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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검정고시인 수기집 제1집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선택 중에서 전재한 것입니다.
이 풍요의 시대에 한 바보를 위한 고찰 조 현 정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비트 컴퓨터 조현정 사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미리 알아두었던 정보들이 마치 살아 있는 앙금처럼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일정의 당혹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학 3학년 때 컴퓨터 회사를 설립했는데 중학교를 중퇴한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점, 그는 매일 17시간씩 컴퓨터와 씨름을 하며 그의 회사는 매년 100%의 성장을 한다는 것, 치과의사인 부안과 그는 고소득자이면서 아직 3천만 원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다는 점 등은 마치 수수께끼처럼 선뜻 감이 접히지 않았다. 굉장한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앞선다. 그러나 그를 직접 만나모면 밝고 명랑하게 웃는 청신상에 우선 놀라게 된다. 처음의 당혹감은 해소되지 않고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그 당혹감은 그와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엔 오히려 엄청난 감동과 총격을 몰고 오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먼저 밝혀둔다. 그 감동과 충격의 파노라마는 그 회사의 응접실 탁자 밑에 있는 어느 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유명한 정신과 의사와 분석한 인간 조현정 조현정(32세) - 첨단산업의 기수, 서울 실리콘 벨의 주역, 학생 사장, 예비 재벌, 컴퓨터에 미친 사람, 독학의 신데렐라, ……매스컴의 경탄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이건 과정이 아니다. 국졸 학력에 전파성 심부름꾼으로 출발한 그가 대학 재학 중에 이미 컴퓨터 회사를 설립, 연간 수억을 번다니 말이다. 끼니를 이을 수 없었던 맨 주먹의 그에게 오늘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매스컴은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중략) 연구를 하다 보면 방을 새는 건 흔히 있는 일. 문득 창문을 내다보면 밖은 훤하다. 한데 저녁인지 새벽인지 구별이 안 된다. 그의 이런 생활은 의젓한 사장이 된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 지난여름 연구를 하다 말고 갑자기 외출할 일이 있어 나갔는데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나간 게 겨울옷이었다. 그것도 나중에 친구가 미친놈이라고 어깨를 흔드는 통에 알아차린 것이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던 건 물론이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ㄲ지 전혀 더운 줄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 선현들은 삼매의 경지라고 불러왔다. 심리학에선 플로(flow)라고 하여 일하는 기쁨의 극치를 일컫는다. 조현정씨의 오늘에의 비결은 이거다. 시대를 잘 타고 났느니, 손재주, 열심히, 거기다 운까지……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ꡐflowꡑ의 경지에 빠져드는 데 잇다. 시간의 흐름, 배고픔도 잊고 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을 때, 문득 창문을 열면 날이 새고, 그제야 시장하단 기분을 느끼는 순간…… 그 황홀한 기분은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상은 고려병원 신경정신과 의사인 이시형씨의 저서「내성적인 사람이 강하다」에서 분석되는 ꡐ인간 조현정ꡑ의 일부부이다. 내성적 성격의 가장 성공한 사례로 조현정씨가 나오게 된 것. 단돈 4백50만원으로 대학생이 회사 설립 겉으로 보면 그는 소프트웨어 중소업체인ꡐ비트 컴퓨터ꡑ의 나이 서른 두 살의 사장이면서 미국 컴퓨터 업계의 억만장자 빌 게이츠에게 도전장으로 낸 야심에 찬 사업가, 일견 평범해 보이는 엘리트 한국 청년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삶의 여정을 알게 되면 이 정도의 수식어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의 한계를 극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의 차원을 넘어서 그에게는 섬뜩한 천재성과 비범함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인하공대 3학년 때인 83년, 단돈 4백50만원을 가지고 ꡐ비트 컴퓨터ꡑ란 조그만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 8년 만에 국내 6백여 개 소프트웨어 업체 중 11위의 회사로 급부상시켰다. 중기소기업 중에서 단연 1위다. 연간 매출액이 22억 3천만인데 금년은 24억원의 목표를 너끈하게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을 정도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업체가 사라자고 탄생하는 소프트웨어 업체 계에서 ꡐ비트 컴퓨터ꡑ의 성공은 하나의 신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유기와 히데키는 천재의 자질로서, 선천적으로 타고난 예민한 감각과 엄청난 에너지의 집중력을 들고 있는데 그의 소프트웨어는 모두 위의 두 가지 요소로 잉태된 작품들이다. 따라서 당연히 그와 비트 컴퓨터 60명의 직원들이 만들어진 작품에는 ꡐ최고ꡑ 아니면ꡐ최초ꡑ라는 수식어가 붙어 된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에 기여한 비트 컴퓨터 그는 83년 8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의료보험 청구요 소프트웨어 개발에 성공했다. 그때까지는 병원에서 까다로운 의료보험 청구서 작성을 일일이 손으로 해왔다. 이를 간단히 처리해주는 프로그램을 2개월 만에 만들어낸 것이다. 그 당시 한 병원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이 프로그램은 타 회사 제품보다 프로그램의 수월한 디자인, 출력의 다양성 같은 질적 수준에서 앞서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190만 원짜리 8비트 ꡐ애플 컴퓨터ꡑ한대와 월세 25만원에 전세 보증금 250만원의 석관동 사무실을 얻고 동생과, 채용한 여직원 등 세 명으로 출범한 ꡐ비트 컴퓨터ꡑ는 이 병원용 프로그램의 선풍적 인기에 힘입어 일대 도약기에 접어들게 된다.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난 돈을 벌제 된 것이다. 그 후 종합병원의 종합 관리용 소프트웨어를 개발 보급함으로써 종합병원이 순수 국내 소프트웨어 기술로 전산화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성공이었다. 그 결과 84년에 접어들어서는 전국의 572개 종합병원 가운데 전산화를 이룩한 140여 곳 중의 65개 병원이 그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게 됐다. 92년도에 들어서서는 83개로 거래처가 늘었다. 이 소프트웨어는 기존의 대형시스템을 이용하여 전산화하던 업무를 소형시스템으로 전화하여 전신화 경비 절간을 유도한 것이다. 86년 4월부터는 각종 인터페이스(INTER FACE)를 개발했다. 이는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여 사람이 직접 지시하던 각종 상황을 각 위치의 감지기를 통해 컴퓨터가 지시할 수 있도록 하는 자동음성출역장치(V. A. System)를 말하는 것으로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 포항제철에서 현재 사용 중에 있다. 또 수입 불가능한 항공 조명탄 측정정비를 국산화했는데, 이를 삼양화학에서 사용 중에 있으며, PCB부품 자동삽입기의 자동제어부 컨트롤러와 소프트웨어를 완전 국산화하여 금성, 산성전자의 조립라인에 납품을 했다. 그리고 피부 자동분석기를 개발, 현재 각 화장품 회사에서 판촉 물로 쓰이게 했다. 최근에는 배우기 어려운 C랭귀지를 쉽고 빠르게 배우게 하는 교육용 랭귀지를 1년 6개월 동안 1억을 투입한 끝에 국내 최초로 개발했는데 90% 정도를 수출할 예정에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독창적 서오가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서울 올림픽의 성공에 그가 묵직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그는 전국에서 방어진 성화 봉송의 관리전산화 작업을 위해 소프트웨어와 소요 경비 4천만 원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 무상 제공했다는 것. ꡐ공인(公人)역할 제도로 하라ꡑ는 꾸중 듣기도 사실 그처럼 매스컴을 많이 탄 기겁가도 드물다. 83년 학생사장이 되고 매년 100% 이상의 성장을 거듭할 따는 평균 한달에 한번 꼴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구의 성가 역시 높다. 91년 1월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의 인터뷰를 싣고 그를 ꡐ한국의 떠오르는 별ꡑ이라고 극찬했다. 92년 1월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각국 정치지도자의 토론 프로그램의 중간 테마인 ꡐ아시아의 젊은이ꡑ에 나오기도 했으며 「아래아」라는 잡지에서는 그에 관한 특집기사를 다르기도 했다. 매스컴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기업이나 대학교에서 초청을 받아 자신의 성공담을 들려주기도 하는 등 유명인사가 됐지만 그는 어린 소년처럼 겸손하기만 하다. ꡒ저한테 성공 비결이 따로 있겠습니다. 열심히 했을 뿐이지요. 그저 너무 앞 뒤 계산하지 않고 한 우물을 파왔습니다. 어떤 분야든지 성공하기 위해서는 손해를 좀 보더라도 꾸준히 파고드는 장인정신(匠人情神)이 필요하지요.ꡓ 어리석게도 자신의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는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ꡒ몇 년 동안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기자 분들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당신은 공인의 역할을 해야 한다. 당신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를 피한다면 공안으로서 직무유기라는 것이었어요. 그 얘기를 듣고는 고민을 무척 했습니다. 지금은 특히 학생 잡지의 인터뷰는 꼭 응합니다. 제가 후배들의 귀감이 된다면 그들에게 좋은 얘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유명세 덕택에 업무와 관계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에게 경영수완이나 소프트웨어 기술의 비법을 구하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무작정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어려웠던 과거를 매스컴을 통해 알고 있는 그들은 장문의 편지를 먼저 ㄸ띄운 뒤, 동경심을 기대하고 찾아온다는 것, 주로 출옥 후 작업이 없는 전과자가 많은데 이런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아주 당호하다.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설득을 할 때도 있고 사지가 멀쩡하면 꾸짖어 보낸다. ꡒ한번은 어느 섬에서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청년이 찾아왔어요. 그는 매년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문학도였는데, 형편이 어려우니 작가가 될 때 까지만 도와달라는 것이었어요. 제가 그랬지요. 정상정복은 하나하나씩 계단을 밟듯 올라야 가능하다. 내가 볼 때는 당신의 처지에서 1년에 한번 뽑는 신춘문예는 무리다. 그보다는 당신 주위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더 보람된 일이라고 애기해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결국 되돌아갔습니다.ꡓ 사원전용 술집을 마련한 사장 거의 IQ가 143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ꡐ비트 컴퓨터ꡑ의 성공은 따지고 보면 조사장 개인의 극성스러울 정도의 집념과 노력의 결과이다. 그의 집중력은 가히 초현실적이다. 그는 창사 이래로 매일 17시간을 일에만 몰두했다. 이는 보통사람 두 배에 해당하는 사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는 상황이지만 요즘도 방 10시까지 혼자 회사에 남아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다. 그의 가장 즐거운 추억은 청량리 매머드 호텔(?)의 시절이었다. 일을 가장 열심히 했기 때문, 석관동의 좁은 사무실에서 청량리 맘모스 호텔의 25편짜리. 스위트룸을 보증금 6백 원, 월세 60만원에 빌렸던 83년 말, 그는 10여명의 직원과 2년 반 동안을 그곳에서 보냈다. 잠자고 식사하는 시간을 빼고는 두문불출, 하루 종일 연구에만 매달렸다. 부하직원 중에는 출퇴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마침 여직원이 없어, 팬티만 한 장 걸친 채 그곳에서 살았다. 주위에서는 그가 미치지나 낳을 까 걱정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좋아한다. 직원들에게도 관대하기 그지없다. 비트 컴퓨터(역삼동) 앞에 잇는 맥주 집 알펜호프는 이 회사의 직원들에게 공짜로 술을 제공하고 있다. 그가 직원들의 휴식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안주 값을 제외한 모든 술값을 회사 앞으로 달아놓게 한 것이다. 안보는 데서는 나라님 흉도 보는데 사원들이 사장 욕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하는 그는 그러나 앞으로는 개개인 부하 직원들과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군기(?)를 잡을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하면서도 회사 경영상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는 고된 일도 도맡아 한다. 어려웠던 초창기, 회사의 담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은행이 돈이 빌려주기는 만무, 하지만 ㄱ는 문을 끈질 게게 두드리는 도전자세와 성실성으로 밀어붙였다. 은행은 담보 없이도 최고 2천만 원까지 대출을 해주는데 그는 이 제도를 충분히 이용, 적은 금액이라도 제 날짜에 되갚아 은행으로부터 신용을 쌓아갔던 것, 무거래 은행에 찾아가 자신의 가능성을 담보로 대출을 요구했던 적도 부지기수. 그렇게 빠듯한 상황 속에서도 그가 매스컴을 타기 시작하자 은행 쪽에서 먼저 자기네 돈을 갖다 쓰라고 연락이 오는 경우도 생겨낫다 이 같은 신용으로 지금은 담보 없이 신용만으로 대출을 해주는 ꡐ신용보증기금ꡑ에서 3억 5천만의, 거래 은행에서 3억 원 정도의 돈을 대출받았으며, 최근에는 상공부로부터 연리 6%의 저금리로 1억 2천5백만 원을 빌릴 수 있었다. ꡒ사업을 한다는 사람들 증에서도 가끔 어린애 같은 사람들을 봅니다. 이 사회가 제도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어 때문에 돈 빌리기도 어렵고 회사경영이 어렵다는 거예요.ꡓ 그는 우리 사회가 보통 애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매몰차지는 않으며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모든 어려움은 극복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세계 소프트웨어 산업의 석권을 꿈꾸는 조현정 사장. 그는 지역감정 해소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한 화사의 경영주가 어느 지방 출신이냐에 따라 구성원의 자방ㅅㄱ이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우리나라 가업의 일반적인 풍토이다. 하지만 경남 김해 출신의 그가 오너로 잇는 비트 컴퓨터에는 호남 출신의 사원이 가장 큼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모두 조사장이 직접 면접을 통해 선발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좁은 땅에서도 사람들을 편견으로 발보고 가려야 한다면 세계시장 제패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와 치과의사인 그이 부인이 아직 검소하다 못해 초라한(?) 3천만 원짜리 전셋집에 눌러 산다는 것이 어떤 집이든지 당장 살구 있을 정도로 고소득자인 그들 내외는 집의 소유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 집주인은 그에게 전셋값 올려달라는 에기를 아직껏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집수리나 페인트칠은 당연히 주인이 할 일이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집중인인 양 먼저 나서는 바람에 진짜(?) 집주인도 별도리가 없다는 것. 약 25만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 페인트칠이지만 주인이 입장에서 보면 고마운 마음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사가 세 들어 있는 역삼동의 월세 4백만 원짜리 4층 건물에도 그는 똑같은 정성을 들인다. 정기적인 유리창 청소는 물로ㄴ, 베란다에 나무를 심는 데 드는 비용까지 그가 부담을 한다. 이런 정성을 보이는 그에게 그 빌딩 주인은 월세를 받겠다고 나오지 못한다는 것. 공부보다는 라디오 고치기를 좋아했던 소년 그는 1957년 8월 13일 경상남도 김해에서 부농인 아버지의 3남 4년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자유당 시절에 정치에 뜻을 두고 있던 재사(才士)로서 직선제로 선출하는 면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고 있던 지방 유지였다. 그런 아버지는 소년 조현정이 초등학교 입학한 지 몇 달 지나기 않아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8세에 벌써 고난의 운명은 시작이 되었다. 선대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풍요한 재산은 이미 관리소홀로 모래알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통적인 양반집 후손의 체통 때문에 집안사람들은 남에게 손을 내미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의 집안 살림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아버지가 국회위원 출마를 의식해 선심으로 지어준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는 아버지의 후광을 얻어 줄곧 우등상을 탔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한글을 몰랐을 정도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처럼 딱지, 구슬치기나 운동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시계나 라디오를 만지는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 남들은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낼 나이였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생계를 위해 무작정 상경을 해야 했다. 서울로 떠나기 며칠 전 담임선생님이 그를 불렀다. 등록금이며 하숙비를 자기가 댈 테니 서울로 떠나지 말라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IQ테스트에서 그가 전교에서 가장 높은 143점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딱딱하기만 한 학교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사실에서 우선 신이 났고 서울에서 어린 시절의 꿈, 멋진 기술자가 된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월급 3천원의 충무로 TV기술자 시절 71년 서울에 올라온 가족들은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는 충무로 전자상가에 취직을 했고 형은 전화국의 맨홀 작업반 시다로 들어갔다. 지금은 없어진 충무로의 30평짜리 전자제품 수리가게는 3층에 자리를 잡은, 종업원 두 명의 작은 규모였지만 그 당시에 기술만은 한국 최고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일하는 가게에는 대개 변두리나 동네 수리 점에서 해결이 안 되는 반 고물(?)의 TV나 녹음기가 들어 노는데 이를 고치려면 그만큼 고난도의 수리기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흑백 TV가 귀했고, 가전 3사에서는 애프터서비스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고장 난 TV나 녹음기가 많았고 고장 상태도 매우심하고 복잡 적이었다. 냉난방은 고사하고 환기조차 잘 안되는 열악한 작업환경이었지만 그는 충무로에서 일류면 한국에서도 일류가 된다는 가능성만 믿고 열심히 고쳤다. 하루 6~10대 정도의 TV를 고쳤다. 지금도 그의 손은 그때 입은 상처로 흉터투성이다. 월급 3천원이 3년 동안 오로지 않았지만 기술은 꾸준히 늘었다. 남한테 욕먹는 사람은 뒤말 말아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 터라 가게 주인이나 동료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았고 그런 악조건에서 유혹 당하기 쉬운 술과 담배는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이렇게 타고난 손재주에 피나는 노력까지 겸비하자 3년이 지난 후 그는 충무로 에서 자타가 공안 하는 일급 기술자가 되었다. 충무로 에서 일급 기술자의 자리를 확고히 하자 이번엔 좀더 나은 기술자, 엔지니어를 꿈꾸게 됐다. 그러자면 대학엘 가양 하는데 그에겐 중졸 자격도 없었다. 교통비가 없어 시험을 못 치르다. 고입 검정고시가 척 관문이었다. 73년 6월일 현충일에 시작한 공부. 시간은 꼭 83일박에 남지 않았다. 한여름 단칸방에서의 수험공부는 처절한 자기와의 투쟁이었다. 그 당시 이문동 38번 버스 종점에 위치한 집에는 그와 동생, 형, 어머니까지 모두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세평이 채 안 되는 집, 그나마 한쪽은 어머니의 삯바느질 작업 공간으로 써야 했다.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단열이 안 되어 있고 불록을 쌓아올린 날림 집이라 여름에는 몹시 더웠고 겨울에는 그 반대였다. 차라리 공부하기에는 방 박의 환경이 훨씬 더 좋았다. 거기서 그는 비장한 각오로 공부를 시작했다. 책상이 있을 리 없었고 교과서나 참고서를 구하기 위해서는 청계천 헌 책방을 뒤져야 했다. 일주일에 한번, 근처에 잇는 외삼촌 집에 장학퀴즈 보러 가는 때가 유일한 외출시간이었다. 너무 땀을 흘리는 데다 잘 씻지도 못하는 바람에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했다. 엉덩이는 짓무르다 못해 종가가 생겨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기는 점점 더 악하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그에게 주었지만 그렇다고 그흔한 연고를 사 바를 만 한 돈이 그의 집에는 없었다. 지금도 그에게는 종기로 생긴 생체 기가 거무스레 난아 있다. 8월의 불볕더위가 절정을 이룬 어느 날 오후, 그의 의자가 시험 당하는 사건이 생겼다. 공부 도중에 그가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웬 요란한 소리에 귀가 솔깃했다. 이웃 사람들이 격렬한 싸움판을 벌이는 소리. 그날만은 왠지 호기 신이 그를 유혹했다. 곧이어 갈등이 생겼다. 누구 싸울까. 구경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만약 저밖엔 나간다면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셈이 된다. 공부에만 집중하겠다는 당초 자신과의 약속을 자기 스스로 무너뜨리는 꼴이 된다. 결국 그는 발을 방에 그대로 두고 머리만 밖을 향해 내미는 자세를 취했다. ꡒ사소한 일로 볼 수도 잇지만 저에게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만약 변병을 만들어 밖으로 나갔다면 시험에 떨어졌을 테고 지금의 ꡐBITꡑ도 물론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ꡓ 그러나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그 당시엔 각 지방마다 검정고시 일시가 달랐는데 먼저 실시되는 경기도 검정고시에서 우선 몇 과목이라도 합격해두면 서울에서는 불합격된 나머지 과목과 시험 치면 되었다. 그러나 경기도 안양에서 실시하는 검정고시를 그는 볼 수가 없었다. 왜냐면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까지 갈 교통비가 없었고 이틀 정도의 숙식을 해결할 돈은 더욱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합격자 발표란 에서 이름을 확인한 순간 그는 쾌재를 불렀다. 정확히 83일 만에 중학교 과정을 끝낸 것이었다. 그것도 독학으로. 취미란 에 ꡐ공부ꡑ라고 적어 주위 사람들의 웃음을 시기도 이런 천신만고의 험로 끝에 그는 연합고사를 거쳐 서울 용문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당장 학비가 문제가 됐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그가 아니다. 충무로의 고난도 기술을 바탕으로 그는 독자적 모델의 소형 스포츠라디오를 제작하게 된다. 이 제품은 폭발적인 수요를 불러일으켰고 여기서 번 돈으로 학비를 충당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가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지금껏 으레, 바둑이 취미라고 둘러대지만 그의 진짜 취미는 공부였고 지금도 공부다. 입학 후 가정환경 설문지 취미란 에 ꡐ공부ꡑ라고 적어놓어 담임과 반 아이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을 정도.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ꡐ호로 자식ꡑ이라는 욕. 그는 이 열등감을 극복하는 처방으로 스스로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자기수혈(?)법을 개발했다. 자기의 좋은 점만을 찾았고 단점은 아예 무시해렸다. ꡐ손금ꡑ을 설명해놓은 책에는 ꡐ일자 손금ꡑ의 운명에 대해 극과 극이라고 씌어져있건만 그는 의도적으로 잘 되는 쪽만 여두에 두었다. 선천적으로 고막이 파열돼 한쪽 귀가 들리지 않은 거조차도 그에게는 길조가 됐다.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ꡐ인간의 굴레ꡑ를 거부했다. 그것은 다수의 좋아하는 것, 즉 객관적 선(善)을 추구하겠다는 가치관의 반영이었다. 그는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일기는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썼다. 자기 분석과 가차 없는 ꡐ자기비판ꡑ의 훈련 속에서, 남에게 지탄받지 않은 자의식을 형성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의 고등학교 일기장에는ꡐ넌 너무 이기적이야ꡑ, ꡐ선우후락(先憂後樂)ꡑ ꡐ주어진 것만 해서는 안 된다ꡑ, ꡐ나의 최선은 항상 110%ꡑ등의 어구로 가득 메워져 있다. 75년, 고등학교 2학년인 그는 또다시 새로운 저녁을 맞이했다. 형이 군대에 가게 되자 어머니는 부산 한복집 기술자로 내려갔고, 동생은 이모 집에 , 그는 어머니의 먼 촌수의 친척집에 맡겨졌다. 그 집에서 그는 중요한 인연의 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그와 동갑으로 훗날 국립의료원 안과 수련의로 있던 중, 자신의 동료 수련의와 그를 부부의 인연으로 연결시켜주게 되었던 것. 학교 아르바이트로 1년에 5백만 원을 벌어 인하대 전자공학과는 이제까지 손재주 뛰어난 충무로 기술자에 부과했던 그를 오늘날의 일약 컴퓨터 소프트웨어 업체의 총아로 변신케 한 모태가 되었다. 그 당시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프레시맨의 몸으로 지금은 인하대 총장으로 있는 원영무 교무차장을 무턱대고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지가의 기술을 이용해 학교에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대가로 학교를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장학금을 요구했던 것, 처음엔 정신이상이 아닌가 하고 상대해주지 않던 그 교수도 그가 살아온 과거며 장래 희망까지 캐묻고는 그의 패기에 감동, 쾌히 승낙했다. 교수의 연구실도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시계탑을 비롯해서 방사성 측정기까지 인하대학교에서 고장 난 모든 물건은 그때부터 그의 손을 거쳐 새 상품으로 되어 나왔다. ꡐ만능 기술자ꡑ,ꡐ마술의 손ꡑ이라는 별명으로 그의 애기가 온 학교에 퍼지자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전자제품 수리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수업을 전부 야간으로 돌려놓고 본격적인 아르바이트 사업(?)에 돌입했다. 이렇게 해서 버는 돈이 1년에 무려 5백만 원쯤 됐다. 그 당시 화폐가치로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720명이나 되는 전자공학과의 과회장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이미 3년 동안 사회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경험이 풍부한지라 나이 어린 동료나 후배들에게는 인생 상담을 해주었다. 동기 중에서는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타 대학 여학생들과 친분이 두터운 것을 이용, 축제 때 주최 측에서 쌍쌍파티 파트너를 제공(?)한다는 인하대의 전통에 따라 그는 수백 명의 여학생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나타나기도 했다. 한번은 과대표로서 무슨 일인지 권이혁 전서울대 총장 집을 방문했다가 TV를 수리해준 적도 있었다. 80년 초, 학교에 애플 컴퓨터가 들어온 것을 계기로 그는 처음으로 컴퓨터라는 실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초반에는 전자오락 게임으로 맛을 들이더니 결국엔 그 당시 교수도 못 가르치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 관한 외국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거금 40만원을 들여 부품을 구입, 아예 컴퓨터 한 대를 조립하는 극성을 부렸다. ꡐ비트 컴퓨터ꡑ가 세상에 첫선을 보인 날 그는 처음으로 눈물을 쏟았다.
한번 프로그램 짜는 묘미를 알자 그는 또 한번 컴퓨터에 미쳤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프로그램 작법에 관한 책 한권을 뗀 이후, 다른 어떤 책도 그에게는 필요 없었다. 왜냐하면 ꡐ프로그램ꡑ의 생명은 창의력과 독창성이었고 이것은 혼자 힘으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대에서도 컴퓨터만 생각했다. 대학 3학년, 서울 근교에서 방위 생활을 할 때쯤에는 이미 소프트웨어에 관한 한 도사가 되어 있었고 근무가 끝나는 시간이면 그의 야심에 찬 프로젝트, 컴퓨터회사 창업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83년 8월 15일 광복절, 오늘날의 ꡐBIT 컴퓨터ꡑ가 처음으로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비록 석관동의 어는 허술하고 좁은 사무실에 청계천제 190만 원짜리 컴퓨터와 직원이라고는 그와 컴퓨터 하구언에 다니던 동생, 그리고 공용한 여지구언 한명이 전부였지만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다 그가 지금의 아내인 치과의사를 만난 것은 86년 초, ꡐ비트 컴퓨터ꡑ는 날로 번창 일로를 걷고 있었고 그 또한 유능한 사업가로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의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알게 된 그 집 아들은 친한 친구가 됐고 자신이 안고 수련의로 근무하던 국립 의료원의 동료인 신현미 씨를 그에게 소개했던 것, 그녀는 경희대 의대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3년간의 치과 수련의 과정을 밝고 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 그 당시 나이는 26세로 구보다 두 살 아래였다. 아버지는 창원공단에 있는 망원경 제조업체 ꡐ신동광학ꡑ의 사장, 그녀는 2남 2년 중 둘째 딸이었다. 86년 3월 대학로, 처음 만났는데도 그들은 한 자리에서 여섯 시간을 함께 보냈을 정도로 인연이 닿았다. 그 후 세 번째 만났을 때 그는 프로포즈를 했다. 외모나 성격에서 그동안 지신의 아내로 그려오던 이상적인 여자를 만났는데 망설일 이유가 조금도 없었던 것. 7개월 후인 10월 9일 한글날에 그들은 홍릉의 예식장에서 그의 은사인 인하대 총장을 주례로 모시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는 이에 앞서 가톨릭 신자인 신부의 의견을 따라 성당에서 약식 결혼식 사진을 인쇄한 스크랩을 만들어 발송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려 주위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지금은 결혼생활 6년째로 5살, 6살의 아들을 두었다. 조사장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보통 밤 12시. 둘 다 신경을 많이 쓰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피곤한 내색을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때문에 밤늦도록 기다리게 될 아내가 안쓰러워서 일부러 힘든 직업을 가진 여자를 선택하려고 했었다는 그. ꡒ처음엔 몰랐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아내는 안경을 쓰고 있었어요.(웃음) 제 아내는 외모로나 성격으로나 어느 한군데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보통 여의사답지 않게 굉장히 겸손하지요. 집으로 갖고 오는 돈은 저보다 더 많아요.ꡓ 아기를 돌보며 같이 살고 있는 그이 장모는 사위 자랑이 대단하다. ꡒ겉으로 보기에는 깐깐하고 날카로운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질 않아요. 딸에나 아이들한테나 화내는 걸 한번 못 봤어요. 자상하고 온유하면서 도량이 넓은 성격이에요. 우리에겐 과분한 사위지요.ꡓ 공휴일이나 일요일에는 가족과 드라이브와 외식을 즐길 정도로 그는 가정적이다. ꡒ자기보다는 가족, 회사 직원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몸에 배었어요. 한번은 콘도미니엄 광고 우편물이 집에 왔는데 집에 왔는데 그걸 보더니 사원용 여름휴가 별장으로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혼자서 중얼거리더군요.ꡓ그의 성공의 뒤안길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다. 어려웠던 서울 생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밥을 해주고 그 밥을 아들이 남기면 들고 그렇지 않으면 끼니를 굶던 어머니, 쌀 살 돈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색을 전혀 안했다. 어머니는 현재 58세, 부산 국제시장에서 한복 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성공한 아들 삼형제가 서울에 모시고 싶어 해도 어머니는 항상 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내 힘으로 먹고살 수가 있는데 왜 자식들 신세를 지느냐고. 어머니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75년 부산 국제시자의 한복가게 종업원으로 들어가 월급을 받으며 지내다 독립, 지금은 광복동에 위치한 시장의 금싸라기땅 6평의 한복집 주인이 됐을 정도로 성공했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귀국, 스물한실의 나이로 아버지와 결혼, 삼형제를 낳았다. 그의 네 명의 누나는 아버지의 전처소생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비뚤어지기 쉬운 어린 아들의 교육을 위해 어머니는 아들 삼형제를 극진히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배다른 누나들에게도 친어머니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는 아버지와 말다툼 한번 안했다고 한다. 절대로 남에게 욕먹는 일을 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된다는 신조를 가졌던 어머니는 학교 공부를 등한시했던 그를 꾸짖는 대신, 오히려 격려함으로써 아들이 갖고 있는 독특한 능력을 이해하는 쪽이었다. 지극히 보통 사람으로서의 조현정 사장 위대한 사람 뒤에는 언제나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렇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의 성공에 결정적 요소를 적용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완벽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실패를 자초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의 성공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기실 며칠의 접촉을 통해한 인간의 진실을 전부 알 수도 없거니와 더욱이 성공의 비법을 캐내겠다는 시도는 자칫 상투적인 결론으로 끝날 위험이 있다. 여섯 시간의 인터뷰와 수차례에 걸친 확인 전화통화, 그리고 그의 성공을 정밀하게 분석해놓은 서적과 그간의 매스컴 보도 자료를 통해서도 머리에 남는 것은 생경스럽고 어마어마한 단어들뿐, 그의 성공을 실감나게 한마디로 끄집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그의 더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너무나 완벽하게 자기의 삶을 주도해온 그에게 일조의 무서움을 느꼈기 때문일까?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한글을 몰랐고, 아이큐는 143이었고, 교통비가 없어 시험 보러 가지 모했으며, 대학생으로서ꡐ미술의 손ꡑ이라고 할 만큼 손재주가 뛰어나고, 역시 대학생의 신분으로 컴퓨터회사를 차렸고, 하루 17시간을 컴퓨터와 씨름했으며, 돈 잘 버는 치과의사와결혼에 골인했고, 자기를 꼭 닮은 아들 둘까지 낳았다는 등등…….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런 정도의 고생과 그런 수준의 특별함은 또 찾으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그로부터 찾아내야만 한다. 이런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희소식(?)을 기대하고 장래 계획에 대한 취재상의 의례적인 질문 던졌다. ꡒ저의 꿈은 세계 최초의 민간 기술연구소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 대기업의 기술 연구는 방대한 조직의 속성상 비능률적이고 자금 소요도 큽니다. 이걸 전문적인 우리 연구소에서 하겠는 것입니다.ꡓ 그 말에서도 특별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나올 만한 애기였고 있을 만한 계획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실한 감을 잡겠다고 한 질문이 건강이었다. 성공하기 위해선 건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문(愚問)이었다. ꡒ하루 두 끼밖에 안 먹습니다. 병도 안 생겨요. 와일드한 걸 싫어하기 때문에 특별히 하는 운동도 없고…….ꡓ 이 대목에서는 자칫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 역시 보통 사람은 성공 할 자격이 없는구나. 절망과 덧없음이 동시에 교차하는 순간, 땀으로 멱을 감고 있던 기자는 지나가는 듯한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ꡒ……일이 노는 거예요. 재미있으니까요. 그렇게 않아요. 일 자체를 즐기니까 스트레스 받을 이유가 없죠. 결론적으로 보면 저는 그냥 재미있게 논 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아직까지 한번도 없었습니다.ꡓ 이거다. 이 정도라면. 뭔가 월척붕어 한 마리를 올린 낚시꾼처럼 가슴으로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는 일이 쾌락이었고 노는 것이었다. 일이 삶의 본질이었으며 모든 것이었다. 에어컨 시설이 없어 더운 그 방을 나왔다. 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