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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항목 |
천사 유치원 출신 |
우덜 대부분 99% |
적극 대응책 |
머리 헤어 스타~일 |
머리카락이 길다 |
박박 또는 삼고머리 |
머리 안 자르면 추월 가능 |
가방 (니꾸사꾸) |
서울 최신 밀수품 |
재생가방, 책보 |
인맥 총동원 밀수한다 |
상의 (웃 도리) |
깃이 있는 양복형 |
독고리 스웨터형 |
가을에 쌀 담보 제시 |
하의 |
벨트형 |
깜장 고무줄형 |
장롱 뒤져서 나온 돈 내께 |
양말 |
긴 무릎 타이즈 양말 |
짧은양말, 구멍난 재생 |
잘 보이지 않으므로 무시 |
신발 |
구두, 운동화 |
운동화 1 : 고무신 9 |
천을 쒸워 운동화라고 우긴다 |
몽타쥬 |
반질,, ,반질 |
꺼칠,, 꺼칠 |
반찬용 오이 감자를 조 진다. |
[ 공부의 질 ]
1학년인가~? 2학년인가~? 암튼 선생님이 미술시간에 종이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보라 하십니다.
나는 동네에서 하던 대로 우리 모두 제일 자신있는 “딱지접기” 신공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딱지”는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어도 더 가지고 싶어 하던 모든 남자아이들의 로망입니다.
그런 나와 철저하게 비교되는 내 옆 짝꿍 녀석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가위로 반원모양으로 자른 후 밑면을 둥글게 자른 후 말 얼굴모양과 꼬리모양을 양쪽에 붙여 균형을 유지시켜 마치 시소처럼 좌, 우로 흔들거리며 움직이는 말 모양 종이접기 신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니를 보았나,,,, 어린것이 그때 벌써 바란스(균형)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 ?
손 끝으로 톡~ ! 건드려서 말이 살아 움직이듯 좌우로 여러번 흔들리다니,,,,,,
이런 줸장 세미 오토 시스템 ,,,,
그 친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첨단 기술의 습득과정을 “너 이거 어떻게 알았냐~?”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그 친구 왈
“천사 유치원에서 배웠다~ !"
ㅠ,ㅠ
아, 이런 멘붕 ~ ! 이래서 선행교육이 중요하구나,,,,,
저는 그 당시 받은 지적 충격으로 지금도 머리가 지끈 거릴 때가 있습니다. 아주 가끔,,,, ㅠ,ㅠ
내게 바란스와 세미 오토를 전수 하여준 친구,,,
초등학교 입학 후 가장 먼저 내 하드 디스크에 저장 기억된 이름 “이경진” 친구였습니다.
무슨 인연이 그리도 질기었는지 중학교 때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친구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가 서산초등학교 친한 동창 친구 사이였으며, 그런 이 친구와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댕기게 됩니다.
3. 한 여름밤의 꿈.
나의 기억 저 너머에 2학년 여름 방학 때로 가물가물 합니다만, 문화적인 혜택이 거의 없었던 서산에서 햇구멍 메면(태양이 지면) 서산 시내 일부 중심가를 제외한 대부분은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나마 상표도 없는 군용건전지를 어렵게 구하여 라디오라도 청취 할 수 있다면 그는 바로 문화 혜택자였습니다.
그 당시 서산 시내에 “성남극장”(현, 진양 아케이트)이라는 극장이 있었습니다.
돈이 귀하던 시절 “용가리” 영화가 보고 싶었지만 서산 시내에서 가장 밝은 극장 앞에 밝혀진 환한 전등 불빛 아래에서 어른들 틈에 치여 영화 포스터를 바라보며 상상을 하여 봅니다.
극장 안의 영화 상상을,,,, 내 상상속의 시네마 천국인 게지요.
그런 어느 날 대낮부터 트럭 한 대가 지나가며 시끄럽게 방송을 해댑니다.
“오늘 저녁 서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무료 영화 상영을 하니 김칫국에 밥 말아 먹고 모두 와서 영화 보시라” 고 이게 웬 떡 입니까~?
동네 꼬마 녀석들의 마음은 벌써 국민학교 운동장에 가있습니다.
주섬 주섬 고무신 신고 툇 마루를 박차고 우덜은 고무신 바닥 태우는 냄새를 내며 냅다 내달립니다.
운동장에서 우덜은 맨 앞에 앉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나마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인파에 밀려 길 잃어버리거나 집 잃어 버리는 일 따윈 두 번째입니다.
내달리는 우덜 앞에서 걸리적 거리다가 부딪치면 전적으로 그들 상대방의 과실이 100% 입니다.
그렇게 나지막한 황토 흙담의 학교 운동장에 도착 합니다.
“우쒸~ ! 많이도 왔네,,,,”
“어제 올 껄 그랬나~ ?”
“암튼 꽁짜라면 양잿물도 마실 사람들,,,,,,”
그만큼 그시절엔 볼거리가 없었겠지요.
물론 명절때 즈음에 어김없이 매년 방문하는 제비들처럼 “동춘 써커스단”도 있지만 돈을 내야했지요.
우리 친구들중에는 엉아들 따라 비공식 무료입장의 개구멍 출입 선수들도 있지만,,,, 요기까지.
맨 앞은 고사하고 어른들 틈에 끼어 서로의 땀 냄새를 풀풀 풍기고 앉아 플라타너스 나무사이로 펼쳐진 광목천 스크린을 기대에 찬 눈으로 주시 합니다.
조금이라도 불빛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손바닥 만 한 크기의 나방과 각종 날벌레들 잠자리,,, 가끔 교실 천장 속 에서 사시던 야행성 박쥐라도 한 마리쯤 쓱 날아가 주시면 압권 이지요.
우덜이 댕기던 학교의 교실은 나무판자에 검은 아스팔트 콜타르로 방수 처리된 일본식 교사동이었으므로 외부 환기용 구멍과 천장 속 틈에 박쥐님과 왕거미, 쥐님들께서 우리와 항시 같이 공부하시었습니다.
이제는 그들 박쥐와 곤충님들 모두 소천하셨겠지만,,,,
만약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계시다면 구구단 정도는 나보다 그들이 훨씬 더 잘 외울 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시 무슨 영화를 보았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애국가와 대한~뉘우스 그리고 박대통령은 어쩌구,,, 저쩌구,,, 어른들 이야기라서 당췌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어떻게 집에 되 돌아 왔는지,,, 메모리가 지워졌네요.
“누가 나 좀 하드 메모리 빽업 시켜 줘~ !”
4. 찍 갈겼따 ~ !
몇 해 전 개그콘써트의 마빡이라는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이었던 “자전거 탄 풍경의 보물”이라는 노래가 생각이 납니다.
“술~래 잡기 고무~ 줄~ 놀이 말뚝 박 기 알 까기 망 치기~ 놀다보면 하루가~~”
공감이 가는 노래입니다.
당시 초등학교때 우덜끼리 동네에서 주로 하던 놀이가 “찍 갈겼따 !”, “땅따먹기”, “머리카락보인다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오징어 놀이” “말뚝박기“ 등입니다.
여자 아이들은 “무찌르자 공산당~ !” 고무줄놀이,
옷핀인가~? 머리핀인가~? 암튼 그런거 따먹기등
그 당시 여자 친구들이 하도 공산당을 무찔러줘서 지금은 전쟁이 일어 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놀이는 우선 동네 아이들이 많이 모여야 하는 무리 놀이였으므로 요즘 손주 뻘 되는 아이들의 주변 환경에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 톰 소여의 모험 ]
동네 어귀 지천 냇가의 송사리떼 몰려 다니듯이 아랫동네와 전쟁놀이 한답시고 부엌의 칼과 고무줄을 가지고 동네 집 뒤의 대나무를 베어 칼과 활을 만들어 아랫동네 악의 무리와 동네 수호전쟁을 수시로 치루었기에 손과 발 얼굴등은 항시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휴전 기간중에 아랫동네를 지나가다 우리편이 치도곤이라도 당하면 휴전이 깨지고 다시 전쟁입니다.
들녘과 산 놀이터에는 철마다 먹을 것이 조금씩 있었읍니다.
초봄 알이 배긴 굵은 칡뿌리 캐러 고아원 뒷산(봉화대)과 옥녀봉 뒷 절까지 영역을 넓혔고 흙 묻은 칡뿌리를 옷 소매로 쓱쓱 문질러 닦아 입으로 쭈욱 길게 찟어 맛있게 나누어 먹던 친구들 얼굴이 생각납니다.
이것을 팔아 용돈하는 친구도 있었구요. 부자되었을 껴 지금은.
“산 딸기”, 검은색 열매가 맺히며 먹으면 달착지근한 “땡꼴”, 시큼 새콤한 “시영”, 저수지 바닦에서 자라며 캐서 삶으면 밤 맛이나는 끝이 뽀족하고 검은 색의 “마름”, “뽀로수 열매”, “애기 사과”, “애기 배”, 당시 누에를 많이 키우던 관계로 뽕나무 열매 “오디” 등,,,,,,
머루, 다래, 어름, 메추리 알, 쫀디기, 뻔데기와, 기타 각종 불량식품등은 건너 뛰겠습니다.
당시 2, 7일 장날은 서산의 주기적인 상권이 크게 형성되는 중심장으로 집에 제사나, 누구 생일이라도 치룰 예정이라면 장날을 기다렸다가 물건을 구입하였고 닭의 경우 지금처럼 가공된 닭이 없는 시대였으므로 살아있는 라이브 생닭을 구입하여 집 안마당에 있는 앵두나무에 끈으로 묶어 몇 일간 키웠습니다.
작은 냇가에는 피라미 몇 마리와 미꾸라지 개구리 우렁 등은 기본으로 살고 있었기에 비온 뒤에는 고무신으로 냇가 풀숲 덤블을 뒤적거리면 붕어 몇 마리쯤 잡을 수 있어서
그런 것들을 몇일 후 돌아가실 닭 님에게 먹이로 던져 주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모든 집이 그러하였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장기간 보관하기 위하여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주로 염장 보관 이겠지요.
우리 어머니들은 찬장 위 선반 대나무 바구니에 음식물을 넣어 보관하시는 등 어려움이 많아
여름 날 김치를 수시로 담그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무더운 날씨에 쉬어 터지니까.....
박속을 파내어 말린 박바가지와 대나무를 이용한 각종 보관용기는 살림의 기본 이었던가 봅니다.
모두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어린 시절이 그립습니다.
5. 새 교실
4학년 때 인가~? 나의 담임 대머리 “서광석” 선생님. 왜 3학년때 선생님은 생각이 안 나냐~ ?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검은 색 나무 교사동에서 벽돌구조의 현대식 강당을 겸용하는 새로운 교실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실의 특징은 내부 칸막이가 개방되는 타입으로 강당을 겸하여 사용하도록 되어 우덜의 졸업식도 여기에서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반공 웅변대회(“남복”이였나?)도 하고 누군가 나와서 하얀 드레스 입고 당시 귀하디 귀한 피아노 시범연주도 하고
“호종” 친구의 마술은 제기에 압정을 숨겨 놓고 주문과 함께 천정에 던져 박히게 하는 써프라이즈 마술 시범도 있었습니다.
더 생각이 나지 않네,,, 아쉬운 것은 내 기억이 여기까지 라는 것입니다.
5, 6학년 기간은 기존 나무교실을 철거하고 콘크리트 2층 구조의 신축 교사동에서 수업하였습니다.
지금 현재 서산초등학교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우리들의 추억이 담긴 교사동 이기도 합니다.
6. 미술시간
5학년때는 검은 뿔테 안경을 끼셨던 “정환호” 담임 선생님.
5교시 미술시간에 진흙 점토를 반드시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담임 선생님께서 회초리로 우리에게 직접 행위 예술을 보여주셨읍니다.
그 예술은 공연시간이 길지 않은 1:1 전수 예술이지만 전수 받는 자만 엉덩이가 무척 아프다는 단점이 있었다.
제기럴 그런데 우리 몇 명에게는 진흙 점토 준비물이 없읍니다.
점심시간 벤또를 까 먹으며 선생님의 눈치만 살피다가 이심전심 후다닥 교실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대책회의를 한다.
- 첫째 진흙 점토는 교문 앞 학꼬방에서 구입 할 수 있다. 그러나, 나 에게는 돈이 없다.
- 둘째 예수가 그렇하였듯이 2병 5어 정신으로 친구들 점토를 조금식 얻어 본다. 그러나, 준비 하지 못한 인원들이 너무 많아 우리 모두가 공멸 할 수도 있다.
- 셋째 누군가 똥 방죽 물 내려가는 냇가에 점토가 무진장이란 정보를 흘린다. - 길철훈이 였나 ?
결론났네, 벤또 뚜껑 손에 쥐고 전화국 뒷 골목 사이를 지나 똥 방죽(현, 호수공원) 냇가로 우덜은 우르르 떼 달리기를 한다.
우린 모두 한마음이다. 담임선생님의 행위예술을 전수 받기 싫어서 입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보니 진흙 점토 유토피아였다.
모두들 시계가 없는 관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고 각자 양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채취하여 급하게 학교로 다시 뛰어서 되돌아간다.
이미 수업이 시작되었고 땀 삐질거리며 손에 진흙 점토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에 기가 막히셨는지 선생님은 아무 말 없으시다.
그런 우리 무리들은 조용히 진흙 점토로 미술 수업을 열심히 받고 있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미쳐 미술 준비를 못해온 친구들에게 오늘도 변함없이 회초리로 행위 예술을 전수하고 계신다. 수제자가 많이 배출되어야 하는데,,,,,,
이런 것은 대 끊기면 않되는데,,,, 반드시 우리중에서 명인이 한명쯤은 나와 줘야 하는데,,,,
[ 서광사 소풍 ]
우리들의 소풍
몇 일전부터 공연히 설레 인다. 제발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도 하여본다.
소풍 가는 날이면 니꾸사꾸 가방에 밤 삶은 것, 계란 삶은 것, 영양갱, 재수 좋으면 김밥까지,
돼지 꿈이라도 꾸면 별이 7개나 그려진 사이다에 몇 백원 용돈 까지도 가지고 가는 그런 소풍을 꿈 꾸어 본다,,,,
그 당시 일반적인 소풍 차림이란 것이 사과, 감, 배등의 과일류 한두개에 단무지 반찬의 벤또가 대부분으로 기억한다. - 어쩌면 나만 그러하였는지도 모른다.
그것 조차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았으므로 그나마 내 호사였나 보다.
소풍 가는 날 아침 학교 교문 앞에는 지게를 지고, 머리에 좌판을 이고 장사하시고자 하는 분들로 정신이 없다. 그야말로 돗대기 시장이다.
우리가 맨 정신으로 그 곳을 그냥 통과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유혹을 그냥 지나치지 못 한다 오늘은 우리덜 날이기 때문이다. 즉시 쪼르려 앉아서 무엇을 사든 사야만 했다.
이미 다른 친구들 손에는 그 무엇이 들려져 있었으므로,,,
그 당시 장사 하시는 분들은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우리들과 함께 소풍을 떠났었다.
나의 기억으로 생전 처음 쏘세지 햄 맛을 본 것이 서광사 뒷산으로 소풍갔을때 "김호종"이 가져온 것을 얻어 먹어본 맛이었다.
출세했다 쏘세지도 먹어보고 "호종" 아 친하게 지내자 우리~ !
떡볶이라 불리우는 것도 "김호종" 집에 놀러 갔을 때 당시 중학생이던 호종의 누나가 우덜 먹으라고 만들어 주었던 그 떡볶이다.
가래떡이 이렇게도 변신하는 구나 개벽을 그때 처음 보았었다.
암튼 시골에 사는 촌자의 입맛을 깨우쳐 주신 "김호종" 가족에게 감사드린다.
7. 그리운 시간들
2012년 현재 서산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은 모교 54회 동문 선배님이 재직중이시고 지금의 학교는 학급당 학생수가 35명 미만이며 그 마져도 시내외각에 산재되어있는 아파트 단지로 인하여 구 도심 공동화 현상이 발생 재학생수가 계속 줄어드는 경향이란다.
베이비 붐 세대인 우리가 학교 댕길 때에는 학생수가 많아서 2부제 수업도 병행하고 한반에 60명 정도로 바글바글 콩나물 교실로 표현 되었다.
[ 아, 옥수수빵 ]
저 학년때 교문 우측 소사실에서 소사 아저씨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옥수수빵을 구어 헐벗고 배고픈 자들을 구원하시던 생각이 난다. 그때의 푸대자루에 악수하던 외국사람 손 그림과 망치로 후려쳐야 깨지는 각진 우유 덩어리 조각.
다른 친구들 몇몇에게만 배급 주고 나에게는 주지 않는다. 나도 먹고 싶은데,,,
우리 집에 먹을 거 없는데,,,, 못 사는데,,,
당시 옥수수빵 내음 만 맡아서 인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아련하다.
그런 영향 때문이었나 ~ ?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는 편이다. 선택 할 수 없는 상황이었나 보다.
[ 이사 가던 날 ]
5학년때 추석 전까지 나는 우체국 뒤 사거리 위쪽에서 살았다.
매일 새벽 4시면 옥녀봉 관음사에서 예불 타종 종소리와 염불소리가 들린다.
물론, 나는 듣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곤히 깊게 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매일 밤 12시만 되면 서산경찰서에서 싸이렌이 울려 통행금지 시간이 되었음을 알린다.
이 소리에는 곤한 잠을 깬다. 너무도 시끄럽고 길게도 울려 퍼진다.
당시 조용하던 그 시절 한밤의 싸이렌 소리는 양대리 지소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양대리에 파출소도 있었던가 보다.
“이상선”, “김현규”, “이춘식"아 솜틀 집 뒤에 살았지 ~ ?”
5학년 가을 암튼 그리운 젓가락 바위를 뒤로 하고 그 곳 동문리 1구를 떠나 시계탑 사거리로 이사를 왔다.
시계탑 사거리로 이사를 와보니 집 주변 근거리에 “헌용”, 여자애 이름은 모르겠고,, “종만” “경만” “광진” “호종” “한규” “동설” “장만” “병수” “성만” “상진” “경진” “효수”,,,,,,,, 암튼 많았다.
당시에 나의 집은 시장에서 부터 홍성 통로와 외곽도로로 연결되는 순환고리 이었던가 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몇 일간은 이사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이야기 하며 집으로 가다 보면 나는 이미 옛집을 향하여 우체국 사거리를 지나 언덕길 중간을 오르고 있었다.
“우쒸~ !” 우리집은 반대 방향으로 이사 갔는데,,,, 언제 되돌아 가냐 집에
이사 오기 전에는 집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없는데,,, 꿈을 꾸면 이미 이사 떠나 온 옛날 집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집 귀신이 나를 유혹하며 홀린다 다시 되돌아오라고. 정 뗄려고 그랬나~ ?
[ 6학년 ]
6학년 때에는 “김정기” 담임 선생님 “석규” 아버지
입학 후 6년이 지나다 보니 입학 할 때의 유아치아에서 영구치아로 바뀌고 키도 더욱 커지고,
이제 1학년 입학생을 보면 병아리 같이 보이는 것은 내가 그만큼 아동에서 소년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이었던가 보다.
이때쯤에 무슨 EMS 학원이다 뭐다해서 옥녀봉 아래로, 법원 앞 시장 골목으로 기타 여러 장소에서 공공연히 개인 학원이 성행하였고 그 곳에서는 서산, 부춘, 서동 출신구별이 없었다.
어느 날 해가 저문 어느 날 저녁 학교 운동장에 나를 비롯한 김호종, 전한규, 최정일등 몇몇 친구들이 모여 주말에 야구시합하자고 모의를 한다.
하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비싼 야구장비가 없었고 "최정일"은 야구 선수였으니 그가 사는 대궐 같은 집에 개인용 글러브, 마스크, 배트, 야구공이 있어 자체 조달이 가능하였다.
그로인하여 서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여름 장 맛 비를 흠뻑 맞으며 그래도 좋다고 친구들과 야구를 하고 다녔다. 그때는 너무 재미있어서 거의 매주 일요일 마다 하였던 기억이다.
한번은 야구하다가 “이춘식”이였나~? 누가 투수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포수를 보던 친구 "전한규"의 눈에 야구공이 맞아서 실명되는 줄 알고 우리 모두를 긴장시켰었다.
이런 천둥벌거숭이 시절
[ 뺑뺑이 ]
그 외 여러가지 개구쟁이 시절을 보내다 보니
담임 선생님이 중학교 배정 선별 추첨을 해야 한다고 강당에 모두 집합하란다.
지금으로 치면 마치 로또 추첨하는 것과 같다.
5개의 원형 콜크 구슬에 1~5번까지 번호가 씌여 있고 일명 뺑뺑이라는 바퀴를 돌려서 1, 3, 5번이 나오면 서산중학교, 2, 4번이 나오면 서령중 이란다.
우덜은 내심 각자 희망하는 학교가 있어 자의적인 긴장과 초초함을 그때 처음 느꼈었다.
환호와 탄성이 오고가며 그렇게 일부 친구들과 잠시 헤어졌었다.
[ 졸업앨범 ]
시간이 흐른 후 졸업앨범 사진을 찍는다고 사진관에 가란다.
그 당시에는 졸업앨범 수량에 따라 제작비용이 다르므로 미리 제작수량을 예약 하여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돈이 없어 졸업 앨범을 못하는 친구도 있었다.
“희망 사진관”이었던가~?
암튼, 자고로 옛말에 어른들 말은 반드시 들으라 하였다.
“사진 찍으면 영혼을 빼앗겨 수명이 짧아진다”는 친절한 조언
맞다 ! 그래서 당시 우리 주변에는 사진 안 찍고 초상화 그림을 그려 놓았었구나,,,, ,,
당시 초상화 그리려 다니는 분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그래서 오래들 사셨나요~ ?
우리들은 자라나는 새싹들이므로 어른 말 무시한 채 그냥 졸업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수 일이 지난 뒤 졸업 앨범이 나왔다고 샘플을 보여준다.
이런 줸장 사진 찍힌 자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고
여자 아이들은 자신의 실사사진 자체를 근본적으로 왕 무시한다.
아저씨가 잘 못 찍었다고,,,
실물이 더 예쁜데 좋지 않은 카메라로 찍었나봐 ~
나 만 미워해,
암튼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맘에 안들어,,, 안들어도 너~~~무 안들어 !
8. 기억이 더 날까.
“서산초등학교 61회 동창회” 카페를 개설하고 보니 한동안 잊고 지냈던 초등학교 시절의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보게 됩니다.
망각의 동물이다 보니 한 사람이 기억을 할 수 있는 부분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내 기억의 한계 속에서 여러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좀 더 길게 주절주절 혼자 넋두리 하듯 쓰고 싶었으나, 각자 어린시절 지낸 동네도 다르고 생활 환경도 달라서
“이게 무슨 딴나라 이야기 하고 자빠졌네” 라고 말을 할 수 도 있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관점에서 쓴 이야기이므로 한부분이라도 여러 친구들과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으면 합니다.
잠시나마, 따듯한 차 한잔 손에 쥐고 눈을 지긋이 감고 각자의 어린시절 추억을 더듬어 봅시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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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실아 너의 반짝거리는 기억으로 한참 동안 옛 시간속으로 여행을 잘 하였다. 나는 4 학년 때 전학을 와서 어리버리한 채로 명문 서산국교 학생들한테 무시당하지 않으려 애썼던 아련한 기억만 절실한데... 누군가 계속 이어서 글 을 올렸으면 좋겠다 ..
완전공감 수고했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지
천사 유치원도 동창이고 어쩜 이리도 새록새록~~ 완전공감ㅎㅎ!!....
맛깔스런 글솜씨 덕분에 나도 모르게 그때 그시간속으로 스며드는듯 아련한 시간여행 했네요^^~
"거미" 친구 답글 고마버요. 창피하네,,, 주러지 주저리 한 이야기 인데,,,
근데 크루져님 생각이 전혀 안나용~ㅋ 얼굴 보면 알려나요?ㅎ
나는 요새 명실이 보는 재미로 산다. 날 행복하게 해준다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