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경에 투영된 문학적 서정성과 그 가능성에 대한 기대]
김상철 (월간 미술세계 주간)
원칙적인 의미에서 서양회화가 서사(敍事)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동양회화는 일정한 문학적 서정성(抒情性)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고전적인 미술사는 바로 이러한 서사와 서정의 심화와 발전과정에 대한 기록인 셈이며,
이는 현대미술에 이르러 점차 그 내용이 희석되어 상호 융합되어 변화하게 된다.
이른바 현대 한국화가 전통적 심미체계를 기조로 한 현대적 조형의 수용 결과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서사와 서정으로 대변되는 두 가지 상이한 심미체계의 융합과 절충에 다름아닌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백범영의 작업은 전통적인 심미체계와 조형방식을 견지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수묵을 기조로 한 표현에 담채를 더하는 방식이나, 엄격한 필도(筆道)를 드러내는 조형방식 역시 그러하다.
더욱이 그것이 동양회화 전통의 종주(宗主)의 자리를 점하고 있는 산수를 표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작가는 온전히 전통적이고 아카데믹한 방식을 견지하고 있음이 화면 곳곳에서 쉽게 목도되는 바이다.
세태가 현대라는 가치를 앞세워 실험적이고 새로운 표현이라는 것을 화두로 삼고 있는데 반하여
작가는 오히려 스스로를 엄격한 전통의 틀에 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전통이라는 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심미가치와 조형경험을 축적하며 그 내용을 풍부히 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한 작가의 작품을 전통적 혹은 현대적이다라고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평가일 것이다.
대개 이러한 평가와 판단은 단지 그것의 형식만을 두고 살펴볼 때 나타나게 되는 그릇된 것이기 십상이다.
작가의 작업 역시 비록 고전적인 산수의 형태와 지필묵이라는 전통적인 조형수단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작가가 지향하고 있는 것이 단지 고전적인 것의 추수(追隨)인가 하는 점은 보다 신중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근자에 들어 산수라 함은 대개 실경산수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수라는 말 자체가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이상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그것이 요구하는 기준은 그저 현장재현의 일차적인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를 극히 형이상학적인 가치관을 전제로 성립되는 수묵을 통해 표현해 낼 때
현장성만을 강조한다면 그 자체가 모순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릇 그것이 산수라 불리는 것은 모두 일정한 관념성을 지니게 마련이며,
이러한 관념의 내용은 작가의 총체적인 것의 반영을 통해 드러나게 마련이다.
굳이 화실에서 벗어나 산천을 주유하고 명승을 관람하는 것은 바로 대자연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하여 그 기운을 포착하고
자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현장에 대한 답사와 사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올바른 산수경을 구축하기 위한 준비과정과도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실경을 전제로 하고 있음이 여실하다.
공간의 원근을 나누고 사물의 대소를 구분하며 공간을 구축해 나아가는 방식은 다분히 합리적인 것이다.
더불어 흐트러짐을 경계하는 단호한 필치와 군더더기 없는 화면의 운용은 각별히 인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작가가 그간 줄곧 견지해 왔던 것이기도 하다.
그럼으로 작가의 화면에는 호방한 묵운(墨韻)의 여운보다는 정연하고 단정적인 기세(氣勢)가 두드러졌었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 역시 이러한 이전의 작업방식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특별히 목도되는 변화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여유로워진 수묵의 운용이다.
필(筆)은 산천의 골(骨)을 구축하고, 묵(墨)은 육(肉)을 형성하는 것이라 비유한다면,
작가의 작업은 바야흐로 이들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자신만의 산수를 구축해 나아가고 있는 과정이라 풀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에 뜨이는 변화는 바로 작가의 산수에서 전해지는 문학적 서정의 내용이다.
작가는 분명 실경을 전제로 하지만, 이의 주관화 과정에서 섬세한 문학적 감성을 더하고 있다.
<분우(盆雨)>, <관음(觀音)>이나 <대춘(待春)> 같은 작품의 명제도 그러하거니와
전체적인 화면의 운용 역시 경직된 실경의 한계에서 벗어나 주관적인 경영의지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그저 보고 즐기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이상화되어 합일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산수라 할 것이다.
이는 작가의 향후 작업을 가늠함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변화의 단서라 여겨진다.
그간 일정 기간 지속된 실경산수가 스스로의 매너리즘에 빠져
마땅한 타개의 방편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물론 작가의 작업은 여전히 실경의 도식적인 시각과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가 드러내고 있는 서정의 내용들 역시 아직은 그 뜻을 되새겨 헤아림으로써
비로소 깊고 그윽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회의(會意)에 이르렀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작가의 관심과 지향이 자연의 재현이나 산수에 대한 장인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만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산수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비록 실경의 그것에서 일정부분 벗어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는 결국 엄정한 필도와 합리적인 공간구성이라는 작가의 작업 특성으로 반영되어 표출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실경과 산수, 그리고 풍경 등의 관계에 주목한다면
이러한 합리적인 화면운용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작가가 오늘의 산수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여야 할 부분에 대한 보다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이해를 더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실경의 군더더기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의 화면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경계에 들 것이라 여겨진다.
작가가 화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작업에 대한 진지함과 표현에 있어서의 엄정함은
이러한 기대를 담보하는 가장 실증적인 근거일 것이다.
더불어 신작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문학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보다 유연한 산수 해석은
작가의 작업이 새로운 지평에 들고 있음을 말해주는 유력한 단서라 할 것이다.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사생에 의해서는 단지 산천의 골격만을 얻을 뿐이며,
만약 산천의 기운을 얻고자 한다면 눈을 감고 깊이 사색하여 그 정신을 깨달아야 한다.”라는
황빈홍(黃賓虹)의 말은 지금의 작가에게 필요한 충고일 것이다.
월전송(月田松) / 212 x 150cm / 한지에 수묵담채 / 2008
조춘만경(早春萬景) / 147 x 141cm / 한지에 수묵담채 / 2008
등척망상운(登陟望祥雲) / 70 x 137cm / 화선지에 수묵담채 / 2008
난지도패총(蘭芝島貝塚) / 137 x 70cm / 화선지에 수묵담채 / 2008
망월(望月) / 70 x 68cm / 화선지에 수묵담채 / 2008
송음진하(松陰鎭夏) / 70 x 68cm / 화선지에 수묵담채 / 2008
흑도(黑濤) / 70 x 69cm / 화선지에 수묵 / 2008
추성(秋聲) / 45 x 69cm / 화선지에 수묵담채 / 2006
청산(靑山) / 52 x 45cm / 화선지에 수묵담채 / 2007
한림명월(寒林明月) / 70 x 45cm / 백설지에 수묵 / 2004
관음(觀音) / 70 x 69cm / 냉금지에 수묵담채 / 2008
삭풍(朔風) / 212 x 150cm / 한지에 수묵담채 / 2008
소생(蘇生) / 70 x 69cm / 화선지에 수묵담채 / 2008
관음(觀音) / 70 x 204cm / 화선지에 수묵담채 / 2008
춘효(春曉) / 139 x 137cm / 화선지에 수묵담채 / 2008
* 촬영을 허락 해 주신
백범영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