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워닝(Spoiler warning) :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혹 <쓰리>를 아직 안 보신 분이 있다면, 이 글을 읽음으로써 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게 될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옴니버스영화 <쓰리>의 세 단편 가운데, 논지 니미부트르의 <휠>에 대한 이야기는 좀 접어둬야겠다. (아마도 영화를 보고나서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들이라면 그 이유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른 두편의 영화, 김지운의 <메모리즈>와 진가신의 <고잉 홈>은 어느 정도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영화들이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과 진가신의 ‘초강력’- 그러나 좀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멜로 감각이 잘 어우러진 <고잉 홈>이 단연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지금,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은 주로 <메모리즈>에 관한 기억들이다.
아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남편은 그녀가 왜,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길가에 쓰러져 있다 눈을 뜬 아내는 자신이 왜 그곳에 와 있는 것인지 의아해한다. 그녀 또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아내는 그녀의 부정(不貞)을 폭력적으로 단죄한 남편에 의해 이미 죽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그 죽음의 이유를 찾아가는 영화인 <메모리즈>는, 언뜻 브레송의 <유순한 여인>을 미이케 다카시풍으로 리메이크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편에 의해 살해된 ‘부정한 여인’, 아내에게 던져진 공간은 스코시즈의 <일과 후> 같은 영화에서 보이던 카프카적 미궁처럼 여겨지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파편화된 시간은 죽은 자의 영혼이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잠시 머무는 시간, 즉 바르도(bardo)의 그것이다. 김지운은 이 옴니버스 단편 프로젝트에 합류하면서 갑자기 최근 한국 단편영화들의 한 익숙한 경향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를테면, <메모리즈>는 윤영호의 <바르도>나 이모개의 <선샤인> 같은 단편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사라진 아내,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
죽은 자는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산 자는 자신의 죄의식을 감추려 든다. 보르헤스의 단편에 나오는 ‘죽어서의 한 신학자’와 카프카의 K의 만남? 하지만 <메모리즈>를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김지운은 이 익숙한 컨벤션을 받아들이지만, 그건 단지 관객을 그들 자신의 악몽으로 온전히 인도하기 위한 초대장일 뿐이다. ‘New Town’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 신도시의 아파트를 주요 무대 가운데 하나로 삼은 <메모리즈>는 어쩌면 올해의 <소름>이 됐을 수도 있는 영화다. 김지운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친숙한 도시공간을, 구멍이 숭숭 뚫린 썩은 치즈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존 카펜터의 <투명인간의 사랑>, 혹은 차이밍량의 <구멍>에서와 같은 노골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아니다. <메모리즈>에서 풍경은 먼저 인물들의 얼굴을 통해 드러나며,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불안감과 공허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만큼 더 풍경은 많은 상처를 숨김없이 드러내게 된다. 이는 이른바 ‘상업영화’ 작가 김지운이, <메모리즈>에서 60년대 서구 모더니즘의 흔적을, 특히 그 시기 영화들에 나타난 여성들의 얼굴과 풍경과의 변증법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막 건물들을 세워 올리고 있는 타워크레인들을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는 김혜수의 얼굴과, 유사한 풍경 속에서 허하게 서 있던 <나비>의 김호정의 얼굴을 중첩시켜 보는 것도 가능하다(그리고 두 영화 모두 ‘기억의 상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아파트 외곽에 걸린 플래카드가 처음 보여질 때 ‘New Town’이라는 글자들 가운데 ‘o’부분에만 구멍이 뚫려 있던 것이, 나중에 다시 한번 보여질 때는 플래카드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메모리즈>가 이상의 모티브와 관련하여 제공하는 작은 서비스일 것이다.
<메모리즈>는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억압하고 있던 것들이 마침내 나타나,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응시해야 하는 순간이 바로 두려움이 솟아오르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다름 아닌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우리를 지탱해주고 있던 것들이다. <메모리즈>는 환영을 통해 공포를 조장하는 장르의 관습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대신 우리 자신의 망각을 일깨움으로써 우리의 환영이 부서지기를 바라는 영화이다. 특히 도시라고 하는 환영. <메모리즈>에서 그것은 기억의 시체들 위에 솟아오른 공중누각이다.
<메모리즈>의 부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이 아이는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인물은 아니며 금세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진가신의 <고잉 홈>에서 부부의 (태어나지 못한) 딸아이는 꽤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여기서 아내는 죽었고 살아 있는 남편은 자신이 지닌 의술을 총동원해 그녀를 살리려 든다. 그런데 이번에 바르도의 시간 속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그 아이이다. 사실 영화 속의 부부를 끝내 죽음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이 아이이다. 이 아이가 이웃의 소년을 유인해내지 않았더라면, 소년의 아버지인 경찰은 그의 이웃을 찾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아내를 살려내려던 남편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는 마침내 자신들의 부모와 만나 가족사진을 찍고, 소년은 다시 외톨이가 된다. 그는 여자아이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그의 곁에 서둘러 불러들이려 할지도 모른다. 즉 진가신의 <고잉 홈>은 의미심장하게도 영화 속의 아이들(미래)을 모두 죽여놓고서 시작한다. <메모리즈>에서 아이는 단지 방기되었을 뿐이다.
<메모리즈>, 기억은 두려움이 시작되는 지점
<고잉 홈>의 아파트는 기억의 시체들을 짓밟고 선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지독할 만큼의 인력으로 기억을 붙드는 공간이다. 두 영화의 남편들은 모두 아내의 시체를 곁에 두고 있지만, 한쪽은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한쪽은 망각을 두려워한다. 또 <메모리즈>의 아파트가 사람들이 꿈을 안고 몰려드는 신도시의 공간이었다면, <고잉 홈>의 아파트는 사람들이 모조리 빠져나가버린, 버려진, 황량한 공간이다.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한편이 익숙한 공간 속에 뚫린 구멍들- 우리의 빠른 근대화가 미처 채워넣지 못했던 바로 그 구멍들- 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 반면(<메모리즈>), 다른 하나는 그 구멍 사이로 기어이 전근대의 노스탤지어를 끼워넣으려는 인물들에 관한 것(<고잉 홈>)이라는 점에 있다. 아내는 남편의 시체를 3년간 정성스레 돌보아 마침내 그를 깨어나게 하지만, 이제 자신이 죽어버린다. 깨어난 남편은 다시 3년간 아내의 시체를 돌보고 그녀가 깨어날 날은 이제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 망자의 곁에 초막을 짓고 머물던 우리네 오래 전의 관습을 떠올려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고잉 홈>의 빈 구멍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우리를 놀랍게 만드는 삼년초토(三年草土)인 것이다.
반환 전 홍콩에서 관금붕은 <인지구>를 통해, 지나간 것들은 결코 지금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쓸쓸하고 아름다운 도시괴담 속에 펼쳐보였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가신은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불가능이 거의 가능할 것처럼 믿고 싶게 만든다. 흡사 케베도의 <죽음 저 너머의 사랑>에 등장하는 유명한 시구처럼, 이 연인들은 ‘먼지로 남을 것이나 사랑에 빠진 먼지가 될’ 그러한 존재들인 것처럼 보인다.
이때 두 연인을 지켜보는 것은 이웃의 경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멍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이며, 그야말로 새벽의 폐허 위에서 전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어리둥절해하던 괴담의 주인공이다. 과거(이웃의 부부)와 죽은 미래(아이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경찰이다. 그의 현실은 갑자기 꿈같은 것이 되어버렸고,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꿈은 다시 꿈으로 되돌려 보내져야만 한다. 경찰관은 이 아파트 밖으로 빠져나와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그의 유머를 되찾아야 한다. “그 여자애가 자꾸 절 노려봐요”라고 말하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 “그럼 너도 노려봐”. 그러나 진가신은 두 연인의 죽음의 공간에 온전히 묻히기를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따라나설 필요는 없다.
공포영화에서의 침묵은 대개 말-사건을 배태한 침묵이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 무언가가 터져나오기를 가슴 졸이며 기다린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말-사건 다음에 다시 찾아오는 침묵이다. <메모리즈>가 아쉬운 것은 그 말-사건 다음에 다시 찾아온 침묵이 말-사건 이전의 침묵의 동어반복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있었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난 다음 보여지는 풍경은, 이젠 다소 상투적인 냉소적 시선에 사로잡힌 풍경, 더이상 아무런 불안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 풍경이 되어버린다. 김지운은 신도시의 풍경을 세밀히 탐색해 들어가지만 결코 풍경의 재발견에는 이르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올해의 <소름>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이 영화는, 결국 <파라다이스 빌라>처럼 끝나버렸다.
<고잉 홈>, 죽음은 삶의 비밀
진가신의 영화에서 재미있는 설정 가운데 하나는, 경찰관이 수다를 떠는 동안 텔레비전 화면에 보여지는 여자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반면, 마침내 경찰관이 그녀의 소리를 듣게 될 때 정작 그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잉 홈>의 결론은, 말-사건 다음에 찾아오는 매우 평화롭고 거대한 침묵을 받아들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건 다름 아닌 죽음이다.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에는 “눈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에서, 죽음은 삶의 비밀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 이외의 어느 것도 숨기지 않는 하나의 비밀이다”라는 말이 있다. 애타게 자신의 짝을 생으로 귀환시켜 다시 만나고자 하는 연인들- 그들은 자살이란 방법은 아예 꿈조차 꾸지 않는다- 이 등장하는 <고잉 홈>은, 어쩌면 바로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영화였을 것이지만, 훌쩍 판타지로 이월하면서 전제를 위반하는 결론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영화에서 논리를 따지는 건 무망(無望)한 일일 것이고, 진가신의 주저함 없는 연출은 분명 관객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끝까지 논지 니미부트르의 영화가 언급되지 않은 점에 불만을 느낀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간단히 덧붙이자면, <휠>은 김지운과 진가신의 영화에 부록으로 덧붙여진 아동용 교훈극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아주 잠깐 ‘야한’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