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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Da Nang)의 참 박물관(Cham Museum)
다낭의 남쪽 끝 쪽에 위치한 참(Cham) 박물관을 찾았다.
나트랑 남쪽부터 위년 일대의 참 유적지를 다 돌아보고 다낭의 박물관까지 왔으니 베트남 미선 유적에 대해서는 거의 섭렵한 것이다. 1915년 세워진 이 박물관은 세계 최대 참 유적을 보관한 곳이다.
참 문화는 인도에서 도입된 힌두교를 모태로 하여 불교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힌두 문화의 것과 크게 다른바 없으나 링가는 시바를 상징하는 남근 사상으로 발기된 남자의 성기를 육감적으로 조각해 숭배한다. 특히 uroja 는 유방을 뜻하는 것으로 참파 왕국의 왕을 낳은 어머니 이름이다. uroja는 젖꼭지로 비유되어 숭배하며 참 유적에 많이 나타난다. 특히 링가의 받침대 주변에 여자의 유방을 조각한 것도 있어 uroja와 Linga가 일체를 이루는 모양을 볼 수 있다.
이 박물관의 유적은 주로 위년 지역의 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박물관으로 나와 걸어서 다낭 해수욕장까지 구경하고 돌아 왔다.
베트남의 古都 훼(Hue)
다낭에서 기차편을 이용하여 훼로 향했다. 다낭을 벗어나 훼의 중간 지점에 하이반만 고개가 있는데 이곳이 베트남 해안 중 가장 절경이라는 곳이다.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베트남인들의 남북의 기질이 달라진다고 한다. 3시간 걸린다는 것이 4시간만에 도착했다. 훼 역에서 200m 앞에 있는 레로이(LeLoi)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6달러에 두사람이 쓸 수 있는 방을 혼자 쓰고 베란다의 전방도 좋다.
이 지역은 참파 왕국에 통치되어 오다 15세기에 구엔 왕조에 병합되고 1775년 찐 왕조에게 그 다음 타이손 형제에게 점령되고 1802년부터 구엔 왕조가 이 지역을 회복하였다.
1883년 프랑스 식민 통치가 시작되고 2차대전 종식과 함께 바오다이 황제를 마지막으로 구엔 왕조가 멸망한다. 이런 역사적인 관계로 훼에는 많은 역사적 유물의 보고가 되었다. 월남전 당시 구정 대공세때 월맹군에 점령되어 미군이 이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무차별 폭격을 하여 많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훼는 향수의 강(Perfume River)에 의해 구도시와 신도시로 양분된다. 먼저 왕궁을 가 보기로 하고 다리를 건넜다. 왕궁으로 가는데는 국기 게양대를 목표로 하고 가면 된다. 왕궁의 석조 문을 지나면 왕궁 안이다. 왕궁 주위는 4개의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연못 안 쪽에 인공호가 둘러 있다. 정문을 들어서 왕궁문 위로 올라가면 왕궁 밖과 안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전망이 좋다.
다음 건물이 태화전으로 빨간색 지붕의 단층 건물로 자금성을 모방했다 한다. 여기서 황제 즉위식을 하고 황제가 사용하던 금박 의자와 대좌가 있다 태화전 밖에는 좌우로 당시 귀족들이 계급 순으로 서 있는 표지가 있다. 현임각에 들어서면 정원에 황제를 상징하는 9개의 청동 솔이 있다. 장생전은 자롱왕의 어머니가 살았던 곳으로 고가의 의자와 중국식 테이블 등으로 꾸몄다지만 전쟁에 의해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그 안으로 비원의 모습은 모두 폐허가 되고 황제들의 위폐를 모신 누각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호텔에 돌아와 투어 신청을 하다 위년에서 만났던 일본 여선생을 만났다.
그녀도 내가 참여하는 투어를 신청했다.
鄕愁의 강(Perfume River) 쿠르즈
8시 호텔 앞에 모인 일일 관광팀은 일본인 남녀 각 2명, 영국 여자 2명, 오스트리아 여선생 1명, 나까지 합쳐 9명이 강가에 나가 용머리 모양을 한 배를 탔다.
배가 향수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강속에서 현지인들이 강바닥에서 바구니로 모래를 퍼 올려 배위에 싣고 있는 모습이 즐비하다. 모래를 채취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제일 먼저 티엔무사(Thien mu)에 배를 대었다. 아름다운 모습이 향수의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21m나 되는 칠층 팔각 탑에 각 층 마다 불상이 안치되고 탑 뒤에는 역사를 적은 석비가 있다. 그 옆에 커다란 종이 있는데 종에 양각된 무늬 중에 태극의 쾌와 같은 무늬가 눈에 띈다. 탑을 지나면 석가를 모신 사원이 나오고 탁광덕 스님이 타던 자동차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다시 배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 드득황제의 묘에 도착했다. 강가에서 한참을 걸어서야 황제 묘에 도착했다. 넓은 별장처럼 아름답게 지어진 궁전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큰 연못이 있고 그 주위에 아름다운 목조 누각을 지어 놓았다. 왼쪽으로 황제를 모신 절이 있고 그 뒤에 석비가 있고 다시 그 위에 연못이 있고 그 뒤로 황제의 묘가 있다.
투덕(Tu Duc)황제는 35년간 통치하며 어려운 시기에 매우 호사스런 생활을 했다 한다. 100명이 넘는 후궁을 거느렸지만 자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배에까지 도착하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오스트리아 여선생과 잰 거름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배에 돌아보니 영국 여자 2명만 정시에 도착했다. 10분후 다른 외국인은 다왔는데 일본인 4명만 도착하지 않아 중년의 미국인이 불만이다.
배안의 의자는 플라스틱 의자인데 23살 먹은 영국 여자 하나는 엉덩이가 어찌나 큰지 그가 일어 날 때는 의자가 함께 붙어 다녀 그가 일어 날 때마다 의자를 불잡아 주니 다른 사람은 웃고 그는 고맙다는 인사가 계속하였다.
향수의 강 절벽에 있는 훈첸 사원(Hon Chen Temple)은 작은 절로 크게 볼 것은 없었지만 투덕 황제의 왕관이 이곳에 보관되고 있었다.
강을 더 올라가 도착한 곳이 민망황제(Minh Mang)의 묘였다. 강가에서 황제 묘까지 가는 길가엔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현지인과 아이들이 야단이다.
황제 묘의 정문을 들어서면 위엄이 있고 감탄할 정도로 잘 만들어 졌다. 중국식으로 지어진 이 묘는 3년간의 공사로 완성되었다.
맨 앞의 돌계단 앞에는 석상이 양쪽에 늘어 서 있고 계단을 올라서면 황제의 공적을 찬양하는 석비가 있는 건물에 이르게 된다. 아치형 문을 지나면 황제와 황후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 있고 뒤편 연못에는 세 개의 다리가 놓여 있는데 가운데 다리는 황제 전용 다리 였다.
이 다리 건너에 명루가 있는데 이 정자가 황제의 놀이터로써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정자 뒤에 정대광명이라 쓴 문을 지나면 다리가 있고 그 뒤에 황제 능이 있다. 참으로 베트남 건축의 진수를 보는 것 같다.
강을 다시 조금 내려와 반대 편 기슭에 배를 대고 오토바이를 타고 카이딘(Khai Dinh)황제묘로 향했다.
이 능은 유럽식이 많이 가미되어 고딕 양식의 석조 건물과 첨탑들이 볼 만하다. 묘지를 지키는 석상에 유럽인의 모습도 있어 프랑스 식민 통치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본관 내의 도자기 모자이크의 현란함이 더 할 수 없이 화려하다 본관에 황제의 사진이 걸려 있고 동상과 무덤이 독특한 양식으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배를 되돌려 호텔로 돌아왔다.
일본인 4명과 함께 베트남의 올드 뮤직을 감상하기로 합의했다.
鄕愁의 강위에서 펼쳐지는 올드뮤직
저녁 식사를 하고 8시에 호텔 후론트에서 일본인 4명을 만나 안내인의 안내로 향수의 강가에 나가니 많은 여행자들이 나와 있었다.
그 중 한 배를 타니 6명의 악사들과 우리 5명 뱃사공 1명이 전부다.
깜깜한 강위에 배를 띄우고 여기서 베트남에 전래되는 음악을 듣게 된다. 악사는 가야금 같은 현악기를 하는 여자 바이올린 비슷한 악기를 하는 남자 기타 비슷한 현악기를 하는 남자 타악기를 휴대한 여자 술잔 4개로 소리를 내는 여자, 그리고 또 한 여자가 악단이 되는 셈이다. 합주가 시작되는데 이 모든 악기가 제각기의 소리를 내며 감탄할 만한 음을 내었다.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로 말하면 창과 같은 것이었다.
얼마간을 계속하다 그들은 종이꽃에 촛불을 밝혀 우리에게 강물에 띄우라며 30여개를 준다. 많은 꽃 촛불이 서서히 강물을 떠내려가니 그 운치가 그만이다. 가야금 같은 악기를 가진 중년의 미인이 독주를 하는데 음악을 잘 모르는 나도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옛날 귀족들이 강위에서 풍류를 즐기던 모습을 재연하여 관광객에게 선 보이는 것이다. 1시간 넘게 공연하는데 5불이고 사람이 많으면 부담이 적어진다.
공연이 끝나고 일본인들의 제의로 맥주를 늦게까지 먹다 헤어 졌다.
훼(Hue)郊外에서 만난 先生
하노이로 가기 위해 훼(Hue) 역에 나가 침대 칸을 알아보니 표가 없단다. 난감한 일이다.
버스로 하노이까지 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여자 직원을 붙잡고 무슨 수가 없느냐고 사정을 하니 잠깐 기다려 보란다. 결국 침대표를 5달라 더 주고 기차표를 구했다. 이것은 여행자의 지혜다. 티켓 때문에 할 일 없이 하루 이틀을 더 머문다면 그처럼 무모한 일이 또 있을까?
호텔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향수의 강을 따라 시골길을 달렸다. 더위에 시달렸지만 베트남의 자연 부락을 꼭 가보고 싶어 무작정 교외로 나갔다. 2시간을 달리니 갈증이 오고 더위를 견디기 힘든 차에 시골 장터가 나왔다.
시골 장터는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사탕수수 즙을 먹기 위해 자전거를 세우고 나무 의자에 앉아 즙을 먹고 있는데 옷감을 파는 여자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온다. 한국이라고 말하니 이 여자가 남주띤이 왔다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장터의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몰려들어 신기한 듯 바라본다. 아이들은 곁에 와서 나를 건드려 보기도 한다. 다시 가던 길을 달려 한 시간쯤 가니 중년 부인과 할머니가 바구니에 물건을 가지고 함께 걸어가고 있어 자전거를 내려 그들과 함께 걸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친절했다. 얼마를 가다가 그들이 숲이 우거진 마을로 접어들자 나도 따라 들어섰다. 집이 몇 채 없는 것 같은데 과일 나무숲을 지나면 또 집이 나오고 꽤 큰 규모의 마을이 였다. 길가 수로에는 물이 풍족하게 흐르고 마을 아이들이 나를 보고 골목길로 뛰어 나와 뒤를 따른다. 중년 부인은 한 집으로 들어가며 들려 가라고 손짓을 했지만 할머니를 따라 한참을 가니 그도 자기집 앞에서 헤어 졌다.
마을 큰 길 쪽에 나와 고목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니 사당이 있었는데 규모가 큰 사당으로 부처만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위인들도 모셔 놓고 숭배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쉬고 있자니 지나가던 왠 사내가 다가와 인사를 하며 무어라 지껄이는데 정말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는 내 곁에 앉아 대뜸 담배를 달래 피워 물고 사라져 갔다.
마을로 돌아보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다 다시 장터에서 갈증을 해결하는데 옷 파는 여자가 남주띤이 왔다고 계속 떠들어댄다. 이때 곱상스런 한 여자가 다가와 한국말로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다시 옷가게 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고 말해 내 이름은 “초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한국말을 하느냐고 물으니 별 대답을 못 한다. 이상스럽다 싶어 한국 책을 보여 주니 우리 글을 정확히 잘 읽었다. 의미는 잘 모르면서 말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자꾸 물으니 자기 집에 가자고 한다.
장터에서 얼마 떨어진 길가의 그의 집을 가니 남편을 소개한다. 고등학교 선생이였다는 그의 남편은 영어로 의사 소통이 가능했다. 알고 보니 이 여자는 한국에 취업 관계로 잠시 머물다 간 사람으로 그가 한국어 공부했던 자료를 꺼내 놓았다.
여자와는 별 다른 의사 소통이 되지 않아 그의 남편과 대화를 나누는데 내가 학교 선생이라고 하니까 자기도 고등학교 선생이 였다며 지금은 쫓겨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소연했다.
통일이 되자 남쪽 사람들을 단계적으로 쫓아내 자기는 10년전에 그만 두고 놀고 있단다. 남쪽의 사상을 가졌던 사람은 이 사회에서 취직은 불가능하다며 북쪽 사람들이 격렬히 비판했다.
먹고살기 어려워 부인을 한국에 보내려고 하는데 4,000달러를 내야 되는데 베트남의 4,000달러는 그야말로 큰돈이 아닐 수 없었다. 웬만한 사람들의 봉급 수준이 30달러에서 50달라니 엄두도 못 낼 일이 아닌가. 내가 생각해도 그들이 앞날에 밝은 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과 헤어져 훼로 돌아와 왕궁을 자전거로 돌아보고 호텔에 돌아와 낮잠을 청했다.
하노이(Ha Noi)行 列車
오후에는 하노이(Ha Noi)로 떠나기 때문에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베낭을 후론트에 맡기고 신도시를 돌아 보다 길거리에서 400원을 주고 이발을 했다. 어차피 한국에 가 이발을 해야 할 터인데 싼 맛에 베트남 이발을 했다. 머리는 감겨 주지 않는다.
호텔에 돌아와 그 동안 친절이 대해 주던 호텔 식당 아가씨들과 인사를 하고 훼 역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외국인은 10여명 있었지만 한국인 한명 만날 수 없다. 기차가 도착하여 탈 곳을 확인하고 침대 칸에 가니 제일 위에 있는 침대 였다. 한 칸에 6명이 있는데 4명이 베트남인이고 한 명이 일본 젊은이 였다. 일본인은 자기 무리에서 떨어져 우리 칸에 있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 나와는 하노이 도착할 때까지 전혀 대화를 못 했다.
열차가 출발하고 티켓을 점검한 다음 식사가 배달되었다. 이 식사는 열차 티켓에 포함된 것이다. 도시락은 먹을 만 했다. 그 다음 외국인에게만 생수 한 병을 갖다 주었다. 외국인은 내국인에 비해 열차 요금이 4-5배 되는 것에 비하면 이건 결코 특혜가 아니다.
어둠이 깃들자 제일 윗칸으로 올라가 들어 누웠다. 천정이 낮은데다 작은 선풍기가 신통치 않게 돌아가니 모든 열기는 위로 올라오고 답답했다. 하노이까지 계속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일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하노이역에 도착하자 시클로를 이용하여 호텔로 갔는데 생각보다 엄청나게 비싼 60달러를 한단다. 나에게 기절할 요금이어서 그때부터 아침거리를 걸으며 호텔을 구하러 다녔다. 한곳에 가니 40달러 또 다른 곳에 들리니 30달러 다른 거리로 들어서 호텔에 들어가니 후론트 아가씨가 50달러라고 하며 40달러까지 해주겠단다. 매우 비싼 요금이라고 하니 자기네 호텔의 방은 아주 아름다운 방이라 한다. 얘야 그런 소리 마라 잠만 자면 된다.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고생을 무척 할 것 같다. 이 아가씨에게 아주 싼 호텔을 소개해 달라고 말했다. 이 아가씨는 명함이 꽂혀 있는 책자를 뒤적이다 주소 하나를 적어 준다. 이 호텔은 15달러면 숙박이 가능하다고 일러준다.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호텔밖에 나와 40m 거리의 호텔을 손짓으로 가르쳐 준다. 고마운 일이 였다. 알려준 마이 리엔(Mai Lien)호텔에 들어가 요금을 물으니 20달러라고 한다. 주인에게 깎아 달라고 사정하니 15달러에 해준다. 이 호텔은 가족이 운영하는 곳으로 배정된 방에 들어가니 지금까지 베트남에서 묵은 호텔 중 제일 호화판이고 깨끗할 수가 없었다. 매일 청소도 잘해 주고 냉장고, 에어컨, TV, 냉온수 불편한 것이 없고 가족적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었다.
기차에 시달린 대다 호텔 찾느라고 아침부터 강행군을 했다. 샤워를 하고 점심때까지 잠이 들었다.
아오자이와 베트남 女人
베트남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 중에 젊은 처녀들의 검고 긴 머리에다 흰 아오자이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잘 어울린다. 탐스러운 검은머리의 아름다움이 눈길을 끈다. 이곳 여자들의 길고 검은머리가 부럽다.
아오자이는 베트남 전통 의상으로 긴 옷이라는 뜻이다. 통일이 되자마자 아오자이 입는 것을 일시 금지시켰으나 지금은 통제 없이 아오자이를 펄럭이며 활보하고 있다.
아오자이는 속살이 비치는 하늘하늘한 천으로 만들어져 선정적이고 육감적이다. 상의는 몸에 꼭 쪼이도록 한데다 옆구리를 터놓아 속살이 드러나 이방인의 눈길을 끌기에 족하다. 하의는 히프에서부터 헐렁하게 되어 있는데 이들이 입는 속옷은 브라자와 팬티뿐이다. 속이 비치는 옷은 팬티에 레이스 무늬까지 드러나 앞으로 늘어진 긴 천만 없다면 위태로움까지 든다. 두가닥의 긴 천은 데이트때 한자락은 남자의 자리를 마련하기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으며 베트남의 옛 전설 속에는 이루지 못할 사랑의 정사에는 아오자이의 두자락 긴 천이 유용하게 쓰인 이야기가 무수히 희자되고 있다. 얼마나 서정적인 의상인가
서양 여행자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저희들끼리 수근 거리며 아오자이를 입는 젊은 여성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으나 그곳의 여성은 별 개의치 않는다.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더욱이 아오자이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스콜이라도 내려 흠뻑 젖은 모습은 더 육감적이다.
또한 베트남 여인들은 선천적으로 미인들이다. 소식을 해서인지 비만의 여성을 찾기 힘들고 모두가 날씬하다. 피부 빛깔도 열대에 사는 사람으론 상당히 희다. 우리네 보다 더 희다고 느껴진다. 눈이 맑고 거의 선천적 쌍가풀을 가지고 태어난다. 웃을 때도 눈이 더 웃는다. 외모를 너무 치장하지 않아 순수하고 청순해서 좋다.
아시아에서의 여성 중에는 제일 미인이 아닌가 싶다.
마치 서쪽 하늘에 걸린 초생달 같은 여인들이다.
南과 北의 葛藤
베트남 역사를 통해 보면 한결같이 북의 세력이 남으로 진행되는 베트남화 과정이 진행되어 왔다. 남쪽에서는 오랜 기간의 피해 의식과 지역 감정은 뿌리 깊고 심각하다. 사람들의 기질부터 생김새가 다르다. 북쪽 사람은 남쪽보다 피부가 희고 과묵하며 남쪽 사람을 정신 상태가 썩은 사람들이라고 치부하며 남쪽 사람들은 북쪽 사람들은 고지식하고 거들먹거린다고 생각한다.
현재 북쪽 사람들은 승전 국민으로서 모든 부분의 상층부에 군림하고 남쪽 사람은 패전 국민으로서 하층부에서 불만을 삭이고 있다. 그 불만의 도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지만 어느 누구도 현 상황에서 노골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묵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개방화와 시장 경계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경제적인 측면은 남쪽 사람들이 억척스럽다. 북쪽 사람들은 아직 자본주의가 몸에 배지 않은 모습이다. 가령 시클로 운전사를 예로 들면 사이공의 시클로 운전사는 귀찮은 정도로 끈질기게 손님을 유인한다. 하노이의 시클로 운전사는 거리에서 손님이 타자고 해야 출발하는 정도다. 손님을 유인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 앞으로 남쪽의 경제 상황이 월등히 좋아진다면 이런 묵계 상황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고 보면 아직 베트남은 완전한 통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 갈등이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분단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첫댓글 이오자이 베트남 여인네의 선정적인 모습을 눈으로만 감상 했을까?! 글로 쓸수 없으면 얘기라도 어떻게 않될까? 자수하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