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팔자(山八字) 물 팔자(八字)
노래 이성애(백년설 / 1940년 10월)
*** 산팔자 물팔자 *** 이성애
1.산이라면 넘어주마 강이라면 건너주마
인생의 가는 길은 산길이냐 물길이냐
손금에 쓰인 글자 풀지 못할 내 운명
인심이나 쓰다가자 사는대로 살아보자
2.얼라며는 얼어주마 녹으라면 녹아주마
인생의 가는 길은 봄철이냐 겨울이냐
그 님도 참사랑도 믿지 못할 세상에
속는대로 속아보자 이럭저럭 지내보자
백년설(白年雪)
1915년 ~ 1980년 12월 6일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한국의 가수.
본명은 이갑용(李甲龍), 이창민(李昌民)이다.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여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다.
1938년 일본에서 〈유랑극단〉을 취입하여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두견화 사랑〉, 〈마도로스 수기〉 등을 연속 유행시켰다.
대표곡은 1940년 발표되어 이후 오랫동안
널리 불린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이며,
이 밖에도 〈삼각산 손님〉, 〈고향 길 부모길〉,
〈남포불 역사〉, 〈눈물의 백년화〉,
〈산팔자 물팔자〉, 〈천리정처〉, 〈아주까리 수첩〉
등 히트곡이 많이 있다.
1940년대를 대표하는 남자 가수로 활동했다.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모은 남인수, 김정구,
진방남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편이라면, 백년설은
음정을 흔들어 구수하게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친근한 맛을 주는 백년설의 창법은 서민적인 취향의
노래와 잘 어울려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했다.
1941년지원병제가 실시되면서 〈아들의 혈서〉,
〈혈서지원〉, 〈위문편지〉, 〈지원병의 어머니〉, 〈즐거운 상처〉 등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친일 가요를 다수 불렀다.
이 가운데 조명암이 작사한 〈혈서지원〉은 혈서를
쓰면서까지 지원병이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며
후렴구에는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라는
가사를 담고 있어 군국가요 가운데서도 친일성이 농후하다.
백년설은 남인수, 박향림과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명단 음악인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백년설이 일제 강점기 말기에 군국가요를
부른 것은 전쟁 지원을 위한 총력 체제 하에서
인기 가수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설혹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그의 예술 인생과
공적을 함께 논해야 할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1958년 대한가수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지냈으며
1961년에는 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3년에 은퇴했다. 가수인 심연옥과 결혼[5]한
뒤 1978년에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함께 이민을
갔으며, 2년 후인 1980년에 미국에서 사망했다.
고향 성주에 생가가 남아있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군민노래자랑 성격의 백년설가요제 추진이 백년설의
친일 경력으로 인해 몇차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만포선은 평안남도 순천시에서
자강도 만포시까지 연결된 철도로서
총연장 303.4㎞. 1931년 순천에서 착공하여
1941년 모든 구간이 개통되었다.
1941년 10월에는 압록강을 가로지르는 만포교가
준공되어 만주 지안[輯安]까지 연결되었다.
철로는 청천강과 장자강 기슭을 따라
우리나라 서북산간지대를 남북으로 통과한다.
순천을 기점으로 중평-용원-개천-구장-북신현-
구현-고인-운송-전천-별하-강계-안찬-건하 등을 거쳐 만포에 이르며,
특히 자장삼강선·강계선·팔원선·평덕선
등과 이어져 내륙지대를 연결해준다.
이 철도는 일본이 새로운 식민지 건설과 평안북도
내륙의 천연자원 개발을 위한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다.
평안북도 내륙지역은 기후가 한랭하고 지형이
험준해 개발이 부진했으나 이 철도의 부설로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과거에는 묘향산맥·적유령산맥·강남산맥·자강고원·
독로강·후창강·자성강·충만강 및 남사수 유역
등의 산림지대에서 생산된 원목을
압록강 수운을 이용해 신의주까지 뗏목으로 운반했으나,
만포선이 개통되면서 원산지에서 직접
제재해 각지로 운반하게 되었다.
1948년에 명문-고인 간이 전철화되었으며, 1975년에는
희천-고인, 1980년 개천-희천, 고인-만포 구간이 전철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