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종도(永宗島)
⚫용유도(龍游島)
⚫을왕려(乙旺里:을왕동)
⚫무의도(舞衣島)
세계 최고 수준의 공항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인천국제공항은 바다를 메우고 섬을 연결해 만든 것이다.
각기 떨어져 있다가 이 공항 건설로 연결돤 섬은 영종도,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 등 모두 4개. 하지만 조선시대 후기 이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다시 따져보면 합쳐진 섬은 4개가 아니라 5개가 된다. 영종도, 자연도,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가 그것이다,
‘자연도(紫燕島)’는 우리가 지금 영종도라 부르고 있는 섬의 원래 이름이다. 그리고 영종도는 자연도 앞, 지금의 구읍뱃터 일대에 있던 작은 섬이었다. 우리는 김정호의 「청구도」나 「대동여지도」에 자연도가 나오고, 그 동남 쪽 앞에 ‘영종(永宗)’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섬이 하나 더 그려져 있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이중 영종도의 예전 이름인 ‘자연도’는 ‘자줏빛〈紫〉 제비〈燕〉의 섬’이라는 뜻이다.
고려 인종 임금 때인 서기 1123년 중국 송나라의 사신단으로 왔던 서긍(徐兢)이라는 사람이 고려의 풍물과 제도 등을 보고 돌아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는 장편(長篇)의 기록물을 남겼다.
여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날 오후 배가 자연도에 머무니, 이곳이 곧 광주(廣州 ) 경내이다. 산에 의지하여 관사를 지었는데 경원정(慶源亭)이라는 알림글(방문:榜文)이 있다. 경원정 옆에는 막사(幕舍) 수십 칸이 있으며, 주민들의 초가집도 많다. 그 산 동쪽에 섬 하나가 있는데, 제비가 많이 날아다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
여기 나오는 경원정은 고려시대중국의 사신이나 상인들이 오가는 길에 묵었던 객사(客舍)로, 지금의 구읍나루터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그 동쪽에 자그마한 섬 하나가 있는데 그곳에 제비가 많이 날아다니기 때문에 경원정이 있는 큰 섬의 이름이 자연도라 불리게 됐다는 얘기다.
한편 영종은 원래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관내에 있던 남양부(南陽府)의 군사기지 ‘영종진(永宗鎭)’에서 나온 이름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영종포(永宗浦) 만호(萬戶)는 남양부의 서쪽에 있다. 중대선(中太船) 3척, 맹선(猛船) 1척, 부군선(無軍船) 3척이요, 각 관의 좌우령 선군(船軍)이 총 510명이다.”
이처럼 영종진은 원래 남양부에 있던 것인데, 조선 효종 임금 때 군사적 필요에 따라 경원정 동쓱에 있던 이 작은 섬으로 옮겨오게 된다. 이곳은 삼남(三南) 지방에서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싣고 올라오는 배들이 거쳐 가는 곳이었다. 또한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바로 이어지는 길목이기도 해 국가 방위의 차원에서 무척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종진은 이 작은 섬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계속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영종진이 옮겨오기 전에 이 섬이 어떤 이름을 갖고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자연도 앞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기 때문에 아마도 별다른 이름이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 본 서긍의 기록에 작은 섬의 이름은 안 나오고, “그곳에 제비가 많이 날아다니기 때문에 자연도라 부르게 됐다” 라고 한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곳에 군사시설인 영종진이 들어섰으니, 국가 방위 차원에서 중요한 ‘영종진’이라는 이름이 계속 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종진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 ‘만세교’ 라는 다리를 만들어 옆에 있는 자연도와 연결을 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효종 임금 때 이 동네 주민들이 구름다리처럼 두 섬을 잇는 다리를 만들었으나 파도에 휩쓸려 부서졌고, 그 뒤 현종 임금 때 용궁사 주지였던 승려 해명이 경기도 지역에 있는 승병(僧兵)들을 불러다가 이 다리를 완공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로 계속된 두 섬 사이의 매립에 따라 영종진이 있던 작은 섬과 자연도는 하나로 이어지게 됐고, 필요가 없게 된 다리는 없어지고 말았다. 이 두 섬은 원래부터 서로 가까울 뿐 아니라, 그 사이의 바다도 깊지 않아 썰물 때면 이어질 정도였기 때문에 매립 작업이 쉽게 이뤄질 수 있었다.
제작자와 제작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해서경기해로도(海西京畿海路圖)」 등에 “(두 섬이) 썰물 때가 되면 (이어져서) 육지가 된다(潮退成陸)”라고 나와 있는 것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두 섬이 연결돼 하나가 됐으니 이름도 하나가 돼야 했는데, ‘자연도’는 사라지고 살아남은 이름은 ‘영종’이었다.
이는 분명 ‘자연도’와 ‘영종(진)’이라는 두 개의 이름 중 국가 차원에서 훨씬 더 중요한 이름이 ‘영종’이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이름은 이런저런 상황 때마다 계속 불리고 쓰이는 반면 그렇지 않은 이름은 불릴 일이 별로 없으니 결국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라지게 된 이름 ‘자연도’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 섬) 동쪽에 섬 하나가 있는데, 제비가 많이 날아다니기 때문에 (이 섬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라는 기록을 보았다.
하지만 이 기록은 잘못된 설명일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제비의 색깔은 대부분 위쪽은 검고 아래쪽은 흰색이어서 어느 면으로나 ‘자줏빛’ 이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자로 된 대부분의 우리 옛날 땅 이름이 그렇듯, ‘자연도(紫燕島)’도 당시에 불리던 우리말 이름을 적당한 한자로 바꿔 쓴 것일 것이다. 이중 ‘燕(제비 연)’은 날아다니는 새 제비와는 아무 관계없이 ‘늘어졌다’는 뜻의 우리말 ‘늘’을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 ‘늘’의 한자 표현에 대해서는 남동구 ‘논현동 + 댕구산’ 편과 ‘도림동 + 여무실’ 편 참고)
늘어졌다는 뜻의 ‘늘―’을 한자 ‘連(이을 연/련)’ 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를 발음이 같으면서 뜻은 더 좋은 ‘燕’으로 바꿔 썼다는 얘기다. 이곳 자연도(영종도)의 땅 모양이 가운데에 그다지 높지 않게 솟아있는 백운산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산 능선이 천천히 늘어지며 내려가기에 ‘늘―’자를 쓴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 있는 ‘紫’자를 해석하기가 어려워 그 우리말 이름이 전체적으로 무엇이었을지는 추론할 수가 없다.
앞서 말했듯, ‘紫燕島’는 한글이 없던 그 당시에 동네 사람들이 부르던 어떤 우리말 이름을 관리(官吏)나 서기(書記)가 적당한 한자로 바꿔 적은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원래의 뜻을 잘 모르는 누군가가 서긍에게 자연도의 이름을 설명하면서 한자의 뜻에 그대로 맞춰 “자줏빛 제비가 많이 날아다녀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니 서긍이 이를 곧이곧대로 듣고 자신의 기록에 그
렇게 남겨놓았을 것이다.
행정구역상으로 영종도는 바로 옆 용유도 등과 함꼐 구한말까지. 인천부(仁川府)에 속한 섬 이었다. 그 둬 1914년 새로 생긴 부천군(富川郡)에 편입됐다가 1973년 경기도 용진군으로 들어왔으며, 1989년에 다시 인천시 중구로 들어와 인천 땅이 됐다.
한편 영종도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백운산(255m)은 영종도에서 가장 높은 이 섬의 주봉(主峯)이다.
아침 저녁마다 산꼭대기에 흰 구름〈白雲〉이 자욱하게 낀다고 해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데, 백운산이라는 산 이름은 우리나라 곳곳에 여럿 있다.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는 백운산이나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장수군 경계에 있는 백운산처럼 높이가 1000m가 넘는 것들도 있다. 이런 산들에 비하면 영종도의 백운산은 그 이름에서 꽤나 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름을 가진 산들이 대개 그렇듯, 저녁 무렵 석양에 비치는 오색구름이 산봉우리에 머물 때면 선녀들이 내려와 놀고 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 백운산이 섬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영종도에 있는 동네들은 이 산을 기준으로 동서남북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운서동, 운남동, 운북동 등의 이름을 갖게 됐다.
용유도
용유도는 영종도 바로 옆에 가까이 있다가 인천국제공항이 생기면서 한데 이어져 버린 섬이다. 그 때문에 이제는 그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기 어렵게 된 섬이기도 하다.
챠 알기 어렵 게 된 섬이기도 하다.
이 섬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흔히 지금의 한자 이름을 그대로 풀어 “섬의 모양이 용(龍)이 수영을 하며 노는〈游〉 모습이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그 모양이 실제 그러한지도 지극히 의심스럽지만, 이 섬의 이름이 이전에 다른 글자로 쓰였다는 점을 확인하고 나면 이 해석이 옳지 않다는 것을 금세 인정하게 된다.
한 예(例)로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용유도(龍流島)는 삼목도 서쪽 수로(水路)로 5리(里) 떨어진 곳에 있다. 둘레가 23리(里)인데 나라의 말 59필을 놓아먹이며, 수군(水軍)·목자(牧者)·염부(鹽夫) 20여 호(戶)가 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용유도((龍流島)는 인천도호부 서쪽으로 55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주위가 25리이고 목장이 있다”고 나와 있으며, 이보다 한참 뒤에 나온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도 ‘龍流島’라 적고 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용이 수영하는 모습”이라는 해석은 근세에 들어 누군가가 그저 지금의 한자 이름을 보고 갖다 붙인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다.
‘龍流島’ 에 대해서도 “섬의 모양이 용(龍)이 흐르듯이〈流〉 오르내리는 모습이어서 생긴 이름” 이라는 해석을 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이 역시 “용이 수영을 하는 모습”이라는 해석만큼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다.
용유도는 아마도 이전에 불리던 어떤 우리말 이름을 비슷한 발음의 한자(漢字)로 바꾼 것이거나, 그 이름을 한자의 뜻으로 받아 새로 만든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근거 있는 자료를 찾아내지 못하는 형편에서는 그 옛 이름을 생각해 내기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용유도가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다.
을왕동(을왕리)
용유도에 을왕동(乙旺洞)이 있다.
오래 전부터 해수욕장으로 유명해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이 몰려드는 곳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전 옹진군 시절의 이름 그대로 ‘을왕리’라 부르곤 한다.
‘을왕’에 대해서는 우선 이곳에 있는 왕산(旺山)에 고려 희종왕의 자손이라고 알려진 어떤 왕자의 무덤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을(乙)’은 오행(五行) 역학(易學)에서 목(木:나무)에 속하는데, 목은 동쪽을 뜻한다. 또 ‘왕(旺)’은 해와 달무리를 가리키는데, 도굴을 당한 이곳의 왕자 묘지를 보면 동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동쪽에 있는 왕자의 묘지를 알리기 위해 ‘을왕마을’ 이라 부르게 됐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는 별다른 증거도 없고, 너무 막연하기만 한 내용이어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얘기다.
「대동여지도」에 이곳 왕산이 ‘王(임금 왕)’자를 쓰는 ‘王山’으로 나와 있다는 점을 더한다고 해도 ‘을왕’이 왕자와 관련돼서 생긴 이름으로 보기에 꺼림칙한 점이 많기는 마찬가지이다.
‘을왕’은 이보다 ‘느릿하고 길게 늘어진 목’ 이라는 뜻의 우리말 ‘늘목’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보는 것이 한결 옳을 듯하다.
‘늘목’에서 ‘늘’은 ‘늘어졌다’는 말이다.
또 ‘길목’ 등의 단어에 쓰이는 ‘목’은 ‘잘록한 부분’이나 ‘통로 가운데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 등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이곳 땅을 보면 해수욕장과 그 일대 바닷가 뒤로 구릉 같은 산줄기가 병풍처럼 빙 두르고 있다. 가파른 산이 아니라 그다지 높지 않은 산줄기가 ‘길게 늘어지듯’ 둘러 서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이라는 말이 쓰인 것으로 본다.
‘목’은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이곳 을왕리 해수욕장은 바다에서 육지 안쪽으로 넓고 깊게 밀려들어온 만(漫)의 형태다. 따라서 잘록한 부분을 뜻하는 말 ‘목’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다소 무리한 감이 있지만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을 뜻하는 ‘목’ 정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옛날 이곳 사람들이 섬을 들어오고 나갈 때나 섬 안에서 다닐 때 자주 거쳐야만 했던 곳(목)정도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늘목’을 한자 이름으로 표시할 때 ‘늘’이라는 발음을 가진 한자가 없으니까 그 뜻을 가진 글자 ‘於(늘 어)’에 ‘ㄹ’ 받침을 나타내는 글자‘乙(새 을)’을 붙여 ‘乻(얼)’이라 하고, ‘목’은 그 뜻을 가진 한자 ‘項(목 항)’을 쓴 것이다.
이는 한글이 없던 옛날에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현하던 ‘한자차용표현(漢字借用表現)’의 몇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게 써놓고 읽을 때는 “얼항”이 아니라 “늘목”이라고 읽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石浦(석 포)’라 쓰고 “돌개”로 읽거나 ‘荒山(황산)’이라 써놓고 “거출뫼”라고 읽는 식이다.
그런데, 이 같은 방식으로 표현해 놓은 땅 이름들이 거의 대부분 그렇듯, ‘늘목’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본래의 발음이나 뜻을 잃어버려 그냥 한자대로 ‘얼항’이라 읽히고 또 불리게 됐다.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좀 뎌 쉬운 발음으로 바꿔어 ‘을항’이 되고, 다시 ‘을왕’이 된 것이다. 그러고 나니 누군가가 여기에 ‘왕자(王子)의 전설’을 끌어다 붙였고, 글자까지도 거기에 맞춰 ‘乙王(을욍)’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지금의 ‘乙旺’까지 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무의도
용유도 옆에 있는 섬 무의도는 이제 배가 없어도 육지에서 연제든지 건너다닐 수 있는 ‘섬 아닌 섬’이 됐다. 2019년 4월 용유도와 이 섬을 잇는 무의대교가 개통됐기 때문이다.
하나께, 큰무리, 실미 등의 해수욕장을 갖고 있는 이 섬은 흔히 “섬의 모양이 장수(將帥)가 관복(冠服=衣)을 입고 춤을 추는(舞) 모습”이어서 ‘무의(舞衣)’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이야기된다.
섬의 실제 모습이 그런지도 무척 의문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금의 한자 이름은 길게 잡아야 100여 년 전에 생긴 것이기 때문에 이 해석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지리서라고 할 수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 지리지」,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이 섬의 한자 이름은 ‘無衣島(무의도)’라고 나온다. ‘옷〈衣〉을 입고 춤추는〈舞〉 섬’이 아니라 ‘옷〈衣〉을 입지 않은〈無〉 섬’이라는 것이다.
또 전국의 가구수와 인구수를 기록한 책으로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無依島(무의도)’ 라고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어느 쪽이든 이 섬 이 춤〈舞〉이나 옷〈衣〉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의 이름인 ‘舞衣島’는 조선조 말에 나온 「영종진지도」에 처음 보이고, 그 뒤 일제 강점기에 만든 여러 지도나 지지(地誌)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쓰였다. 무슨 이유에서 이처럼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무의도’ 라는 이름의 뜻을 모르니까 그저 불리는 데에 맞춰 그 발음을 가진 한자를 아무 것이나 골라서 쓴 것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어찌됐든 ‘장수가 옷을 입고 춤추는 모습’이라는 이야기는 누군가 뒤늦게 지금의 한자 이름을 보고 만들어낸 것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무의도’는 우리말로 된 어떤 이름을 한자(漢字)로 바꿔 표시하는 과정에서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소리만을 빌려 쓴 것으로 보는 것이 한결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우리말 이름은 ‘무리’나 ‘물’, 또는 이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어떤 단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의도는 대무의도와 소무의도로 나누어져 있다.
이들 두 개의 섬 가운데 마을이 크고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사는 대무의도는 지금도 흔히 ‘큰무리’라고 불리며, 소무의도는 ‘떼무리’나 ‘뙤무리’로 불린다.
여기서의 ‘무리’를 한자로 옮겨 쓴 것이 ‘무의’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무리’는 섬사람들이나 어부들이 고기잡이와 관련해 바닷물의 흐름을 나타낼 때 ‘한물’, ‘두물’ 하는 식으로 흔히 쓰는 단어 ‘물’이 바뀌어 생긴 말로 보인다.
결국 ‘물섬’ 또는 ‘무리섬’ 정도로 불리던 것이 발음이 바뀌어 ‘무의섬’이 되고, 이를 한자로 나타낸 것이 무의도일 것이다.
따라서 이 이름을 나타낸 한자는 뜻과는 관계없이 소리만 벨려 쓴 것이기 때문에 ‘無衣, 無依, 舞衣’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