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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제국(歐美諸國)과 같은 문명국가권에서 볼 때 미개지의 암흑대륙으로 여겨지던 아프리카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던 일련의 지리적·역사적 여러 탐험.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BC 430년경 나일강을 아스완 부근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곳에서 들은 것을 기초로 나일강 상류의 쿠시왕국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
구미제국(歐美諸國)과 같은 문명국가권에서 볼 때 미개지의 암흑대륙으로 여겨지던 아프리카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던 일련의 지리적·역사적 여러 탐험.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BC 430년경 나일강을 아스완 부근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곳에서 들은 것을 기초로 나일강 상류의 쿠시왕국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약 400년 뒤에 무명의 그리스인이 《에리트라해 안내기》를 썼는데, 현재의 동아프리카 해안부에 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로마시대에는 북아프리카에 로마제국 식민지가 설치되었으며 BC 23년에는 로마의 이집트 총독 G. 페트로니우스가 쿠시를 원정하였고, AD 61년에는 네로황제가 나일강 상류를 탐험하였다. 아랍인이 <산지>라 했던 동아프리카 해안부에 관해서는 10세기 초의 아랍인 여행가 마수디, 해안 제도시의 번영에 관해서는 12세기 모로코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기록을 남겼고, 1417∼1419년에는 명(明)나라 정화(鄭和)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항했다. 1498년에는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가 동해안에 진출하였으며, 그 뒤 수많은 포르투갈인이 해안도시를 위협했다. 서수단에서는 일찍부터 사하라사막을 넘어서 대상로(隊商路)를 따라 아랍인과 접촉을 했는데, 아랍인의 목적은 소금과 교환하여 금(뒤에는 노예)을 입수하는 데 있었다. 이 땅에서 번영한 고대가나제국(8∼11세기 말)에 관해서는 11세기 말 아랍인 여행가 알 바크리의 기록, 계속되는 말리제국(13∼15세기 말)에 관해서는 14세기 중엽의 이븐 바투타의 기록, 송가이제국(14∼16세기 말)에 관해서는 16세기초의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기록이 남아 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동인도무역의 보급기지로서 케이프타운에 상륙한 이래, 회사는 이민을 장려하고 북동 내륙부로 진출하였는데, 본격적인 내륙진출은 1814년의 영국의 케이프식민지화와 그 뒤에 이어지는 보어인(네덜란드계)의 그레이트 트렉(1835∼38)과, 오렌지자유국 및 트란스발공화국의 건국이다. 한편, 영국정부는 내륙에 대해 영토면에서는 무관심했으나 그리스도교 포교는 적극적으로 이루어 나갔다. 1840년 런던 전도협회로부터 파견된 D. 리빙스턴은 처음에 베추아날랜드(보츠와나)의 쿠루만에 전도소를 열었는데, 그 뒤 포교할 목적으로 더 내륙으로 들어가 3회에 걸쳐서 탐험을 했다. 제1회(1841∼56)는 서해안의 루안다로 나가 다시 되돌아와서 잠베지강 하구까지 내려갔으며, 제2회(1858∼64)는 잠베지강을 거슬러 올라가, 도중에 시레강으로 들어가서 말라위호를 발견했으며, 제3회(1866∼73)는 루부마강을 따라 말라위호로 나갔으며, 북상하여 탕가니카호로 향했는데, 그 뒤 소식이 끊겼다가 《뉴욕헤럴드》지 기자이며 탐험가인 H.M. 스탠리의 수색으로 우지지에서 극적으로 회견했다(1871). 18세기 후반에 설립된 영국의 아프리카내륙발견협회(뒤의 왕립지리학협회)의 목적은 노예무역의 폐지와 내륙부에 대한 지리학상의 관심이었으며, 우선 그 대상을 니제르강의 수원·수류(水流)·하구의 조사로 돌리고 탐험가에게 재정적인 원조를 해주었다. M. 파크는 2회의 탐험(1795∼97, 1805∼1806)으로 수류를 밝혔으나, 도중에 부사에서 사고로 죽었다. 이어서 D. 데넘·H. 클래퍼턴·W. 오드네이가 북아프리카 트리폴리에서 남하하여 차드호에 도달하였으며, 차드호와 니제르강이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증명했다. 또 A.G. 레잉 소령은 강의 수원을 밝혔으며 백인으로는 처음으로 통부크투로 들어갔으나, 귀로에 살해되었다. 한편, R. 카이에는 혼자서 감비아로부터 통부크투로 들어간 다음 사하라사막을 종단하여 모로코의 라바트로 빠져나왔다. 1830년 레인더형제는 기니에서 북상하여 부사에 이르렀으며, 강을 내려가서 대서양으로 나가 처음으로 니제르강의 하구를 밝혀냈다. 니제르강 문제가 해결된 뒤 왕립지리학협회의 관심은 나일강 수원으로 돌아갔다. 먼저 R.F. 버턴과 J.H. 스피크는 1857년 잔지바르로부터 내륙으로 들어가 1858년 탕가니카호(湖)에 도착했다. 버턴이 병을 치료하고 있는 사이에 스피크는 북상하여 빅토리아호에 이르러 나일강의 수원임을 직접 보고 확인했다. 이어서 그는 J. 그랜트와 함께 수원문제에 결말을 내기 위해, 1860년 잔지바르로부터 빅토리아호의 서안을 돌아서 부간다왕국(우간다)에 도착했으며, 1862년 빅토리아·나일강의 유출구를 확인했다. 그 뒤 나일강을 따라 카이로로 나가는 도중, 이집트에서 남하해 온 S.W. 베이커 부처를 만났으며, 베이커는 앨버트호를 발견했다. 한편, 1871년 소식이 끊긴 리빙스턴을 우지지에서 찾은 바 있는 스탠리는 1874년에 다시 대호지방의 탐험대를 조직하고, 호수를 배로 일주하여 스피크설을 증명했다. 다시 부간다왕국에 들른 다음 앨버트호·에드워드호를 거쳐 탕가니카호에 도착하여, 이 호수에서 유출하는 루알라바강을 따라 콩고강으로 나가, 이 강을 내려가서 1877년 처음으로 하구에 도달했다. 스탠리의 이 탐험은 그 뒤에 벌어지는 아프리카 분할의 개막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