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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산행(20210117)
화방재-사길령-산령각-사길치-유일사주차장삼거리-유일사삼거리-유일사쉼터-주목군락지-태백산 장군봉-태백산 천왕단
1.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2021년 흰소띠의 해를 맞아 1월 17일 태백산으로 첫 산행을 떠난다. 버스는 금봉이휴게소를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태백시 화방재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어평재휴게소 광장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곳에 오니 낯선 느낌이 든다. 화방재휴게소가 아닌 어평재휴게소? 그렇다면 화방재를 어평재라는 이름으로 바꿔 사용하고 있군. 이유가 무엇일까? 알아보니, 강원 태백시는 일본식 고개이름인 태백산 ‘화방재(花房領)’를 ‘어평재(御坪峙)’라는 고유 명칭으로 부르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500여 년 전부터 ‘어평재’라고 불려 왔으며, 고개 아래의 마을은 어평리(魚坪里)라고 옛 책자에 명기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단종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옛 전설이 어린 고개의 이름을 어평재(御坪峙)라고 바꿔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 고개에 꽃이 만발한다고 하여 일제 강점기에 화방재(花房領)라고 고쳐졌다고 전하며 또 일본 식물학자였던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이 조선총독부 초대 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의 이름을 차용·개칭하여 화방재(花房領)라고 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연유야 어떻든 고유한 옛 표기가 있었는데 일본이 자기네들 식으로 바꾸었다면 옛 지명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31번 국도 해발 936m 어평재의 이정목을 보고 백두대간 마루금으로 올라섰다. 한겨울의 날씨가 매섭다. 첫 산봉을 오른쪽으로 돌아서 내려가면 해발 980m 사길령이다. 사길령에는 표석과 그 위에 사길령탐방지원센터가 있다. 사길령 표석 뒷면에는 사길령의 유래에 대하여 이렇게 새겨 놓았다. “사길령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충으로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신라 시대에 태백산 꼭대기로 통하는 고갯길이 있어 천령(天嶺)이라 했는데 높고 험하여 고려 시대에 새로이 길을 낸 것이 사길령이다.” 천령 길이 높고 험하여 고려 시대에 새로 뚫은 길이므로 새길고개, 새길령(嶺)이 사길령으로 바뀌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사길령에서 태백시 혈동(穴洞) 방향을 내려 보니, 사길령 아래 오래된 노거수(老巨樹)가 서 있고 그 아래는 팔보암이 살짝 보인다. 마른 억새풀 꽃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쓸쓸함을 자아낸다. 마른 겨울바람과 마른 억새풀 꽃, 감정을 모두 말려버릴 듯하지만 오히려 쓸쓸함을 가득히 묻혀온다. 쓸쓸함을 털어내며 탐방지원센터를 통과하여 임도를 따라 오른다. 흑갈색 낙엽송들이 줄지어서 하늘로 치솟아 있다. 음습한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을 낮게 엎드린 산죽 푸른 잎들이 씻어낸다. 햇빛에 반짝이는 산죽 푸른 잎들의 반짝임을 내려다보며, 흑갈색 낙엽송은 봄날의 자신의 가지에서 돋아날 푸른 새싹의 풍경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산죽, 너는 사시사철 네 잎이 푸르지만 낮은 땅에만 엎드려 있지? 내 비록 봄날부터 여름까지 초록으로 반짝이는 날은 너보다 짧지만 나는 언제나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내 초록의 잎들이 솟아날 봄날은 머지않았다. 마음껏 피워 올려볼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흑갈색 겨울을 묵묵히 견디고 있다. 너의 초록빛을 보며 겨울을 견디며 이렇게 희망할 수 있으니 네게 감사한다.” 낙엽송 군락지에서 두런두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얀 눈이 얕게 깔린 널찍한 터, 주변에 참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찬 곳에 동쪽을 향하여 산령각(山靈閣)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에는 음나무(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있고 그 밑동에 돌무더기가 쌓여서 서낭당 역할을 하고 있다. 음나무의 가시는 잡귀를 쫓아낸다는 믿음이 있는 나무로, 산령각의 음나무는 사악함을 물리치는 신목(神木)으로 산령각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정성들여 쌓아놓는 돌 하나하나는 그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것으로 길손이 이 돌무더기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서 길을 가면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민속도 전해진다. 이런 돌무더기가 있는 곳을 서낭당, 성황당이라 했다고 한다.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은 이 고개를 넘나들던 보부상들이 장삿길의 안녕을 기원했던 당집이라고 한다. 산이 험하여 맹수와 산적들이 출몰하는 이 고갯길의 무사안전과 상업의 번창을 위하여 고갯마루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령각 당집의 산령은 태백산신 곧 단종대왕이다. 단종대왕의 혼령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에 들어 태백산신이 되었다고 하여 산령각 내부에 단종대왕이 백마를 탄 그림과 태백산신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고 하는데 문이 잠겨 있어 들여다볼 수 없었다.
산령각 앞의 널찍한 빈터의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옛 시절의 길손들이 산신령께 무사안녕을 빌고 이 빈터에서 휴식을 취하였을 것이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도는 길손들이 여러 정보를 주고받으며 각지의 소식도 듣는 정보교환처의 역할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령각에서 시간을 좀 보냈다. 산령각 이정목을 보니 해발 1171m, 사길령0.5km, 유일사쉼터2.0km, 천제단3.7km라고 적혀 있다. 천제단은 태백산 장군봉의 장군단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태백산 천왕단을 이르는 것이리라. 앞서간 일행을 따르기 위해 산령각 위쪽의 푸른 산죽밭이 펼쳐진 산길을 힘차게 걸었다. 아이젠을 하지 않아서인지 자꾸 미끄러지고 돌바닥에서도 미끄러진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 속도를 내서 이정목이 있는 안부(鞍部)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정목에 사길령1.5km, 유일사주차장1.2km, 유일사0.6km, 천제단2.3km이라 적혀 있다. 산령각에서 1.4km, 24분을 걸어 도착했다. 지도상에서 보면 사길령-산령각-사길치-유일사삼거리-유일사쉼터라고 나와 있는데 이곳은 나와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삼거리가 유일사주차장삼거리가 되며 유일사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길치는? 사길치는 이 안부 삼거리 이전의 언덕이었을텐데, 부주의하여 그냥 스치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길치는 유일사주차장 갈림목 직전의 고개라 추정한다.
유일사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삼거리에서 머뭇거리며 위치를 확인하고 올라서면 돌무더기가 있는 유일사삼거리, 오른쪽으로 유일사로 가는 오솔길이 나있다. 이곳 이정목에 유일사쉼터까지 0.4km가 남아 있다고 적혀 있다. 이제 몸에 서서히 열이 오른다. 유일사쉼터로 가는 언덕에 올라서니 고개에서 동북쪽 전망이 탁 트이며 백운산-운탄고도-만항재-함백산 산줄기가 가슴을 뻥 뚫어놓는다. 산행을 시작하여 첫 통쾌함, 흰소띠의 해 첫 산행에서 처음으로 감동하는 풍경을 조망하며 가슴이 달아오른다. 손이 얼어붙는 강추위가 무슨 상관이랴. 카메라를 꺼내어 이 감격을 영상에 담았다. 영상은 흰소띠해의 첫 감동을 얼마나 잘 담아낼까? 미래의 어느 날 이 영상을 꺼낼 때 오늘처럼 내 손가락은 시리게 얼어붙을 것이다. 감격을 가라앉히며 유일사쉼터에 도착하였다. 동쪽에 있는 쉼터에는 내려가서 그 모습을 살폈다. 서쪽 아래에 있는 유일사(唯一寺)는 법당 건물이 조금 보이는데 내려가 살피지 않았다. 설명안내판에 의하면 1959년에 불사(佛寺)를 일으켰으니, 유일사는 연륜이 짧은 절이다. 태백산 동북쪽 품에 안겨 등산객들의 북적이는 소리와 모습을 귓가에 들으며 머리에 이고 있는 절이 유일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려가 살피지 않고 이렇게 단정하는 꼴은 무식하기 때문이렷다.
유일사쉼터에서 배터리가 얼어 방전되어서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폰카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과연 강추위에 맨손을 내놓고 얼마나 풍경들을 담아낼 수 있을까? 유일사쉼터에서부터 경사가 가파르다. 눈길은 얼어있다. 아이젠을 하지 않고 천천히 비탈길과 돌계단을 올라 주목군락지가 시작되는 곳에 이른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주목들이 생명의 존귀함과 그 덧없음도 함께 일깨운다. 한겨울 하얀 눈과 푸르른 주목 그리고 고목이 된 주목들의 풍경에 산객들은 멈추어서 추위를 무릅쓰고 이 순간을 삶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긴다. 주목나무와 동남쪽으로 열린 풍경, 장군봉에 이르기까지 이 풍경은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두위지맥을 할 때이던가? 백운산과 운탄고도와 꽃꺾이재(花折嶺)를 걸었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을 건너와서 태백산 주목군락지 곳곳에서 뒤돌아서서 그 풍경을 자꾸만 바라보며 추억에 잠긴다. 그 풍경에 환장하여 장갑을 벗어 던지고 풍경 속에 내 삶을 담는다. 죽어서 단 하루도 못 쓸 내 육신과 정신을 살아서 이렇게 담는다. 순간을 누리며 감동하고 생명 있는 동안 그 순간을 추억하기 위하여 얼어붙는 손가락에 무감각하여 자꾸 폰카를 누른다. 이 또한 헛된 짓임을 알면서도 순간의 탐닉에 황홀하다.
황홀한 순간은 이렇게 흘러간다. 어느새 태백산 최고봉 장군봉에 올라섰다. 장군봉 정상에는 장군단이라는 천제단이 있고, 해발 1567m 태백산 최고봉을 표시하는 장군봉 표석은 그 아래에 있다.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르는 듯 강풍을 타고 날아간다. 태백산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헛것에 씌었나? 나는 두리번거리다 정신을 차리고 바삐 떠나려 하는데 강풍에 쏜살같이 달아나는 내 이름의 음절들, 그때까지도 나는 풍경의 황홀감에 빠져 흥분해 있었던 것일까? 맞은편 천왕단 제단을 향하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때다, 내 몸을 치는 산객. 어라! 지난해 11월 15일 송백산악회 소백산 비로봉 산행 때 우연히, 그때에도 우연히 만난 동창생 두 친구였다. 태백산과 소백산, 양백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친구와의 재회에 놀라워하며 삶의 굽이굽이는 수많은 우연의 만남들 연속임을 다시 실감했다.
태백산 천왕단으로 가는 길에서 뒤돌아본 태백산 장군봉의 풍경이 둥그스름하게 원만하다. 그 뒤쪽 풍경은 함백산을 가리고 있지만, 오른쪽으로 비단봉과 바람의언덕 그리고 매봉산 풍경은 지난해 12월 20일 두문동재-금대봉-비단봉-매봉산-삼수령 산행의 바람을 일으켜 이곳으로 보낸다. 벅차다. 살아온 인생길을 뒤돌아볼 때 벅찰 때가 있다. 그 벅찬 아름다움에 젖어 눈물 흘릴 때가 있다. 지금 태백산에서 뒤돌아보는 두문동재-삼수령 산행의 모습과 그곳에서 실어 보내는 그날의 소리들을 환각하며 벅차다. 이 벅찬 감격의 울음은 오직 내 혼자의 가슴 속에서 솟아오를 뿐이다.
태백산 천왕단 앞에 섰다. 시간에 쫓겨서 천왕인 단군을 모시는 한배검 제단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태백산을 신성시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신라는 통일 전에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그 주위의 다섯 산봉, 동악 토함산, 서악 선도산, 남악 함월산, 북악 소금강산, 중악 단석산을 五嶽이라 하고, 五嶽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산악숭배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삼국통일 이후 영토가 넓어지면서 五嶽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때부터 태백산은 우리 민족의 숭배의 대상으로서, 나라에서 태백산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이어오다가 조선왕조 말 나라가 어지러울 때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동학을 이어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가 태백산 단군제단을 세우면서부터 태백산이 더욱 신성시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일까? 태백산 표석은 최고봉인 장군봉에 있지 않고 천왕단이 있는 영봉(?) 아래에 세워져 있다. 이는 태백산을 신성시하는 대종교와 태백산 지역민들에게 태백산의 정상은 장군봉이 아니라 천왕단이 있는 영봉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태백산 표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산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오늘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산악숭배사상이 핏속 깊이 뿌리 박혀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시간에 쫓겨 그 줄에 서서 기다릴 수가 없다. 천왕단 아래서 앞에 보이는 문수봉과 부쇠봉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앞서간 일행들은 부쇠봉을 거쳐갔을까? 후미일행들의 위치를 가늠하며 천왕단과 태백산 표석을 떠난다.(2부에서 이어짐)
2. 산행 과정 영상
위 사진을 찍고부터 배터리가 추위에 얼어서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폰카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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