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官(사관)의 붓
史官(사관)이란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를 뜻함이다.
대저,역사란 옳게 기록되어야 하며 권력자라 할지라도 이를 미화 시키거나 조작 하여서는 아니된다.
사관은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고 잘잘못을 비판 해야 마땅한것이니
이를 일컬어 " 春秋筆法 " 이라 한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임금은 혼암무도 하여 신하의 아내와 통정하다
죽는 대사건이 벌어진다.
제나라 대부 최저의 아내는 당강이라 하는데 얼굴이 매우 예뻣다.
최저는 일찌기 상감이 자신의 아내를 궁에 머물게 하고 갖은 음탕한
짖을 다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집에까지 와서 아내의 방에 들어가
동침하는데 격분하여 장차 왕을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어느날 임금 제장공이 최저의 집을 방문 하였다.
일국의 왕이란자가 대신의 집을 방문하는것 자체도 법에 어긋나거늘
그것도 최저의 사저를 방문 했거든 그의 거처를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최저의 처 당강의 거실로 들어가 희학질을 하려 하자 그곳에서 최저가
임금을 처죽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훗날 최저는 제나라 右相(우상)이 되어 나라 정치를 농단 하기에 이르러 마음대로 하였다.
최저가 하루는 太史(태사;역사를 기록하는관리)) 伯(백)에게 분부했다.
實錄(실록)에 제장공이 학질로 죽었다고 쓰오!
그러나 태사 백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 여름 오월 기해일에 최저가
그 임금 光을 죽였다 "고 썼다.
그 기록을 본 최저는 격분하여 최저를 죽였다.
이때 태사 백에게는 仲(중),叔(숙),季(계) 라는 세 아우가 있었다.
그들도 모두 史官(사관)이었다.
태사 백이 죽은후 그 아랫동생 仲 역시 형이 쓴것 처럼 똑같이 기록했다.
이에 최저는 태사 중 역시 죽였다.
그런데 그다음 동생 叔 역시 죽은 형들처럼 똑같이 기록 했다.
최저는 발악하듯 그 숙 마저 죽여 버렸다.
그러나....
막내 季(계) 마져도 죽은 형들 처럼 똑같이 기록 했다.
최저가 기가 막혀서 계에게 말했다.
너는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내가 시키는대로만 쓰면 너를 살려 주마 ~
태사 계가 대답 한다.
事實(사실)을 바른대로 쓰는것이 歷史(역사)를 맡은 사람의 직분입니다!
자기 직분을 잃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편이 났겠습니다!
그러니 내 오늘 죽어 쓰지 않더라도 반드시 천하에 이 사실을 알릴 사람이 있을것이니 아무리 해도 최우상이 저지른 일을 감출수는 없을겁니다!
자꾸 감추려 들면 천하의 웃음거리만 됩니다! 했다.
최저가 태사 계에게 기록을 던져주며 탄식하고 물러갔다.
태사 계는 그 기록을 집어들고 史館(사관)으로 돌아가려다 저편에서 오는 南史氏(남사씨)와 만났다.
태사 계가 묻는다
무슨일로 이렇게 바삐 오시오?
남사씨 왈
그대 형제가 다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혹 이번 오월 을해 사건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竹簡(죽간)을 가지고 오는 길이요.
죽간은 종이가 발명 되기전 얇은 대나무에 글씨를 쓰던 풍속이 있었다
태사 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록을 남사씨에게 보였다.
그제야 남사씨는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 갔다.
염옹이 史記(사기)를 읽다가 이 대목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한다.
역사란 이런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흔히들 말하지만 그건 역사가 아니며 죽은 기록이며 그 역사를 이어 받은 민족과 국가는 처참한 결과를 내려받게 되어있다.
우리의 역사가 그러하다.
고려가 신라의 역사를 망처놓고,조선이 고려의 역사를 똥칠해놓은 결과 현재 이나라의 역사가 무엇이 남았는가?
그저 헐뜯고 시기하는 근성만 난무하고 저 아니면 않된다는 이기주의만 팽배하다.
국론분열이 요즘처럼 심화된적이 또 있었는가?
참으로 역사가 한탄할 일이다
춘추의 필법이란 이런때 쓰여져야 옳지 않겠는가!
******강촌의 생각******
첫댓글 옳소이다.
이런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