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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문창과 75학번 우영창 시인이 <월간조선> 1992년 6월호에 발표한 것입니다. 그간 동문의 이력이 많이 바뀌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발표 당시대로 했습니다.
(이승하 선배께서 올린 게시물을 읽기 쉽게 하여 이 쪽으로 옮겼습니다)
한국 문단의 최대 인맥
서라벌예술대-중앙대 문예창작학과
1954년 첫 입학생을 선발한 이후 지금까지 4백여 명의 文人을 배출한 <문창과> 졸업생들의 면면과 현주소
우영창(시인)
37년간 작가 4백여 명 배출
1991년 12월 14일 저녁 6시, 문예진흥원 대강당에서 제1회 서라벌예술대-중앙대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총동문회가 열렸다. 1954년, 미아리에 위치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이하, 문창과로 표기)가 첫 신입생을 선발한 이후 실로 37년 만의 일이었다. 이 모임을 두고 항간에서는 총동문회 결성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말들도 오고 갔다. 문단에 새로운 파벌을 조성하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단일학과로 40년도 안 된 세월에 4백여 명 이상의 작가를 배출한 문창과가 총동문회라는 명칭하에 문단 내에서 결속력을 강화해 어떤 헤게모니라도 잡고자 한다면, 하는 우려도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 예상을 훨씬 넘는 350여 명의 참석 동문들 표정에선 어떠한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문, 선후배들끼리 환담을 나누고 총회가 끝난 후 끼리끼리 모여 밤늦게까지 옛날 방식대로 술잔을 나눴을 뿐이다. 그날 모인 동문들 중엔 물론 시인, 소설가들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사회의 각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많은 인사들이 있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문학 쪽에 많은 비중을 두겠지만 각 분야별로 활동하고 있는 동문들의 인맥과 그 분위기도 나름대로 짚어보고자 한다.
미아리 시절의 예비 문인들
문창과 동문 명부를 들춰보면 현 문단의 중진들이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대거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55년에 시인 함동선이 입학하고 56년엔 소설가 안장환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58년에 소설가 김주영, 백도기, 유현종, 천승세, 시인 이근배, 박이도, 문학평론가 홍기삼 등이 서라벌의 정문을 통과했다.
함동선은 이후 서라벌대 교수를 거쳐 중앙대 교수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문창과 동문들이 수여하는 제1회 서라벌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주영은 몇 해 전 절필선언 사건으로 매스컴의 화제가 되었으나 최근엔 다시 장편소설 「화척」(3부작)을 발간하고 소설의 자료 조사차 북한 방문을 신청해놓고 있다. 유현종은 「들불」등 역사소설로 독자들에게 친숙한 작가다.
경희대 교수로 재직중인 박이도는 1991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라는 시집을 발간하고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문단 내 바둑의 최고수 중 한 사람인 이근배는 문예지 『민족과 문학』대표로 있었다. 몇 안 되는 문창과 출신 평론가 중 최고참인 홍기삼은 동국대에 재직하고 있다.
남성적인 문체로 힘있는 소설을 쓰고 있는 천승세는 무예 면에서 그 연배 중 제1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장편소설 「빙등」을 집필하고 있다.
50년으로 내려오면 드라마 작가 이희우가 돋보인다.
60, 61년은 특히 많은 예비 문인들이 서라벌에 입성한다.
소설가 김원일, 양문길, 오인문, 박상륭, 이문구, 조세희, 한승원, 시인 송수권, 이건청, 신중신 등이 그들이다. 그야말로 막강 군단이다.
초대 동문회장을 역임한 김원일은 젊은 시절 니힐한 청춘상을 그린 「어둠의 축제」로 등단한 후 30세가 넘어서면서부터 해방과 6.25전쟁 사이의 아픈 세월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해온 선이 굵은 작가다.
주목할 만한 단편들을 발표해오다 최근 작품 활동이 뜸한 양문길은 영풍문고에 재직중이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이름인 박상륭은 『죽음의 한 연구』라는 특이한 문체와 형식의 장편소설로 한국 문단 내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현재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으며 작품을 완성하면 문학과지성사에 그 원고를 송고해오곤 한다.
박상륭과 절친한 사이인 이문구 역시 그 특이한 문체와 풍부한 어휘, 뛰어난 작품성으로 70년대를 풍미한 작가다. 박상륭이 캐나다로 떠나기 전 평론가 고 김현이 합석했던 자리에서 박상륭과 이문구가 서로 네가 최고라고 우기다가 주먹까지 오고 갔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만화가 강철수도 다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70년대 후반 독서계를 강타했던 조세희는 오랜 침묵 끝에 현대사에 대한 통렬한 고발을 담은 장편 「하얀 저고리」를 발표하였다.
어촌의 작가 한승원은 국내 작가 중 보기 드물게 어촌 문제에 깊이 천착해 들어가고 있는 작가다. 그의 작품을 쓰는 끈기, 집념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문구가 동시에 쓴 것처럼, 그도 최근 시집 『열애일기』를 내놓은 바 있다.
『조선총독부』의 작가 유주현의 사위이기도 한 오인문은 호인형으로, 술 잘 마시고 누구에게나 친숙한 형님 같은 인상의 작가다.
광주시를 사수하고 있는 시인 송수권은 시단의 일반적인 조류와 동떨어져 민족 고유의 정서를 시어에 담는 귀중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가락이 이상하게 홀대받고 잇는 시단 풍토에서 그의 작업은 그만큼 순수하고 또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될 것이다.
한양대 교수인 이건청은 사막의 고독한 하이에나를 소재로 삭막한 문명사회에서의 강한 자아상을 그리고 있다.
63년으로 오면 소설가로, 드라마 작가로, 도 작사가로 다방면에 재능을 가진 양인자가 서라벌 문단을 노크한다.
64년엔 소설가 백시종, 시인 윤금초, 한분순, 정장선 등이 있다.
백시종은 재벌그룹의 회장을 묘사한 소설 「돈황제」를 발표, 크게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
짧으면서도 단아한 서정시를 쓰고 있는 시인 윤금초는 『주간조선』에 재직하였고 풋풋한 내음의 밀도 있는 시를 쓰는 한분순은 여성지 『퀸』을 이끌고 있다. 목포의 시 동인지 『흑조』의 창간 주역이었던 정장선은 현재 광주에 거주하고 있다.
65년에 오면 특이하게 만화가 강철수의 이름이 보인다. 강철수가 문창과를 나왔다는 건 필자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지만 스포츠 신문의 인기연재작 「발바리」의 그 유창한 언어구사력을 생각해보면 그가 문창과 출신이구나 하는 점이 이해가 된다.
동문회가 있던 밤 한 무리의 술꾼이 ‘발바리의 추억’이라는 술집에서 강철수가 낸 공짜 술을 마시고 대취해서 나오던 모습을 필자도 목격한 바 있다.
이 해에 시인 권오운, 마종하, 임영조, 김영형, 소설가 이동하, 드라마작가 나연숙이 등장한다.
견고한 시세계를 갖고 있는 권오운은 『여성백과』에 근무하고 있고 뛰어난 감성의 시인 마종하는 최근 들어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투철한 시정신이 투영된 시를 쓰고 있는 임영조는 최근 김주영과 함께 제1회 서라벌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여류작가, 오정희 이경자 윤정모
삶에 대한 담담한 심경의 세계를 즐겨 펼쳐 보이는 김영형은 샘터사에 근무하고 있다.
소설가로는 이동하가 다소 늦은 나이에 문창과에 들어온다. 문창과의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는 장편 「우울한 귀향」으로 『현대문학』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그는, 당시 매일 밤 일정량의 원고를 하루도 빠짐없이 썼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목포대학에 근무하다 모교의 문창과 교수로 적을 옮겼다.
66년엔 소설가 오정희, 이경자, 윤정모 등 미래의 여류작가들이 서라벌에 꽃바람을 일으킨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오정희는, 김동리 선생이 소설 창작 강의시간에 그녀의 소설을 소설의 한 모델로써 많이 인용하기도 한 작가다.
여성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이경자는 드라마로 만들어진 「절반의 실패」로 최근에 많이 알려진 작가다.
민중문학권에서 큰누님으로 대우받고 있는 윤정모는 여성으로서는 매우 힘있는 문체를 사용하며 많은 독자를 갖고 있다. 소설가 정종명도 이 해에 들어오는데 중․단편에서 특히 확고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67년에 시인 감태준․신현정, 소설가 김민숙, 박양호, 표성흠, 황충상 등이 들어왔다. 45세 전후의 나이로 작가로서는 한창 완숙해질 시기이다.
시집 『몸바뀐 사람들』로 일찌감치 문단에 깊이 침투한 시인 감태준은 『현대문학』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한양대에 출강하는 등 그야말로 몸이 두 개라도 힘들 정도로 바쁘다.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데뷔한 이은숙(73학번)과 결혼한 신현정은 캠퍼스 커플로서 당신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시인이나 소설가인 표성흠은 필자가 70년대에 집에 놀러 가본 바에 의하면 미발표 원고가 항상 수천 매가 있곤 해서 감탄하곤 했다. 「무색계」라는 불교적 내용의 소설로 등단한 황충상은 종교소설이 취약한 문단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남대 교수인 소설가 박양호는 1991년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할 당시 문단 선후배들의 대거 참석으로 그의 인품과 인기를 과시한 바 있다. 그의 소설은 견고한 문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교수진은 주로 현역 작가
68년엔 소설가 김상렬, 송기원, 시인 김종철, 이시영, 이진행, 최영해 등이 나온다.
「달아나는 말」의 작가 김상렬은 조용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동시에 당선되었던 송기원은 그 낭만적 혁명주의 기질로 수차례 시위를 주도해 제적당하고 또 80년엔 시인 고은과 함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징역을 살게 된다. 그는 『실천문학』주간을 거쳐 최근엔 출판사 『들꽃세상』을 운영하고 있다.
송기원과 절친한 사이인 이시영은 창작과비평사 주간으로 엄격한 감정 절제의 칼날 같은 시들을 쓰고 있다. 그는 1991년 국내 최초로 아내(이경희, 71학번)의 발문을 받아 시집 『이슬 맺힌 노래』를 출간하였다. 송기원․이시영과 친한 이진행 역시 절제된 시어로 서정성 짙은 시들을 쓰고 있다.
『시정신』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종철은 「못」이라는 상징적인 소재를 주제로 연작시를 쓰며 두드러지게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 학번에 기인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최영해이다. 그는 문단 내에서 매우 유명해 그 명성과 기행은 전국에 걸쳐 알려져 있다. 원래 스님이었던 그는 숱한 기벽으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석고 붕대를 한 다리로 술집을 찾아 전전하던 그의 모습이 필자 눈에도 선하다. 그는 흑석동의 닭장 같은 조그만 방을 세계 문화의 중심지라고 부르곤 했었다. 그는 낮밤 할 것 없이 술을 마셨는데 문창과 출신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69년엔 현재 대원외국어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소설가 정대재와 경성대 교수인 작가 조갑상이 입학. 60년대를 마지막으로 장식한다.
50, 60년대에 입학한 작가들을 비교적 길게 인용한 것은 이들이 한국문단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고 또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당시 미아리 시절 이 미래의 작가들은 청춘의 가장 소중한 시기에 문학과 술과 가난과 발산할 길 없는 청춘의 열정을 함께 앓았어야 했다. 문학에 대한 이론적․학문적인 접근보다는 감성적인 반응에 크게 좌우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의 교수진으로는 민속학의 권위자인 임동권 교수가 학장을 맡고 잇었고, 소설가 김동리, 유주현, 시인 서정주, 박목월, 함동선, 김구용 등이 강의를 맡고 있었다. 타대학 국문과와는 달리 실기지도 중심의 교육이기에 강사진 역시 평론가보다는 현역 문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일천했던 한국문학의 역사로 미루어보아 그들이 강의실 밖에선 외국문학에 깊이 침윤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정신적 스승은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토마스 만, 사르트르, 카뮈, 카프카, 헤밍웨이, 포크너, 엘리엇, 발레리, 보들레르, 블레이크, 두보, 이백 등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자양분을 흡수해가면서 그들은 한국문학의 목록에 새로운 작품들을 추가시켜 나가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까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50, 60년대 동문들 중 많은 졸업생들이 서라벌을 졸업한 후 다시 타대학(4년제)에서 학위를 받게 된다. 그 중엔 박사학위까지 딴 상당수의 동문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청춘의 한 시기를 순수하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바쳤을 그 서라벌 시절을 쉽게 기억에서 지우기는 힘들 것이다.
70년대의 흑석동 시대
70년대의 무대는 미아리에서 흑석동으로 옮겨진다. 중앙대학교가 73년에 서라벌예술대학을 전격 인수한 것이다. 따라서 70년대 초에 문창과에 다녔던 동문들은 미아리와 흑석동 시절을 함께 겪게 된다.
70년대의 동문들을 훑어보면 72년에 소설가 강태기, 시인 정근옥, 최수호가 입학하고 73년엔 시인 조완호, 소설가 신영철이 있다. 그리고 74년엔 시인 김홍성, 원태희, 원용대, 박종헌,소설가 김도형, 이형덕의 이름을 들 수 있다. 그 중 시인 김홍성은 여행전문가로서 그의 기행문은 극히 수려한 것으로 평판이 나 있다. 또 김도형은 스포츠를 소재로 소설을 쓰는 특이한 작가다.
필자가 포함된 75학번은 60년대 이후 가장 많은 시인, 작가를 배출한 학번으로 기억될 만하다. 시인 원구식, 오형근, 여종하, 홍우계, 소설가 박원식, 엄광용, 하일지, 채희문, 최성각 등이 있고 다큐멘터리 작가로 홍형기가 있다.
76년엔 시인 오정국, 백창수가 있고, 「고개 숙인 넘저」의 드라마 작가 주찬옥이 흑석동행 84번 버스에서 내렸다.
77년엔 시인 김용국, 박영우, 오준, 윤한로, 장원상, 소설가 이대환, 박상우, 황영숙, 드라마작가 방철환과 아동문학가 김인애(김서정)가 있다.
78년엔 최근 소설 「토정비결」을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은 이재운, 소설가 안광, 시인 조재훈 등이 등장한다.
79년엔 시인 남진우, 오광수, 이승하 등이 있다. 남진우는 신춘문예에 시와 평론이, 이승하는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되어 기염을 토했다. 남진우는 시보다는 평론 쪽에, 이승하는 소설보다는 시 쪽에 주력하고 있다. 79학번에는 낙양의 지가를 천정부지로 올린 두 명의 베스트셀러 작가도 배출한다. 「가시고기」와 「등대지기」를 쓴 조금현(조창인), 「남자의 향기」를 쓴 하병무가 그들이다. 우경미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뒤늦게 소설가로 등단한다.
80년엔 민중문학권에서 크게 각광받고 있는 소설가 방현석이, 81년엔 시인 강신원, 박광덕, 희곡작가 이대영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상의 작가들이 70년대 흑석동을 주무대로 방황하던 군단들이다.
72년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이 땅의 지식인들이 박정희 독재정권에 조직적인 항거를 하게 될 무렵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도 그 격동의 시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75년 신학기 초 필자가 입학할 무렵 4학년이었던 송기원의 주도하에 문창과의 연좌데모가 일어나고 송기원을 비롯 열 명의 주동자들이 제적당하게 된다. 당시 문창과에서 작성했던 유인물의 내용이 명문이라 해서 일본 신문에 실리는 등 꽤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70년대 문창과 학생들은 강의실보다는 주로 술집인 ‘개미집’에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우게 된다. 노동자들도 자주 드나들었던 이 술집에서 학생들은 노가리와 생두부를 안주로 엄청난 양의 소주와 막걸리를 마셔댔던 것이다.
지금 동문들을 만나면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한결같은 얘기지만 아직 본격 소비사회로 들어서기 전의 적당히 가난했던 이 땅에서 젊은 문학도들의 청춘은 그렇게 술집의 화롯불가에서나마 타올라야 했던 것이다.
당시의 교수진으로는 서라벌 시절부터 터줏대감이었던 김동리를 비롯하여 서정주, 구상, 박목월, 유주현, 함동선, 박재삼, 김의정, 신상웅 등 문단의 원로, 중진급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동문들의 등단 속도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안성캠퍼스의 소장 그룹들
실제로 많은 동문들이 50, 60년대와는 달리 학교를 졸업하고 서른이 넘어 등단하게 되는데 이는 교수, 선배들이 제자나 후배들에게 그만큼 무관심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재질과 자생력을 믿고 문단 진출의 길을 손쉽게 터주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은 추측일 것이다. 신춘문예에 제자의 이름이 보이면 일부러 밀쳐놓았다는 소문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문창과의 특징 중 하나가 평론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수백 명의 시인과 작가를 배출한 문창과가 평론가를 배출하지 못했다는 것은 거꾸로 추론하면 문창과의 분위기가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70년대에는 또 예술대학 내 연극영화학과, 회화학과, 음악학과, 사진학과 등의 학우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는데, 이들과는 사회에 진출해서도 일 관계로 접촉할 기회가 상당히 많아진다. 70년대의 문창과 분위기를 긍정적인 것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문학은 이론이 필요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하는 곳에서 문학은 오히려 그 낭만주의적 속성에 크게 의존, 답보 상태를 벗어날 수 없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82년 문창과는 또다시 이삿짐을 싸게 된다. 예술대학이 안성 캠퍼스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또 한번 선후배간의 단절을 우려한, 문학을 위해 학점을 포기한(?) 일단의 ‘늙은’학생들이 안성으로 내려가 선배들의 화려했던 시절들을 안성의 후배들에게 무용담 형식을 빌려 전하게 된다.
그러나 80년대는 주지하다시피 제5공화국이 철권을 휘두르면서 민중문학이 상대적으로 크게 위세를 떨치던 시기다. 80년대 문학도들은 더 이상 선배들의 낭만적인 기행들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한국문단을 지배해온 서구 보수주의 문학의 중압에서 벗어나, 민족.민중을 주제로 한 문학의 혁명적 깃발을 높이 치켜들게 된다. 민족.민중은 당위였고, 그들은 그 당위를 위해 문학이라는 무기를 선택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80년대의 많은 학생들이 제적당하고 감옥으로 가게 된다.
이전 세대와는 달리 ‘학습 세대’로 불리는 그들은 문단 데뷔보다는 현실의 변혁에 더 큰 무게중심을 두고 소규모 스터디 그룹을 위주로 조직적인 민중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의 문단 진출은 1987년 6․29 선언이 있은 후에야 다소 활발하게 이뤄진다. 80년대 전반은 그만큼 현실의 중압감이 컸다는 반증이다.
80년대 문창과의 전위그룹은 주로 82학번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 송제홍, 정종목(92년 전태일 문학상 수상), 원동우, 전동균, 소설가 이정창, 홍순목, 이혜경, 희곡작가 박종길, 문학평론가 김민수 등이 그들이다.
83년엔 소설가 권정숙이, 84년엔 시인 오선홍, 반칠환, 김영산, 정상현, 소설가 구광본, 정지아, 윤동수, 정지형(정마리), 방송작가 오현미 등이 안성 땅 내리에 나타난다.
85년에는 소설가 박청호, 한만수(한정영), 아동문학가 김진섭, 이미애, 희곡작가 이지양이 입학했고, 86년에는 시인 류근, 극작가 김윤미, 장성희가 입학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소설가 박정우, 김세연, 마희정, 이근미, 시인 박권규, 박윤규, 임장혁이, 88년에는 소설가 임현택이 입학했다.
학계의 문창과 파워
80년대의 진보적 문학도들은 성백술(80학번), 전상삼(84학번) 등을 중심으로 〈진달래〉〈진군나팔〉등의 집단창작 그룹을 형성, 반미의식을 주제로 한 장편 서사시 「피어린 산하」등을 89년 『실천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 내에서 큰 반향과 논란을 일으킨다.
이제 80년대도 가고 90년대의 도래와 함께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 포스트모더니즘의 창궐 등의 와중에서 가치 부재의 사상적 혼돈을 겪고 있는 90년대 세대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문창과를 이끌어갈 것인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전망은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그 어느 세대보다 가벼움을 중시하는 90년대 세대들이 선배들이 견디고 또 겪어내야 했던 그 무거운 주제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소화해서 새로운 문학을 선보일 것인지 그 점이 우려되는 것이다. 그러한 우려가 선배들의 단순한 노파심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할 90년대 문창 세대 주역들의 출현을 기대해보며 문학 방면의 개괄은 이쯤에서 줄이기로 한다.
학계나 언론계에서도 문창과 출신들은 엄청난 군단을 형성하고 있다. 문창과를 나왔다 해서 커다란 영향력을 사회에 끼치고 있기에 여기에 종사하는 자들의 역할도 크게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글로써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전업작가가 드문 상황에서 많은 작가들이 이 계통에 직업을 갖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먼저 학계 쪽을 살펴보면 구창환(54학번, 조선대), 김영혁(54, 서라벌고), 신완섭(54, 서라벌중), 이우재(54, 광운대), 황선철(54.고려대), 김춘배(55, 서라벌중), 오창익(55, 인천대), 김영탁(57, 영동고), 엄한정(57, 서울기계공고), 옥인기(57, 성동고), 권영근(58, 영등포여고), 김인식(58, 미8군 외국인학교 교장), 김형주(58, 안양 신성고), 오재철(58, 구로고), 유길수(58, 부안유천국), 김종대(58, 한양대 박물관), 이태재(58, 문교부 중앙교육 연구원), 조대현(58, 용산공고), 조상기(59, 동덕여대), 최계식(58, 안양여고), 최명길(58, 강릉여고), 강무창(59, 화순고), 강순규(59, 광주여고), 김영준(59, 해동중), 윤석현(59, 광주 송지중), 임동일(59, 목포제일여고), 조윤기(59, 화순여중), 최재환(59, 목포고), 정민호(60, 경주 근화여고), 박문재(65, 개포중), 장정훈(67, 천안여중), 한현숙(67, 동부여중), 김봉천(68, 경기기계공고), 김일지(68, 부산동성고), 오정환(68, 부산 동성고), 조승기(68, 목포 문태고), 신석진(69, 중경고), 이상철(69, 대원 외국어고), 권순원(70, 상명여고), 김경희(70, 포천중), 이준섭(70, 영락중), 김광렬(72, 제주 신성여고), 안성수(72, 제주대), 전범수(72, 한양공고), 김석균(73, 문일고), 김숙자(73, 정신여중), 조찬용(73, 영복여고), 최경희(73, 정신여중), 고광희(74, 금옥여중), 최영호(74, 영복여고), 최정희(74, 수원공고), 박민규(75, 수원 애향여상), 임채우(75, 배재중), 김승종(79, 안양공전), 박수진(76, 성보중), 박원희(76, 장훈고), 이진훈(76, 영동고), 임영순(76, 한영고), 정종배(76, 장훈고), 홍행숙(76, 동마중), 김서학(77, 서라벌고), 김학경(77, 염광여고), 문명영(77, 명덕여고), 오준(77, 동구여상), 이해욱(77, 염광여고), 김재성(78, 정명고), 심명석(78, 문일중), 허유승(78, 성문여중), 정전화(79, 안양예고), 하병무(79, 안양예고), 한관수(80, 대원고), 오희엽(81, 대진고), 임덕배(81, 문일중), 최병권(81, 구로중) 등이 있다. 언급한 동문들 외에도 수백 명 이상의 동문이 학계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언론계 인맥
언론계에도 문창과의 인맥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박갑천(55, 서울신문), 황규호(58, 서울신문), 김영도(64, 한국일보), 윤금초(64, 주간조선), 한분순(64, 퀸), 성인환(65, 동아일보), 김청(65, 한국일보), 박창순(67, 교육방속), 강태기(72, KBS 여성백과), 방영훈(72, 일간스포츠), 김용길(73, 서울신문), 홍형기(75, 문화방송), 엄광용(75, 가정조선), 이동준(76, 리빙센스), 오정국(76, 스포츠서울), 이정규(76, 경향신문), 장원상(77, 언론중재위원회), 김규진(78, 한국방송협회), 이점석(78, 퀸), 홍성호(78, 이코노미스트), 김주식(79, 여성자신), 남진우(79, 내외경제), 오광수(79, 경향신문), 정선교(79, 주부생활), 정경철(80, 여성자신), 김문영(80, 문화일보), 임순만(80, 국민일보), 조병도(81, 퀸), 주경섭(81, KBS), 권정식(82, 스포츠조선), 전동균(82, 한국방송공사), 최선호(82, 월간미술), 이지양(85, KBS) 등이 신문․잡지․방송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 동문들이 다루는 소재도 단순히 문화 쪽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스포츠, 과학 등 전 분야에서 전공 출신기자들 못지않게 우수한 기사를 쓰고 있다.
때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 사실 이상의 보도도 가공하게 되는데 그런 점이 문창과 출신 기자들의 장점이나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우수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비교적 어려운 주제도 쉽게 잘 소화시킨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출판, 광고, 영화에도 진출
출판계는 오래 전부터 문창과 동문들이 많이 진출해 있으며 약 10년 전부터는 광고계에도 부쩍 진출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이재영(58, 동아출판사), 전현규(58, 신라출판사), 남윤성(60, 연합광고), 조달현(65, 태평양화학 출판팀), 이채형(67, 금성출판사), 손종욱(69, 서연출판사), 최선호(69, 청한․세계사), 최수호(72, 진화기획), 김재호(72, 다다기획), 원태희(74, 제일기획), 구준회(77, 제일기획), 김인애(77, 엘지에드), 조재훈(78, 금강기획), 허유근(79, 엘지애드), 박문수(79, 들꽃세상), 김석중(81, 스포츠서울 광고국), 민경식(81, 거손), 이대해(81, CWA), 최혜영(81, 글타래), 김남조(82, 형설출판사), 박용해(82, 종근당 광고부), 박정근(82, 일간스포츠 광고부), 김웅현(82, 금강기획), 함석배(82, 대홍기획), 박찬호(83, 엘지에드), 오선홍(84, 코마코), 박철범(84, 동방기획) 등이 주로 활동하고 있다.
광고계에선 기획가 카피라이터 업무에 종사하는 동문들이 많은 편이며 문학과 사업적 문구가 접목하는 최일선에서 이들은 가능성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외에도 영화 쪽에선 김원두(60, 현진영화사 대표), 김송희(85, 세계영화제 기획위원) 등이 활약하고 있고, 김영완(57, 김세일라 무용학원), 김영두(85, 현대장식 예술기획), 정두수(58, 한국음악저작권 협의회) 등의 기타 예술분야에 진출해 있다.
기업체나 연구소에도 많은 동문들이 진출해 있는데, 이동식(54, 극동문제연구소), 홍용수(57, 한국경영훈련원), 유순창(67, 현대중공업), 박상태(72, 근로복지공사), 홍해표(74, 극동건설), 박상언(80, 문예진흥원) 등 백여 명 이상의 동문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상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창과 동문들의 현황을 대략 살펴보았는 바, 필자의 조사 미비와 식견의 부족함으로 많은 주요한 인사들이 누락되었거나 다소의 오류가 예상된다. 필자는 수많은 문창과 동문들 중의 한 사람의 자격으로 이 글을 썼으며, 차후에 또 다른 동문이 필자의 미비함을 보충해주기를 바란다.
어쨌든 문화와 정보의 중요성이 점증되어가고 있는 90년대에 문창과 출신 동문들은 문학과 기타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가며 우리 사회의 문화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해나갈 것임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월간조선』(1992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