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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 행
청다리
聖穴寺
錦城壇
죽계9곡
겨울山行 溫泉浴
울산 박제상
雲門寺
鳳停寺
陜川 海印寺
星州
智異山 10경
경대 박물관 정원 석조부도
명산순례 (2) 설악산 덕유산편
內延山 香爐峰, 덕골
봉화 구마동계곡
오지마을 (17곳)
계곡소개
도보여행
尙州
善山
周王山
蔚山
淸道
把溪寺
불굴사
중요민속자료 104호
신성봉(967m) <스포츠서울 12/17 25p>
고성 공룡터
전기 없는 마을
飛鶴山(762m)
문경 단산(956)
石浦
남해안 봄구경
문경 이화령 조령산(1017m)
덕유산 종주
昌寧
聞慶 曦陽山(999m)
山淸 淨水山(828m)
榮州 浮石寺
봉화 삼동치 췌언
中峰골→靑玉山
太白 龍淵洞窟
簡易驛
대구-전주 완행 노정 (1997)
慶山
안동 임하댐 龍溪里 700년 은행나무.
密陽 山內 白雲山(885m)
葛羅山과 高山精舍
울진 12령
漆谷 西來山 望月寺
청다리
내죽 버스정류장 앞, 죽계천 상류. 1710(숙종36)에 세운 '霽月橋'로 2년마다 새로 놓는 나무다리.
다리 앞 비석에 <康熙庚寅五月霽月橋>라 새겨져 있다. 옛날 유생들과 종이나 마을처녀 사이에서 난 아이를 이 다리 밑에 많이 버려, 아이를 놀릴 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생긴 곳이라 하며, 버려져 죽은 아이의 원혼이 귀신이 되어, 밤에는 무서워서 동백꽃을 입에 물고 소꼬리를 잡고 건넜다 한다.
聖穴寺
소백산 국망봉 아래 월명봉 동남쪽 기슭에 있다.
절의 이름이 본시 작은 토굴 수도처로 시작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신라시대 義湘大師가 草庵寺에서 수도하던 중, 장소가 불편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하나, 도중의 내력은 알 수 없다. '聖穴寺'라는 이름은 절 아래 300m 쯤에 聖人이 나온 暗窟이 있어 그렇게 지었다 한다. 꽃살 창호로 유명한 아담한 羅漢殿만이 격식을 갖춘 건물로서, 절의 품격을 잃지 않게 하여 寺勢를 면면히 이어 왔으며, 곳곳에 작은 암자 같은 건물이 많다. 수도처로는 아주 알맞아, 옛 선비들 가운데 이 절에서 수학했다는 사람이 많다.
3칸, 측면 1칸이 다포계 단층 맞배지붕 기와 건물이다. 정면 3칸에 설치된 창호는 꽃살창호로서 특히 어간의 모양은 연못에 게, 물고기, 동자상, 여의주, 기러기 등이 조각된 특이한 것이다.
* 羅漢殿(보832)
정면 3칸, 측면 1칸의 '多包系 맞배지붕'으로 아주 아담하다. 안에는 후기신라시대의 거으로 보이는 石造 毘盧遮那佛이 있고, 좌우의 16羅漢이 매우 아기자기하며, 인간적인 친근감을 준다. 칠해지지 않은 단청이 단아하고 오히려 깊은 맛을 내며,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隅柱의 안쏠림과 귀솟음 수법이며, 자연미를 살렸다. 정면 3칸 에 설치된 창호는 '꽃살무늬창호'로서 어간에 새겨진, 연꽃·연잎·물고기·두루미·개구리·모란꽃·동자상·여의주·기러기·게의 조각이 매우 화려하여, 진풍경을 이루고 있으며, 한가한 여름의 연못을 보는 듯하다. 이 조각은 민화적 요소를 강하게 반영하여 이를 세련된 공예기술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300년 餘의 오랜 역사와 독특한 문살조각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수할 때 발견된 글에 의하면, 1553(명종8) 창건하고, 1634(인조12) 개건하였다.
錦城壇(기념물93호)
錦城大君(세종6子, 세조弟, 단종의 숙부) 제향처. 1711(숙종37) 단종복위 후 부사 이명희가 왕의 허가를 받아 설치. 상단은 금성대군, 우단은 부사 李甫欽, 좌단은 여타 희생자들이며, 춘추로 향사.
금성대군은 평소 수양을 경계하던 중, 모반의 누명을 쓰고 순흥에서 유배살이를 하다가, 府使 李甫欽과 단종복위운동을 하였다. 한 관노의 밀고로 官軍의 습격을 받게 되고, 관련자는 모두 학살되고, 고을은 불타고 폐부가 되었다. 당시 피살자의 핏물이 40리 아래까지 흘러, 그 마을을 지금도 '피끝'이라 한다.
일설에는 1719(숙종45)에 순흥인 이기륭이 단소를 설치했다 하기도 한다. * 端宗復位謀議事件으로 都護府가 폐지되고 順興府는 양분되었다.
* 錦城大君은 죽어서 태백산 신령이 되어 불쌍한 백성을 돌봐 준다고 한다.
* 丹山面 玉帶里 두렛골 서낭당 서낭제는 금성대군을 당신으로 한 동제로서, 정월 보름에 지낸다. 규모가 크고 엄숙하다.
竹溪九曲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 순흥 내죽리를 감돌고 소수서원 백운동을 지나 사천으로 이어진다. 九曲名은 이황이 풍기군수 때 붙인 이름. 1곡 白雲洞 翠寒臺, 2곡 金城盤石, 3곡 栢子潭, 4곡 梨花洞, 5곡 沐浴潭, 6곡 靑進東崖, 7곡 龍湫, 8곡 金堂盤石, 9곡 中峰合流.
草庵寺
소백산 기슭, 의상대사 창건. 625 병화로 쇠락, 이보은 스님 재건. 3層石塔 (도유형문화재 126호)
겨울山行 溫泉浴
1) 보련산
충주시 북방 20km, 능선의 노송군락·자연동굴·수룡폭포 등 비경, 정상에는 흙과 돌로 쌓은 보련산성(1.8km), 돈산온천·능암온천(국내유일의 탄산온천) 0441-850-1165
2) 대둔산
전북 완주, 호남의 소금강, 정상 마천대 878m, 칠성봉·장군봉 등 암봉, 삼선바위·용문굴·금강문 등 기암괴석, 금강구름다리(50m), 마천대-낙조대 구간의 일출 일몰 장관, 대둔산온천(약알칼리성 유황수) 0652-240-4224
3) 월출산
전남 영암, 수석 전시장, 구름다리(52m, 국내 최장), 정상 九井峰·황천봉, 월출산온천(맥반석 온천수로 미네랄 용존산소 풍부), 0693-471-1404
4) 백월산
창원, 일명 三山, 계곡, 동봉에 사자바위, 동쪽에 주남저수지, 마금산온천(1927년 발견, 식염천 55℃), 인근 수로왕릉·가야고분, 0551-280-2543
5) 운문산
1188m, 소나무·전나무 울창하. 운문사(6세기-신라 진흥왕, 창건), 용암온천(게르마늄·유황성분의 약알칼리성) 0542-370-6394
울산 박제상
1500년 전, 울산 시내에서 24번 국도 언양쪽으로 가면 범서면소 100m 못가 우회전 두동면쪽으로 가면 山書院(치산서원)(1993년 단장) 박제상 부인 치술신모 제향
박제상 363년(내물왕8) 양주 충효동 생, 눌지왕 즉위 직후, 왕제 구출, 고구려 卜好, 일본 미사흔(일본에서 사망),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는 안되겠다.
치술령에서 부인 두 딸 사망. 몸은 망부석, 혼은 새가 되어 숨었다.(隱乙庵, 국수봉 580m 암자) 치산서원에서 1km, 기로, 직행, 망부석, 우행 은을암,
두동면 고인돌, 선바위, 다운동 고분군, 연화산(536m), 무학산(343m), 치술령, 國讐峰,
두동면 구미, 蓮花山, 國讐峰, 범서면 범서 立巖, 仙巖寺, 望里, 中里, 九英, 屈火, 銀片, 泥田, 萬和, 三政, 茶雲洞, 川前 刻石,
雲門寺
운문면 신원리 소재, 560년(신라 진흥왕21) 당시의 국사 寶讓이 창건(건축 9년 소요).
금당 앞 석등(보물 193호), 원응국사비(보물 31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317호), 사천왕석주(보물 318호), 3층석탑(보물 678호),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180호)가 있다.
△ 雲門寺石造如來坐像 (보물 317호)
고려시대의 작품, 화강석, 불상 높이 5.4m,
6각형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머리는 나발, 법의는 통견, 얼굴은 평면적인데 어깨는 약하게 보이고 가슴은 떳떳하다. 수인은 항마촉지인, 광배는 주형 거신광이지만 예전에 보이던 굴곡은 없어지고 투박스러울 뿐이다.
상대는 평면타원형이며 14개의 연화문이 앙련으로 조각되었고 그 아래 양쪽으로 당초문이 있다. 중대는 6각형인데 하대와 1석으로 되어 있고, 하대는 양쪽이 긴 6각형으로 연화문 18개가 조각되었다.
△ 雲門寺3層石塔 (보물 678호)
후신시대 말기의 석탑 2기, 화강석재, 높이 5.4m, 대웅전 앞에 배치된 쌍탑, 기단부가 파손된 것을 수리하였다 함. 2층 기단 위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후신시대 형식. 상륜부의 露盤과 覆鉢·仰花까지 구비되어 있다. 기단부에는 탱주와 우주가 있고, 면석에는 8부신중을 양각하였는데 모두 앉아 잇는 자세로 머리 부분을 크게 묘사하였는데 조각 수법은 형식적이고 치졸하다.
△ 雲門寺金堂앞石燈 (보물 193호)
후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2.58m. 방형 지대석 위에 8엽의 연화를 새긴 대석이 얹혀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간석이 중대 연화석을 받치고 있다. 지대석·간석·화사석·옥개석 등도 모두 8각형으로, 옥개석에는 보주가 1개만 남아 있다. 4면에 화창을 내었으며, 주위에 小孔이 있고, 다른 4면은 조각이 없다.
△ 雲門寺圓應國師碑 (보물 316호)
고려시대 고승 원응국사의 비, 화강석재, 고려 인종 때 축조, 높이 2.28m, 폭 1.8m, 임진전쟁 때 왜적들에 의하여 잘리어 방치된 것을 수리하여 보존한 것. 원응국사가 운문사를 중창한 사실을 기록하고 그의 유덕을 받들어 길이 모시기 위하여 왕명으로 세원진 것.
비면 상부에 方廓題額을 마련하고 <圓應國師碑銘> 6자를 해자 종서하였고, 제액의 글자는 자경이 12cm이며, 비문은 행서로 자경은 1.5cm이다. 원응국사는 송나라에 가서 天台敎觀을 배우고 1114년(예종9)에 대선사가 되었으며 입적 후에 국사가 되었다.
△ 雲門寺四天王石柱 (보물 318호)
후신시대 석주, 작압전 안 석조여래좌상 좌우에 2기씩 배열 안치되어 있는 4기. 석주 높이 좌로부터 1.52m, 1.64m, 1.63m, 1.53m. 각 석주 1면에 사천왕상이 1구씩 조각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惡鬼生靈座 위의 立像으로 戎服을 입고 머리에는 원형의 두광이 있다.
전체의 조형은 온유우려하며 조각수법은 매우 사실적이다.
이들 석주는 그 위치가 이동되었기 때문에 어떤 건축에 사용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며, 像名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면상으로 보아 역시 좌로부터 廣目天王·多聞天王·增長天王·持國天王으로 추측하고 있다.
△ 雲門寺銅壺 (보물 208호)
신라 말, 구리로 된 항아리, 높이 55cm, 口徑 19.5cm, 腹徑 31cm, 입지름 23cm, 몸체 좌우에 견고한 고리가 달려 있고, 중앙에 꼭지가 달려 있는 둥근 뚜껑이 있다.
그 용도는 확실치 않으나 절에서 사용하던 佛具로 추측되며, <甘露樽>이라고도 한다.
肩部에 새겨진 銘文에 <1067년(고려문종21)에 개조하였고 무게는 30근>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로써 그 제작이 이보다 앞설 것으로 추측된다.
鳳停寺
신라시대의 절집. 672년(문우왕12) 의상이 창건하여, 그동안 수차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 극락전·대웅전·고금당·華嚴講堂·海會堂·寂然堂·客寮·兩化樓·藏經庫·東菴(靈山菴)·西菴(知照菴)·德輝樓 등의 중요한 건축물과,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인 3층석탑이 있다. 서암에는<獨抱道德>이라는 선조 어필의 현판이 있고, 극락·대웅 양전에는 대장경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안동시 西後面 광평리 臺庄洞 천등산 기슭에 소재. 안동에서 34도로 西行, 송야천 송야다리 건너 3km 전진하면 명리, 우회전 북행 4km 춘파, 3거리에서 북행 3km 중태장, 3거리에서 좌행(서북) 3km 지점. (안동에서 16km)
▲ 極樂殿(국15)
고려 말기의 건물.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柱心包집. 해체 수리할 때, 중앙간 宗道里 밑에서 발견된 墨書銘에 의하면, 1368년에 옥개 부분에 重修가 있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건립 연대는 그보다 100∼150년 정도 앞섰으리라 짐작된다. 건물의 전면에만 다듬질 된 석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배열하여 柱座만을 조각하였고, 초석 위에는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전면과 측면 중앙간에 板門을 달았고, 전면 兩夾間에는 살창을 달았는데, 전면의 판문과 살창은 수리할 때에 복원한 것이며, 수리하기 전에는 3간 모두 띠살 4푼 閤門이 달려 있었다.
우리 나라 最古의 목조건물이다.
▲ 大雄殿(보55)
조선 초기의 건물로, 亂積 石基壇에 정면 측면 3간으로 된 단층 8작지붕의 多包系 건물이다. 전면 기둥 앞으로 톳마루를 깔았는데, 후보물인지 당초의 것인지 분명치 않다. 本殿에 이와 같은 툇마루를 시설한 것은 유일하다. 隅柱는 平柱보다 약간 높게 올려 귀솟음을 주었다.
▲古今堂(보물449)
조선시대의 단층 건물. 정면 3간 측면 2간, 극락전 앞뜰에 동향해서 세운 소규모의 건물. 원래는 닷배집 건축인데, 북쪽 측면은 훗날 8작지붕으로 개조하였다. 남쪽은 지붕을 연장하여 간을 막고 부엌을 달았으며, 내부는 온돌을 놓고 요사로 사용하였다. 방 앞에는 쪽마루를 깔았고, 壁間마다 외짝의 띠살문을 달았으나 원래의 문짝들은 아니다. 包는 기둥 위에만 배치된 柱心包집 계통의 구성인데, 기둥 윗부분에 꽂은 홋첨차와 그 위로 柱枓에서 나온 살미첨차가 겹친 위에 行工첨차를 가로 놓고 外目道里를 바쳤다. 주두에서 좌우로 벽면에 배치된 첨차는 창방과 함께 포벽 속에 가리워 보이지 않으나, 건물의 후면은 모두가 원래대로 남아 있다. 공포를 구성하는 첨차의 형태가 이미 조선 초기의 특색을 잃고 변형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건립연대는 조선 중기에 속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 現存最古木造建物
봉정사 대웅전(보55)…<1361년에 불단을 제작하였다.>는 묵서가 발견되었으 니, 그 이전에 건축된 것이다. 이 묵서 발견 전에는 봉정사 극락전이 최고 의 것으로 되어 있었다.
봉정사 극락전(국15)…<1363년에 지붕을 고쳤다.>는 묵서가 발견된 바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국18)…일제 때 부수할 적에 <1376년에 창건하였다.>는 묵 서가 발견된 바 있다.
* 봉정사 대웅전 후불탱화(불상 뒤 벽체에 그린 불화), 1428년 제작, 國內最古, 대웅전 해체 수리 중 지붕 속 종보받침 長舌에서 <1428년에 미륵하생도를 그렸다>는 묵서 발견. *강진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1476년)가 최고인 것으로 알았는데 이보다 48년 앞섬.(2000. 3. 24 보도)
대웅전은 1361년(고려 공민왕 10년)에 불단을 조성, 묵서 발견, 最古목조건물
陜川 海印寺
절의 창건은 신라 애장왕 때 順應과 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牛頭山(가야산)에 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에 들었을 때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 주었다. 이 에 감동한 왕이 가야산에 와서 願堂을 짓고 정사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이에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고 뒤에 이정이 이를 이어받았으며, 이정의 뒤를 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가 건국하자 태조는 당시 주지 희랑대사가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 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아 해동제일의 도량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이곳으로 옮겨, 이 절이 호국신앙의 요람으로 되었다. 그 후 세조는 장경각을 확장 개수하였고, 그의 유지를 받드는 왕대비들의 원력으로 금당벽우를 이룩하게 되었다. 성종 때 대대적인 가람 증축이 있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창건 이후 7차례의 대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지금의 건물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 앞 3층석탑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팔만대장경판은 몇 차례의 화재에도 화를 입지 않고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통도사·송광사와 더불어 三寶寺刹 중의 하나로 法寶寺刹로 유명하다. 지금은 조계종 12교구본사이며 불교학원인 <海印叢林>이 있다.
문화재는
1)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32)
2) 경판고(국보 52)
3) 석조여래입상(보물 264)
4)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518)
5) 반야사 원경왕사비(보물 128)
부속말사는 75개, 부속암자는 白蓮庵·弘濟庵·藥水庵·願堂庵 등 14개이다.
◆ 海印寺大藏經板(高麗大藏經) (국보 32호)
해인사 경내 2동의 경판고에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 81,258장.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의 격퇴를 발원하여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 제작.
경판고 안에 5층의 판가(板架)를 설치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판가는 천자문 순서로 函의 號數를 정하여 분류 배치하고, 卷次와 丁數의 순으로 架藏하였다.
판목의 크기는 세로 24cm 내외, 가로 69.6cm 내외, 두께 2.6∼3.9cm로 양단에 나무를 끼어 판목의 균제를 지니게 하였고, 4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 얇게 칠을 하였다. 판목은 남해지방에서 나는 厚朴을 써서 만들었고 무게는 3∼4kg 가량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천지의 계선만 있고 각행의 계선은 없이, 각행 14자(크기 1변 1.8mm) 23행, 글씨가 늠름하고 정교하여 고려시대 판각의 우수성을 보여 주고 있다.
처음에 이 경판은 강화 西門 밖 <대장경판고>에 두었고, 후에는 강화 禪源寺에 옮겼다가 1398년(조선 태조 7) 현위치로 옮겼다.
◆ 海印寺藏經板庫(국보 52호)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고 2동. 1488년(성종 19)에 건조, 정면 15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지붕 양식. 같은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세워졌는데, 남쪽을 <修多羅藏>, 북쪽을 <法寶殿>이라 한다.
건물은 큼직한 部材를 간단한 방식으로 架構하였고, 세부 역시 간결하여 장식적인 意匠이 가미되지 않았다. 평초석 위에 배흘림이 큰 圓柱를 세워 기둥 위에 柱頭를 올리고 대들보를 올려 직접 柱心 도리를 받으며, 그 밑에 간단한 草工이 있을 뿐이다.
◆ 海印寺石造如來立像(보물 264호)
후신시대의 여래입상. 화강석재. 높이 2.1m, 목이 절단되고 어깨와 두 팔이 모두 깨어졌으며, 발도 없어졌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가 매우 적고 얼굴은 머리와 함께 긴 타원형이다. 몸은 많이 깨어져 석주 같은 느낌이 들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꺾어 가슴으로 올린 것 같고, 왼손은 그냥 내린 것 같지만 잘 알 수 없다. 법의는 통견인데 의문은 특이하고 양쪽에서 비스듬하게 난 선이 중심에서 만나 날카로운 V자형을 이루었다.
◆ 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및石燈(보물 518호)
후신시대의 靑石 석탑과 粘板巖 석등.
석탑은 높이 2.38m. 3단의 화강석 방형 대석을 쌓고 그 위에 방형의 단층 기단이 결구되었는데, 그 상하에 연화문이 돌려져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단지 10층의 방형 옥개만이 남아 있다.
우리 나라에는 나말에서 고려 때 유행한 청석 소규모 다층석탑이 몇 기 남아 있으나, 이 탑은 그 중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고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전래되고 있다.
석등은 높이 1.86m. 평면 6각형의 이례적인 것으로, 석재도 점판암이어서 주목된다. 지대석은 화강석으로 조성한 6각형이며, 그 위에 하대석이 연화대석으로 12판의 복련이 조각되어 있으며, 상면에 2단의 괴임을 刻出하여 竿柱石을 받고 있는데, 竿柱는 後補物이다. 상대석은 하대의 복련과 대칭되게 12판의 앙련이 조식되어 있다. 화사석은 없어지고 개석만이 상대 위에 놓였으며, 개석 아래쪽 면에는 각형 받침 3단이 刻出되어 있다.
◆ 般若寺元景王師碑(보물 128호)
고려시대 비, 높이 2.3m 너비 1.2m. 화강석. 본래 가야면 倻川里 탑동마을에 있던 것을 1968년에 현 위치로 옮기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비문은 자경 1.8cm의 해서체이며, 찬자는 金富佾(김부식의 형)이고 李元符의 글이다. 龜趺·身石·蓋石이 모두 평박한 것이 특색이다.
星 州
白內川
大伽川
禪石寺大雄殿(문재113 85지정)
世宗王子胎室(경북유문88호) 19기, 창덕궁 소유, 월항면 仁村里.
東方寺址7層石塔 (9층서 7층으로 됨)
동방사는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되었으나 임진전쟁 때 소실, 석탑은 양식으 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
星山洞古墳群(사86, 63지정)
가야시대 고분. 성주는 星山伽倻, 또는 碧珍伽倻의 故地, 현재 56기 잔존,
1918년 3기 발굴,(횡구식 석곽묘, 창녕고분과 동일)
星山洞支石墓群
星山洞城址
禿用山城…가천면 금봉리
禿用山(955)의 石城, 영남지방의 석성 중 최대, 장 3km, 고 2.5m, 폭 3m.
할미山城…벽진면 대가면 사이
石造毘盧遮那佛坐像(보1121, 92지정) 가천면 金鳳里 산 11번지, 9세 신라시대 작품
法水寺址幢竿支柱(보?87, 75지정) 수륜면 백운리, 신라시대 작품
法水寺址3層石塔(보?86, 75지정) 수륜면 白雲里, 신라시대 작품
深源寺址3層石塔(문재116, 85지정) 수륜면 백운리, 가야산 심원계곡 옆에 넘 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
甫月里3층석탑(119, 79지정) 수륜면 보월리, 통신시대
感應寺…월항면 대산리, 신라 애장왕 왕자의 눈병을 이곳 약수로 치료하였 다는 전설이 있다.
寒岡武屹9曲
南宋 朱熹의 武屹九曲을 본떠 지음.
성주에 5곡, 금릉에 4곡이 있음.
1곡 鳳飛巖 수륜 신정리 대가천변
2곡 寒岡臺 수륜 수성리 〃 (갈맛소의 절벽)
3곡 船巖 금수 무학리 〃 (배바위) 舞鶴亭
4곡 立巖 금수 영천리 〃 (선바위)
5곡 사인암 금수 영천리 〃 (은지) 捨巖
6곡 玉流洞 증산 유성리 〃
7곡 滿月潭 증산 평촌리 〃
8곡 臥龍巖 증산 평촌리 〃
9곡 龍沼 증산 수도리 〃
* 武屹精舍 (見通齋)
晩歸瀑布…가천면 신계리
조선 유학자 李源祚가 晩歸亭을 짓고 만년을 즐기던 곳
馬水瀑布……가천면 마수리
太子바위……벽진면 매수리, 대가야 태자가 죽었다는 곳의 바위
星州海平洞側栢나무(49호) 呂重煥
星州댐
星州鄕校大成殿(문재114, 85지정) 성주읍 예산리,
태조 6년에 건립, 중국 5聖, 宋 6賢, 조선 18賢 위패를 안치하고 춘추제향,
星州文廟明倫堂(경북향교재단 165호) 성주읍 禮山里
연계당·영계소영일기 1동1책 (문재115, 85지정) 성주읍 京山里
檜淵書院(지유문51, 74지정) 수륜면 新亭里,
寒岡 鄭逑의 강학처, 선조 때 건립,
月會堂(48호 84지정) 벽진면 수촌리(海平里), 呂璣東.
중종 때 건립, 呂希臨이 향학강론처, 소실되었는데 뒤에 呂孝曾이 건립.
晴川書堂(261호) 대가면 칠봉리,
1729년(영조) 건립, 2동, 東岡 金宇 의 제향처, 金暐.
社倉書堂(문재200, 87지정) 수륜면 午川里, 鄭逑의 朱子學 강학처
道山書堂(59호) 附 高山塾 ,선남면 文里里, 철종 때 건립, 서민교육처
星山館(자방유형문화재 143)
성주읍 京山里,
성주이씨 시조가 사용한 神井 자리에 1679년 성주목사 申學이 건립, 선말 까지 성주목의 관아로 사용, 三五堂, 부속건물, 후손 중수, 팔작지붕.
百世閣(163, 82지정) 초전면 高山里, 을사명현 宋希奎, 1551년(명종6), 못을 쓰지 않고 건축, 1919년 파리장서사건 모의 장소, 宋萬銖
安山影堂(문재217, 89지정) 벽진면 紫山里, 선조 때 목사 李玄培가 중수, 성 주이씨 西君公 李長庚의 영정이 있음
浣亭古宅(문재163, 85지정) 4동, 초전면 월곡리, 李玉鎣基.
벽진이씨 監務公派 28세손 李存永이 건립
金昌淑生家(83호 91지정) 대가면 칠봉리, 항일독립운동가, 金暐,
東岡 金宇 神道碑(260호) 대가면 옥화리, 조선 영조 때, 大司成 벼슬, 金暐,
海東淸風碑(82호 90년) 벽진면 鳳溪里, 紫下 張基奭의 충의와 절개를 기리는
비, 張光相, 비문은 김구선생의 친필
雙忠事蹟碑(지방문화재 61) 국유
1792년 건립, 임진전쟁 때 諸沫, 諸弘祿의 업적을 기림,
고 2.16m, 폭 0.79m.
心山紀念館……성주읍 경산리, 김창숙의 기념관, 1974년 건립, 현판글 박정희
白年雪노래碑
民俗마을……한개마을…월항면 대산리, 옛모습 보존유지, 문화재 4개소.
星州李氏影幀(10종 13폭 245호 89지정) 대가면 玉花里
續資治通鑑綱目板本(259호 91지정) 673장, 金暐, 대가면 七峰里
* 民俗資料
校理宅(43호 83지정) 월항면 大山里, 조선 때 弘文館 校理 李碩九가 건립,
李台永.
北扉故宅(44호 83지정) 월항면 대산리, 영조 때 사도세자의 護衛武官이던 훈련원 主簿 李碩文이 사도세자를 사모하여 서을을 향해 문을 북쪽으로 내고 은거한 집, 李洙鶴
寒洲宗宅(45호 83지정) 영조 때 李敏儉이 건립, 성리학자 寒洲 李震相이 중 건, 李海錫
月谷宅(46호 83지정) 1911년 李銓熙가 건립, 李洙彬.
星州水城里中梅宅(86호 89지정) 수륜면 水城里, 5동, 1903년 건립, 전통적 주택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가사노동의 기능을 배합한 건물, 鄭渤.
* 重要無形文化財
曺玉伊(87호 63지정) 1920년생, 용암면 本里里 두리실, 명주짜기,
1460년부터 15대째
白文基(16호 90지정) 1928년생, 용암면 본리리, 무명짜기, 목화밭.
姜錫庚 원로.
■ 경대 박물관 정원 석조부도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 탑이라면, 부도는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것을 말한다.
경북대학교 박물관 정원에 있는 이 고려 시대의 석조부도는 높이 274cm로,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조형에서 신라시대 이래 나타나는 8각원형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고려 시대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차례로 쌓았다. 방형으로 한 하대석은 각면에 6판씩 모두 24판의 복련이 조각되었는데, 각 면 중앙의 연판은 정면을 향하고 있고, 남은 연판은 각 면 중앙의 연판을 중심으로 좌우로 비스듬히 표현되었다.
이 수법은 고려시대의 연판 표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이다. 중대석을 각을 죽인 8각으로 거의 원에 가까우며, 표면 전체에 구름무늬가 양각되었고, 앞뒤에 정면한 용과 좌우에서 이 용을 향하여 다른 2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중대석 위에는 8각 2단으로 된 낮은 괴임이 있어 상대석을 받고 있다. 상대석에는 16판의 큼직한 앙련이 돌려졌다. 8각으로 된 탑신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형이 있고 앞 뒤 양면에는 효형이 모각되었는데,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양각되었고, 좌우 양면에는 조각이 없다.
옥개석 또한 8각으로 정상에서 급한 경사를 이루었고, 추녀에 이르러 넓게 퍼졌다. 옥상에는 8조의 우동이 뚜렷하고 귀꽃이 있었던 듯하나 남은 것은 없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2단의 괴임이 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그리고 상륜에는 연화가 조각된 1석으로 된 보륜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시대의 8각 부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전체적인 구도에서 나타나는 안정감, 중대석의 장식적인 조각, 옥개석의 표현 등에서 앞선 시대의 양식과는 다른 점들을 찾을 수 있다.
■ 명산순례, 설악산 덕유산편
* 설악산
설악의 삼형제 大,中,小靑峰 구름 모자쓰고 수줍음을 타는가 그 모습 금방 감추어 日出광경 보고 소원 빌고 싶은데 햇님 보기 어렵네 조물주가 조각한 천불동 石佛 千個는 천태만상이라 길손은 황홀감에 취해 합장한 손 풀지 않고 해는 지고 백담사에 목탁소리만 靜寂을 깨누나
* 덕유산
백련사의 풍경소리 들으며 가파르게 오르는길 샘(井)이 아홉 개라 九泉동인가 계곡물이 넘치고 맑은 물은 계곡따라 이리 저리 흐르다가 은밀하게 仙女들의 목욕물이 되어 향기품으니 맨 꼭대기 큰 봉우리를 香積봉이라 했구나남덕유로 가는 길에 원추리 군락도 일품이라네
* 內延山 香爐峰, 덕골
경북의 금강산
능선은 오르면서, 계곡은 내리면서 길을 찾기 쉽다.
본명은 終南山, 신라 진성여왕이 견훤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온 뒤 개명.
* 일반적 등산노정
1) 주차장→ 보경사→ 사령고개→ 문수봉(622)대피소→ 삼지봉(720)→ 마당기미(797)→ 840봉→ 향로교갈림길→ 향로봉(930)→ 고메이등→ 시명리→ 淸河골→ 보경사 <또는 역순 등산>
2) 샘재→ 매봉→ 꽃밭등 갈림길→ 향로봉
* 절 ; 寶鏡寺, 문수암, 보현암
* 폭포 ; 廣川골짝 12폭포, 相生폭포, 觀音폭포, 연산폭포(7폭, 제일, 30m 낙수), 복호폭포.
▲ (내연산) 덕골 산행 안내
* 보조자일 필수
향로봉에서 남서쪽을 뻗은 지능선을 오름길로 하고 ,
월사동 근처 도로가 크게 굽도는 곳 옆 빈터에 주차하고, 산행 시작.
목장 철문 옆을 돌아, 하옥천 냇물을 3번 건너, 숲 사이의 오솔길로(처음 내 건넌 곳에서 아래로 100m 지점, 이 오솔길목이 중요).
곧 비탈길, 20분 후 능선 안부, 이끼 암봉·노송·고사목, 굴참나무·졸참나무 능선길, 월사·향로 능선, 갈림길 없이 계속 오르막길, 911봉 [三枝峰(구 내연산) 3.7km] 강철 팻말(94년 경북연맹이 등산로 실측, 안내판 정비),
향로봉 정상 헬기장, 일출맞이 명소, 산길 분명, 북북동으로 700m 지점에 갈림길(左 향로교 3km, 直 삼지봉 3km), 능선 숲속 평로, 향로봉 출발 30분 뒤 840봉 (갈림길, 直 밤나무등길·시명리-장애목 설치, 左 리본 있는 길로),
600m 가면-797봉 앞 안부 마당기미(갈림길, 直 94년의 샛길, 右 옛길), 右行 옛길로 20분 후 '미결등코스'(팻말) 착(781봉 남쪽 중턱), 왼쪽 가로지르는 길로 나아가면 묘 3기-능선길과 다시 합함.
三枝峰(720) 정상(총 4;20 소요), 동쪽으로 내려서자마자 또렷한 길을 버리고, 왼쪽(北) 희미한 길로 100m 아래의 안부에 다다른 다음, 왼쪽의 덕골 상류부로 간다. 나무줄기 표지판.
마두교 계곡 가는 길, 등산로 없음, 계곡 탐사길,
문의 태백알파인클럽 61-0145, 61-4416.
족적을 따라 능선을 넘지 말고, 물줄기를 따라 내려감, 덩굴숲-길이 없고-물줄기를 따라 내려감. 1시간 후-골이 좁고 양쪽이 절벽, 바위-협곡-깊은 소,
1.2km 지점에서 물줄기가 사라지고, 200m 후에 다시 물, 기어서 하산, 우측 사면에 족적, 산비탈을 곧게 가로지르는 좁은 길, 30분에 1.5km 하산, 다시 골짜기, 양쪽 모두 절벽, 뒷터계곡 입구까지 나와서 오른쪽에 분명한 길,
* 하옥리 '향로교'에서도 계곡으로 東行, 향로봉을 우회하여 오를 수 있다.
* 竹長面 上玉里→達山面 玉溪里 --- 비포장길,
* 下玉川(죽장면), 省法嶺 발원, 북류, 西大川(달산면) 거쳐 영덕읍행.
* 寶鏡寺
松羅面
628년(신라진평50, 혹은 602년 신라진평25) 내연산 동쪽 기슭에 日照大師가 창건.
圓眞國師碑(보252), 圓眞國師舍利塔(보430).
정상을 중심으로 남동과 남서로 八字形으로 뻗었다. 동남으로 천령산을 마주보고, 서북으로 주왕산이 있다. 포항시 송라면과 영덕군의 경계.
문수산(622m), 三枝峰(710m), 향로봉(929m)에서 매봉, 삿갓봉, 우척봉으로 능선이 완만하게 이어지는 육산.
12폭포가 절경.
1) 상생폭(청하골 초입) 2) 보현폭 3) 삼보폭 4) 잠룡폭 5) 무룡폭 6) 관음폭 7) 연산폭
* 보경사에서 연산폭포까지 계곡 양편은 절벽, 내연산 12폭포로 계곡미의 진수를 감상.
* 향로봉은 나무가 없는 초원지대, 전망이 좋다.
* 정상으로 가자면 문수암 위로해서 주능선까지 올라가 계속 소나무가 많은 능선을 따라 간다. 하산길은 향로봉까지 나가거나, 그 직전의 안부에서 계곡을 따라 시명리를 경유 삼거리로 내려간다.
* 산행 코스 시간
1) 보경사→문수암→정상→향로봉→시명리→보경사 : 20km, (8;30)
2) 보경사→연산폭→은폭→내연산→보경사
3) 보경사→관음폭포→은폭→복호폭 갈림길→시명리→향로봉→정상→문수산 →보경사. (7;30)
* 대구 동부버스 : 053-756-0017, 포항 시내버스 : 0562-72-3194
보경사
신라 진평왕 11년(589)에 창건되었다 하며 일주문,천왕문에서 숙광전,대웅전등 빽빽히 들어찬 웅장한 규모에다 경내가 노송과 벗꽃나무, 탱자나무등으로 울창하여 고찰다운 면모를 한껏 발휘하고 있다.
지명법사가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신비한 팔면경을 가져온 후 내연산 아래 큰 연못에 묻었다. 그 위에 금당을 세운 뒤 사찰을 창건한 것이 보경사라는 이름의 유래다. 보물 2점도 보존되어 있다.
연산폭과 청하골
쌍생폭을 시작으로 삼보폭,보연룡,잠용룡을 거쳐 관음폭에 이르면 암벽에 관음굴이 또한 볼만하고 구름다리를 건너면 12폭포중의 최고 절경인 연산폭에 이른다. 이 위로 은폭,복호룡까지의 계곡 일대를 청하골이라 한다.
관음폭포
쌍폭인 관음폭포는 주변에 쌍굴인 관음굴,폭포 위로 걸린 연산적교(구름다리) 및 층암 절벽과 어우러져 환상적이다. 연산적교를 건너면 높이 20미터의 연산폭이 학소대 암벽을 타고 힘찬 물줄기를 쏟아 내린다. 보경사에서 연산폭까지는 약 3KM, 1시간 남짓 걸리는 오솔길이다.
■ 봉화 구마동계곡
현동3거리---진대미3거리(고산주유소 못가 900m)---비포장길 북서행,
도로 끝 최종 마을 [간기] 고산교에서 15lm,---도화동 도화사, 5km 2시간,
간기부터 구마동계곡,
간기 이병수(63) 0573-672-7356
도화동에서 주계곡-덕터골이 갈린다.
1) 덕터골---두리봉까지 2시간
2) 주계곡---맷돌소-장기바위(계곡 갈림, 2계곡 사이길)
도화동에서 40분 소요.
장기바위-백두대간 능선까지 1시간 소요,
깃대배기-태백산 부소봉(1547) 1시간 반 소요.
* 동막계곡--경기 연천군
* 당골계곡--태백시
* 능강계곡--제천시
* 선암계곡--단양군 단성면
* 사미정계곡--봉화군 법전면
* 용추계곡--문경시 가은읍, 대야산
* 화개 청암계곡--하동
■ 오지마을 (17곳)
영양 수비면 수하리 오무마을.
영월 영월읍 와석리 어둔마을. 김삿갓 만년 수년 정착, 그의 무덤.
영월 문산리. 동강변
인제 내린천면 개인동. 내린천 2km 사행천
인제 기린면 설피밭. 연목어 서식지
정선 남면 발구덕마을. 동굴 많은 곳.
정선 연포면 소사마을. 동굷박쥐, 三峰月出
명주 한터마을. 오대산 송천변.
삼척 하장면 한소리. 물레방아
연곡 가마소마을. 오대상 속
의성 옥산면 금봉리. 청학산 밑 소미기, 의방이, 물랭이골
봉화 소천면 홈전마을. 폭포와 소
봉화 두음리 듬골. 적송
울진 서면 왕피리
산청 오봉
단양 빗재마을. 도자기
■ 계곡
▼ 청도 남산계곡
우리 나라에서 남산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산이 전국 곳곳에 많이 있지만, 어느 곳의 남산도 웅장하거나 큰 산이 아니고, 알맞게 크고 예쁘장한 것이, 다소곳이 고개 숙인 처녀 모양인데, 청도의 남산도 예외는 아니다.
청도 남산은 해발 829m로 청도읍, 화양읍, 각남면 3개 읍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봄이면 상여듬에서 봉수대 사이의 진달래 군락과 산중턱까지 개간한 복숭아밭의 만개한 도화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절경이며, 봉수대에서 정상 까지의 바위능선 길은 릿지 산행도 맛볼 수 있다. 남산 곳곳에는 명소가 즐비하다. 이서국 패망의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은왕봉과 깍아지른듯한 높이 30m의 낙대폭포는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 하여 약수폭포라고도 한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나무숲, 맑은 물을 자랑하는 남산계곡의 여름철은 분주하기 그지없다.
▽현지교통
1) 경부고속도로 건천IC→경주시 산내면→20번국도→청도→남산 (1;30)
2) 구마고속도로 구지IC→창녕군 성산면→비티재→청도→남산 (1;00)
3) 국도 25호 대구→경산→남성현고개→용암온천→청도→남산 (1;10)
4) 지방도 911호 대구→가창→팔조령→청도→남산 (0;50)
▼ 청도 삼계리 계곡
청도 운문면과 언양을 잇는 도로를 따라 펼쳐진 계곡. 배너미, 생금비리, 개살피의 3계곡으로 이루어져서 삼계계곡이라 함. 가지산 발원. 운문사 쪽으로 가다가 문명분교 앞 3거리에서 왼쪽 언양 가는 길로 6km 가면 계곡이 나오고, 이 길을 계속 가면 石南寺다.
▼ 성주 대가천계곡
무흘구곡의 배경이 되는 곳. 대가천을 지나다니는 배를 매어두었다는 배바위, 무흘구곡 중 제일 아름다운 4곡 선비바위가 있다.
▼ 울진 덕구계곡
응봉산 발원. 형제폭포, 올류대, 선녀탕 등 명소.
▼ 영양 본신계곡
수비면. 6km. 금장산, 울련산, 검마산, 백암산. 수하계곡. 자연휴양림.
▼ 영주 죽계구곡
소백산 발원, 순흥읍내 동편에서 소수서원 배점마을을 거슬러 초암사에 이르는 냇물. 초암사 앞에서 1곡이 시작, 삼괴정 앞이 9곡. 약 5리. 경사가 알맞다.
▼ 포천계곡
가야산 계곡 중 대표적 명소로서 물이 맑고 풍부, 옛 성주 선비들이 심신과 학문 도야의 장으로 삼았던 곳. 조선 후기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선비였던 응와 이원조 선생이 만년을 보낸 만귀정이 상류에 있으며, 만귀정 옆 폭포수는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약 7km 계곡.
현지교통……성주버스정류소→가천→신계리 (50분)
▼ 용추계곡
大野山 중턱에 위치하고 용이 승천하면서 생긴 비늘 자국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때묻지 않은 태고의 신비와 절경을 간직한 곳.
위 치 :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원북리 (문경새재에서 20km)
교 통 : 문경시내에서 시내노선 버스 운행
숙박업소 (민박)
김동수 : (0581)71-5619 정주석 : (0581)71-8370 심남섭 : (0581)71-6542
하태동 : (0581)71-0120 이종대 : (0581)71-9079
대야산 전체가 화강암, 화강암반으로 된 용추폭포와 沼,
산행--가은읍 완장리 벌바위마을 지나 주차장에서 시작,
가마소, 말십소, 용추폭포, 월령대
월령대에서 右면--피아골, 처음 완만, 급경사
左면--떡바위골, 밀재(道界), 북급경사 능선길 20분, 거대암 반지대, 송이버섯, 기암, 20분, 중대봉으로 이어지는 암릉꼭대기, 정상 상대봉은 암봉
경사, 바위 협곡 안, 급경사길, 하산은 피아골로, 소요시간 5시간
조망--속리산, 동남 둔덕산,
▼ 동화사계곡
군위의 삼존불상은 석굴암의 어머니격이다. 삼존석굴은 자연 암벽을 파고 부처님을 모신 석굴사원으로 국보급 문화재다. 팔공산 북쪽 자락 깊은 산중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석굴은 1천2백여 년 전에 만든 것으로, 토함산 석굴암보다 더 오래 됐고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자연굴을 이용했다.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여름 여행객의 발길이 드문 곳이지만, 코스를 잘 짠다면 붐비는 행락객들을 피해, 한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우선 피서를 위해 '절보다 계곡'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동화사로 향하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기는 하지만 계곡의 상쾌함을 만끽하는데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동화사에서 서쪽으로 팔공산 일주도로를 따라가면 풍성한 여름 과일이 길마다 가득 메우고 있어 드라이브가 더욱 즐겁다. 농장에서 직접 기른 과일을 들고 나온 농부들이라 값도 싸고 양도 푸짐하다. 술렁이는 동화사계곡을 빠져나와 지방도로를 타고 한티재를 넘어 부계면으로 계속 올라가, 삼존석굴에 당도한 날은 이서방네 주막에서 하루 묵어가는 것도 괜찮다. 삼존석굴에서 부계면으로 3km 정도 더 가면 푸근한 시골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한밤마을이 있다. 마을 한가운데는 시원하게 세워진 대청이 있고 마을로 들어가는 고샅길도 무척 아름답다. 마을 한켠으로는 깨끗한 개울이 흐르는 곳에 빨래터도 있다.
교통편……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대구 북부 시외버스정류장에서 하루 7회 운행하는 직행버스가 있다. 군위읍에서 삼존석까지는 하루 6회 버스가 운행한다.
▼ 용추계곡
용추계곡을 장수계곡이라고도 하고 기백산과 황석산의 한가운데를 가르고 생긴 계곡이다. 심원정은 조선조 때의 정자로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고 옆에 넓은 소가 있어 더욱 운치가 있고 이 위에는 삼형제바위, 매바위, 꺽쥐소, 요강소등 계곡이 있어 운치가 좋다.
교통편
1) 대구 서부정류장-거창행-안의행/용추사행
2) 대구-거창(88고속도로)-안의-용추사(하원리)
숙식…안의나 거창에는 여관이 있고 용추사에서는 소수인원의 민박이 가능.
▼ 청평 금당계곡--장평IC에서 봉평방면으로,
■ 도보여행
* 문경새재-제천 부근
1, 버스로 공원입구 하차, 새재입구-10-조령3관문-8-안보-내리막길
2, 월악나루터-6-숫갈-6-신현2리-6-봉화재 거쳐 오티-10-청풍
3, 청풍-15-금성 <가장 아름다운 길> (민속촌, 청풍문화재단지)
* 오대산을 거쳐-구룡령을 넘어-양양군으로 가는 길
1, 월정3거리-10-월정사-10-상원사-1.5-적멸보궁
2, 적멸보궁-북대사-명개리 -18- 구룡령(1013m)휴게소 -8- 미천계곡-서림 -18-
* 평창-정선 지역
하진부-나전 -31- 전선 -9-
* 호남지역
땅끝-영전-14-남창-10-=24
발에 로숀 크림을 바르고, 잘 말린 다음, 발가락 사이에 파우더를 듬뿍 뿌린 다음, 양말을 신는다. 얇은 양말을 신고, 푹신한 등산 양말을 덧신는다.
■ 尙 州
忠毅祠(정기룡장군 사당)·신도비
금돌성(백화산, 신라 最古의 성, 사30)
견훤산성(화북 속리산)
沙伐王陵(沙伐面)
古寧伽倻王陵(함창)
3층석탑(보117, 사벌)
석불입상(보118)·석불입상(보120)
문장대(속리산)
球狀花崗巖(천69, 낙동면)
옥동서원(모동면)
台山樓(鄭經世유적지, 외서면)
化寧전승비(화북면)
▲ 擎天臺
3층 절벽과 낙동강 물과 노송 숲이 어울러진 명승지. 본래 <자천대>라 하였음.
* 擎天臺碑---임진전쟁 때 우리를 도운 명나라와의 의리를 위해서 세운 비.
<대명천지 숭정일월>
* 무우정---1637년(인조15) 우담 채득기 선생이 은거 수학하던 곳
* 말구유---정기룡 장군 용마의 구유통이라고 전함.
* 전망대---
* 인공폭포·전망대·휴식처·야영장·어린이랜드 등
* 인근 명소
화달리 3층석탑(보117)---후신시대
傳沙伐王陵(도기25)---사벌면 화달리
忠毅祠
병풍산성·병풍산
경천대관리사무소 0582-536-7040 [742-960]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 12-3
▲ 忠毅祠 (지방문화재기념물13)
1592년 임진전쟁 때, 1597년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鄭起龍 將軍(1562-1622) 위패를 모신 곳. 유적지.
1980년 사당·내외삼문·유물전시관·기념비·관리사무소 등 시설.
* 묘소
* 忠烈門
* 梅軒實記 版木--정기룡의 전기책 판목
* 敎書 2점·敎旨·諭書·信牌·玉帶 등 6점 (보669)
敎旨--1773년(영조49, 장군 순직 151년 후)에
조정에서 내린 시호 忠毅公 敎旨
玉帶·笏--朝服에 쓰던 허리띠
* 神道碑--1700년(숙종26) 건립, 송시열 찬, 높이 3.7m.
* 墓所--묘비·望柱石·文人像 등
비명 <府都摠管鄭起龍之墓 大明崇禎甲申丁亥六月> 1644년 건립
* 行蹟
1562년(명종17)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출생. 초명 茂壽, 본관 진양.
1581년(선조14) 20세에 상주로 천거
1586년( 동 19) 무과에 급제, 왕명으로 <起龍>이라 개명
1590년( 동 23)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申砬의 휘하에 들어감.
1591년( 동 24) 훈련원 봉사에 승진
1592년( 동 25) 임진전쟁이 발발,
別將으로 승진, 거창전투에서 왜적을 격퇴,
금산전투에서 포로가 된 경상방어사 조경 장군을 구출,
상주 가판관으로 승진하여 용화동전투에서 왜적을 격퇴,
화공전으로 상주성을 탈환.
1593년( 동 26) 상주목사 겸 감사군대장
1597년( 동 30) 丁酉再亂 발발,
討倭大將이 되어 고령에서 6만 왜적 대파,
함양 사근역전투에서 8천 왜적 격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승진
상주·합천·초계·의령 등의 여러 성 탈환, 경주·울산 수복. 前後 60여 차례의 전투에서 승전
1598년( 동 31) 明軍의 摠兵管職을 대행하여 경상도지방에서 왜적을 소탕
1607년( 동 40) 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승진
1617년(광해 9) 三道統制使 겸 경상우도 水軍節度使 승진
1621년( 동 13) 위 직 재임명
1622년( 동 14) 향년 61세로 통영 진중에서 순직, 유언에 따라 성주시 사 벌면 금혼리에 안장
1773년(영조49) <忠毅> 시호 받음
▲ 沙伐王陵(사벌면)
沙伐國王陵. 높이 4m, 주위 47m, 상석·半馬石·燈臺石·비석 등이 있다. 비석 뒷면 명문 <光緖八年七月>(1882년), 商山朴氏 문중에서 관리.
■ 善 山
* 文化財
大竹洞5층석탑(국13,) 또는 竹杖洞5층석탑(국130)
海平洞醫泉寺경내 석조여래좌상 (보492)
洛山洞3층석탑(보469)
松谷洞도리사석탑(보470)
농소 은행나무(천225)
궁기동석불좌상(지유문120)
중요민속자료 1점
▲ 洛山洞3층석탑(보469)
신라후기, 화강석, 전체 높이 8m. 2층 기단 위에 세운 方形의 석탑인데, 몇 장의 板石으로 地覆石을 만들고, 하대석과 中石을 1석으로 하여 8석으로 하층의 기단을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3주씩 있다.
甲石은 몇 장으로 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완만한 경사와 상층 기단을 받기 위한 弧形과 角形의 괴임이 刻出되어 있다.
상층 기단은 몇 장의 판석을 세워 面石을 구성하고, 우주와 탱주의 2柱가 표현되었다. 상층 기단 甲石은 4장으로 덮었고, 밑에는 附椽이 있다. 윗면은 경미한 경사를 두고, 각형과 호형의 몰딩이 있어 탑신부를 받게 되어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몇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초층의 옥신은 특이한 구조로, 우주와 면석이 별개의 돌로 되어 있지만, 남면에는 우주석에 廓이 조각된 석재를 좌우에 세우고 위에도 광곽이 조각된 중방과 같은 석재를 얹어 그 하부에 감실을 형성하였다.
옥개석도 받침, 옥개 추녀, 윗면 층단이 모두 별개의 석재로 되었고, 각 부분도 여러 장으로 짜여져 있다. 옥개석의 받침과 상면의 층단은 각층마다 상하가 동일하며, 초층과 2층은 각 5단씩이고, 3층은 4단이다.
상륜부는 노반이 남아 있을 뿐 그 이상은 없어졌다.
▲ 竹杖洞5층석탑 (국130)
竹杖寺址, 신라후기, 화강암. 높이 10m.
18장의 長臺石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상하의 2중 기단, 또 그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웠다. 하층 갑석은 높은 괴임 2단 위에 상층 기단 면석을 올렸는데, 현재는 파손되어 있다.
초층의 탑신은 남면에 불상을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 텅 빈 감실이 있고, 여기에 문비가 있던 흔적도 남아 있다.
옥개석 받침은 6단이고, 7단의 층계석 낙수면으로 구성되었으며, 낙수홈은 음각되었다. 2 층의 옥개석 받침은 5단, 3층은 4단, 4층은 3단, 5층은 3단으로 구성되었고, 낙수면은 2층에서 5층까지는 6단으로 만들어졌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만이 남아 있다. 지대석에서 노반까지 많은 부재 즉 수백 장 돌로 이루어졌다, 이는 신라후기의 전형적인 2중 기단을 형성하고 있으나, 우주와 탱주를 표현하지 않은 독특한 형식이다. 그리고 낙수면의 층단은 전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수법이다.
▲ 海平洞석조여래좌상 (보492)
해평동 寶泉寺 경내에 있는 화강석 불상. 불상고 132cm, 대좌고 109cm, 광배고 167cm.
대좌와 광배를 구비한 좌불상으로, 머리는 螺髮이고, 얼굴은 둥글고 단정하다. 눈·입·귀가 모두 작고, 코는 손상되어 시멘트로 새로 만들었다. 신체는 단정하지만 체구는 작고,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어깨에 걸친 법의는 유려하며, 배에는 형식적인 띠매듭이 표현되었다.
광배는 舟形擧身光으로 身光은 二重圓圈을 표현하며, 그 안에 寶相華紋이 새겨졌고, 頭光 중심에는 연화문이 있다.
또 맨 아래쪽 양편에 향로가 있으며, 그 뒤에 각각 2구의 化佛, 위쪽에 삼존불이 있고, 둘레에는 火焰紋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는 8각대좌이며, 상대석은 半球形인데, 重瓣蓮花 16엽이 조각되었다. 중대는 8각으로 모서리에 우주가 표현되었고, 전면에 여래형 좌상, 양측면과 후면에 꽃가지를, 그리고 다른 면에 飛天像을 조각하였다. 하대는 하부 8각 각면에 안상이 있으며, 그 양 끝에 운문 비슷한 것이 조각되었고, 상부는 복판연화문이 있다.
지대석은 4각인데 각 모서리마다 지름 5.5cm, 깊이 3.5cm의 구멍이 뜷려 있다. 섬세하고 화려한 대좌와 광배는 물론, 단정한 작은 체구와 얼굴 등은 9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 周 王 山
▲ 大 典 寺
672년(문무왕12)에 義湘大師가 지었다고도 하고, 919년(고려태조2)에 普照國師가 주왕의 아들 大典道君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고도 한다.
임진전쟁 때 불탄 것을 1672년(현종13) 또는 1812년에 중건하였다 한다. 지금은 普光殿, 冥府殿, 仙靈閣 등이 있다.
부속암자로는 白蓮庵과 周王庵·蓮花庵이 있다.
보광전 앞에 있는 2탑은 무너진 1개의 탑을 주어 맞추어 만든 듯 하다. 동쪽에는 잔돌탑이 있고, 돌탑 뒤에는 부도밭이 있다.
임진전쟁 때의 사명대사 眞影과, 李如松이 사명대사에게 보낸 친필 목판이 있다. 또한 이 절에서 사명대사가 승군을 훈련하였다고도 한다.
崔致遠·나옹화상·도선국사·보조국사·무학대사·徐居正·金宗直
등이 여기서 수도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절터가 부선형인데 절앞뜰에 우물을 파서 쓰자 불이 났다 한다. 그 뒤 이를 메웠는데, 지금도 오른쪽 밭 가운데 그 흔적이 있다.
* 普光殿(유문202)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공포는 내외 2출목의 다포식 건축물이다. 밖에서는 앙설로 되어 있고, 안에서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 건축양식의 특징이다.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안치하였다. 좌벽상에 코끼리를 탄 지혜의 文殊菩薩像 벽화가 있는데, 이것은 그 내용이나 크기가 흔치 않은 것이다.
*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이익공양식이다.
▲ 주위사찰……大典寺·光巖寺·蓮花寺·蓮花庵·周王庵
▲ 주위명소……
* 巖…旗巖·石壁巖·石屛巖·아들바위·배바위(腹巖)·부암·神仙巖
* 峰…蓮花峰·시루봉(甑餠峰)·香爐峰·彌勒峰·觀音峰·玉女峰·將軍峰
* 臺…汲水臺·鶴巢臺·神仙臺·望月臺
* 窟…周王窟·蓮花窟·武藏窟
* 瀑…제1폭포·제2폭포·제3폭포·月外瀑布(달기폭포)·注山瀑布
* 沼…주산지(부동면 이전리)·九龍沼·神仙蕩
* 계곡…月外계곡·周王계곡(周房계곡)·內院계곡
* 紫霞城(周房山城)……높이 6m, 주왕암 입구↔나한봉 15km.
아들바위…기암을 지나 주방천에 있다. 왼손으로 다리 사이로 돌을 던져 얹 으면 생남한다.
시루봉…모양이 시루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 한 도사가 수 도할 때 두 신선이 아래에서 불을 지펴 주었다는 전설.
周王庵…신라 문무왕 때 창건. 대전이 부 주왕의 이름으로 암호를 지었다. 2 층 누각인 대문채 가학루는 독특한 형태이다.
汲水臺…정상에 신라 왕손 김주원의 대궐터가 있다. 이 바위 위에서 두레박 으로 물을 퍼올렸다 하여 급수대라 한다.
滿花峰…바위 밑에 연화굴. 만화봉·장군봉이 연접되어 있다.
主山池…1720년(숙종46) 또는 영조 때 만든 연못. (청송 8경)
神仙臺…
觀音峰…주왕암 뒷편의 암봉
3瀑布…높이 22m, 가장 큰 폭포.
月外瀑布…월외리, 일명 달기포포, 높이 11m,
內周王(절골) (청송 8경)
▲ 周 王 山 (721m)
일명 石屛山·周房山이라고도 한다. 太行山(933)·大遯山(905)둔·명동재(875)·벅구등(846)·왕거암(907)·금은괭이(812)·연화봉·장군봉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7천만 년 전(중생대 백악기 후기, 한반도 공룡이 번성하던 때)에 화산활동으로 생성되었다. 이 시기에 생긴 산은 내연산·보현산·운문산이며, 거제·남해·고흥·완도·진도로 이어진다.
旗巖은 화산재가 鎔巖처럼 흘러 내려가다가 멈춰서 굳은 鎔灰巖 성분으로 된 것이다.
* 鎔巖이란 화산에서 뿜기어 나오는 마그마(바위물). 굳으면 바위가 된다.
* 火山재(灰)란 화산에서 뿜어 내는 용암의 부스러기가 자디잔 먼지 같이 된 재.
* 凝灰巖이란 화산에서 뿜겨 나온 재와 모래가 물밑에 쌓여서 눌러 굳어 진 바윗돌.
동물 500종과, 식물 400종이 서식하고 있다.
조선조 학자 洪여방은 청송읍 讚慶樓의 <讚慶樓記>에서 주왕산에 대하여 <산세는 기복이 있어, 용이 날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범이 웅크린 것 같기도 하며, 냇물은 서리고 돌아, 마치 가다가 다시 오는 것 같다>고 찬탄하였다.
신라 후기 金周元은 선덕왕의 후계자로 되었으나, 김경신(後의 원성왕)이 반란을 일으켜, 왕이 못되고 이 산(石屛山) 周王巖 뒷편의 <宮地>에서 은거하였다.
[전설]
에 晋의 왕손인 周鍍가 晋의 회복을 꿈꾸고 後周天王이라 자칭하고, 779년(唐덕종12)에 수도 長安을 공격하다가 곽자의에게 패하자, 쫓기어 요동을 거쳐 신라 땅인 이곳에 숨어들었다. 唐은 신라에 周王을 쳐 달라고 요청하였다. 신라는 마일성 장군 5형제를 보내 주왕과 싸우게 하였다. 주왕은 旗巖을 노적가리처럼 위장하여 싸웠으나, 주왕굴에서 죽었다.
주왕에게는 아들 大典과 딸 白蓮이 있었는데, 절 大典寺와 白蓮庵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 周王窟……주왕이 피신한 굴로서,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가 마장군의 화살과 철퇴를 맞아 죽었다. 주왕이 흘린 피에서 수달래(水丹花, 주왕산 4대명물)가 돋아나, 주방천 가에 붉은 꽃이 핀다. 매년 5월 <주왕산 수달래제>가 열린다.
* 武藏窟……주왕이 무기를 숨겨 둔 곳이다.
* 蓮花窟……주왕군의 훈련장이며, 주왕의 딸 白蓮公主가 성불한 곳이다.
길이 150m, 너비 3∼7m.
* 靑雲洞 성천댁 (중민자172)
정면 5칸 측면 4칸 기와집. 허식이 없고 실용성 위주로 지었다. 18세기 건축물인 듯. 자손은 떠나고, 타인이 살고 있어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다.
주방천(龍纏川)·삼거리
* 周王山(720m) 大典寺 계곡 --- 1, 2, 3 계곡, 달기약수.
■ 蔚 山
임진전쟁 때 격전지, 신라 때부터 군사요새
신불산(1209), 文殊山(600), 간월산, 고헌산
太和江--東築寺, 華城館, 兵營城터, 兵營節度寺營터, 望遠樓터, 蔚山鶴城,
太和寺터 12支像浮屠(보441)
울기공원--대왕암, 용굴, 남근암, 용추암, 긴수염고래턱뼈
울주
文福山(1014), 가지산(1240), 陵洞山(982), 鼎足山地, 天馬山, 磨石山,
回夜江--선바위(태화강변), 춘도공원, 석남사,
작천정(언양 자수정동굴)
언양정류소 #377버스 1시간 간격, 15분소요 10회 운행
언양읍성(사154)--동부리
동구…… 방어진 울기등대와 대왕암
주전봉수대
중구…… 태화사지 12지상부도 (보441)
울산 향교
남구…… 장생포
온산읍…… 처용암
목도 상록수림 (천65)
서생면…… 대송리 간절갑 등대
온양면…… 내원사계곡과 내원암
웅촌면…… 무제치늪
청송사지 3층석탑 (보382)
삼동면…… 망해사지 석조부도 (보17)
문수사
범서면…… 선바위
두동면…… 박제상 유적지와 치술령 망부석
두서 은행나무 (천64)
천전리 각석 (국147)
청동기 선사시대의 생활상. 200여 점 조각. 바위면(10×3m).
1965년 댐 완공으로 수몰, 가뭄 때 노출,.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285)
반구대 암각화→천전리 각석(국보 147)→천전리 공룡 발자국 화석(地文6)
삼남면 작천정과 벚꽃터널
상북면 언양 자수정동굴
신불산 흥류폭포
고헌산
석남사 부도 (보369)
가지산 쌀바위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보370)
관문성 (사48)
천황산 요지군 (사129)
언양읍성 (사153)
검단리 유적 (사332)
울산 병영성 (사32)
울산 극경 회유해면 (천126)
* 삼한시대에는 진한 땅
△ 울산 천전리 암각화(국147)
두동면 천전리, 큰길에서 3km, 대곡천, 1970년 12월 25일 발견(동국대박물관 조사단)
경주-울산 35번 국도변
1억 년 전 공룡발자국 200여 개(1995년 발견)
평평한 바위(9.5m×2.7m) 천전리 각석
시베리아를 제외한 中·日 등 극동지방 유일의 선사시대 유적
선사시대(석기시대)부터 신라시대(청동기시대)까지 새김.
삼라만상을 극도로 추상화하여 바위에 새겨놓고, 풍요로운 세상과 출산을 기원
* 제1암각화--횡 10m, 종 3m, 상고시대부터 신라말에 이르는 기하학적 문양과 銘文, 조각(명문은 김씨왕권을 세운 사람들이 순례하고 기념으로 새긴 것으로 추측), 고관행차 장면과 騎馬人物 등을 단순한 線으로 묘사
* 제2암각화--사냥 예술(북구 시베리아 등지의 신석기시대 미술과 직결), 사슴, 호랑이, 멧돼지, 고래, 곰, 토끼, 여우 등 동물과 사냥광경, 고래잡이광경 등 150여 점이 새겨져 있음. 기법은 全面彫와 線刻을 原初的인 技法으로 하였다. 신적기시대 말에서 청동기시대 사이의 작품으로 추측
* 청량면 망해사터 석조부도(보173) 율리, 청송사터 3층석탑(보382)
* 온산면 목도상록수림(천65) 신암리해안
* 서생면 西生浦城(사54) 西生里
* 웅촌면 검안리유적(사332) 검단리, 운흥사터-고연리
* 언양읍 사연湖
* 두서면 은행나무(천64) 두량리
* 江東面 정자城-정자리, 미륵3불상-어물리
■ 淸 道
지석묘군(기념물99) 화양 범곡, 선사시대 무덤 34기
청도석빙고(보323) 화양 동천, 숙종 때, 바닥길이 14.8m, 폭 5m, 화강석, 아취 형 전국최대
운문사 560년(진흥21) 창건, 비구니승 승가대학.
석가여래좌상(보317)
사천왕석주(보318)
청동호(보208) 12c, 용도붌확실, 사찰행사용인 듯.
금당 앞 석등(보193)
3층석탑, 높이 5.4m 기단 8부중상조각이 정교.
만세루 1105년(고려 숙종) 건립, 160평, 법회 설법 이용
장연사지 3층석탑(보677) 매전 장연, 높이 4.3m, 폭 1.56m, 화강석
봉기3층석탑(보113) 풍각 봉기, 서탑. 동탑은 광복직전에 없어짐. <청정사> 터라 전함.
佛靈寺 塼塔(문자294) 매전 용산리, 벽돌마다 불상 조각
배자예부운락 판목(보917) 국학 유일 각본판
海東續小學 판목(유문재208)
임당김씨고택(민자78) 금천 임강, 북향 건물
운곡정사(민자90) 운문 수몰지, 조선후기
원모재(문자232) 운문 수몰지, 1993년 이건.
운강고택(중민자106) 금천 신지, 조선시대 상류주택, ㅁ자형
대비사 대웅전(보836) 화양 송금, 임진후 중건, 맞배집, 석축조각 유명.
오례산성(일명 구조산성) 매전
청도읍성(기물103) 화양 서상.
적천사 목조사천왕좌상(유문153) 청도 원리, 1690년(숙종) 제작
적천사 괘불(유문152) 길이 12.3m, 관세음보살상? 숙종21년.
대운암 목조관음보살좌상(문자309) 청도 유호, 높이 1.2m, 폭 0.8m
박곡 석가여래좌상(보203) 금천 박곡, 1938년 화재
청도향교(유문207) 화양 교촌, 1732년 이건
道州館(유문212) 조선 중기, 관리 숙소.
청도척화비(문자109) 화양 서상, 관도변에 있던 것을 도주관으로 이설.
자계서원(유문83) 이서 서원. 김일손(조선 문신) 1581년 초 건립, 일명 문계서원. 김종직 제자,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 조의 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으 로 사사.
선암서원(지유문79) 금천 신지, 김대유 박하담을 제향, 1577년 건립.
▲ 佛靈寺 塼塔(문자294) 梅田面 龍山里 비학골
천년 전 시라의 가장 뛰어난 조각가 중 양지의 작품.
불영사……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하나 당시의 유물은 없다. 호양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있어 경치가 빼어나고, 절 뒤편의 높은 암반 위에는 5충전탑(1968년, 무너진 벽돌더미를 시멘트로 붙여 세운 탑, 문자294)이 있다.
원효와 동시대 인물인 양지는, 영묘사의 장륙삼존불·사천왕상, 감은사 서탑 사리기 외함의 사천왕상, 사천왕사의 목탑을 장식한 소조 사천왕상, 신라인의 조각 솜씨를 자랑하는 귀면와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양지는, 지팡이에 바랑을 달아 두면 지팡이가 날아가 시주를 받아 올 정도의 신통력이 있었다. 그가 석장사에 있을 때, 벽돌을 새겨 탑을 만들고, 부처 3천여상을 봉안했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부지를 발굴하면서 불상과 탑이 새겨진 벽돌이 다량 발굴되어 삼국유사 기록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불영사 전탑의 벽돌은 이 석장사의 것과 같은 것이다. 높이 7-8cm, 가로 세로 25cm 내외의 벽돌에 섬세하게 불상과 부처를 새겼다.
양지는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쓴 명필이기도 한 양지는 삼국유사에만 기록이 전할 뿐, <해동고승전> 등 어떤 기록에도 없는 신비의 인물이며, 미술사학계는 신라 최고의 장인으로 인정한다.
강우방은 "양지는 진흙의 요술쟁이, 미켈란제로나 로댕처럼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 평한다.
영묘사의 장륙존상을 만들 때, 장안 사람들이 흙을 나르면 부르던 <풍요>하는 향가 노래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설움 많아라
설움 많은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 把溪寺
* 把溪寺 木觀音菩薩坐像 (보물 992호)
파계사 主殿 원통전의 主尊佛이다. 머리에는 금속제 보관을 썼는데, 각종 꽃무늬를 장식하여 매우 화려한 모습이다. 관대에는 굵직한 연주문을 장식하고, 그 밑에는 寶髮이 보이는데, 양쪽 귀에 걸친 머리카락은 몇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까지 덮고 있다. 眉間에는 白毫가 뚜렸하며, 얼굴은 풍만하고, 입·코 등의 각 부분은 조각이 뚜렷하다. 양쪽 귀는, 대개 어깨까지 닿는 다른 불상들에 비해 짧은 느낌을 주기는 하나, 목에 삼도가 돌려 있어 위엄과 자비를 느끼게 한다. 법의는 양 어깨를 모두 가린 通肩衣로, 양팔에 걸쳐 무릎을 덮었고, 가슴 부분에는 裙衣의 매듭이 뚜렷한데, 이는 조선시대에 유행한 불상의 착의법을 따른 것이다. 瓔珞은 가슴과 양팔, 그리고 무릅 등 전신을 감싸고 있어 화려한 면을 보이며, 특히 무릅 밑에 보이는 물결 모양의 옷무늬는 전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목된다.
또한 이 좌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전신의 화려한 瓔珞과 양 무릅을 덮은 법의가 흘러 마치 상현좌 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다. 또한 이 붙상이 차지하는 큰 의의는 1979년 개금 불사 때 復藏되어 있던 영조대왕의 어의와, 어의를 복장하게 된 경위와 불상의 건립연대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발원문을 발견하여, 불상이 조성된 것이 최소 1448년 이전이라는 것과, 불상조각의 변천과 유사 불상의 편년을 가늠할 수 있게 된 점이다.
* 英祖大王의 道袍 (중요민속자료 제220호)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영조대왕의 도포는 1979년 파계사 원통전내의 관세음보살상을 改金하다가 발견하였다. 도포와 함께 韓紙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이 발견되어 이 도포가 파계사에 보관된 경위가 밝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도포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592년 경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러나 파계사의 영조대왕 도포는 현품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 것으로, 형태와 색이 거의 완전하여 그 역사적 가치가 상당히 크다. 특히 이 도포는 1740년 대에 왕이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도포의 형태를 보면 넓은 두리소매에 반목판깃이 달려 있어 왕족과 서민 사이에 나타나는 양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도포로 인해 깃의 형태나 소매 밑단 선 등이 시대에 따라 변해 왔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시대를 올라갈수록 완만하고 좁고 긴 소매였던 것이, 점차로 소매통이 넓은 두리소매형으로 되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도포는 출토물이 아닌 현존물이어서 옷감의 질감과 색을 그대로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복식사적 가치가 상당히 크다.
■ 불굴사
(29) 불굴사 언저리
불굴사 삼층석탑-(1) 언저리 (보물제429호)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약사여래 입상"
690년(신라 신문왕10년)에 창건한 절로, 전성기에는 와가 500여 동, 암자 12채를 갖춘 사찰이었는데, 1736년(영조12년)에 큰비로 대파되었다 한다. 당시 약사여래입상은 매몰되었는데, 수년 전 발굴되어 현재 보호각 안에 안치하고 있다.
약사여래입상은 백발머리와 타원형의 긴 얼굴에 키는 크고 귀는 길게 늘어저 있다. 통견법의는 길게 발등까지 덮었고, 왼손은 약함을 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머리부분이 몸통에 비해 크다. 현제 작은 규모의 법당 안에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연화대좌 위에 바로 섰으며, 소발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있고, 相好는 장발형에 가까운 양눈과 코 입은 뚜렷하나 부분적으로 마멸되었다.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어께 위에 닿았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어 근엄하게 보인다.
상호의 근엄한 표정과 동체의 법의 연화문의 조성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원효 석굴"
이 석굴은 신라 원효대사가 불굴사 건립 이전에 흙담을 쌓고 수도했던 장소라고 하며, 김유신 장군도 소년 시절 이 굴에서 신인을 만났다고 전해 온다. 불굴사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있으며, 기암절벽 사이에 있다.
이 잘생기고 깍아놓은 듯한 바위벽들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가짐과 자리에 따라 갖가지 모양으로 보이는데, 그 중 석굴 입구에 넓게 자리한 바위는 멀리서 보면 그 표면에 불교 탱화를 그려 놓은 것 같아 찾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곳에서 불상이 발견되어 말로만 전해오던 워효대사의 행적을 확인했다고
하는데 그 불상은 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한다.
단풍이 고이 물든 이가을에 석굴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청명하기 이를데
없다. 원효대사도 김유신장군도 또 참배객들도 모두 그 하늘안에 마음을
풀어 씻고 각기 제 갈길로 돌아 갔으리라.
■ 중요민속자료 104호
달성군 하빈면 묘동 800 파회마을, 묘골 박씨종가(박도억) 240년 전 선조 때 건축, 대문 옆 탱자나무 수령 200년.
*신숭겸 장군 유적지……표충단(공산싸움에서 전사한 신숭겸의 시신과 피 묻은 흙, 의복, 무기 등을 수습하여 전사한 곳에 세운 혈단) 표충재(신숭겸 사당).
*봉무정·봉부토성……
*팔거산성·용암산성·대덕산성……
*둔산동 경주최씨 종가·보본동 사당……최씨 종가는 대구지방 最古주택.
*신당동 석장승……계명대 안 소재. 대구 잔존 유일.
*묘골……하반면. 사육신의 하나인 백팽년의 유복손이 터를 잡은 곳. 육신사(사육신의 위패 봉안), 태고정(육신사 경내 99칸의 종택에 딸린 정자), 도곡재, 충효당, 금서헌, 좀 떨어진 곳에 삼가헌(별당채 하엽정이 딸린 상류주택).
*하목정……임진 의병장 낙포 이종문이 세웠다.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머문 적이 있어 하목정이라 정호를 써 주었다. 인조의 명으로 건물에 副椽을 달았다.(일반 가옥에서는 부연을 달지 못하였음). 여름의 백일홍이 곱다.
*남지장사 靑蓮庵……법당과 요사채를 겸하고 있어 평면배치가 특이하다. 구조는 소박하면서도 부분적으로 고식수법이 남아 있다. 특이한 평면구성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단청도 없고 탑도 없어 절보다는 양반 가옥을 연상시킨다.
*鹿洞書院……임진 때 가토 휘하의 좌선봉장이던, 귀순 귀화한 일본인 모화당 김춘성을 추모하는 곳이다. 일본 성은 <사가야>, 정유재란과 벙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웠다.
*달성 조길방 가옥……200여 년된 초가. 사랑채와 아래채는 고쳐지었다.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화원읍 본리동. 문익점 자손 세거지. 수봉정사·광거당은 대표적 건물로 유명하다.
*인흥서원 명심보감 판본……노당 추적이 편저한 명심보감을 그의 20세손 추세문이 출판한 판본이 인흥서원에 있다. 목판 31장. 율곡 등 학자들의 서문·발문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용연사
*현풍 석빙고……경주·안동·창녕의 석빙고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 규모는 크지 않다.
*도동서원……동방 5현의 수좌라는 김굉필을 향사한는 곳. 소수서원·도산서원·병산서원·옥산서원과 함께 5대서원의 하나. 중정당·중정당 기단·환주문·제례용 소품.
*이로정……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굉필과 정여창이 풍류를 즐기며 석병의 정을 나눈 곳. 두 사람의 시 <유악양>가 새겨져 있다.
*곽재우 장군 유적……묘는 구지면. 유가면 가태리 예연서원에 위패 봉안.
■ 고성 공룡터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해안 (상족유원지∼실바위 6km 해안)
공룡집단서직지(세계학계공인)
경북대 양승영 지질학 교수, 남해안 일대 지질조사 중 발견,
〃 임성규 고생물학 교수, 집중적 연구
1억년 전 공룡·새 발자국
퇴적암 암반
해안은 퇴적암의 층암단애로 되어 있다.
중생대 백악기 (1억 3,000만년전∼6,500만년전까지 6,500만년 동안)에 살던 공룡 발자국
경상계지층(중생대 백악기의 것)
공룡 외 큰 동물이 없었다.
중생대 초기부터 포유류가 있었으나, 들쥐 정도로 작았다.
이 지층에서 큰 뼈의 화석이나 발자국은 공룡이 확실하다.
두께 150m 지층에서 공룡발자국 화석 발견(수천만년 동안의 공룡서식지를 입증)
호수가 늪지대의 공룡발자국 위에, 수 천년 동안 물에 떠내려온 진흙 등 퇴적물이 쌓여, 발자국이 찍힌 지층이 암석으로 굳어진 뒤 다시 지표면으로 밀려 올라오면서, 침식 받아 드러난 것.
상족암을 지나 통영 앞바다로 불쑥 튀어나온 해변.
거대한 호수이던 백악기 당시, 얕은 호수가에서 먹이를 먹던 새들의 발자 국이 곳곳에 있다.
깊이 1cm, 직경 1∼2mm∼∼1∼2cm 정도인 나무가지로 긁은 듯한 자국.
1973년 하동군 금남면 수문동 해안에서 공룡알 껍질 발견 (양승영)
이후 뼈·이·똥·발자국 등 공룡흔적이 골고루 발견, 몸체는 미발견.
발자국 의성 등 경북 7, 경남 18, 계 25군데.
덕명리 3,000개 (경남북 5,000개)
뼈, 합천군 등 4군데.
이, 2군데, 7개 발견
의성·고성 등이 대마도와 본토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호수. 발자국 화석이 보존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
혼적화석인 발자국화석, 골격화석인 체구화석은 형성 및 보존조건이 다르다.
골격화석은 홍수나 산사태 등 격변이 있어 공룡이 산채로 매몰되어야 한다. 이곳은 당시 안정된 지형이었다.
덕명리……3步 이상의 步行列이 247개
임성규 교수 논문 2족행 75%, 4족행 25%
초식 96%,(집단생활 가능성, 여러 마리 발자국 나란히)
육식 4%
경남지정기념물, 보존대책 전무, 방치, 선명한 화석 조치, 파도에 씻겨 희미 해지고 있다.
상족유원지 어촌관광횟집(34-5415) 민박 가능
경상남북도는 중생대 퇴적암
우리나라, 쥐라기와 백악기 지층이 넓게 분포
의성군 탑리, 공룡뼈 몇 개 추정, (1973년)
남해군, 공룡알,
의성군 금성면 만천2리, 뒷산 암벽, 새끼공룡 발자국화석(1억3,000만년전) 12개, 육식·초식, 그 외 2종 43개 발자국화석,(부산대 지질학과 김항묵 교수), 1994. 2.
제오리 공룡발자국화석(천연기념물 373호) 1989.
■ 공 룡 (Dinosa며)
드라이아스期 후기에 출현. 쥐라期와 白堊期에 번성하다가, 백악기 말에 절멸, 1억 수천만년간 생존.
파충류는 중생대(2억2,500만년∼6,500만년, 1억7,000만년간) 水陸空에서 크게 번성한 대형동물, 중생대는 파충류시대·공룡시대
龍盤類……
알로사우루스(쥐라기), 10m, 2t, 四肢, 갈퀴 모양 발톱, 날카로운 이, 육식
티타노사우루스(백악기), 15m, 7t, 키 5∼6m, 육식
메갈로사우루스(백악기), 3∼6m, 육식,
龍脚類……플라테오사우루스, 6m, 雷龍,
鳥盤類……
캄프토사우루스, 8m, 4.5t, 초식
트라코돈, 12m, 초식
翼龍類……
람포린쿠스, 1m, 飛膜 발달
프테라노돈
바다恐龍
■ 전기 없는 마을
안동시 길안면 송계리 도연마을, 임하댐 수몰민 거주지, 5가구 19명,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내원마을, 주왕산 깊은 산골, 7가구 12명,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해발 800m, 달봉산 꼭대기 성안마을, 2가구 6명,
영주시 부석면 소천5리 달터마을, 2가구 4명, 부석사에서 5km,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옻나무골, 완장리에서 계곡을 따라 산길로 2km,
군위군 고로면 학암2리 신기마을,
영양군 영양읍 화천1리 안한골마을,
봉화군 14곳,
■ 飛鶴山(762m)
포항시 북구 神光面 上邑里 法廣寺 뒷산.
神光버스정류소에서 서북으로 3km, 법광동 法廣寺(과거 法光寺)
50분 상행, 전망대바위, 神光벌 전망.……선바위, 안개바위, 訴訟묘, 50분 정상 착.
549년(진흥왕10)에 梁 武帝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불사리를 보내 주니, 진흥왕이 궁에서 맞이하였고, 진흥의 손자 진평왕(579-632)이 원효에게 명하여 절을 짓게 하고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 원당으로 삼았다 한다. 그러나 원효는 648년(진덕2) 32세에 출가하였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창건 당시는 대웅전·2층 금당·香火殿·5층석탑 등 525칸이었다. 1746년(영조22) 비구니 明玉 등이 5층석탑을 중수하려고 탑을 허니, 하층 玉函 속에 불사리 22과가 나와, 다시 銅函을 만들어 탑 2층에 봉안하였으며, 가을에 탑 앞에 법당 금강계단을 지었으나, 수십년이 못되어 全燒, 廢寺되었다.
1876년(고종13)부터 10년간 圭敏이 圓通殿·得水堂·祥雲閣·山靈閣·독성각 등을 중건하였다. 1887년(고종24) 5층 중 3층만 남아 있던 사리탑을 중수하였을 때, 1750년(영조26)에 쓰여진 <사리탑중수기>가 발견되었다. 그 뒤 다시 화재로 폐사되었다.
[유적·유물]
절터……기념물 20호
石塔……4층만 잔존, 1968년 도굴, 도굴 뒤 탑 속에서 <법광사석탑기>란 塔 誌石 2개 발견, 신라 후기 제작?,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佛像蓮花臺座……지름 2.2m, 둘레 7.3m, 대좌 위에 거대한 불상이 봉안되었 음을 짐작케 함.
雙龜趺
幢竿支柱
많은 주춧돌
■ 石浦
석포-石開재(山 1009m) 9.5km, 石開川골짝
다시 외삼방-덕풍 갈림길까지 2km
외삼방갈림길-덕풍 6km
석포-석개 너뱅이(廣坪) 김상수(65) 이정우 2가구 거주
덕풍 모르쇠농원 엄기학, 반장 이기철 72-7378
풍곡버스정류장 0397-72-4424, 기와집민박 72-7338, 삼거리민박 72-4244
석포면 대현리 현불사 주지 적멸, 1999. 5. 21 김대중방문기념비 제막
■ 남해안 봄구경
여수 돌산 동백 군청 0662-690-2225
고흥 나로도 군청 0666-830-5224
해남 산이반도 보해 매실농원(3월 절정) 0634-532-4959
남해 미조면 금산(701m) 해안 마늘밭 군청 0594-860-3223
■ 문경 이화령 조령산(1017m)
1) 이화령(700m) 휴게소에서 좌측으로 난 북쪽 능선을 타고 40분 가면 사방에 돌밭, 돌밭 지나 30분 으르면 억새풀밭과 조령샘, 가파른 길을 30분 오르면 고개, 좌로 돌아 30분 한 고개 더 오르면 정상.
2) 이화령 휴게소에서 바로 능선으로 올라가는 코스. 조령산 정상을 넘어 헬기장에서 붕오리를 올라 능선을 40분 가면 1코스 지점과 만남. 정상까지 2;30
북쪽 산세 험준, 정상에서 급경사 봉우리를 2개 지나면 갈림길, 계속 북진하면 조령3관문, 좌측 계곡으로 내려가면 신선암(수직암)-느티나무-신풍마을 (산행 총 4;30)
* 문경-충주 버스는 이화령에서 정거하지 않음.
* 문경-이화령 완행버스는 문경에서 1일 2회 운행.
▲ 문경 성주산
시내버스정류소 15분 걸어, 정2리 마을회관-마을 안 노인정(식수 준비)-호도나무고목 갈림길-좌행-담배밭 두충나무재배지-갈림길 서쪽으로 직진하는 계곡길-덤불, 출발 40분에 지능선과 만나는 3거리-다시 10분 상수리 당고목 고갯마루-당고개에서 북쪽 능선을 이어가면 830봉까지는 1시간,
▲ 덕유산 종주
육십령 출발, 덕유산 향적봉까지 40km, 1박 2일, 삿갓재에서 1박.
육십령(700m 정도) 출발,
능선, 북행, 할미봉 정상, 능선, 완경사 오르내리막길, 잡목,
갈림길, 안내판, (동행, 덕유교육원) 점치 가팔라지고, 산죽 우거진 능선길, 바위지대, 절경,
서봉 200m 아래, 안내판(해발 1300m, 육십령 8km, 남덕유산 4km),
야영지(남덕유산 1.3km, 참샘 100m),
*삿갓봉(1410m, 1386m) 무룡산(1492m), 중봉(1594m), 향적봉(1614m), 서봉(1510m)
갈림길에서 남덕유산(1507m) 정상은 동으로 5분,
월성재(1240m, 물)에서 서쪽,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토옥동계곡, 무주·전주 버스 편리. 동쪽, 거창 북상면 월성리 바람골 거쳐 황점으로 가는 길.
삿갓재대피소 2.9km,
*황점에서 거창행 버스 1일 6회 8;20, 11;00, 12;30, 13;50, 15;40, 18;40
*삿갓재대피소(011-372-4898)
삿갓재(1280m) 대피소, 서 원통골, 동 황점,
舞龍山(1492m)
冬葉嶺(1328m)→점차 갈파라짐.
동 병곡계곡, 빙기리, 분계천, 덕산정, 수승대.
서 안성면 (천일폭포, 용추계곡, 용추폭포) 용추계곡
*안성분소매표소 아래 통한마을에서 안성행 버스 1일 7회운행 막차 18;30
백암봉(1503m)(거창에서는 '상여덤'이라 함)
中峰(1594m)
香積峰(1614m) 오름길 시작은 白蓮寺(940m), 정상 바로 아래
*향적봉대피소(063-322-1614),
60령→남덕유산 10km, 4시간.
西峰→남덕유산 30분, 정상을 5분 남겨놓고 왼쪽으로 가면 남덕유산정상과 50m 떨어진 주능선 3거리.
南德裕山 정상에서 월성재를 거쳐 삿갓재대피소까지 2시간.
서 양악리.
삿갓재(笠峰)→향적봉 5시간, 3/2 이상 햇볕 노출.
香積峰 서북릉 10분 거리, 곤도라로 무주리조트로 간다.
白蓮寺까지 급경사 1시간. 삼공리 집단시설지구까지 2시간.
▲ 昌寧
532.4평방km, 99,600명(1985년)
신라 比斯伐의 중심지, 靈鷲山(737m)
가락국이 땅, 신라에 병합, 比自火郡 또는 比斯伐이라 함, 555년(진흥) 下州,
757년(경덕) 火旺郡, 940년(고려 태조) 창녕.
<경남의 경주>
眞興王 拓境碑(국33, 화강석 높이 1.78m, 폭 1.75m, 最古의 비, 561년 건립)
述亭里 동3층석탑(국34, 읍, 후기신라, 높이 5.75m, 화강석)
술정리 서3층석탑(보520)
영산법화암다층석탑(유문재69)
昌寧石氷庫(보310, 읍 송현동, 조선시대, 빙실 11m, 3.6m)
영산석빙고(사169)
조선 중기, 경주와 안동의 석빙고에 비해 약간 규모가 작다. 빙고는 외모가 문쪽이 높고 그 반대쪽이 낮다. 봉토주변에는 자연석을 쌓아 호석을 둘렀고, 봉토 정상에는 2곳의 배기공이 설치되었다. 배기공에는 갸름한 돌을 끼워 外氣와의 조절을 기도했다. 문은 지표에서 한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게 된 石階 끝에 있다. 옹벽은 큼직한 돌 세 벌을 쌓아 주변을 정리했고, 옹벽 위로는 큼직한 긴 돌 세 개를 나란히 놓아 천정을 구성하였다. 거대한 돌을 거칠게 다듬어 벽을 쌓고, 세 틀의 홍예를 바깥쪽으로 하여 판석을 덮어 공산 전체를 차단하였고, 앞뒤 벽은 그에 따라 축조되었다.
觀龍寺 藥師殿(보146, 신라?)
觀龍寺 용선대 석가여래좌상(보295, 높이 1.88m, 후기신라 초)
관룡사 대웅전(보212, 1704년 대홍수 때 유실, 조선 태종원년 재건,
신라8대사찰)
관룡사 석장등
丈馬고인돌
靈山萬年橋(1780년 축조, 영산면 東里)
靈山 蓮池
靈山 쇠머리대기
昌寧松峴洞石佛坐像(보75, 후신시대, 화강석재, 높이 1.37m, 마애불)
昌寧塔金堂治成文記碑(보227, 후신, 높이 1.58m×0.45m, 이례적 석비, 810년)
송현동고분군(사81)
교동고분군(사80)
河丙洙가옥(중민자10)
화왕산성(사64)
목마산성(사65)
창녕객사(유문재231)
* 창녕
관룡산 입구 석장승 2개, 왕방울눈과 주먹코
우포늪, 牧馬山城(창녕읍 교상동, 송현동, 술정리), 가야고분군,
만옥정공원, 동3층석탑(국34) 교상동, 불국사 3층석탑과 비견
진흥왕 척경비(국내 最古)
석빙고(보310)
하병수초가(쇠풀지붕, 하자연 1498년 무오사화 때 하향)
만년교(보564) 영산홍교, 동천냇물, 영산면
지석묘--장마면 유리 야산 1채, 신석기시대 고인돌, 북두칠성 모양 7채 발견
■ 聞慶 曦陽山(999m)
* 산행안내
괴산군 연풍 은티마을에서 시작하는 길과,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홍문정 마을에서 시작하는 길이 있다.
홍문정∼희양산성 2시간, 여기서 정상까지 30분.
은티마을에서 시작하는 산행길은 여기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동쪽계곡에서 북릉성터로 가거나, 남쪽 채석장을 지나 지름티재로 가는 길이다.
산죽군락이 있는 동쪽계곡을 따라 15분 걸으면, 3m높이의 폭포가 있다. 길은 폭포 위 암반지대를 지나 남쪽으로 꺾여, 작은 능선을 넘은 뒤, 동남쪽으로 패어 들어간 골짜기 사이로 이어진다.
3월 보름∼4월 보름, 봉암사 개방.
등산코스
은티마을→지름티재→갈림길→정상→성터→은티마을(4시간)
曦陽山(998m)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 최치원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고 올라가는 듯하고,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 智證大師
△ 鳳巖寺
1982년 6월부터 출입금지
* 원북리 홍문마을에서 서쪽 봉암사로 가지말고, 희양산 정상방면의 능선으 로 이러지는 등산로를 이용
은티마을 초입 가게 옆 남근석, 남쪽 다리, 지름티재(희양산 구왕봉 사이)가 멀리 보임, 남쪽 지름티재 길, 인삼밭 2km, 동쪽 계곡 안 갈림길, 1- 동쪽 계곡 안 산길, 2- 남쪽 옛채석장 앞길
산죽군락, 10여평 암반밑 3m 높이 폭포, 능선, 희양산성터(신라),
괴산군 연풍면 주봉리 은티마을
봉암용곡(봉암사계곡)--오봉장마을, 점말마을
취적대, 야유대, 양산천,
仙遊洞溪谷--불란치재, 道界, 상중하 관평마을,
칠우정, 학천정
△加恩
* 함창에서 교촌 향교, 검안동, 저수지, 마천리, 구머리들, 두곡리, 몽두리고개(몽우리재), 면계, 사현리(3거리), 길동천, 갈동들, 농암(3거리)장날, 전곡리, 민지송어장, 성욱, 가은 (1997. 10. 25. 가은행)
* 1896년(고종33) 상주군에서 문경군으로 편입, 1973년 邑으로 승격
陽山川(충적지)-- 潁江(영강)
경지율 10.6%, 담배·누에고치가 주산물
광구수 11개, 恩城炭鑛(旺陵里) 연산 25만톤, 왕릉리 定期시장
* 문화재
李康秊기념비, 견훤산성, 鶴泉亭, 지증적조탑, 동 비, 정진대사원오탑, 동 비, 3층석탑
△ 鳳巖寺
羅末 문경 沈忠이 鳳巖 龍谷 땅을 희사하며 禪刹 건립을 권하여, 879년(답사책에는 881년) 智證大師(824-882)가 창건, 曦陽山派의 본거지가 되었다.(지증은 현지를 답사하고, "여기는 스님의 거처가 아니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철불상 2구, 憲康王이 <鳳巖寺>라 명명함. 882년에 智證이 열반, 883년에 봉암사에서 다비, 부도 <寂照塔>를 세움.
924년에 智證大師碑(최치원 찬, 寂照之塔碑銘)를 세움.
지증 竪碑 불과 5년에, 화재로 전소, 원인은 미상이나, 견훤 소행으로 추측.(919년 견훤 加恩 공격 실패, 당시 경순왕은 희양산 중턱 <城골>에서 피난, 원북마을 아침배미(朝夜味)에서 아침식사, 저녁식사-한배미(一夜味), 환송처 <行拜亭> 봉암사 입구)
6년 후 935년 靜眞大師(兢讓, 878-956)가 다시 창건, 법당 10, 승당 16, 행 랑·누각 14, 부속건물 10여, 산내암자 9, 고려3월 중의 하나, 최전성기
고려3월--여주 고달원, 양주 도봉원, 문경 봉암사
普照國師 智訥 수도 여부 미확인, 몽고란(13c초)으로 침해 여부 미상.
1431년(세종 때) 涵虛(1376-1433)가 중수, 부도탑(涵虛堂得通之塔, 절 동쪽, 得通이 雅號)
배불정책에도 명맥 유지
16C말 임진전쟁 때 전소, 문경의병의 본거지가 되었다.
전쟁 후 환적(1603-1690)이 주석.
幻寂堂, 부도 <智鏡之塔>(智鏡은 아명) 겸허 옆
1674년(갑인) 화재로 전소, 信和和尙이 중건
霜峰禪師(1621-1707) 주석, 졍전 주석, 목판본 간행, 1703년 화재로 전소.
霜峰의 부도는 幻寂堂 옆, 石鐘形으로 초라하다.
비는 일주문 옆 계곡 위, 동강이 났다. 白下 尹淳의 글씨
한말, 의병의 본거지, 일주문 극락전만 남고 모두 소실,
광복 후, 조실 西庵
1955년 대웅전 중건, 서암의 주도로 9산선문 참선도량으로서 전통이 부활, 일반인 통제,
1992. 6. 14 대웅보전 완성(108평)
爐柱石(庭燎石, 불우리) 1쌍,
대웅전 앞마당, 야간 행사 때 관솔불을 밝히던 곳, 희귀한 것
대웅전의 돌축대, 9C 창건 때의 것. 낙수물 물받침돌,
1km 오르면 白雲臺바위, 巖盤에 마애보살입상 양각, 마애불 아래 암반 명소,
<白雲臺> 글씨는 조선 후기의 것.
원북마을 버스종점, 너덕바위, <夜遊巖>, <取適臺>, <高山流水 明月淸風> 조선 후기 글씨. (口傳 崔致遠 글씨)
명진 승려, 서울개운사 대승불교 승가회
1990년 晩秋 禪房(9칸)낙성식
백련암은 임진 방화 모면, 기도 도량,
백운암, 환적암, 월봉토굴
△ 智證大師(824-882)
憲德·憲康王 때, 字 智詵, 諡號 智證, 성 김, 본 경주, 탑호 寂照.
8척 거구, 聲大, 六異六是, 잉태시 大師 태몽, 400일 지나 8일 출산, 매운 것과 비린 것 불식, 9세 父喪하고 出家하려 하였으나 모 불허, 월장하여 영주 부석산 부석사에 출가. 모 득병, 치유 서원, 모 완치,
17세(840년) 부석사 瓊儀律師에게서 具足戒를 받고, 楊孚에게서 禪을 배우고, 慧隱에게서 玄理(禪宗의 교리)를 배워, 苦行修道.
계람산 수석사에서 법회, 대중운집, 경문왕 호의 사양,
41세(864년) 賢溪山 安樂寺 주석 수락, (단의장 옹주)
44세(867년) 단월옹주 재산 노비 증여 수락.
문경 沈忠, 봉암 龍谷 땅 희사,
<여기는 스님의 거처가 아니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지증 현지 답사.
881년 봉암사를 창건하고 다시 안락사로 갔다. 헌강왕의 王師를 사양, 882년 12월 18일, 59세 법랍 43에, 저녁 공양 후 제자들과 정담 중, 가부좌를 튼 채 입적)
<嗚呼,星廻上天月落大海> 사후 1주년에 봉암사로 옮겨 장사
<먼저 깨친 사람이 나중 사람에게 배운 것을 나누어 주는 데 인색해서는 안된다.>(나무꾼 꾸지람)
자의출가, 나무꾼 깨달음, 왕의 부름 사양, 봉암사 창건, 가마 거절, 평온한 열반.
△ 정진대사(878-956)
공주생, 유학,
20세 계룡산 보원정사에 출가,
21세 西穴院 양부선사(智證大師의 제자)의 제자,
23세(900년) 入唐, 24년 후 귀국, 양부선사가 주석하던 康州(晋州) 伯巖寺에 있다가, 935년 봉암사로 이거, 景哀王은 <奉宗大師>라 호칭, 초면,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에게 가서 불교자문,
943년, 혜종 즉위 경하 편지, 945년, 정종 즉위 초대받고, 광종 즉위하자 왕사가 되어 舍那禪院에 머뭄,
956년(79세) 입적, 시호 靜眞, 부도명 圓悟
* 872년 구산선문의 하나인 곡성 대안사(태안사) 소유토지는 685결
△ 李康秊(1858-1908)
1880년 무과 급제, 선전관
1884년 갑신정변으로 낙향
1894년 동학전쟁 때 문경동학군 지휘, 왜병과 탐관오리 섬멸
1895년 을미사변 때 의병을 일으켜 부정관리 처단
을사조약 후는 永春·原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忠州를 공격, 加平 鑛岳山에 서 왜병 격파, 인제·강릉·양양 등지에서 활약하여 승리
1908년 淸風 錦繡山에서 피체, 학살 당함
* 보물
3층석탑(보169)
智證大師寂照塔碑(보138)
智證大師寂照塔(보173)
靜眞大師圓悟塔碑(보172)
靜眞大師圓悟塔(보171)
* 지방문화재
極樂殿 귀중문화재
涵虛禪師塔(지유문34)
涵虛堂得通之塔, 涵虛 부도, 8角堂 형식, 봉암사 뒤 기슭)
霜峰大禪師碑
爐柱石
白雲臺·玉石臺 (백운대는 금강만폭동에 비견된다.)
磨崖菩薩坐像(지유문121) 관세음보살 음각문, 幻寂義天禪師願佛(傳 曦陽舊誌)
야유암 각자,
■ 鳳巖寺 문화재
▲ 3層石塔(보169)
높이 6.31m, 상륜고 2.83m, 지대석 너비 3.24m, 기단이 다층을 이루고, 그 주연에 대석을 둘렀을 뿐.(석탑의 일반형은 重層이다.) 탑신은 옥석과 함께 각각 1석이며, 옥석은 평박하고, 받침은 모두 5단이다.
탑의 상륜부가 잘 보존되어 그 곡선미가 완전하고, 각 부분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주목되며, 기단부가 훤칠하게 커서 미인을 연상케 한다. 봉암사 창립 때인 羅末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 智證大師寂照塔(보137)
대웅전 향 좌측, 지증대사적조탑비와 나란히 있다. 지증대사 입적 무렵인 후신시대인 882년(헌강8)에 조성.
화강석, 높이 3.41m, 지대석 너비 2.28m, 8角圓堂을 기본으로 한 부도.
앞면 조식의 찬란함과 그 조화·통일에 있어서, 비할 바 없는 걸작이며, 규모가 장중하다.
기단은 하대·중대·상대로 구분되고, 기단 밑에는 넓적한 방형 지대석이있고, 그 윗면 중간에 연꽃을 조각한 3단의 몰딩이 있다.
하대석은 2단으로 되었는데, 하단은 각 면에 안상 일좌씩을 두고 그 안에 사자를 양각하였고, 그 위에 갑석을 얹고, 상면에는 얕은 몰딩 위에 구름모양으로 돌려있고, 위에 상단이 있으며, 구름모양으로 조각된 입주형이 모퉁이마다 있고, 각 면에 날개를 편 가릉빈가를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갑석을 얹어 중대석을 받치고 있고 중대석 즉 기단신부의 각 면에는 일종의 안상을 조각하고, 정면에는 탁상연좌 위에 사리합을 안치하고, 보개 보주 영락으로 장식하였으며, 다른 7면에는 연엽 위에서 무릎을 끓고 공양하고 혹은 비파를 타는 상을 양각하였다.
탑신은 얕고, 모마다 隅柱形이 있고, 전후 양면에는 戶形을 만들어 자물쇠와 문고리를 표시하고, 그 좌우에는 四天王立像이 있고, 양 측면에는 菩薩立像을 양각하였다.
옥개석은 광대한 8각이고, 밑에는 곡선을 그리는 받침이 있다. 옥개 정상에는 16판 蓮座를 얹고, 그 위에 露盤·仰花·覆鉢·寶珠를 차례로 얹었다.
서까래는 角形 2重椽이고, 처마는 크게 반전되었다.
옥상에는 기와의 표현이 없고, 우주만이 있다. 우주는 굵직하고, 그 끝에는 각각 귀꽃이 있다.
1979년 적조탑비와 함께 보호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 智證大師寂照塔碑(보138)
지증대사 일대기와 봉암사 유래를 소상하게 적은 부도탑비.
후신시대, 지증 입적 3년 후에 왕이 최치원에게 碑銘 撰을 명령, 8년 후(892년) 탈고, 33년 후(924년, 경애1) 竪碑. 상당 부분 글자 식별 곤란.
<남에 남아 있는 金石文의 최고봉>--김응현
탑의 총 높이 4.12m, 비신높이 2.72m, 너비 1.64m, 두께 0.23m,
석재는 편마암(점판암)으로, 남해에서 운반해온 해중석으로, 이런 석재비는 우리 나라 유일이다. 당시의 시대적 혼란과 교통 조건을 감안하면 이런 대형석재를 천리길 봉암사까지 운반해 온 것은 경이로울 뿐이다.
비의 조출이 뚜렷하고, 이수의 조형이 다양하여 사실적이다.
귀부와 이수의 보존이 완전하고, 귀두는 한 개의 뿔을 장식한 용두형으로 되었다. 이수는, 앙련과 8마리의 용이 서로 얽히어 싸우듯 장식이 매우 섬세하고 다양하다.
비좌의 각면에 비천상을 각출(이는 후신시대 전성기의 요약된 강렬한 표현기법이 말단 장식화되는 과정의 기법이다.)
<芬皇寺 釋慧江 書幷刻字 歲八十三>, <有唐新羅國故鳳巖寺敎諡 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최치원 四山碑銘 중의 하나, (四山碑銘은 성주사 낭혜화상비, 쌍계사 眞鑑國師碑, 경주 숭복사비와 이 봉암사 智證大師寂照塔碑)
▲靜眞大師圓悟塔(보171)
靜眞大師(봉암사 중창)가 입적하자, 고려 광종이 대사의 덕을 사모하여 왕명으로 세운 부도탑. 화강암, 높이 5m, 지대석 너비는 2.9m, 8각圓堂形 墓塔.
방형 지대 위에 3단 기단을 구성.(지대석은 일부 석재가 흩어져 옮겼다) 이 지대석 윗면에 3단의 몰딩이 있어, 하대에 하단 면석을 얹고, 각면에 안상을 조각, 그 안에 花紋이 장식하였다.
상개석 밑에 2단의 굄이 있다. 굄은 위에 16瓣의 앙련이 있고, 短柱와 난간을 2중으로 장식하였다. 탑신은, 위에 부연이 있는 갑석을 얹어 높직하고, 모마다 두드러진 圓柱形을 模刻하고, 그 표면에는 운문이 있고, 원주 사이에는 雲紋과 雙龍紋이 있다. 그 위에 팔각 갑석을 덮었으며, 또 그 위에 낮은 중석을 얹었다. 각 면에는 화문이, 전면에는 사리함과 보개 보주를 조각한 1구가 있으며, 다른 면에는 아무 조각이 없다. .
전면에는 戶形과 그 안에 자물쇠가 있고, 다른 7면에는 기단과 같이 彫飾이 생략되었다.
屋蓋石은 屋裏에 3단의 굄이 있고, 角形의 重椽이 細刻되었으며, 각 角隅의 反轉이 심하다.
기본구성이나 彫飾에 있어서 생략과 弛慢이 눈에 띄고, 옥개가 두꺼워 鈍重한 느낌이다. 이런 것은 시대적 양식에서 오는 현상인 듯하다.
정진대사원오탑비가 965년에 세워졌으니, 이 부도탑도 이 무렵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 靜眞大師圓悟塔碑(보172)
고려시대, 청석탑, 높이 2.73m, 너비 1.64m, 두께 0.26m.
李夢遊(高初)찬 張瑞說(열)서, (靑溟 任昌淳역),
여초의 조형적 특색이 있다. 귀부와 이수의 형식은 통식이나, 비좌가 두드러지게 크다. 정상의 화염보주는 뚜렷이 조출되었는데, 이는 다른 예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귀부와 이수의 조형은 매우 간략해졌고, 彫法은 안이한 것으로 퇴화하였다.(6각형 重廓甲文이나, 이수의 小寶雲文, 龍頭化한 龜頭 등에 그런 현상이 잘 나타나 있다.)
<東國金石評에서, 張瑞說의 글씨를 "안진경체인데, 고졸하다"고 평하였다>
--<槿域書畵澄(吳世昌)>
▲ 山淸 淨水山(828m)
산청읍 차황면 신등면 경계,
정상에서 지리산 천왕봉, 합천 황매산·둔철산·웅석봉이 보임.
율현마을에서 율곡사 20분,
율곡사 左路, 율곡사 물 파이프管, 갈림길 좌행, 외길, 세신바위(719m), 右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정수산
율곡사-정수산 2시간,
문의--산청군 신등면 면장 김동환(055-972-3501),
진주시외버스 단계행버스 (055-741-6039) 신등면소
6;30∼19;50 1신간간격 운행, 40분 소요.
■ 榮州 浮石寺
부석사는 지금부터 1300여 년 전 의상대사가 문무왕 16년(676)에 신라5교 중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서 창건된 고찰이다. 이는 경주 불국사보다 75년이나 앞서 세워진 것으로 한국 10대 사찰의 하나이다. 의상대사는 당에서 귀국하여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아」 5년 동안이나 전국의 산천을 두루 살펴보고 찾아 창건하게 된 것이 바로 부석사다.
이곳 봉황산 부석사에서는 빛나는 역사와 숱한 전설과 함께 한국불교 사상의 주류인 화엄종이 꽃피었다. 이곳에서 의상은 3천명의 제자를 가르쳤으며 의상 이후에도 부석사에서는 국사급 고승이 다섯이나 배출되었다. 또한 의상의 유명한 화엄일승법계도, 백화도량발원문 등의 저술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부석사는 이와 같이 종교사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의 전당으로서도 또한 빛나고 있다. 병화가 잦았던 역사 속에서도 부석사처럼 풍부한 불교문화재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도 없다고 하겠다. 국보가 5점, 보물이 4점이나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에는 대대적인 보수정화공사 덕분으로 모습이 새로워져 관광 명소로도 더 한층 돋보이게 되었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뒤부터는 우리 고장의 불교문화가 더욱 융성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고장의 불교가 가장 융성하였을 때는 부석사를 중심으로 사방에 5백여 개의 크고 작은 사찰, 암자가 모여 있어 커다란 불교문화권이 형성되었다 한다. 부석사의 창건이 우리 고장 문화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 최고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부석사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 2기(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석조기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고려각판(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유형문화재 제127호) 및 2기의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130호)이 있다.
희방사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두운조사가 경주 유호장의 무남독녀가 호랑이한테 화를 당할 뻔한 것을 살려주어 그 은공으로 절을 지어주고 희방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희방은 곧 기쁘다는 뜻이다. 조선 철종 1년(1850)에 강월대사가 중창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4동 20여 칸과 사찰 안에 있던 월인석보 목판과 기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근년에 와서 대웅전, 탑 등을 세웠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경내에는 13층탑, 종각 등이 있는데 종각 옆에는 탑재를 모아 세운 3층석탑이 있고 탑의 높이는 1.5m 이다.
비로사
소백산 비로암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비로사는 신라 문무왕 20년(680)에 의상조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후 약 2백년 뒤인 신라 말 진공대사가 중건하여 큰 사찰로 전해오다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후에 법당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 보물 제996호인 영풍비로사석아미타 및 석비로자나불좌상, 유형문화재 제7호인 영주삼가동석조당간지주, 유형문화재 제4호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가 있는 신라시대 고찰이다.
흑석사
흑석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경내에 국보 제282호인 흑석사목조아미타불좌상 및 복장유물과 보물 제681호인 흑석사 석조여래좌상, 마애삼존불, 광배, 좌대 등과 석탑재 등이 보존되고 있어 창건연대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고찰 흑석사의 유허지를 기념하기 의하여 1945년에 그 자리에 흑석사를 새로 세웠다. 새로 지은 흑석사에는 극락전, 약사전, 산신각, 칠성각, 종각 등을 비롯한 11동의 목조건물이 있다.
국보인 흑석사목조아미타불좌상은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정암산 법천사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원래 삼존불상 가운데 하나로, 여러 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복장유물로는 여러 점의 전적과 복장용 사리, 오곡, 오향, 칠약 등이 있다.
초암사
초암사는 의상이 부석사를 짓고 나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소백산에서 두 번째로 큰 절로 웅장한 석축과 신라탑 등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대웅전과 초암사 삼층석탑 및 동·서 부도가 남아 있다.
가흥리 마애삼존불상
시내에서 시민운동장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 얕은 언덕에 불상이 얹혀 있는데 이 불상이 가흥리 마애삼존불상(보물 221호)이다. 가흥1동(한절마) 주공아파트 뒤편에 위치하며 중앙에 앉아 있는 좌불상과 좌우에 서 있는 보살상을 새긴 마애삼존불이다. 이 불상은 장중한 모습과 새로운 사실적인 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통일신라의 조각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통일신라시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눈이 움푹 패인 것은 눈부근의 돌가루를 다려 먹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낭설을 믿고 아낙네들이 눈을 파 갔기 때문이라 한다.
▲ 봉화 삼동치 췌언
산비탈에 잔설은 있어도, 버들개지는 물이 올라 음빛을 띠고 있었다. 오는 봄은 막을 수 없나보다.
춘양면 牛口峙里 金井窟 상금정마을 시작--牛口峙 삼동치를 넘어 상동읍 덕구리 31번 국도까지 17km, 700m-900m의 산길
상금정 버스 종점, 금정초교 직전 998번 지방도 이정표, 우구치까지 외길, 우구치에서는 좌 임도, 우 옛길, 삼동치(886.6m) 넘어 덕구리까지 외길
봉화 정류장에서 춘양경유 상금행 7;50, 14;20, 16;15, 1;20 소요
덕구리에서는 내덕상회 0373-378-3037 버스정류장
▲ 中峰골→靑玉山
중봉산 1283m
청옥산 1403m
頭陀山 1353m
中峰골·番川里계곡
임계면소재지-중봉골 입구-숙박-갈전초교 중봉분교-직전, 터골-암자-임도-중봉골-흰적골-절골 합수점-정연흥 농가-김원기 농가-(산중 고옥, 황토집, 백두대간 지킴이)-숙박-고적대-청옥산-番川里계곡
정연흥, 김원기, 이건배(토박이)-김인호
▲ 太白 龍淵洞窟
태백시 화전동, 해발 920m, 한국 最高의 동굴
3억-1억5000만년 전에 생성
내부 830m, 이무기의 눈물, 용의 문, 꿈의 궁전, 나 살리도, 머리 조심
제1광장 폭 50m, 길이 130m
태백시외버스에서 7;00∼밤 10;16까지 시내버스 22회 운행, 10분 거리
동굴관리소 0395-50-2648
석탄박물관 0395-53-4672
▲ 簡易驛
* 압록역
전라선-곡성-구례
백사장 3만평, 모래시계의 김영애 소나무, 500m 거리에 '압록유원지'
태안사(동리산, 신라 경덕왕 때 창건), 관음사, 화엄사(지리산)
0688-63-7788
* 승부역
영동선-현동-석포
비룡산 오미산 사이, 승부역은 하늘도 3평 꽃밭도 3평(역 앞 돌).
0573-73-0468
* 정동진역
영동선, 0391-44-5062
* 장항역
장항선 종점(천안에서 분기) 서울에서 1일 15회 운행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나무숲, 0459-956-7788
* 여량역
정선선-구절리역 직전
노추산(율곡 공부, 이성대, 노추사), 철거 예정
구절리역 0398-41-4988
▲ 대구-전주 완행 노정 (1997. 11. 1.)
6;00 서부발, 성산IC, 고령읍, 묘산, 7;09 싸리티재, 봉산교3거리(합천댐),
상현휴게소, 郡界, 남하면, 고속도下, 7;28-40 거창, 7;52 주암, 삼산, 용추계곡, 8;08 안의, 광풍루, 황석산, 11;90 수련장, 황산, 봉전, 우전, 오현, 송계3거리, 들, 서상, 논개묘, 냇물, 서상정류소, 감나무, 길 가에 눈, 먼산 눈, 8;36 60령고개(도계), 반송, 계내, 들판,
8;74-9;00 장계, 천천면소, 조신, 신촌, 방고개(군계), 마이산, 상봉모임, 물곡, 진안, 목마휴게소, 용문사 입구, 화심온천, 전주
▲ 慶山
불굴사, 제석사, 도동재
불굴사--원효 수행, 김유신 삼국통일 계시, 我東第一藥水-巖刻
제석사--삼국유사, 원효 출생지 길 가, 娑羅寺 창건,→제석사
686년(신문6) 음 3월 30일 원효 입적,
誓幢和尙碑(경주 외곽에서 발견), 경산온천 가는 길.
도동재--설총(신라 10賢, 이두 창시) 사당, 묘소,
경산시 남산면 하대1리 마을회관 뒤
▲ 안동 임하댐 龍溪里 700년 은행나무.
▲ 密陽 山內 白雲山(885m)
백운산 능선에서 능동산, 사자봉, 재약산 주능선이 보인다.
밀양시 山內面 三陽里. 빼어난 절경과 아기자기한 암릉길이 일품이다.
산 전체가 화강석, 주변 조망과 하산길의 바위경관이 자랑거리.
산행 기점은 호박소 휴양지. 산행은 주차장에서 시작돼 구룡소 폭포를 지나 811봉~정상~암릉~너덜지대~24번 국도 코스로 4시간 정도 소요된다. [키포인트] 24번 국도타고 석남사행.
산행은 호박소 휴양지 주차장내 제일매점 왼편의 계곡길에서 시작한다. 구룡소폭포 아래 화장실 왼편 오르막길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길이 이어진다. 10∼20분 오르면 구룡소폭포. 산 속 깊은 계곡을 따라 70∼80m 아래로 쭉 뻗은 폭포다. 여기서 폭포 옆 산길을 따라 안부능선쪽으로 향하다 안부에서 왼편길로 접어들면 백운산행이다. 비교적 수월한 산행코스.
하지만 여기서는 폭포를 가로질러 희미한 산길을 오르도록 코스를 잡았다.
오르막의 잡목 숲길인데 제법 가파르다.
바위가 올망졸망하다. 30∼40분 오르면 바위전망대. 가지산 주능선이 좌우로 가까이 다가온다. 소리를 지르면 계곡을 따라 울려퍼지는 메아리가 일품. 15분 더 오르면 811봉.
이어 바위로 된 오뚝한 모양의 2번째 봉우리를 지나면서 바위를 타는 재미를 느낀다. 여기부터가 산행의 하이라이트.
정상에 올라서면 바로 앞에 재약산과 사자산의 주능선이 펼쳐진다.
남쪽으로 신불산, 영축산, 시살등, 서쪽으로 운문산, 바위봉이 보인다. 정상에서 바위능선길과 내리막 오솔길을 지나면 거대한 반석 모양의 전망대다. 이어지는 바위봉우리 직전에 갈림길. 여기서 왼편 호박소쪽으로 가면 원점회귀. 바위 왼편으로 자일을 타고 내려가, 바위 전망대에서 타고 온 능선길을 아래서 바라보면 절경.
여기부터 펼쳐지는 주변 경치가 일품. 20분 가면 왼편에 거북이가 목을 쭉 내민 모양의 바위가 있다. 희미한 개척길이기 때문에 부산일보 리본을 촘촘하게 달아놓았다. 이어 너덜지대를 지나 국도 쪽으로 내려가면 산행종점. 얼음골 사과주산지 표지석이 있다. 여기서 산행기점까지 10분.
▲ 葛羅山과 高山精舍
葛羅山 570m 丹村面 安東市
등운산 624m 단촌면
황학산 782m 옥산면
구무산 676m 춘산면 청송군
산두봉 719m 춘산면 청송군
선암산 879m 가음면 군위군
복두산 500m 가음면 춘산면
국사봉 521m 안사면
청화산 701m 구천면 구미시
풍수 이상으로 땅의 진면목을 깨닫게 해주는 집이, 서쪽 암산 기슭에 있는 <高山精舍>다. 현재 <고산서원> 정면 오른쪽 밑에 있는 3칸짜리 작고 아담한 고산정사는, 일직면 蘇湖里 출신 大山 李象靖이 60세에 지은 것이다.
<擇里志>에 "기름진 들을 끼고, 집에서 십리쯤 되거나 걸어서 한나절쯤 걸리는 곳에, 산수가 좋은 터를 마련하여, 생각날 때마다 그 곳에 가서 시름을 잊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은 자손대대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했으니, 고산정사가 이에 잘 부합되는 집이다.
이상정은 30세 때부터 암산계곡의 산수에 매료되어, 그가 57세 때에 미천변에 집을 지었으나, 물이 너무 가깝고 바람이 많아, 3년 뒤에 언덕 중간쯤 되는 지금의 위치로 고산정사를 移建하였다.
고산정사터가 지니는 가치는 對壁臨流의 지세에 있다.
대산이라는 그의 아호도 생가 晩修齋가 있는 大石山에서 따왔다.
그의 풍수관은 그의 '高山七曲詩記'에 나타나 있는데, 그 중에서도 '晩對巖'과 '光影潭'은 누구나 歲寒臺에 앉아 그 뜻을 한번 음미해 볼만하다.
半面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차가운 공기에 기대서서
석양빛이 어른어른하니 元氣가 서려 있네
뜬구름 오나가나 관계치 않고
짙푸른 그 한 빛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구나
(晩對巖)
해맑은 한 빛이 티끌 하나 없는 것은
새어나는 넓은 근원 끊임없이 솟기 때문이라
삼라만상이 眞體만이 맑으리라
푸른 허공 차가운 달이 밤 깊은 데 비췄더라.
(光影潭)
■ 울진 12령
"울진 유일의 내륙통로로, 울진-봉화장을 오가는 보부상이 단골이고, 군수, 과거보는 선비, 양반들도 넘던 길."
보부상은 '행상' '선질꾼'이라고도 하고, '바지게꾼(다리가 없는 바지게를 지고 다녔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지고 가는 물건은 주로 소금·미역·생선 등 해산물이었다.
울진 부구초등학교(북면 부구리, 면소 옆) 교사 김경하(42, 백두대간 식물탐사회)
'12령'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울진과 봉화 사이의 높은 12개의 영'이라는 뜻이며, 울진의 울진장·흥부장, 봉화의 내성장·춘양장을 3일 밤낮을 걸은 약 150이 길이다. 울진에서 바릿재→새재→느삼밭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 봉화땅에 들어 고채비재→멧재→배나들재→노루재 등으로 이어진다.
보부상 집결지---북면 두천1리 바깥말래
권택경(40, 태백한마음산락회 등반대장)·김경하 동행.
낙동정맥인 한나무재로 오르는 임도길.
<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 <乃城行商接長鄭韓祚不忘碑>--철비, 乃城 出身, 1910년대 생존인,
반수--회장격, 접장--부회장격
두천리→발재→새재→대광천까지 9.2km, 3;30 소요. 여기서 후곡동 버스길까지 5km,
불망비 비각 앞 출발
박장성(67) 비각 위치 안내.
"바지게꾼은 미역 소금을 싣고 내성장까지 가는데, 10명∼20명 모여 출발했다. 해방 뒤부터는 안다녔다. 비각 앞으로 난 길이 12령 가는 길이다. 너불한재 넘으면 發現洞인데, 폐가 1채가 있고, 바린재(발재)가 바로 보인다. 재에는 당집도 있다. 그 다음은 무인지경. 성황당 보수공사하는 데가 새재이다. 여기서 새재 넘어 대광천마을까지 족히 3시간이 걸린다."
왼쪽 언덕을 오르면 효자각이 있고, 이곳에서 등성이를 따라간다.
*길은 효자각 언덕에서 등성이를 타고 희미하게 이어지다, 임도와 합쳐진다. 멀리 고갯마루에 선 당나무와 당집이 보였다. 저것이 벌재다. 발현동에 왔다.
버스가 다닐 수 있는 임도에 도착하면 이곳이 발현동이다.
당집이 선 발재가 보이고, 마을에는 폐가 1채가 있다.
발재 마루에서 10분 내려가면 간이창고가 있고, 이 12령골 합수점에서 1시간 반 가량이 <옛길의 백미구간>
*발재에서 임도로 10분 가면 간이창고가 있는 곳에서 12령골이 합류한다. 12령골 상류 계곡을 따라간다. 길은 펑탄하고 순하고 부드럽다. 1시간 반. 찬물내기를 지날 즈음, 곧은 길이 U자형으로 돈다. 옛길과 작별하고 가파른 임도가 시작된다. 고도가 순간에 높아져 골짝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대광천상류까지 간다.
길이 U자로 급선회하는 곳에서 10분 오르면 왼쪽으로 새재 성황사로 오르는 옛길이 있다. 성황사까지 10분, 새재에서 소광리 대광천마을까지 40분. 길이 넓고 좋다.
등성이를 따라간다. 임도에 도착하면, 여기가 <발현동>이다. 당집이
*왼쪽에 새재로 오르는 옛길이 있다. 나무다리(99년 10월부터 70일간 울진군청에서 새재 성황당복원공사를 할 때 목재운반을 위해 만든 것).
*새재(12령의 중심고개)까지는 10분 거리. 길이 가파르고 좁다.
*성황당 <鳥嶺城隍祠> 현판
임경희(영남대 교수)는, 1868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에 근거해 <城隍祠>의 역사를 150년 정도로 추정.
*12령 바지게꾼 노래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후렴)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한평생을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대마 담배 곡식 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평생의 내 지겐가.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노.
*대광천을 따라 후곡동 남의석 민박집. 소광리의 500년생 황장소나무,
*보행 5시간 소요.
버들강아지에 물이 올라 살결이 고운 은빛이다. 계곡에는 눈과 얼음이 엉켜 있었으나 얼음 밑을 흐르는 물소리는 무거운 겨울 옷을 벗어버리고 경쾌하게 흐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봄이 오고 있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산골은 평화로왔다. 계곡은 사이좋게 이어져 가다가 오른쪽으로 굽이돌아 올라 갔다. 적막한 산행은 3시간이 걸렸다.
▲ 교통편
울진→두천리행 시내버스 군청 앞에서 6;20, 11;00, 13;30, 16;30, 18;10.
울진→소광리(후곡동 경유 소광분교 종점) 터미널 앞에서 8;00, 17;00.
울진버스 0565-783-4141
▲ 울진 명소, 성류굴, 불영사계곡, 백암온천, 덕구온천, 덕구계곡, 불영사, 월송정, 망양정, 자연휴양림(구수곡, 통고산)
■ 漆谷 西來山 望月寺
칠곡군 지천면 달서동 소재. 15년 전만해고 폐사 직전. 동진스님의 원력.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말고 직접 달을 보라.
망월사 6개의 달, 하늘의 달, 洛花潭에 뜬 달, 너의 마음에 간직한 달, 나의 마음에간직한 달, 너의 찻잔에 뜬 달, 나의 찻잔에 뜬 달.
장군바위 전설---후삼국의 왕건은 견훤과의 팔공산전투에서 패하여 앞산방면으로 피신, 은적사, 안일사, 임휴사에서 몸을 숨겼다. 견훤은 한양으로 가던 도중 망월사 근처를 지나가다가 마을 입구의 큰 바위의 좁은 돌문이 행군을 막자, 주먹으로 바위를 날리니 두 조각이 나서 뒷산에 떨어졌는데, 그 흔적이 있다. 이것이 장군바위이다.
낙화담 전설---임진전쟁 때 왜병의 온갖 행패에 쫓긴 현풍곽씨 모녀가 이곳 절벽에 몸을 던졌는데 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표지석을 세웠다.
대웅전, ㄱ자 요사채, 원광선원. 고즈넉한 사찰분위기, 현 당우는 처음의 자리에서 아래이다.
望月연밭---백련과 홍련은 경북 유일.
心月孤圓 마음 속의 달이 홀로 둥글고
光呑萬象---그 달빛 삼라만상을 삼켜버리네.
光境俱亡---경계가 없는 빛
復(부)是何物---이것이 또한 무엇인가?
경허의 임종시 시
달을 바라보며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둥글고 밝은 부처님의 씨앗을 싹틔우기 위하여 망월사는 늘 언제나 그곳에서 흡족한 풍경을 담고 환하게 미소짓고 있다.
팔달교--보건전문대학--신동초등학교에서 우회전--망월사
중앙고속도 칠곡인터체인지 지나 신동초등학교에서 좌회전--망월사
0545-972-2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