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하동 청학동에 배달성전 ‘삼성궁’을 창건한 한풀 선사가 삼성궁내를 둘러보고 있다. 뒤로 건국전과 팔각정자인 청학루가 보인다.
'우리'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많다. 잘 모른다는 것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잘 알려고 하지 않는 것, 잘 알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것, 그래서 실체가 낯설고 정체성마저 흐릿해져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하루하루 잃고 사는 우리를 뒤늦게 발견하게 된다. 지리산 청학동에서 태어나 사라져가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복원하며, 신화(神話)로 알려진 역사(歷史)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민족문화 부흥운동을 펼치고 있는 '한풀선사(세속명 강민주)'를 만났다. 선사는 지난 30여 년간 환인, 환웅, 단군 등 배달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삼성인(三聖人)을 모신 민족성전 '삼성궁'을 창건했다. 10월 3일 개천절을 앞두고 지난달 30일 지리산 청학동 삼성궁에서 그를 만나 민족혼과 복원 방안 등을 들었다.
▲안호상 박사와의 숙명적 만남
한풀 선사는 청학동에서 면면이 이어온 '신선도(神仙道)' 교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선도의 한 종파인 '동도교' 창시자인 할아버지 강한수 옹(작고)과 아버지 동원선사(강동혁·작고), 그리고 스승인 낙천선사(김종운·작고)가 유년기 정신적 지주였다. 6세 때부터 낙천선사로부터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 고대 신선도의 경전을 배웠고, 삼륜, 오계, 팔조, 구서의 계율을 배웠다. 그러던 선사는 고등학교를 서울로 유학가면서 스승 낙천선사의 소개로 일생일대의 숙명적 동지이자 또다른 스승을 만난다. 신선도 세계관을 가진 한풀 선사가 민족정기라는 더 큰 가치관을 접하는 계기가 시작된 것이다.
안호상 박사(초대 문교부장관·작고).
안 박사는 독일 철학박사 출신으로 당시 우리나라 지성의 꽃으로 불린 인물이다. 장관 재임시절 홍익인간과 이화세계를 대한민국 교육이념으로 도입한 분이다. 홍익대, 단국대, 건국대 등 민족교육·민족정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대학을 인가해준 애국 민족지사였다.
한풀 선사는 안 박사를 만난 이후 안 박사가 관여하던 개천학회 간사를 맡았고, 개천대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우리나라 상고사 등 민족 역사와 철학을 배웠다.
중앙대학교와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김성훈·설봉식 교수로부터 실물경제와 응용경제를 배우기도 했다.
이후 선사는 안 박사와 함께 1977년부터 정부에 민족의 시조를 기념하는 '국조전'을 만들자고 주창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선사의 고향인 청학동으로 돌아와 '배달민족학교'를 지었다.
배달민족학교는 항일독립운동 총사령관 서일장군이 110여년전 세운 독립군단인 '북로군정서'의 부설 교육기관인데, 장교와 사병을 길러내는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 만큼 중요한 민족정기를 삼성궁이 이어 받았고, '배달민족학교 삼성궁'은 수많은 수행자를 길러내며 '배달성전 삼성궁'으로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배달성전은 커져 갔지만 정작 국민들의 정체성과 역사성은 낮아져 민족혼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풀 선사는 "일본은 시조신을 모신 '이세신궁'이 있고, 중국도 시조 '황제 헌원'을 모신 관묘가 있고, 북한은 단군릉과 단군관련 유적 30여종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국조를 모시는 사당이 한 곳도 없다"면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적극 추진해야 하는 공공사업을 개인이 하고 있는데도 정부와 지자체에서 미안한 기색없이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질타했다. 선사는 "시조(始祖)를 개인영업에 이용하면 중국은 사형, 일본은 종신형에 처한다"고 했다.
▲민족혼, 부흥시켜야 할 숙명적 과업
나라의 시조를 모신 사당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지만 대종교·신선도·동학·천도교 등 민족종단의 실체가 사라지고 있고, 민족혼과 독립정신이 사라지는 현실도 안타깝다는게 선사의 하소연이다.
선사는 "해방전후사 인식부분에서 우리의 독립정신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독립유공자에게 포상하고 사후 국립묘지에 모시면 끝나는 문제로 치부한다"면서 "독립운동의 의미를 정진시키고 학습하는 단체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뿌리인 역사교육현장을 살려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영어밖에 모르는 나라, 최고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낙오자가 되는 현실. 전인은 없고 전문인이 넘치는 현실. 그래서 인성이 파괴되는 현실을 철학·역사·사회학의 유기적인 관계로 살려야 한다는게 선사의 지론이다.
선사는 파괴되는 인성의 복구는 배달정신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배달정신은 단군정신을 말하는데, 밝은 땅(배달)에서 배달민족이 행했던 의식세계는 홍익인간·재세이화·광명이세가 철학적 바탕이다. 이 모두가 인간과 자연, 이치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이화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선사는 특히 배달정신을 개천정신과 결부시켰다. 개천정신이 밝음으로 나아가는 정신이라는 것이다.
단군할아버지가 열었다고 하는 개천. 10월 3일을 말한다. 하늘은 단군할아버지가 열기 이전에도 계속 열려 있었는데 무엇을 열었다는 것인가.
선사는 "단군은 물성인 세상에서 인성인 세상을 열었다. 물성이 지배하던 때는 차별화된 인간구조가 됐다. 하지만 단군할아버지부터 사람이 하늘로 받들여져 사람의 성품을 여는 것을 개천으로 삼은 것이다"고 설명했다.
또 "자연그대로 살다가 인성이 강조되니 사는 것이 불편해져 머리를 묶는 댕기가 생기고, 옷을 수습하고, 의식주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며 "개천이후부터 인간내면의 깊은 성품을 성찰하고 깨달았고, 인간 모두가 하느님인 세상을 만들었다"고 개천의 의미를 짚었다.
인간이 곧 신인이면서 인간이 자연인 것을 알았고, 모든 천지자연의 이치에 맞게 조화롭게 사는 성품을 터득해서 가르친 것이 개천절이라는 것이다.
▲필생의 과업으로 쌓는 삼성궁·삼신궁·마고성
첩첩산중 제대로 된 길 하나 없었던 30여 년 전. 선사는 10여 년간 혼자 지리산에서 수행하며 손수 삼성궁이라는 어마어마한 민족성전을 쌓아 올렸다. 90년대 들어서는 몇몇 제자들이 도왔지만 삼성궁의 돌성은 직접 쌓았다.
호미와 삽, 낫으로 행선(수행)하면서 하루 80t에 이르는 돌을 쌓아내며 지금의 역사를 만들어냈다고 하면 쉽게 믿을 사람 누가 있겠냐는 반문도 이해된다.
추위와 더위, 비와 바람, 멧돼지·곰 등 산짐승과 마주하면서도 성전창건을 멈추지 않았고, 등짐을 지며 산속으로 건설자재를 하나하나 옮겨가며 오늘의 삼성궁을 창건해냈다.
선사가 필생의 과업중 첫 번째로 삼성궁을 창건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사가 창건한 삼성궁의 오른쪽 능선을 넘으면 '마고성'이 나오고, 그 성안에 '삼신궁(마고신궁)'이 있는데, 선사의 집안에서 대대로 지켜왔다고 한다. 삼신궁은 지리산 청학동의 산 봉우리인 '삼신봉' 밑에 위치해 있어 삼신궁과 삼신봉의 역사적·지리적 관계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마고신을 모신 삼신궁은 항상 있어 왔지만 국조 3대 할아버지를 기념하는 사당이 전국 어디에도 없어 한풀 선사와 안호상 박사, 스승인 낙천 선사의 합의에 따라 갑자년(1984년)에 삼성궁을 창건하기 시작했다.
후원자가 없어 사비를 모으고, 큰누님(강태숙)에게 돈을 빌려 청학동 일대 땅을 매입했다. 일부는 뜻 있는 지역 유지들의 기부로 땅을 제공받기도 했다.
선사는 민족의 근본을 찾는 일에 지역 지식인들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멸시하고, 지역 행정가들의 몰역사성에 따른 반대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풀(큰 기운)' 정신으로 이겨냈다고 한다.
멸시와 반대를 견딘 선사는 "이제 국민들이 삼성궁을 종교단체가 아니라 민족문화 부흥운동 단체라는 것을 알아주고, 지방행정에서도 인정하는 등 민족정기를 일으키는 명소로 발전했다는 측면과 연간 50만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만족하지만 이제 시작이다"고 했다.
내년 10월 서울대학교-삼성궁-UCLA와 세계 마고 학술대회를 개최할 계획도 잡았고, 삼성궁에서 보관중인 선사시대 유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유물전시관도 만들어야 한다. 1년에 한번만 개방했던 마고성과 삼신궁의 중건을 서둘러 마쳐 내년부터 연중 공개한다는 약속도 지켜야 한다.
애써 첩첩산중을 찾아오는 연간 50만명에 이르는 관람객들의 입장료와 기념품 판매가 주 수입원인 현실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지지와 지원이 필요하다. 뜻있는 독지가들의 동참도 민족문화 복원과 중흥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진행시키는 선사에게 큰 응원이 될 것같다.
들어갈때 미심쩍은 마음이 든다는 관광객들. 나올때는 "우와~ 정말 대단하다. 또 오겠다"며 크게 만족해 한다. 첫인상은 낯선 곳이었지만 또 오고 싶고, 또 오겠다는 사람들의 약속. 그것은 바로 우리의 DNA가 면면히 이어온 민족적 기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조윤제 기자 cho@knnews.co.kr 사진=김승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