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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인천이씨 인물고 |
허철회(한국역사인물학회 대표) 고려 초기의 시조 이허겸에서부터 고려말기의 이문화에 이르기까지의 인천이씨 인물을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허겸(李許謙) 생몰년 미상. 고려초기의 문신, 본관은 인주(仁州).문하시중을 지낸 자연(子淵)의 할아버지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김은부(金殷傅)의 장인이고, 현종의 비인 원성태후(元成太后)의 외할아버지이다. 그로 인하여 1024년(현종 15) 상서우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 식읍일천구백오십호(尙書右僕射 上柱國 邵城縣開國侯 食邑一千九百五十戶)에 증직되었다. 이자연(李子淵) 1003(목종6)-1061(문종 15) 고려전기의 문관, 본관은 경원(慶源). 자는 약충(若冲), 소성백 허겸의 손자로 좌복야를 지낸 한(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낙랑군대부인 최씨이다. 처는 김씨로 그 사이에 11남매를 두어 권문세가를 이루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시 권세가였던 김은부의 처조카로서 정치적 함수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1024년(현종 15) 3월 유징필이 지공거가 되어 주관한 과거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1031년(덕종 즉위년) 우보궐이 되었다. 이부낭중. 어사잡단. 우승선을 거쳐 정종 때에는 급사중, 지중추원사, 중추부사 등을 지내다가, 1047년(문종 1)에 이부상서 참지정사가 되고, 1049년에 수사도, 1050년에 내사시랑평장사가 되었다. 1052년에는 그의 딸 셋이 문종에게 시집을 가서 인예태후, 인경현비, 인절현비가 되었다. 특히 인예태후는 순종, 선종, 숙종을 낳았으며, 인종에 이르기까지 왕들은 모두 인예태후의 혈통이 된다. 이렇게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자 사원세력을 장악하는데 에도 신경을 써서 그의 아들 소현은 금산사의 혜덕왕사가 되었고, 손자인 승통 세량은 현화사에, 증손자인 의장은 현화사에 있으면서 법상종의 세력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경원이씨가 고려의 최고문벌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052년 수태위가 되었고, 이어 문하시랑평장사, 태보문하시중 판상서이부서에 이르렀다. 그 뒤 추성좌세보사공신에 봉하여지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중서령 감수국사 상주국 경원군개국공이 되었으며 식읍 3000호가 주어졌다. 문종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장화이다.
이예(李預)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 상서우복야를 지낸 한(翰)의 손자로, 자상(子祥)의 아들이며 정신현비의 아버지가 된다. 문종 때 급제하여 상서공부원외랑이 되었고, 1085년(선종 2) 상서예부시랑으로 동지공거가 되고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087년에 한림학사가 되었고, 1092년 동지중추원사, 1093년 지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가 되고, 1094년 지중추원사로 다시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1095년(헌종 1) 정당문학 형부상서가 되었다. 이자의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으나, 정신현비의 딸인 연화궁주가 예종의 비가 되자 다시 부름을 받았다. 1106년(예종 1)검교태위 형부상서 정당문학이 되었으며,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이오(李䫨) 고려시대의 문신,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로 한(翰)의 손자이며, 자상(子祥)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이 된 뒤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등 여섯 왕을 모셨다. 1097년(숙종 2) 예빈경추밀원부사가 되었고, 다음 해 예부상서가 되었다. 1100년 동지중추밀원사로 지공거가 되었고 진사를 뽑고 복시를 주관하였다. 1101년 장단 총지사에서 대각국사가 운명하자 정당문학으로서 대각국사의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고 명망이 높으므로 예를 어겨서라도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왕이 소복과 현관(玄冠)을 쓰고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1103년 검교사도 수사공 판형부사가 되고, 다음 해에는 수사공 상서우복야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태자소보가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여 문하시랑도 평장사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 상주국, 1107년(예종 2) 문덕전태학사 판성서예부사수국사가 되었으며, 1109년에는 다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100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수태보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판상서예부한림원사수국사상주국에 이르렀다. 이자인(李資仁) ?-1091(선종 8) 고려시대의 문신, 중서령을 지낸 자연의 손자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정의 아들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뒤 1081년(문종 35)시어사가 되었다. 1083년(선종 즉위년) 문종과 순종이 잇달아 서거하자 고상사로 의구심을 품고 있던 요나라에 가서 잘 설득하고 돌아왔다. 1085년 병부시랑으로 공부상서 임개(林槪)와 송나라에 등극사로 다녀왔으며, 이듬해 우간의대부 상서좌승을 역임하였고, 1088년에는 전중감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이자의(李資義) ?-1095(헌종 1) 고려시대의 문신, 중서령을 지낸 자연의 손자이며, 시중을 지낸 정(頲)의 아들이다. 1090년(선종 7) 호부상서로서 사은사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오고, 1094년(헌종 즉위년) 지중추원사를 거쳐, 이듬해 중추원사가 되었다. 처음에 선종이 상서 이석의 딸로 후를 삼아 헌종을 낳고 또 그 누이인 원신궁주가 한산후 윤을 낳았는데, 헌종이 유약하여 모후가 국사를 대리하게 됨을 기화로 용사를 모집하여 윤을 즉위시키려고 모의하였다. 이때에 계림공(숙종)이 이를 탐지하고 평장사 소태보에게 알려 상장군 왕국모로 하여금 시위하게 하자, 장사 고의화에 의하여 살해되고 그 일파도 죽음을 당하거나 변방에 유배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자겸(李資謙) ?-1126(인종 4) 고려 중기의 외척 권세가, 본관은 경원, 호부낭중을 지낸 호의 아들이다. 경원이씨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인주지방의 호족세력으로서, 이허겸의 외손녀가 현종의 비로 책봉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지만, 귀족가문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 때부터이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문벌귀족으로 성장하여 이자겸의 누이 중 장경궁주(長慶宮主)는 순종의 비가 되었고, 부인은 해주 최씨로 수상을 역임한 사추의 딸이다. 이와 같은 가문을 배경으로 그는 음서로 진출하여 초직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제수 받았다. 그러나 더욱 빠른 속도로 출세하게 된 것은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로 들어가면서였다. 그 뒤 참지정사, 상서좌복야를 거쳐 개부의동삼사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로 진급하며, 곧이어 다시 소성군개국백에 봉작됨과 아울러 여러 아들들도 승진되는 특전이 베풀어졌다. 이와 같이 예종 때부터 권력의 핵심에 참여하였지만 아직 정계를 주름잡는 위치는 아니었다.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죽고 그의 외손이 되는 인종이 어린 나이로 이자겸의 보필에 힘입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양상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인종1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이자겸을 평하여 풍채는 맑고 위의는 온화하며 어질고 착한 이를 반겼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군자풍의 태도와 행동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외형상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심이 지나쳤다는 지적도 있다. 권력 면에서는 경원이씨 이외의 다른 성씨가 왕비가 나오면 권세와 총애가 분산될까 염려하여 왕에게 강청, 셋째 딸을 왕비로 들어 보냈던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강력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토대 및 당시 또 하나의 큰 세력을 이루고 있던 사원과의 긴밀한 유대 등을 바탕으로 정계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왕권에까지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 뒤 자칭 지군국사(知軍國事)란 직함으로 나라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고 왕을 자기 집으로 이어(이어)하게 하고는 국사를 제멋대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하여 인종의 밀명을 받은 내의 최사전이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떼어놓는데 성공하여 척준경에 의해 거세된 이자겸은 유배지인 전라도 영광에서 죽었다.(굴비의 유래) 이공수(李公壽):?-1137(인종 15) 고려의 문신, 본관은 인천, 초명은 수(壽), 자는 원로이며, 예의 아들이며, 재상을 지낸 최유선의 외손자이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이 되었고, 이어 좌습유를 거쳐 서경유수판관이 되었다. 예종이 서경에 임하였을 때 백성을 잘 다스렸다하여 칭찬을 받았고, 환도할 때 호종할 것을 명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예부원외랑을 거쳐 병부시랑이 되어 군사를 선발하는데 14년 동안 조금도 잘못도 없었다. 여러 관직을 거친 뒤 공부상서가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검교사도 수사공 참지정사로 발탁된 뒤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뒤에 판이부사 감수국사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문하시중으로 지공거가 되어 왕좌재 등 33인을 뽑았다. 1130년에는 양부의 대신들과 의논하여 관리들에게 쌀을 차등 있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자겸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추충위사동덕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개부의동삼사문하시중상주국으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자현(李資玄) 1061(문종 15)-1125(인종 3)고려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인주, 자는 진정(眞靖), 호는 식암(息庵), 청평거사(淸平居士), 희이자(希夷子). 자연의 손자이며, 의(顗)의 맏아들이다. 1089년(선종 6)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사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세웠던 보현원을 문수원이라 고치고 당과 암자를 지어 이곳에서 나물밥과 베옷으로 생활하며 선(禪)을 즐겼다. 예종이 사람을 시켜 다향과 금백을 보내어 여러 번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1117년(예종 12) 예종이 남경에 행차하였을 때 왕을 만나기는 하였으나 곧 다시 문수원에 들어가 평생을 수도생활로 일관하였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저서로는 선기어록(禪機語錄), 가송(歌頌), 남유시(南遊詩), 포대송(布袋頌), 추화백약공락도시(追和百藥公樂道詩) 등이 있다. 그의 글씨로는 청평산 에서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4자의 대해서(大楷書)가 있다. 청평사는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1리에 있다. 이자덕(李資德) 1071(문종 25)-1138(인종 16), 고려시대의 문신, 자는 관지(觀止)이며, 자연의 손자이며 재상을 지낸 의(顗)의 아들이다. 음보로 경시서승에 임명되면서 관계로 진출하였다. 1111년(예종 6) 형부시랑으로 천흥절을 축하하기 위하여 요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122년에는 동북면병마부사가 되었다. 1123년(인종 1)에는 추밀원부사가 되었고, 1124년에는 어사중승 김부철과 사은사로 송나라에 다녀와서 공부상서지추밀원사에 올랐다. 이듬해에 참지정사가 되었으나, 1126년에는 종형제인 이자겸이 실각하자 그 일파로 논핵되어 황주목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1136년 다시 참지정사가 되었고, 1137 참지정사 태자소보를 겸하였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의(莊懿)이다. 이자량(李資諒)?-1123(인종1).고려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주, 초명은 자훈, 자연의 손자로 호의 아들이며, 자겸의 아우이다. 예종의 외척으로서 좌우위녹사참군사가 되었고, 1107년(예종 2)에는 윤관의 여진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감찰어사가 되었다. 그 뒤 형부시랑 추밀원지주사가 되었으며, 1116년에는 송나라에서 대성악을 보내준 데 대한 사은사로 가서 시명을 떨쳤다. 이듬 해 송나라에서 돌아와 형부시랑 지주사 겸 태자빈객이 되었다. 이 해 4월 인종이 즉위하자 형부상서추밀원사가 된 뒤 수사공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글 읽기를 무척 좋아하였으며, 특히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병법을 연구하며 즐거워하였다고 한다.
이정(李頲)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 수태사 겸 중서령을 지낸 자연의 아들이다. 문종비 인예태후의 오빠이며, 선종비 원희궁비의 아버지이다. 음보로 20세에 내부고사를 거쳐 예빈성주부, 합문지후를 역임, 상서고공원외랑, 상서호부원외랑, 위위소경지합문사, 상서우승, 상서이부시랑, 전중감지상서이부사, 동지충원사 겸 삼사사를 역임하였다. 1068년(문종 22) 우산기상시, 이어 호부상서, 중추사 권서경유수사, 이부상서가 되었다. 51세에 중서시랑동중서 문하평장사판상서병부사서북면병마사겸서경유수사상주국에 이르렀다. 만년에는 불교를 독신하였으며 문하시중으로 생을 마쳤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이호(李顥):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천, 문하시중을 지낸 자연의 아들이며, 자겸과 순종의 비인 장경궁주에게는 아버지가 된다. 관직은 호부낭중에 이르렀고, 뒤에 경원백애 추증되었다. 이지저(李之氐) 1092(선종 9)~1145(인종 23).고려시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인천으로 예(預)의 손자이며, 시중을 지낸 공수(公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고, 문장에 능하여 글을 지을 때에는 미리 지어둔 것과 같았다고 한다. 1120년(예종15)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인종 초에는 우정언에 임명되어 지론(持論)이 공정하였으나, 재상의 비위를 거슬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옮겨졌다가 서해도 안찰사로 나갔다. 이자겸이 정권을 잡자 이를 노려 많은 무리들이 다투어 붙었어나. 그는 친족이면서도 상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자겸의 사자들이 주군에서 뇌물을 받아들이므로 이를 금하다가 미움을 받아 지평주군사로 좌천되었다. 이자겸이 물러나자기거주(起居注)가 되었다. 또한 묘청(妙淸). 배수환 등과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여 금나라에 대하여 신중론을 폈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중서사인에 임명하였고, 1135년(인종13)에 묘청 등이 난을 일으키자 인종에게 건의하여 문공인, 임경청 등을 파면시켰다. 이듬해 좌승선으로 서경을 초유하였다. 1138년 추밀원부사가 되고, 동지공거가 되어 이대유 등 29인을 뽑았다. 1140년 예부상서가되었고 1141년 정당문학 판한림원사가 되었다. 1142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수사공 좌복야에 오르고, 1143년에는 참지정사판서경유수사를 지냈다. 중서시랑평장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지무(李之茂)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천이다. 1141년(인종 19) 사신으로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1147년(의종 1)국자감시의 시험관에 발탁되었다. 이듬해에 우간의대부, 좌간의대부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1150년 동지공거가 되어 예부시를 주관하였으며, 다음해 지어사대사가 되었다. 1156년 지공거가 되어 다시 예부시를 관장하였다. 그 해 태자태보에 임명되어 김존중을 대신하였다. 다음해 감수국사가 되었다. 1162년 판상서이부사를 거쳐 1164년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이듬해 문하시랑 도중서문하평장사에 올랐다. 이지미(李之美)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문하시중 자연의 증손으로 자겸의 아들이다. 1118년(예종 13) 정극영과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권적 등을 제과에 합격시켜준 것과 조서를 내려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1124년(인조 2) 이자겸이 공신호를 받았는데, 이때 그도 비서감 추미원부사에 올랐고,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그 해 지추밀원사에 이르렀다. 1126년 왕명을 받아 태묘에 가서 금나라에 대하여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점쳤는데, 그 뒤 곧 판추밀원사가 되었다. 이해 척준경의 거사로 이자겸 일파가 모두 붙잡혔는데, 이때 붙잡혀 합주(지금의 합천)로 유배당하였다. 1129년 왕이 서경에서 돌아와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는데, 이때 모든 형제들과 함께 편리한 데로 한곳에 모여 살도록 허락되었다. 이지보(李之甫)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문하시중 자연의 증손, 자겸의 아들,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김향(金珦)의 사위이다. 가문에 힘입어 관직이 상서호부낭중 지다방사에 이르렀다. 1126년(인종 4) 지녹연이 오탁 등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 때 이자겸의 명령을 받고 지녹연을 붙잡아 순천관에서 고문하여 거의 죽음에 이르도록 하였다. 이해 척준경이 이자겸 일당을 제거할 때 연좌되어 삼척에 유배당하였다. 1129년 왕이 서경에서 돌아와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는데, 이때 모든 형제들과 함께 편리한 데로 한곳에 모여 살도록 허락되었다. 이광진(李光縉) ?-1178(명종 8)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인천, 초명은 원휴이다.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등의 6조를 섬긴 문신 이오의 손자이다. 음보로 양온승이 되어 재부에 까지 올랐다. 1170년 무신의 난이 발생하여 문신들이 무참히 도륙당할 때, 온순, 근실하여 무신들에게 반감이 적었으므로 목숨을 보전하였다고 한다. 1157년(의종 11)공부낭중으로 조정의 명을 받아 금나라에 가서 의종의 생신을 축하해 준 점을 사례하였다. 1169년 시병부상서를 거쳐 1170년 중군병마사,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명종 초에 참지정사가 되었고, 중서시랑문하평장사가 되어 전형을 맡았다. 시호는 정의(貞懿)이다. 이혁유(李奕蕤) ?-1192년(명종 22), 고려시대의 문신이다. 초명은 응의(應誼)이며, 중서령을 지낸 자연의 증손이며, 식의 아들이다. 어려서 문과에 급제하여 직문하성이 되었고, 왕의 뜻에 맞는 의견을 자주 올렸다. 1190년(명종 20) 참지정사가 되고, 이듬해에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문벌귀족 가문에서 성장하였으나 교만하지 아니하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으며, 정중부의 난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
이인로(李仁老) 1152(의종 6)-1220(고종 7) 고려 무신집권기의 문인. 초명은 득옥, 자는 미수, 호는 쌍명재이다. 가문은 무신란 이전 고려전기의 3대 가문의 하나였던 경원 이씨로 누대에 걸친 왕가의 외척으로서 무동의 문벌을 형성하였다. 증조부는 평장사를 지낸 오이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을 볼 수 없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는데, 화엄 승통인 요일이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나, 1170년(의종 24) 그의 나이 19세 때 정중부가 무신의 난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에 귀의하였다. 뒤에 환속하여 25세 때에는 태학에 들어가 육경을 두루 학습하였고,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에 서장관으로 수행하였고,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뒤 문극겸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를 짓되 막힘이 없으므로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그 때부터 임춘, 오세재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예부원외랑, 비서감우간의대부를 역임하였다. 아들 세황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 과거의 시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하다가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의 명을 받았으나, 시석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을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열전에서 그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한 것은,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 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학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의구묘(語意俱妙)’를 강조한 작시론 이라 하겠다. 또한 어묘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의 자연 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를 위해서는 신의(新意)를 중시하였다. 저술로는 은대집(銀臺集), 쌍명재집(雙明齋集), 파한집(破閑集) 등이 있다고 하나 파한집만 전한다. 이간(李侃) 1167(의종 21)-1216(고종 3)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원, 초명은 방영, 자는 거화이다. 문종 때의 척신, 자연의 손자인 자덕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수사공우복야를 지냈다. 1190년(명종 20) 과거에 급제하여 첨부사의 녹사와 주부, 중서정언, 기거사인 등을 지내고, 평주에 출보 하였으며, 이어 기가랑지제고에 올랐으나 요절하였다. 평장사 왕공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도량과 풍채가 뛰어나고 청렴하여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독서, 시부, 원유를 즐겨하였다고 한다. 1216년(고종 3)에 도관원외랑 허씨가 지은 묘지명이 전한다. 이장용(李藏用) 1201(신종4)-1272(원종 13) 고려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인주, 자는 현보, 초명은 인기, 중서령 자연의 6세손이며, 추밀원사 경의 아들이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서경사록, 교서랑 겸 직사관, 국저대사성 추밀원승지를 거쳐 1256년(고종 43)추밀원부사, 1258년 정당문학을 역임하였다. 1260년 (원종 1) 참지정사 수태위 감수국사 판호부사, 1262년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어 수태부 판병부사 태자태부를 겸하였다. 1264년에 왕이 몽고에 입조할 때 수행, 해동현인으로 칭송을 받아 명재상으로 이름을 높였다.rnlrnr 후 왕을 잘 수행한 공으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오르고 경원국개국백.에 봉하여졌으며 태자태사가 더하여졌다. 1267년 몽고가 병부시랑 흑적 등을 보내어 일본을 초유하게 하는 것을 반대하여 관철시키고, 이 해에 감수국사가 되어 동수국사 유경, 수찬관 김구, 허기 등과 신종, 희종, 강종에 이르는 3대실록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이듬 해 문하시중에 오르고 1269년 절일사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여러 번 지공거를 역임하였다. 1271년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려 할 때 이를 방지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위할 것을 말한 일로 면직되어 서인이 되었다. 경사(經史)에 밝고, 음양, 의약, 율려에 통달하였으며, 문장에 능하고 불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몽고와의 외교에 공을 세웠고, 일찍이 개경 천도를 주장하기도하였으며, 이승휴를 천거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다. 시호는 문진(文眞)이다. 이문화(李文和):1358(공민왕7)~1414(태종14).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자는 백중(伯中).호는 오천(烏川). 전공판서(典工判書) 심(深)의 아들로, 평장사 지저의 6세손이다. 1380년(우왕 5)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우정언, 우헌납, 예문응교를 거쳐 경상도안렴사를 지내고, 공양왕 때 우사의를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간의대부에 등용되고 1395년(태조 4) 검교시중직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1397년 좌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 겸 상서윤을 지냈다. 1399년(정종 1) 생원시를 관장하고 이듬해 첨서의흥삼군부사가 되어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사평부우사로 등용되었으나 분경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경상도관찰출척사로 외방에 나가고 이어 참찬의정부사, 사평부의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 대사헌을 지냈다. 1405년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도체찰사 임무를 대행하고 이어 명나라 황엄의 접반사가 되었다.1408년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그해 처녀 진헌사로 명나라에 갔다. 1409년 형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민무질 사건에 연루, 면직되었다. 1411년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저화(楮貨)에 삼사신판 대신 호조신판이라는 글로 대체할 것을 주장, 시행하게 하였다. 1413년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참찬의정부사가 되고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대구의 서계서원, 장흥의 금계사, 함안의 도천사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공도이다.
이원굉(李元紘)?~1405(태종 5)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인주. 호는 春谷.고려 말 우왕 초에 대언을 지내고 뒤에 燕山君에 봉하여졌다.1384년(우왕10)사신으로 명나에 가서 세공을 바치고 돌아온 뒤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되었으며, 1391년 다시 경원군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그의 딸이 공양왕의 비가 되고, 같은 해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처 다시 정당문학에 올라 과거를 관장하였다. 1392년 조선개국 뒤에는 개성유후사 유후를 지냈다. 저서로 <<춘곡집>>이 있다. 이관(李灌) ?-1418(태종 18) 조선초기의 문신, 정당문학 이원굉의 아들이며, 1393년(태조 2) 춘장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고, 1401년(태종 1) 지양주사가 되었다. 1408년에는 충청도경차관으로 나가 도망간 군인들을 추쇄하였다. 이어 사헌부집의, 대언을 지내고, 1413년 지신사를 지냈으나 이듬해 도량형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규찰하지 않았다 하여 또 파직되었다. 곧 함길도관찰사를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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