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희망 을 포기 하지 않는 한
희망은 결코 나를 외면하지 않는다 (자서전)
독한 고독 (시집)
나 오창선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삼천포로 빠지는게 주특기다
지독히도 공부하고 담을 쌓아가며 멀리 했던 학창시절
용문시장 입구 작은 기차길 터널 입구에서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뚜렷하게 무얼하고 있는 일도 없이 배회 하고 있는 장면을
딱 목 격 하셨다
(지금 100세이신 최부월 어머니께 붙들려
칫솔처럼 생긴 커다란 빗자루 ~
손으로 잡는 부분이 회초리가 되어
밤이 꼬박 샐때까지도 잘못 했다고 빌지 않았다
빗자루는
나의 조그만 두다리(종아리)를 벌것게 달구곤 생명을 다해 부러졌다
누이들이 안스러운지 메달리며
아낌아 잘못 했다고 빌어라를 끝없이 들으며 어머니가 항복 할때까지 맞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미련한 것 이었는지 공부에 전혀 뜻이 없어서 인지
똥고집이 쎄서인지
평생을 고민(숙제) 해봐도 답을 못찾고 있다
그 이후로
학교만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책가방 벗어 던지고...
두블럭지나 골목길(지금은 효창공원역이 되었다)에 나의 우정회 벗 마리아 !
(현재 청파동 숙명여자대학 입구
이리오너라주점 주인장 김용실~서양화 작가 오창선 작품 보러 왔다고
이름대면 안주 서비스 무한제공 막~ 퍼준다 김사장님을 알고 아지트로 삼아 비즈니스 하면 대박나지요)
연탄가게 옆 만화독서실에서 광팬으로
보고 또보고 외다싶을 정도로
결석 한 번 안하고 초등학교를 망가친구가 절친이었다)
이제야 철이 드려나?
30년을 제대로 휴가도 못챙기는 직업에 헌신하며 대통령 훈장을. 받고
지금도 ~
꿈 속에서 가위에 눌~ 려 잠을 깨야해야 했던 트러우마 같은
젤로 힘든 직업을 30년 채우고 54세에 명예퇴직후
2년 정도 뚜렷한 무엇을 하는 것도 없이 산에도 가봤다 TV도 보았다
낮에는 정치 정치 정치 청문회 청문회가 TV로 중계되었다
그걸 보며 하루를 지나다 보면 왜 이렇게 사는가 ?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
시간은 멈춤없이 어떤 싱크홀로 빠져드는 것 같이 빠른 속도로 흘러
인연의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렇게 고민하며 시간은 흘렀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왔음에도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인터넷이 처음 나와 그때만 제대로 공부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IT왕국이라는 이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성공을 했을 거라는 그런 생각이 밀려 왔다 밀려간다
천만인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누이 명지여중때 우리집에서 일박이일 시험준비를 하던
강경숙 누님 추천 으로 무역회사 5명 응시 ~서울 소공동 센타빌딩 16층 정우실업 직장을 다녔다
조그만 무역회사지만 일본을 주 무대로 봉제 봉제 수출을 하며 성장을 거듭하였 던 그런 회사였다
성적이 부진 하였는지 군포 공장으로 경리과로 발령 받아 새벽 6시에 집을 나와
남영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며 군포 공장으로 5개월정도 출근하였다
이당시에 내또래 최 양근씨 후에 연락이 되어 러브래터를 보냈으나 시집 갔다는 사연
그시절 입사1년이 안지났다고 휴가도 없다 하시던
이충선 경리부장님은 권오성 대리님에게 휴가비르5천원인지 1만원인지 주고 3일 정도 휴가를 보내주셨다
내 월급이 10만원으로 기억된다
이때 재수를 하던 형남신 친구에게 휴가비 받았으니 부산 가자 하여
둘이 여행을 하였다
그러다 이 친구가 궁금하여 수소문 끝에 찾았는데 내가 별볼일 없어서인지 연락이 끈겼다
고의로 끈지는 않았다는 생각이다
조성복씨와 경리일을 보던때 007가방에 현금 8천만원을 들고 공장으로 월급을 주러 갔던 일이 생각난다
평생 잊지 못할것 같다 조금이라도 나쁜 마음을 가졌던가 날치기라도 당했다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하는 공상을 많이 해봤다
입사동기였던 무역부 이응희씨가 더 좋은 자리로 이직을 하고
경리과 년말정산한다고 경리부 직원들과 모텔을 빌려 합숙을 하던 일도 생각난다
아침 일찍 나와 일본어를 일본어 회화를 공부하자고 58년 개띠 대동상고 최철환씨는 그런 제안을 했다
공부가 수준미달인 나로써는 그시간이 젤로 힘들었다
열심히 아주 열심히 했었더라면 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아 그리고 덕수상고입사동기 조성복 친구가 생각난다
내가 전에 30년 직장을 다니면서 교통사고가 나서 집근처 성민 병원에 4, 5개월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찮게 조성복 친구가 그전에는 증권회사에 다녔었는데 나중에 우리 집 앞에는 아 무슨 증권회사는 증권회사이었는데 지점장으로 계셨던 곳이다
성민 병원에서 퇴원 할 때 조성복 친구의 도움으로 병원비중 식비를 많이 깎아 주셨다
역시 인연이란 이러한 이렇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며 사는가 보다
나는 그분한테 많은 도움을 받고 잊고 살았네 아 지금이라도 전화 한번 해서 식사라도 점심 식사라도 대접해야겠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조성복 친구 친구야 절실히 미안하다
나도 고윤선생님처럼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이친구들도 나의 역사의 증인이니 나오겠네
우리 최철환 하하하 보고싶어요 상계동 집에서 테니스를 가르쳐 주시고
동갑이면서 1년 회사 선배이신 잘나가던 유망주 였으니 그명성이 대단 할 것이라 믿는데
페북에서 열심히 친구찾기를 해봐도 동명이인과 정보제공을 하지 않아 찾기 어렵다
외환은행 관세환급팀 거래처 초청 남이섬 여행도 괜찮았는데
이름도 모르고 빗바랜 흑백사진 한장 기억을 더듬는다
최철환씨 이응희씨 지금 어디 계실까....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금의 나는 그렇게 공부를 안 한 탓으로
나의 머릿속은 무궁무진한 창조력을 응용할 수 있는 그러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런 생각에 너무나도 감사함이다
요일에 상관없이 금쪽같은 시간 그림에 폭 빠져 그림에 미쳤다는 금요 미친회 결성
현재 인천수요사생회 장귀분 선생님 이순옥 선생님 고맙습니다
입회하고 사생다니고 미친회에서 시간 보내고 그림실력 빵빵하게 늘었고
이모든것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또 그분들과 만나 또 김연자 선생님을 만나고
주 진승 목사님을 또 만나고 주진승 선생님 감사합니다
매번 자가용을 혼자 타고 백운역압 부평아트센터를 그냥 가셨을 텐데도 불구하고
저희 아파트 입구까지 오셔서 저를 태우고 또 돌아올 적에는 꼭 태워서 저희 문 앞에 데려다 놓으셨던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아 목사님 당신은 위대한 목회자이십니다 존경합니다
명품 가방을 선뜻 선물로 주시던 계양미협공모전에서 입선 특선을 휩쓴 김종임선생님
이러한 분들이 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착실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무궁무진한 잠재력으로
기회는 문을 두드려 주었다
요일에 상관없이 눈만 뜨면 그림생각에 미친다
대우주의 그 공간을 주 예수 그리스도 님께서 저에게 희망의 달란트를 선듯 내주셨습니다
제가 미사 시간에 성체를 모시면서 주님께 고백하였지요
주님 !
제가 그림으로써 그림으로써 성장을 하며
이웃들과 나눔을 실천 할 수 있는 그러한 화가가 되게 해 주십시오
매주 반복적으로 성체를 모시면서
그러한 나의 희망 사항을 주님께 기도 드린 후 그러한 응답이 지금 펼쳐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말로만 감사해서 죄송합니다 분명 실천할 날이 올 것이다 믿습니다
개인전도 일년에 두 번씩이나 열었다는 은총의 선물과 자부심이 큽니다
지금 고윤 선생님 출판기념회 회자 하면서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감격스러운 나를 발견하는 듯합니다
부평구 주민센터 김인자선생님 수채화 입문반에서
2년간 취미삼아 입문한것이 큰밑거름이 되어 감사드립니다
북구 도서관 윤주철교수님을 만나서 인연의 탑을쌓고 안효숙선생님께 수업도 받고
캘리그라피도 배우고 부평구 여성문화원 정준식선생님 수채화 수업 간석동 여성 문화원 연필 인물화등등
아주 재밌었었습니다
2015년 인천미협 수요사생회 이순옥샘 장귀분샘 추천으로사생회원이 되었지요
그해 여름에는 대이작도 섬기행 전이 있어 대이작도까지 배를 타고 두어 두어 시간을지나 그 배에서 또 다른 애들을 내려 주고 또 두어시간을 또 가서 다른 다른 이들을 내려 주고 그렇게 한 4시간 정도를 배를 타고 이동을 하며 대이작도 섬에 도착 하였지요
그 당시에 서화옥 쌤을 만났는데 쫄망쫄망 배가 흔들거리다 보니까 작은 키에 그만 난 간을 잘못 짚어서 자빠져 넘어져
팔인지 어딘지를 다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한참 시간이 흘러 나보고 보증 좀 서둘러서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는 야 그래서 했다고 했습니다 그 답례로 점심을 한번 얻어 먹은 기억이 나네요
미협선거에서 지회장이 바뀌어 수요사생화는 희비가 엇갈려 독립을 하고 지금 나는 인천수요사생회 총무로 있다
미협사생회는 전봉선샘이 수요사생회를 2년간 성장 시키며
고문으로 자리를 옮기고 산주항샘이 운영위원정을 하며 인천미협사생작가회로 역사를 바꾸었다
제1회 서울 인사동 갤러리 화인에서 개인전(몽골 기행)
인천 중구청 앞 인천수요사생회 운영위원 이진우샘 추천으로 갤러리 서니 구럭부에서
제2회 개인전 박서니관장
이제는 억만금을 주어도 예전직장에서 일하기 싫다
두달만 더 다녔으면 400만원 정도의 성과금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두 달만 버티면은 아 두 달만 버티면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나의 온 육체와 정신을 쏟아 부었다 꺼져가는 촛불 인질 꺼져가는 다 촛불이 다 되어 꺼져 가는 줄도 모르고 심지 바닥까지 끌어 쓰는 그러한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잎나와ㅛ을텐뎊 포기했다
앞으롳내가 어떠한ㅍ인생을ㅊ살자 모르지만ㅍ성과금ㅊ쫏다 반신불수가 돨것ㅊ같은아찔한 순간이 내일을 스쳤다은
절대로 그 길로 돌아가기 싫어 400만 원의 고금을 포기한 채 명태라는 힘든 결정을 해야 했다 두 번씩이나 명태 서약을 처리하면서 이대로는 내 의지대로 퇴직을 못 할 것 같아 1번 마지막 엔터를 누르면은 전혀 돌아가 처리를 할 수 없는 그 시간에 찾아가 서약을 했다
내 인생 바늘 반 남은 시간을 그림에 매진하고 싶다 이래 개인전을 하면 생각이 달라지고 그림도 달라진다고 지은이 말씀이 생각난다 참 맞는 거 같다 내가 어찌 이렇게 대가가 됐을 줄은 전혀 몰랐어 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그림을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다 보니 참 좋은 사람들만 만나 현재희이 길은 너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어 준다 k 화우는 나에게 영감을 주며 내가 가는 길에 채찍질이 태워 주어 참 고맙다
절댚그길 로 돌아가기 싫어
그림에 조금 맞닥드렾산다
고유 선생님 그림 전시 작품 어려워
작품집 갖고 와 봐야 책장에 홀로 남겨질 것 같아
저서 두 권을 보듬어 갖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