21대 영조 8년(1742) 8월 22일에 내린 큰비로 능이 동서로 약 44자 가량 무너진 것을 임금의 명에 의해 수축하고, 따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지냈다고 한다. 사적 제29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백률사(栢栗寺) 금강산 중턱에 있는 절로 신라 법흥왕 15년(528)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곳에 자추사(刺楸寺)라는 절을 짓고 그의 명복을 빌었는데 지금의 백률사다.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크게 지었으나 허물어지고, 지금은 조그마한 절이 되어 있다.
백률사에는 영험한 금동약사여래상이 있었는데 국보 제28호로 지정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불상에는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효소왕 2년(693) 3월 국선 부례랑이 말갈적에게 납치되어 친구 안상이 뒤쫓고 다른 낭도들은 왕에게 알렸다.
왕은 “피리와 거문고를 잘 보관하면 재액이 없어진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인가?”하고 천존고에 가보니, 그곳에 보관하던 피리와 거문고가 없어졌다. 왕은 창고지기를 옥에 가두고, 영을 내려 이를 찾는 사람에겐 큰 상을 내리기로 했다. 한편 부례랑의 부모는 날마다 백률사 부처님께 빌었는데 5월 보름날 불단에 피리와 거문고가 얹혀 있고, 불상 뒤에서 부례랑과 안상이 나타났다.
사연을 물으니, 오랑캐의 대도구라 집의 목동이 되어 대오라니 벌판에서 말을 먹이고 있는데, 피리와 거문고를 가진 한 중이 나타나 그를 따라 어느 바닷가에서 안상과 만나, 중은 거문고를 타고 부례랑과 안상은 피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고 했다.
이 말은 들은 왕은 백률사에 금·은그릇 다섯 개씩 두 벌과 베 3천 필과 가사 5벌과 밭 1만 경을 바치어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했다.
또 백성들에게는 3년 동안의 세금을 면해주고, 부례랑은 대각간으로, 그의 아버지 대립을 태대각간으로 삼았다.
그의 어머니 용보는 사량부 경정궁주로 삼았다. 안상을 대통에 임명하고, 창고지기도 사면하고 5급 벼슬을 내렸다. 그 해 6월 혜성이 나타나 일관에게 점을 치니, 피리(만파식적)에게 벼슬을 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더니, 혜성이 사라졌다고 한다.
피리에게 내린 벼슬 ‘만만파파식적’
굴불사(掘佛寺)터 백률사 아래 산기슭에 사방불이 있는 곳으로 굴불사 혹은 굴석사 터라고 한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되었으며, ‘굴석사(掘石寺)’라는 명문이 나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백률사로 행차할 때 땅 밑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땅을 파 보니, 둘레가 약 11m, 높이 3m 되는 큰 바위가 나왔다.
왕의 이 바위의 사면에 불상을 조각하게 하고, 절을 짓고 굴불사라 일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위 서면에는 아미타삼존, 동면에는 약사여래좌상, 남북에도 여러 불상을 조각했다.
보물 제121호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다.
▲사진자료 : 인터넷에서
사방불 탑신석(四方佛塔身石) 경주시청 사거리 북편 놀이터공원에 있는 탑의 몸돌이다. 사면에 불상을새기고 위아래로 튀어나온 부분에 연꽃 문양을 새긴 특이한 양식의 이 탑재는 통일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숭신전(崇信殿) 신라 제4대 탈해왕의 위패를 모신 전으로 석탈해왕릉 남쪽에 있다.
조선 광무 2년(1898)에 창건하고 1906년에 사액되었다.
숭신전 앞에는 1921년 세운 ‘신라석탈해왕비명(新羅昔脫解王碑銘)’의 비각이 있다.
본래 월성 석빙고 남쪽에 있었으나, 1980년 이곳으로 옮겼다.
● 알천제방수개기(閼川堤防修改記)
경주시 동천동(東川洞) 북천(北川) 경주포항간 산업도로와 보문단지와의 연결도로인 북안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을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이 있을것으로 생각되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1980년에 조사되었으며, 자연암석 3면에 해서로 음각되어 있습니다.
북천의 물길은 무장사지가 있는 암곡에서 덕동댐을 지나 보문 호수에서 머물면서 북천을 지나 예기청수에서 서천의 물과 합류 형상강을 이루어 동해로 흘려갑니다. 지금은 북천의 북안도로가 제방과 도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만 1970년 이전만 하더라도 하천의 범람으로 수시로 물길이 변하여 농지를 비롯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음을 아래 내용으로 알수 있습니다.
◇내용은 이근직 1998, '경주의 문화유산'을 참조 하였습니다.
본문 중의 정해년(丁亥年)은 조선 숙종(肅宗) 33년(1707)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모두 90자(字)로 음각되어 있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閼川西注邑基東 高擁木石奧自麗氏今又脩改歲維丁亥因勢利導水由古道磨峨記蹟垂之千億知府延安李公書全希天 聖經金命雄任基重贊成以孫汝義徐津金昌道鄭世禎僧渭性董役孫公主之色吏李震溟金始經.)
경주시 동천동(東川洞) 북천(北川) 경주포항간 산업도로와 보문단지와의 연결도로인 북안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을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이 있을것으로 생각되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1980년에 조사되었으며, 자연암석 3면에 해서로 음각되어 있습니다.
북천의 물길은 무장사지가 있는 암곡에서 덕동댐을 지나 보문 호수에서 머물면서 북천을 지나 예기청수에서 서천의 물과 합류 형상강을 이루어 동해로 흘려갑니다. 지금은 북천의 북안도로가 제방과 도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만 1970년 이전만 하더라도 하천의 범람으로 수시로 물길이 변하여 농지를 비롯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음을 아래 내용으로 알수 있습니다.
내용은 이근직 1998, '경주의 문화유산'을 참조 하였습니다. 본문 중의 정해년(丁亥年)은 조선 숙종(肅宗) 33년(1707)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모두 90자(字)로 음각되어 있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역]
"서쪽으로 흐르는 알천 물결에 읍성 동편 제방이 무너졌다.
나무와 석축으로 높다랗던 둑은 고려 때에 쌓은 것이다.
금년 정해년(1707)에 다시 개수하여 지형 따라 잡은 물 갈래는 옛길대로 물을 터 주었다.
(이에)여기 암면에 사실을 적어 길이 후세에 전하려 한다. 부윤 연안이공(인징)이 쓰고 전희천· 권성경· 김명웅· 임기중이 함께 도왔다.
손여의· 서진· 김창도· 정세정과 스님 위성이 공사의 책임을 맡았으나 실지로는 손여의가 주관하였고, 감독과 관리는 이진명· 김시경 등이 하였다."
사진및 국역자료 : 출처 :야생화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 금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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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시조 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표암 밝바위.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공의 탄강지 광림대의 유허비각이다.
표암(瓢岩) ‘박바우’, ‘밝은바우’, ‘큰 바위’, ‘박암(朴岩)’이라고도 하며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 알평공(謁平公)이 하늘로부터 이 바위로 내려왔다는 탄강설화가 깃든 곳이다. 이곳에는 공의 유허비와 재실 등이 있다.
신라 때 궁궐에서 이 바위가 마주 바라보여 좋지 않다고 하여, 박을 심어 덩굴이 바위를 덮어 ‘박바우’라고 했다고도 한다.
또 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가지고 온 박이 자라 바위를 덮었다고 하며, 혹은 그 박이 크게 자라 저절로 쪼개졌는데, 그 속에서 이 바위더미가 나왔다고도 한다.
또 어느 노파가 이 바위 밑에 박을 심었더니, 온 바위를 덮고 큰 박이 열렸는데, 그 속에서 옥동자가 나왔는데 이가 알평공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금강산(金岡山, 金剛山) 높이 143m의 매우 영검한 산으로 신라시대부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이곳에서 회의를 열면 반드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산의 남쪽 기슭에 탈해왕릉이 있고 서쪽 기슭에는 굴불사터 사면석불이 있으며 산허리에는 백률사가 있다.
신라 때에는 북악(北岳)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금강령(金岡嶺)’,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고도 한다.
박바우산 온 산이 바위로 되어 있는 탈해왕릉 서북쪽의 산. 박바우가 있고 경주이씨 시조의 비각과 재실이 있다.
‘표암봉(瓢岩峯)’이라고도 한다. 노송(老松)배기 여내밭골 서쪽에 있는 산으로 관창골 입구이다. 지난 날 노송이 있었다고 한다.
새딧산 윗동천의 동쪽 산으로 금학산 동쪽이 된다.
섶갓 섶나무가 많았다고 하는 윗동천 북쪽 산으로 금학산 줄기이다.
아리랑고개 지형이 꾸불꾸불하여 ‘아리랑고개’라고 하는 고개로 화장장 골짜기에서 용강리의 다불이 넘어간다.
질매재 지형이 질매(길마)모양으로 생긴 고개로, 동천에서 북군동으로 넘어간다.
진등 관창골의 북쪽에 있는 긴 등성이다. 너머에 북군동이 있다.
용두말랭이 아랫마을 이씨네 선대에 어떤 장군이 말을 먹이면서 말을 매던 곳이다. ‘용마등’이라고도 한다.
꼬불꼬불한 아리랑고개
관창골 옛날에 관청이 있었다고 전하는 중리 북쪽 골로 영검하여 요즘도 공 들이는 사람들이 와서 기도하고 있다.
‘무당골’이라고도 한다.
가부라정 중리 앞 들로 6지구에 편입되어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 있다.
능골 헌덕왕릉이 있는 골짜기로 윗동천 동쪽이 된다.
대밭골 대밭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배양골 서쪽 시립화장장 골짜기다.
대추밭골 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하는 골짜기로 가부라정들 동쪽, 군부대 사거리 동쪽이다.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 있다.
도독골 도둑이 숨어 살았다고 하여 ‘도독골’이라 하는데, 여내밭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문동곡 옻밭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문디이(나병환자)가 살았다고 한다. 군부대 뒷골짜기이다.
배앙골 옻밭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백양골’, ‘배양골’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향토예비군 교장이 들어서 있다.
어분골 배양골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여내밭골 관창골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옻밭골 옻나무가 많았다고 하는, 도독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건드린바우 박바우의 서쪽에 있는 큰 바위로 사람이 흔들면 건들거린다고 한다.
지수물 윗동천 가운데 있는 우물. 근처에 종이를 만드는 지소가 있어 이 물을 이용했는데 따라서 ‘지소물천“이라고도 한다.
보문저수지를 막은 후부터 물이 시원찮다고 한다. 지금은 아크릴로 덮어 놓았다.
동천(東泉) 이 마을에는 신라시대에 왕의 물을 떠갔다는 샘이 있는데, 그 부근이 옛 기록에 나오는 동천과 동천사(東泉寺)터로 추정된다.
주민들에 따르면 당나무 밑에 샘이 있고, 20여년전에 이곳에서 금불상이 출토되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지수물’이 동천이라고 한다.
고래전 윗동천 서쪽에 있는 고래실로 항상 물이 새기고 쪽박샘이 있었다.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 있다.
귀사릿들 대안동 북쪽에 있던 들로 ‘귀사래’, ‘귀살들’이라고도 했다. 지금 경주시청부근이다.
능골들 능골 아래에 있는 들이다.
동천보 알천개수비 앞에 있는 보다.
능골보 능골들에 물을 대는 보로 헌덕왕릉 뒤쪽의 보다.
시립화장장과 변전소 이전
대안마을에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이 사업이 빨리 시행되고 현재 진행 중인 알천북로 4차선 개설의 완공문제가 시급한 과제라고 한다. 그리고 시립화장장과 변전소를 이전했으면 한다. 마을 중심에 변전소 있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장만화(73 전 서울은행 지점장), 박헌오(58 전 경주시의원), 박용준(57 경주농협 상무), 한효우(55 예비역 공군 준장), 박헌열(53 서울시립대 교수), 손광우(51 SK 생산부장), 한협우(51 한화그룹 자원개발부장)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마을취재에 협조해 주신 오장환(1통), 강순진(2통) 통장님과 마을주민들에게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