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미국과의 시차적응이 쉽지 않다. 어쩜 기차를 타자마자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일부러 첫날은 관광도 안하고 일박을 하면서 여유있게 쉰다고 쉬었는데 역시 (지친) 몸은 (즐거운) 마음과 다른 바이오리듬을 보여준다. 아침에 캘리포니아제퍼 (에머러빌 출발 09:10-15:50 시카고 도착)를 타기 위해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일까? 에머러빌에서 오전에 출발하는 횡단열차를 타려면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07시경 출발하는 암트랙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혹시 버스를 놓칠까봐 서둘러 일찍 나왔더니 몸이 더 피곤한 모양이다.
“무슨 기차를 2박 3일동안 타니? 그런 여행은 지루하겠다, 아니 그보다 체력적으로 그건 무리한 여행이야”
그래서일까? 이번엔 나도 제대로 나의 체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서는 알수 없는 흥분과 호기심이 올라오면서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식의 오기마저 발동한다. 미국의 노비자 선언 이후 미국기차여행을 준비하면서 대륙횡단열차는 꼭 한번 타 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기차여행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나의 세계일주 리스트에는 전세계 모든 나라에 있는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기차놀이를 하는 계획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매년 해외로 기차여행을 떠나지만 이번 미국기차여행이 다른 나라보다 더 흥미로운 이유는 그 넓은 미대륙을 기차로 횡단하면서 대자연의 사계절(초원, 사막, 계곡, 설경 등)을 풀코스로 경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2박 3일 동안 기차만 타고 간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지루한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짧은 구간을 여러 번 타고 내리면서 많은 것을 보는 유럽기차여행도 좋지만 가만히 앉아서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대자연의 풍경을 가만히 눈으로 들여다보는 이 미국여행도 얼마나 즐거운 여행인가! 걸어 다니면서 사진 찍는 여행이 여행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요”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로 서부에서 동부까지 간다구요?”
“네~ 기차로 3박4일 가긴 가는데 여행삼아 머리도 식힐 겸 쉬엄쉬엄 가면 좋잖아요?”
라틴계 검은 곱슬머리를 가진 핸섬한 청년은 기분좋은 얼굴로 암트랙 사무실로 기차표를 구입하러 왔다. 그렇다, 확실히 유럽열차와 달리 미국은 열차가 교통수단이 아니라 여행수단이다. 한국에서 모든 예약을 완료하고 좌석승차권만 픽업만 하러 온 나로선 이런 대책(?)없는 대륙횡단여행자가 급 당황스럽다. 그래 여기는 미국이니까! 한국의 100배 크기라는 미국에서 주요 이동수간이 자동차 아니면 비행기일 수 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이렇게 일부러 느긋하게 휴가도 즐길 겸 기차여행을 할 겸 열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단다.
“굿모닝, 암트랙 침대칸 담당자 000 입니다”
미리 예약하면 무료인 일반석(coach class)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2박 3일을 기차에서 먹고 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 한국에서 일찌감치 침대칸으로 업그레이드 예약을 하고 왔다. 역시 비싼 게 제값을 하는걸까? 침대도 유럽보다 넓고 안락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열차 내 판매되고 있는 식사를 아무거나 골라 먹을 수가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햇반이랑 사발면이랑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는게 아닌데~ 우와~식당칸 옆에는 천정일부가 유리로 된 확 트인 전망열차칸도 있다. (맛있게) 먹고 (편하게) 자고 이렇게 (눈이 즐거운) 전망칸까지 따로 있어 미국의 대자연을 3일동안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보며 간다고 생각하니 절대 미국 횡단열차여행이 3일이 되든 4일이 되든 전혀 지루할 이유가 없다. 이런 열차여행이라면 나도 시카고가 아니라 뉴욕까지 3박 4일 갈수 있을 것 같은데?
“여행 중에 필요하거나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주세요”
덩치가 큰 흑인뚱보차장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애교있는 멘트와 굵직한 보이스로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이한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아주 많은 것이 필요할 수도 있는 이번 기차여행에서 그래도 이렇게 반가운 미소로 멀리서 온 객을 맞아주니 괜시리 기분이 좋다. 기차를 타고 보니 기분이 더 좋다. 시트도 깔끔하고 침대도 넓직한데다 나만의 공간이 안락하기만 하다. 여기저기 침대칸을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간단히 짐을 푸는데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바로 아침식사 안내방송이 나온다. 아니 타자마자 무슨 식사? 장거리 기내 서비스도 이렇게 빨리 밥(아니 빵)을 내놓진 않는데 역시 미국열차 침대칸이 좋긴 좋구나 (참고로 침대칸 예약자는 열차 내 모든 식사 서비스와 음료 서비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새벽같이 일어나 호스텔에서 햇반에 맛김으로 끼니를 떼우고 오는게 아닌데!
아메리컨 조식이지만 나름 거하게 아침을 먹고 나니 배도 부르고 기분도 편안해진다. 그래서인지 자꾸 자리에 눕고 싶다. 차장을 불러 seat-a beds로 펼쳐달라고 부탁하고는 편안하게 누워서 덜컹거리는 기차의 진동을 즐기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장거리 기차여행이라 몇가지 챙겨온 책 중에서 다소 내용이 가벼운 것으로 일단 꺼내 들었다. 이런 공간에서 혼자 잘 놀 수 있는 방법은 열심히 책 읽고 사진 찍는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문제는 암트랙의 가벼운 진동과 함께 약간 지루할 수 있는 가벼운 흔들림이 오히려 잠자기에는 너무 안성맞춤이라 그것마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카메라 셔트에 힘을 주면서 졸지 않으려고 했지만 시차 때문인지 자꾸 잠이 온다. 말이 대륙횡단열차여행이지 2박 3일동안 얼마나 잘자고 편안하게 쉬었는지 모른다. 혹자는 이런 흔들림과 진동속에 잠을 자니 못자니 불평도 하겠지만 역시 편안한 몸이 먼저 알고 적당한 잠을 원한다. 물론 중간중간 일어나 차창너머 이국적 아니 미국적 풍경도 담고 정차하는 도시에 잠시 내려 기지개도 켜고 손님들이 플랫폼에서 커피 한잔 마실 시간도 주고 하지만 그래도 너무 잘 자고 잘 먹은 미국대륙횡단열차. 아 여행와서 이렇게 너무 잘 자도 문제인데~ 중간중간 크고작은 도시에 정차를 하면서 손님을 내리기도 하고 태우기도 한다. 정말 느긋한 미국사람들처럼 기차도 아주 꾸물꾸물 굴러간다. 사진을 찍어도 전혀 포커스가 흔들리지가 않을 정도로 속도감이 전혀 없다. 기차란 자고로 신나게 달려가는 질주의 본능도 즐거움이라면 큰 즐거움인데 이놈의 나라는 땅도 넓고 앞에 막힌 것도 없는데 왜이리 천천히 가는거야? 너무 변화없이 꾸준한 속도감에 시카고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숙소 찾는데 곤란해질까 괜히 걱정이 된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고 삼일쯤 되자 다이나믹한 바위산들을 보여주던 유타주를 지나 덴버로넘어가자 처음에는 밤이라 몰랐는데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보니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다. 가장 미국스럽고 지루하리 만치 길고 넓게 펼쳐진 지평선이 바로 그것이다. 황색의 아득한 대평원의 파노라마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번 대륙횡단열차를 시카고에서부터 시작했더라면 아마 초반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서쪽에서부터 시작해 너무 엄청난 광경을 보고 넘어왔더니 같은 코스인데 바라보는 시선과 느낌이 이렇게 다를수가 없다. 그래 이런 지루한 지평선도 미국이니까 가능한 거야. 끝없이 전개되는 지평선조차 보기 힘든 한국에서는 이 또한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보여지는 미국의 대평원 모습을 카메라에 마음껏 담으며 2박3일의 횡단열차 사진을 마무리해 본다. 그러고보니 지금 찍고 있는 저 지평선 포커스가 자꾸 흐리게 나오는 걸보니 아마도 지금 달리는 기차속도는 서부쪽보다 훨씬 빨라진 것 같다. 아~기차가 모든 구간에서 천천히 달리는게 아니었구나! 어쩌면 서쪽에서는 대자연의 풍경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가라고 (일부러) 천천히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차에 몸걱정하며 첫날부터 잘 먹고 잘 자는게 아니었는데, 더 많이 보고 더 열심히 찍어둘걸! 괜히 2박3일 기차이동이라는 날짜가 주는 부담감에 너무 몸을 사린 객의 어리석은 체력관리가 잠시 억울해진다. 그래 여행도 다 때가 있고, 천천히 가는 기차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을! 기차여행 매니아라면서 이런 여유조차 부리지 못하다니! 달리는 철마의 속도에도 다 의미가 있는 것을! 그래 항상 빠르다고 좋은 것은 아닐게다.
“암트랙 열차가 출도착 시간을 잘 안 지킨다고 하던데?”
“2~3일씩 운행하는 기차가 몇 시간 좀 연착됐다고 해서 그게 문제가 되니?”
한시간 정도 연착한 기차를 보며 약간의 언성을 높였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던지는 미국 여행자의 한마디가 아직도 뇌리에 맴돈다. 그래 까짓거 좀 늦으면 어때 ‘기차’ 그 자체가 내 소중한 여행의 한 부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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