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황실(皇室)은 고대로부터 궁중(宮中)에 가라가미(韓神)를 받들어 모시고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가라가미 마쯔리(韓神祭)를 지내 오고 있다.
서기 927년 당시 국무총리격이었던 후지와라 다다히라(藤原忠平)가 편찬한 연희식(延喜式)에는 신격(神格)에 따라 제사(祭床)에 올리는 제물의 종류와 제사의 절차가 자세히 쓰여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연희식이 제정될 당시 전국에서 모셔지는 기년제신(祈年祭神)은 전부 3132분이 였는데 그중에서 가라가미(韓神)와 소노가미(園神)를 합친 세분 신(神)만은 신격(神格)이 가장 높은 까닭에 특별히 궁내성(宮內省)에 모시고, 최상급의 제물을 바치도록 규정해 놓았으며, 봄-가을 두차례 가라가미 마쯔리를 모시도록 했다는 점이다.
일본 학자들은 가라가미 마쯔리는 중세때부터 쇠퇴하여 근년에는 폐지됐다고 사전마다 써놓고 우겨대지만 그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왜냐하면 근년에 와서는 봄에 가라가미 마쯔리(韓神祭)를 지내던 2월21일을 일본의 건국기념일로 제정해 놓고 황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축제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천손이라고 하는 일본황실이 가라(加羅=伽倻)에서 온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아니라면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개척한 일본열도가 독립하여 스스로 '야마토(日本)’라고 일컫기 시작한 것은 서기 663년 백제가 라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부터다.
‘야마토(日本)'는, 원래 ‘위지’한전(韓傳)에 기록돼 있는 야마국(邪馬國)을 가르키는 이름이며 경북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번영한 가라(加羅=伽倻)의 종주국 (宗主國) 우가야(上伽倻)를 지칭한다.
즉 자치령(自治領)이 되어 일본열도에 살게 된 그들은 종주국 ‘우가야’를 계승하는 나라임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사례가 있다.
요시다도고(吉田東伍)가 펴 낸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의 (국호론(國號論))과 명치(明治) 33년 1월에 발간된 역사잡지(歷史雜誌)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日本’이라는 국호는 원래 한국인들이 일찍부터 써온 것인데, 우리나라가 그 이름이 아름답기 때문에 국호로 정했다.
(伴信友)*‘日本’이라는 문자(文字)는 상고(上古)로 부터 사용해온 (히노모도)라는 말에 한자를 충당해서 쓴 것이며‘日本’이라는 이름 그 자체는 삼한(三韓)사람들이 쓰기 시작한 것이다.
(星野恒)*‘日本’이라는 국호는 원래 한국인들이 쓰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 국호로 더욱 적당하기 때문에 만세불변(萬世不變)의 호칭이 됐다.
(木村正辭) 메이지(明治)시대의 뛰어난 석학(碩學)들이 입을 모아 증언(證言)하고 있듯이 '日本'이라는 이름은 우리민족이 오래 전부터 써 왔다.
그런데 백제의 속령(屬領)이던 열도 사람들이 독립한 때부터 일본으로 국호를 삼았음을 알 수 있다.
'日本'이라고 한자로 쓴 것을 그 당시에는 '야마터'라고 읽었었는데 근세에 한자음(漢字音)으로 읽게 되면서부터 그것을 소리바꿈한 ‘닙뽕’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니혼’이라고 발음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메이지(明治)초기에 일본정부는 그것을 바로 잡아 ‘닙뽕’이라고 고쳐 발음하도록 긴급 결의(決議)한 적이 있다.
그 후 공식문서(公式文書)에는 ‘닙뽕(Nippon)’이라고 쓰지만, 일반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니혼(Nihon)’이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이야 어찌됐든 긴 넋두리는 이만 접기로 하고 이제부터 가라족(加羅族)이 독립하여 ‘야마토(=일본)’을 세우기까지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는지 1만년 내지 1만2000년에 걸친 그 오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하기로 하겠다.
그러자면 먼저 ‘가라족(韓族)’이라고 불리우는 우리민족이 언제 어디서 형성 됐는가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우리 민족의 형성) 도대체 우리 민족의 고향은 어디였을까?우선 그것부터 생각해 보자.그러자면 먼저 현대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언제쯤, 어디에 나타났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학자들은 ‘아프리카’에 처음 나타난 원시인이 ‘유럽’으로 진출한 때를 지금으로부터 약 10만년쯤 전이라고 한다.
그들이 진화를 거듭해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불리워지게 되는데, 현대인과 생김새가 거의 비슷한 그들은 지금의 ‘터키’와 ‘이라크’지역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약 3만5000년전 쯤 것으로 추정되는 그들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현대인과 같은 언어생활은 하지 못했음이 확인됐다.
서로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하자면 혀가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도록 인후(咽喉)가 넓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후두(喉頭)는 현대인보다 높게 자리잡고 있었던 탓으로 인후(咽喉)가 좁을 수밖에 없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현재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따뜻한 애정에 넘치는 가족생활을 하고 있었음도 확인됐다.
이라크의 ‘샤니달’동굴에서 발견된 무덤은 여러 가지 들꽃으로 장식됐던 사실이 주변 흙에서 채취된 많은 꽃가루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네안데르탈인은 비록 현대인과 같은 정도로 복잡한 발음으로 구성된 말은 못할 망정 가족사이의 애정을 교환할 정도의 원시조어(原始祖語)는 쓰고 있었음이 짐작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현대인의 신생아도 태어났을 때는 네안데르탈인과 다름없이 후두(喉頭)가 높으며 인후는 좁다.
신생아의 후두(喉頭)가 낮아지고 인후(咽喉)가 넓게 되는 시기는 다소의 개인차는 있지만생후 2년 쯤 되어 어지간한 발음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이 사실로 미루어 아기가 엄마의 입 움직임을 쳐다보면서 엄마의 말을 흉내내려고 애쓴 노력이 아기의 후두를 자극한 결과 인후가 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3만년에서 3만5천년 쯤 전에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네안데르탈인들도 생활환경에 큰 변동이 생긴 것에 자극이 되어 딴 사람들과의 협동을 가능케 하기 위한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에 그것이 후두를 자극하여 신생아처럼 인후가 넓어져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을 자극시켜 그들의 생활활동에 대변동을 일으키게 한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재배생활의 시작이다.
원시생활을 위한 활동의 대부분은 수렵과 채취에 의한 식량확보였는데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계절의 변동과 날씨 불순으로 짐승이나 식물의 채취가 여의치 않을 때는 심한 굶주림과 싸워야 했고 그 때문에 유아의 사망률은 극도로 높았다.
그런 그들이 식물을 재배하여 식량을 마련하는 방법을 터득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겠는가. 그것은 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킨 것 같은 사치스러운게 아니고 식생활의 근본을 바꿔준 대혁명이었으니 어떠했겠는가? 지금은 농사를 위한 장비가 있어서 많이 나아졌지만 청동기시대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인 시대에 부부만의 힘으로 산야를 개간하여 식물을 재배한다는 것은 이만 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자연히 다른 사람들과의 협동이 필수가 됐다.
그에따라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절대조건으로 등장한다.
네안데르탈인들에게 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일깨운 것은 바로 재배생활을 위한 협동작업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은 3만-3만5천년 전인데 보리농사는 네안데르탈인들의 주된 생활지역이 였던 아나토리아 고원지대에서 시작되어 그 농법이 정착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이라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즉 네안데르탈인이 지금과 같은 말을 쓰게 된 때는 3만5천년-1만년전 사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민족이라고 부르는 끈끈한 집단이 형성된 것도 식물재배가 시작된 때와 평행했다고 봐도 큰 잘못이 아닐것이다.
(가라민족(韓民族)의 탄생)원시인들에게는 자연의 모든 것이 경이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것이 원시신앙을 사람들의 마음에 싻트게 했다.
식물재배 시대가 시작되면서 자연적 추세로 만물을 키워주는 태양을 숭배하는 태양신앙족(太陽信仰族)들이 많아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 가라족(韓族)이다.
‘가라’의 어원은 ‘하라=태양’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태양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는 데서 비롯된 말인데, 지금은 ‘하라=태양’를 ‘해=태양’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된 까닭을 잠시 설명해야겠다.
사국시대(四國時代·高句麗·加羅·百濟·新羅時代)에는 ‘바다라’라고 하던 말이 지금은 ‘바다(海)’가 되고 '가라!' '해라!' '둬라!' '서라!'등의 말들은 각각 '가!' '해!' '둬!' '서!'라고도 한다.
‘하라’(=태양)도 그와 같은 이유로 ‘라’소리를 잃고 ‘하’(=태양)가 된 다음 ‘아기’-‘아비’가 각각 ‘애기’(幼兒)-‘애비’(父)로 모음교체된 것처럼, ‘하’(=태양)도 지금은 ‘해’(=태양)으로 발음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해’(=태양)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분은 왜 우리가 어린 자식을 ‘아해’(=어린 해-태양)이라고 하며 처를 ‘안해’(=안에 있는해-태양)라고 부르는지 생각해 보면 우리가 스스로와 가족 구성원을 모조리 ‘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맞춤법으로 ‘안해’(=안에 있는 해-태양)를 ‘아내’라고 적고 ‘아해=어린해(태양)’에서 소리 바꿈된 ‘아히’를 ‘아이’라고 표기하는데, 그것은 어원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잘못이다.
이와 같은 요새 맞춤법의 잘못은 적지 않지만 여기서는 말할 것이 못된다.
본론으로 돌아가자.이와 같이 우리는 예로부터 스스로 태양의 자손인 하라족(태양족)이라고 자처해왔다.
그런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 조상은 해(태양)가 있는 곳으로 동쪽으로 향해 먼 행로에 올랐다.
우리는 몽고를 거쳐 중국 동북부를 흐르는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에 이르러 단국(檀國)을 세운 것은 보리재배가 정착하기 이전이니까 아마도 1만5000년에서 1만2000년 사이인 듯 싶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첫 임금으로 모시는 분을 단군(檀君)이라 부른다.
그러나 단군은 어느 한사람에게 붙여진 고유명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한문자로 쓴 ‘檀’은 우리말로 ‘박달’인데 그 어원은 ‘밝달’(=밝은 땅/해의 땅) 즉, ‘하라족의 나라’(=檀國)을 뜻한다.
‘밝’은 ‘태양빛’을 상징하는 말이며 ‘달’은 ‘양달=陽地’ ‘음달=陰地’ 할때의 ‘달=땅(地)·곳’이다.
따라서 ‘단군’(檀君)은 ‘가라족의 나랏님’이라는 뜻이다.
‘하라족=태양족’이라고 하던 우리가 ‘가라족’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단국(檀國)을 세운 뒤부터인듯 싶다. /박병식(한-일어원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