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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 05. 12
■ 경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
● 일제의 침략도, 6.25 전쟁도, 천년을 이어온 경주의 아름다움과 그 정신은 빼았지 못했다. 전쟁직후인 1954년. 경주에 어린이 박물관
학교가 생겼다. 아이들에게 경주의 역사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학교에 대한 기대는 대단했다.
서울에 있는 문인과 학자들이 개교1주년 기념 축사를 녹음해 보낼 정도였다. 개교1주년에 아이들이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교가였다.
작곡자는 윤이상. 그는 부르는 방법을 설명한 녹음테잎까지 보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경주는 세계의 경주로 성장했고, 세계 문화유산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화려함의 이면에서, 경주는 영혼을 잃어가고 있었다.
천년을 간직해온 경주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경주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노서동. 10여기의 무덤으로 이뤄진 노서동 고
분군은 최초로 신라시대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이 있는 곳이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은 크고 작은 고분들은 경주의 상징이자,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경주의 얼굴이다.
그러나 땅에서는 고분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바로 앞에 들어선 한 주유소가 그 모습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근처의 황오 고분. 철책이 무덤의 목을 조르고, 주위에 쓰레기들이 널려있다.
고분은 쓰레기와 주차된 차들, 포장마차 리어카 등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다.
설 땅을 잃은 것은 무덤뿐이 아니다. 노서동에 있는 한 버스회사 주차장. 불상 하나가 콘크리트 담장안에 갇혀 있다.
불상의 얼굴마져 움푹 파였다. 원래 이곳은 신라시대 절터였는데, 2년전에 한 버스회사의 주차장이 됐다.
간이화장실을 불상옆에 세우고, 보호를 명목으로 콘크리트 담장을 쌓았다.
경주 서쪽에 있는 단석산. 산 한가운데 철제로 만든 거대한 유리 보호막이 세워져 있다.
지난 94년 문화재청이 바위에 새겨진 10개의 마애불상을 보호하기 휘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보호막을 씌운후 불상에 금이 가고, 비만오면 2-3일간 그 사이로 물이 새어나와 이끼가 낀다고 했다.
보호막을 씌워도 물이새자 95년엔 마애불 뒤쪽을 파서 배로수를 만들었다. 그러나 물은 계속 새어나왔다.
주지스님은 보호막을 만들기 전에는 물이 세지 않았다며 보호막의 기둥을 마애불상위에 무리하게 꽂아 바위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연에 세워진 노천불당이라 불리는 단석산 마애불상군. 그러나 2억여원을 들여 만든 보호막이 오히려 마애불을 훼손시키는 장본인이 되
고 있는 것이다. 경주 동쪽에 위치한 명활산성. 최근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신청한 지역이다.
명활산성 아래 위치한 보문리 고분군. 도시계획법상 사적지구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상태다. 이곳에는 크고 작은 고분들이 100여기 정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 리 고분군은 1916년 일제에 의해 부부총, 금환총, 완총의 3기가 발굴됐다. 그중 남자와 여자의 묘가 한 봉토 내에 발견된 부부총.
순금 귀걸이. 은제 팔찌, 구슬 등의 유물이 나왔다. 특히 여자의 묘에서 나온 길이 8.7cm짜리 금제귀걸이는 신라 귀걸이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국보 90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부부총은 최초로 발굴된 석실분이었다. 이것은 6세기에 유행한 것으로 돌로 방을 만들어 시신과 유물을 넣는 것이었다.
일제는 유물만 발굴하고 덮어버렸다. 마을사람들은 그때 고분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분바로옆 민가에서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일제는 1917년, 보문리 고분군중에 또하나를 발굴했는데, 그 위치는 알려지지 않
았다. 그런데 그 고분을 발굴하고 난뒤에 세운 비석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집 주인은 비석이 원래 어느 고분위에 있었던 것인지는 모른
다고 했다.
보문리 고분에서 또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확인됐다.
누군가가 고분위에 과수나무를 심어놓은 것이다.
심어놓았던 나무를 파간 흔적도 곳곳에, 보였다.
주변에는 신라시대 토기 편들도 널려 있었다.
바로 옆 고분위엔 수십 그루의 조경용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고분위에 나무를 심어 조경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나무를 심은 사람을 수소문하던, 취재팀은 근처에 한 조경업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분위에 나무를 심은 장본인은 바로 월성조경 이었다. 이들은 사적지내에 불법으로 가 건물까지 지어놓았다.
월성조경은 시에서 주관하는 공사에 가장 많이 참여한 회사였다.
동행한 시청문화재관계자는 심각한 문화재 훼손이라고 했다.
시청관계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이하의 벌금이 가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훼손현장을 확인한 시는 이후 월성조경에 원상복구조치를 내렸다.
경주의 문제는 개별문화재 훼손뿐 아니라 고도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곳곳에 고층아파트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오늘날, 경주를 있게 한 것은 자연환경이었다. 그러나 도시가 성장하면서 자연과의 조화가 깨져버린 것이다.
그러면 외국인들은 현재 경주의 모습을 어떻게 느낄까? 지난달 취재팀과 동국대 관광경영학과 박종희 교수 팀은 외국인관광객을 대상으
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대상은 유럽 ,미국, 중국, 일본 인 들이었고 외국의 역사도시와 경주를 비교했다.
조사결과 외국인 관광객들의 만족도는 전반적으로 높았다. 5점 만점에 평균 4점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건축과 역사적건축물과의 조화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 현대건물과 유적지와의 조화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건축과 역사적 건축물과의 조화에 대한 응답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다.
그중 역사도시가 많은 유럽인들이 가장 낮은 점수를 주었다.
경주는 천년동안 지속돼 온 지구상에서 유래가 없는 도시다.
우리 문화의 모태이자 한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신라시대 경주는 계획된 도시였다. 왕궁을 중심으로 주작대로가 뻗어있고, 그 양쪽이 동경과 서경으로 나뉘었다.
삼국유사는 당시 인구가 17만호, 100만 명 정도로 현재 경주의 6배에 달하고, 절이 별처럼 많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날아간다고 기록한
다.
경주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발굴 작업과 출토유물들은 경주의 신비를 하나씩 벗겨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천년도시, 경주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선도산, 명활 산, 남산사이에 위치한 경주에는 월성, 첨성대, 대릉원, 황
룡사지, 분황사, 무열왕릉, 안압지등 세계적인 유적지들이 집중돼 있다.
그리고 국보 22개, 보물 50개, 사적53개 ,141개의 지정문화재와 수백기가 넘는 고분들이 펼쳐져 있다.
살아있는 노천박물관인 것이다. 지난 6월에는 불국사, 석굴암에 이어 명활산성, 대릉원, 안압지, 월성, 남산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
청해 세계적인 역사도시의 면모를 과시했다.
경주는 가능성의 도시다. 천년을 이어온 수많은 유적들이 땅속에 묻혀있다.
그리고 연구가 계속될수록 옛 경주의 영역은 넓어지고 있다.
건축학자인 김석철 교수는 위성사진과 출토유물 등을 살펴본 결과, 옛 경주는 지금보다 4배정도 더 넓다고 추정했다.
신라 전성기의 경주는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버려진 도시가 됐고, 유물들은 역사속에 묻혀갔다.
버려진 경주의 가치를 발견한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고분은 문화재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였다.
우리보다 일찍 문화재에 대한 눈을 뜬 일본인들은 폐허가 된 불국사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석재와 수풀사이에 앉아있는 석굴암은 일본인들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취재팀은 경주에서 오랫동안 문화재조사와 발굴을 했던 한 일본인학자를 만날 수 있었다.
아리미쓰 교수. 올해 93세인 그는 일본 내에서도 조선고고학의 일인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총독부의 남산조사사업에 참여해 경주남산의 불적이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
1931년 대학을 졸업한 아리미쯔 교수는 조선고적연구회 경주연구소의 조수로 채용돼 경주에 가게됐다.
그는 경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리미쯔교수는 해방 후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고, 우리 손으로 한 최초의 고분
발굴이었던 호우총 발굴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하에 매장돼 있던 신라문화재들은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됐다.
일제는 1921년 금관총에서 최초로 금관을 발굴했다.
두 번째로 금관이 출토된 금령총. 신라시대 생활을 알 수 있는 금제허리띠, 금 구슬, 큰칼, 마구류, 그리고 신라 토기로서는 최초로 국보로
지정된 기마인물형 토기가 출토됐다.
1926년, 세 번 째 금관이 나온 서봉총. 일제는 발굴에 스웨덴의 황태자까지 초청했다.
고분에서 연이어 3개의 금관이 나오고 금관 장식, 귀걸이, 반지 등의 화려한 장식품에서 서역과의 교류를 입증해주는 유리그릇까지 출토
되자, 경주에 일본인들의 관심이 집중 됐다.
일제의 고분발굴이 이어지면서 조선인들도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경주 최고의 부잣집이었던 한 민가의 마당에 있는 석탑, 탑 옆에는 석등도 있었다.
석등기단에 12지신 상이 새겨져 있는 것은 드문 것이었다.
집안 곳곳에는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탑재와 주춧돌들이 있었다.
일제가 발굴한 고분에서 금관과 금장식품 등이 나오자, 경주 전역의 고분에서 도굴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문화재가 돈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탑을 폭파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항 리 5층 석탑은1925년 탑 안의 사리함을 꺼내려는 도굴꾼에 의해 폭파 됬고. 1932년에 복원됐다.
경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70년대부터 시작됐다. 1973년 천마총에서 금관과 금제모자와 장신구들이 쏟아졌다.
이때 나온 천마도는 신라시대 그림수준을 짐착케하는 획기적인 자료였다.
높이가 20M가 넘는 대형고분인 황남대총에서도 금관이 나왔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으로 고도성장을 시작하던 1971년, 경주개발 10개년 계획이 수립됐다.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의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정신을 함양한 다는 취지였다.
모든 유적과 유물을 사적지구로 묶고, 관광도시 개발을 위해 도시의 기반시설 확충 및 환경정비,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위락단
지 건설이 주된 내용이었다.
1973년 불국사 정화사업이 완료됐다. 겨우 명맥만 유지해오던 불국사가 우리 손으로 복원된 것이다.
그러나 경주개발의 뒤에서 파괴되는 문화재들도 있었다. 경주남산의 남리사지. 무너진 탑재들이 밭 한가운데 놓여있다.
마을주민들은 70년대 이곳의 탑재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남산에 있는 탑재를 불국사 근처, 구정동에 가지고가서 새로운 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구정동에 있는 3층 석탑. 이름도 안내판도 없는 탑은 지난 62년 경주 유적정화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 졌다.
취재팀은 탑 설계와 공사를 맡았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시청 교육과 직원으로, 탑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이 탑의 첫 번째 옥계석부분은 남산에서 가지고 온 것이 너무 낡아서 또다른 곳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했다.
탑 꼭대기는 만들어서 올려놨다. 70년대 이 후 경주는 급속하게 팽창했다.
곳곳에 건물과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개발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경주 북쪽에 위치한 황성동은 개발의 신호탄이 됐다.
지난 90년, 주공아파트 택지조성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규모 철기유적지가 확인됐다.
신라가 고대국가를 성립하기 이전인 3세기경에 형성된 철기 제작지와 철기 제작유구들이 나온 것이다.
발굴단은 처음엔 보존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주택2백만호 건설정책에 밀려 결국 보존을 포기해야 했다.
황성동 유적지가 있던 곳. 지금 주변에는 아파트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일단 주공아파트 공사를 허락했기 다른 곳도 허가를 내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황성동 주공아파트 건설은 경주 난개발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경주에는 수많은 아파트들이 건설됐다.
현재까지 470여개동, 27500세대가 들어섰다.
1995년 지방자치단체가 들어서면서 개발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경주시가 94년부터 추진해 오고 있는 경마장건설사업.1972억 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이다.
경마장이 들어설 지역은 명활산성뒤쪽 천북면, 물천리 손곡동 일대의 28만평. 지난 94년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됐는데, 토기와 기와를 생
산하던 가마터가 발견됐다.
유적지가 확인되면서 문화재청은 98년 5월이후 문화재발굴허가를 유보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자 상인들을 중심으로 경마장 건설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경마장이 경주의 침체된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주시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경주는 최근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부고속철도문제는 경주의 개발과 보존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과 장기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
다.
경주 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쪽 샘 지구.
쪽 샘 지구는 고분과 집들이 마구 뒤엉켜 있다. 전체가 사적지구로 지정돼 있어 집을 개축하거나 증축할 수 없다.
주민들은 심각한 재산권침해를 받고 있다며 이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담장인 듯 보이는 고분들. 그러나 고분 안에 쌓았던 돌들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고분위에 집이 들어섰다.담장공사를 하고 있는 한 주민. 집이 무너져서 수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사를 갈 수도 없다. 집을 내놓아도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이 무너진 경우도 있었다.
이집은 5년 전, 여름에 장마로 집이 무너졌고, 집주인은 아예 집을 버리고 떠났다.
발굴비용은 시공자가 부담하고 출토된 유물은 국가소유가 되는 문화재보호법 또한 시민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황오동에 있는 한 주택가 공터. 땅주인은 집을 짓기 위해 1억여 원의 발굴 비를 들여 발굴조사를 했다.
그러나 집도 짓지 못한 채 발굴비만 날렸다.
조사결과 적석목곽 층으로 확인됐고 은관, 귀 걸이 등이 출토됐기 때문이었다.
황남동의 정인환 씨 또한 집도 짓지 못하고 발굴비용만 썼다. 정씨는 고등법원에 소송을 했지만 패소했다.
정씨가 사용한 발굴비용은 인건비, 식비부터 원고료까지 2천4백60만원이었다. 법뿐만 아니라 예산도 문제다.
정부는 3년 전부터 쪽 샘 지구의 매입을 시작했다. 쪽 샘 지구 전체 매입 액은 5천억 원, 그러나 정부의 매입비용은 쪽 샘 지구와 다른 지
역을 포함해 1년에 9억원. 쪽 샘을 매입 하는 데는 5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동쪽에 위치한 동방동. 한 주택조합이 10년 전부터 11만평의 택지조성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런 발굴조사도 없이 진행됐다. 지난 7월, 3만m2이상 개발 사업에 대한 사전지표조사를 의무화하는 법이 제정되기 전에 이뤄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학자들이 수많은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조합측은 유물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취재팀은 동국대학 안재호 교수와 함께 현장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파헤쳐진 공사현장의 단면에서 토기조각이 확인됐다. 유물과 버려진 흙들이 빗물에 쌓여 형성된 유물포함층도 보였다.
그런데 현장을 확인한지 2시간 남짓, 회색빛을 띄고 있는 토기들이 박혀있는 곳이 발견됐다.
안 교수는 이 일대가 3세기 집터라고 했다. 새로운 유적이 확인된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 개발논리. 유물을 외면하고 심어지 훼손하게 만드는 문화재보호법과 부족한 예산. 이 모든 것이 경주를 위
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프라가 준비돼 있지 않는 상태에서 세계 문화유산은 걷 껍질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의 역사도시, 나라. 지난 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8세기 일본의 수도였던 평성경. 일본정부는 70년 전 이곳에서 유물이 발견되자 이 지역전체를 매입했다.
1959년부터 발굴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현재 이곳에서는 배수로와 연못 발굴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데 주로 목간과 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평성경은 주민들이 지켜낸 것이었다. 전시관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건설하려는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건설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나라는 유적은 물론 주변 환경까지 보호하고 있다.
중요문화유산이 있는 지역은 주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완충지대를 각 유산의 단절을 막기 위해 역사적 환경조정구역을 설치한다.
나라는 대부분의 유적지를 문화재보존지역으로 설정하고 주변을 모두 공원으로 만들었다.
일본도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논란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1966년에 나라를 비롯한 교토, 가마꾸라,아스카에 고도보존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발굴후 출토된 유물은 국가가 소유하지만 발굴 비는 보조해준다.
나라를 역사도시로 가꾸는 원동력은 시민들의 힘이었다.
지역주민들과 얘기를 나누는 집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야기의 집. 도시 만들기 센터라는 한 시민운동단체가 나라의 전통가옥을 복원해 놓
은 것이다.
나라 전통가옥은 토방이 넓게 자리하고 집구조가 좁으면서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있다.
그리고 토방 한쪽에 아궁이가 설치돼 있다. 도시 만들기 센터는 지난 79년 변호사, 건축가, 공무원, 교수 등 20여명이 모여 없어지는 나라
의 전통을 복구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이 단체가 강조한 것은 문화재는 시민이 중심이 되서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선 도시 만들기 센터는 역사도시라면 지역에 뿌리를 내린 독자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라의 전통민가 가꾸기 운동을 펼쳤고 사람들이 동참했다.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나라의 전통민가가 통풍과 채광
이나 공간 활용에 훨씬 좋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라의 전통 민가들은 마을전체의 환경과도 잘 어울렸다.
이 도로는 도시 만들기 센터와 주민들이 원하는 건축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 도시 만들기 센터는 어떤 도로가 전통민가와 어울릴지 토론회를 개최하고 주민들을 직접 방문해서 물었다.
그리고 한 자동차회사에서 600만 엔을 지원받아 모형과 시안을 만들었고. 시 도시계획과에 가지고 갔다.
시민들의 노력으로 이제 나라 전통민가 들은 관광지가 됐다. 기념품가게, 미술관, 자료관등이 이곳을 나라현 정부는 문화유산답사코스
로 개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시민이 정부의 개발방향을 바꿔놓은 것이다.
오는 12월 세계문화유산결정을 앞두고 있는 남산. 천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남산. 40여개의 골짜기다.
수많은 불상과 탑들이 그렇게 앉아있고, 그렇게 서있다. 산 그대로가 살아 숨쉬는 야외박물관이다.
그러면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이들은 평가보고서에서 3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우선, 100m로 돼 있는 남산주변의 완충지대를 확대할 것. 남산국립공원자체를 확대할 것.
그리고 동해남부선을 옮길 것을 요구했다.
경주시는 최근 경부고속철도공사와 연계해 문화유적 지구를 통과하고 있는 동해남부선과 경주 역을 이전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경주역문제는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있다. 경주시는 이전한 경주역부지에 새로운 시청사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민단체나 학자들은 경주역 이전을 고도의 복원과 보존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가 제시한 남산의 완충지대 확대 조건은 거꾸로 가고 있다.
남산자락 바로 앞까지 호화주택들이 지어졌다. 남산 옆에 음식점과 유흥업소들이 밀려들고 있다.
곳곳에 민 묘가 성행하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선다. 남산기슭에는 교도소까지 있다.
세계문화유산 남산의 숨겨진 얼굴이다.
출처 : www.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