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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더덕에 발목 잡힌 세월
공 영 해
1. 마산은 어디 있는가
는개가 촉촉이 내리고 있던 1975년 6월 어느 날이었다.
제일여고에서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의 강연을 듣고 나오던 길이었다. 안개의 띠를 두른 무학산과 비에 젖고 있는 돝섬의 풍광이 작정을 하고 나의 발목을 잡았다. 한 폭의 수묵담채화가 저리 아름다울까. 비에 젖고 있으되 다 젖지 않고 섬을 풀어 놓고 있는 바다와 안개에 묻혀 있으되 봉우리를 의연히 내 놓고 있는 무학산은 벌써부터 나를 만나기 위해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몸이젖고 있는 것도 잊은 채 한 동안 우뚝 서서 산과 바다의 은밀한 유혹에 빠져 들고 있었다.
네 고향은 마산이다. 떠나지 말아라. 이곳이 네 영혼의 집이다.
낯섦에 대한 거부감으로 꽁꽁 닫아 건 내 마음의 빗장을 그들은 쉽게 풀고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 가슴 속은 금세 합포만의 미역빛 바닷물과 야생마처럼 힘차게 내닫는 무학산의 기상으로 설레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마산에 온 지 석 달이 지나도록 나는 마산을 찾지 않았었다.
마산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지명이었다. 그곳은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며 의거의 도시였다. 대학 시절 통영 가는 길에 잠깐 만나 본 신포동 앞 바다는 그러나 나를 설레게 할 만한 곳이 못되었다. 아름다움과는 너무 거리가 먼 바다였다. 3.15탑과 분수로터리에 대한 기억은 관념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박철희 지도교수님께서 마산에 신설 사립학교 있으니 자네 한 번 이력서를 내 보지 않겠느냐는 권고를 받아들인 것은, 한일합섬과 마산자유수출지역이 있어 70년대 산업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많은 유동 인구가 유입되는 탓으로 근대 자본의 공업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소시민들의 삶의 다양성을 취재할 목적에서였다. 나는 당시 소설의 소재 찾기에 목말라 있었다. 이력서를 내었고 채용이 되었다.
학교는, 바다를 볼 수 없는, 도심과는 한참 거리인 창원 쪽에 있었다. 내 이름자에 바다[海]가 붙어 있어 바다와의 만남을 필연이거니 하였었다. 바다와 함께 할 수 없어 실망스러웠다. 갈등했다.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도 차편이 불편하여 쉽지 않았다. 병아리 선생이라 교단생활도 몸에 익지 않았다. 소계동 북면막걸리집이 나를 찾았으나 뜨내기 선배들의 키재기식 영웅담에 식상하여 차라리 그냥 권태를 씹기로 했다. 글 한 편 써 보겠다던 처음의 각오는 접어 두기로 했다. 정 붙일 곳이 없어 잠시 머물다가 곧 떠날 작정이었다. 마음이 겉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석 달이 지나도록 나는 마산을 알지 못했다. 마산은 추상의 도시였고 나를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는개에 옷이 푹 젖어도 좋았다.
합승 버스도 그냥 보내고 문화동 그 긴 계단을 걸어내려 바다로 가고 있었다. 내 안에 들어온 바다가 서서히 파도치고 있었다. 물은 맑았고 내 이름자의 바다가 마침내 섬에 닿아 정박의 닻을 내리는가 보았다. 그날 나는 바다와 무학산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 한 번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가난한 과거와의 인연을 단절토록 했고 활황의 젊은 도시 마산과 짜릿한 연애를 하도록 했으니 말이다.
나는 마산의 품안으로 몸을 던졌다.
도시는 이미 나를 수용하고 있었다.
내가 마산을 찾기 시작하자 도시는 내 눈과 귀부터 틔워 주었다. 마산은 확실히 아름답고 활기찬 신생의 도시였다. 어말이 강한 말투는 낯설었지만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정이 갔다. 그 말투는 애향을 잊는 고리였다. 나는 말씨부터 바꾸어갔다. 나의 마산 탐험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사람 사는 마산의 정을, 양지와 그늘을 두루 찾아 헤맸다.
어시장의 좌판에서 만난 비리도록 싱싱한 아침.
김밥 한 줄로 교방천을 따라 서마지기를 거쳐 오른 무학산의 기지개,
거기서 종일 만난 숨 쉬는 바다와 일어서는 도시.
학봉과 중봉의 가파른 산행을 통해 깨달은 무학산의 진경.
서원곡 관해정에서 무상으로 얻은 최치원의 숨결.
완월폭포에서 만난 아낙들의 불심,
만날고개 넘어 확인한 내 씨족의 뿌리 - 고려 말 귀화한 회원군(檜原君) 소(昭) 할아버지의 묘역.
왜간장으로 기억되는 몽고정.
산호공원에서 바라본 숨막힐 듯 어깨를 맞댄 산호동 슬레이트 지붕들.
골목으로 연탄 굴뚝이 늘어선 추산동 비탈길.
월영동 비탈길에서 불러낸 밤바다의 달빛 소나타.
괴물처럼 들어서는 가야백화점.
퇴근하는 자유지역 근로자들의 활기찬 걸음과 왁자한 방언들.
돝섬에서 바라본 무학산의 목가적 일몰.
천연덕스럽게 살평상에 앉아 점심을 맛나게 들고 있는 교방동 주민들과 화장장의 연기.
해운동 판자촌의 빨래와 화력 발전소의 검은 연기.
그리고 경남연탄공장 일대의 석탄 더미와 검은 탄가루 바람.
철 이른 가포 해수욕장과 요양소.
한국철강의 소음과 국군마산병원 옆 예비군 훈련장의 총성.
불종거리의 휘황한 불빛과 어갈비 골목.
철둑을 따라가며 길게 벋은 부림시장과 먹거리 골목. 삼각벨트로 배치된 세 개의 극장.
영자들의 젓가락장단이 맥주병을 펑펑 따는 창동 뒷골목과 오동동 통술집들.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수출지역 후문의 술집과 북마산 역을 중심으로 기생하는 바가지 살롱들…….
숨길 것 하나 없는 발가벗은 도시를 탐험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마산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때 한 여자를 만났다. 눈이 예쁜, 숫되고 붙임성 있는 산호동 처녀였다. 나는 그 여자와 자주 만났다. 그 여자는 좋은 벗이 되어 주었다. 그 여자는 내가 모르는 마산의 맛을 자주 보여 주었다.
아구찜을 처음 만난 것은 그 여자를 통해서였다.
얼큰하여 연신 뻘뻘 흐르는 땀을 닦으며 먹는, 아구 특유의 억세고 쿰쿰한 육질의 맛을 내 혀는 며칠 동안이나 못 잊어 했다. 그것뿐 아니었다. 미더덕과의 만남이 내 인생의 절대적 실수(?)일 줄을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여자네 집에 가면 울퉁불퉁하게 참 못 생긴 생미더덕을 곧잘 내 놓았다. 깨끗하게 씻은 그 미더덕을 칼로 쪼개 껍질째 씹어 먹는 것이다. 그 향기와 여미가 나로 하여금 오금 저리게 하였다. 멍게 맛과는 또 달랐다. 멍게는 껍질을 먹지 못하지만 미더덕은 껍질을 씹으면 씹을수록 포드득거리며 입에 씹히는 맛과 향이 서로 달랐다. 콩나물과 고춧가루를 버물려 쩌 내는 미더덕찜의 맛은 또 어떻고. 미더덕은 방황하던 나의 발목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했다.
나는 그렇게 마산 사람이 되어갔고 마산은 나를 거리낌 없이 수용했다. 그러나 아쉬움은 남았다. 내 문학적 열정의 부재로 인한 아쉬움이다. 창작에의 열의는 진학지도를 핑계로 미루어지고 있었다. 직장을 가지고서도 문단에 등단하는 사람들이 내게는 한없이 부러웠다. 제자들의 진학지도에 목을 걸었고 그들의 성공에 대리 만족을 얻어가고 있었다.
나는 대학 시절 마산이 고향인 한 후배를 만났었다. 작가 양귀자의 남편이 된 그는 늘 사석에서 제 고향을 자랑하곤 했다. 다른 사람이 고향을 자랑하면 심드렁해지는데 그가 고향을 자랑하면 왜 그리 귀가 솔깃해졌던지. 내가 마산에 가게 되었다고 하였더니, 거기 가면 좋은 작품 한 편 건져 올 거라며 제 일처럼 축하해 주었었다.
기껏 9인 수상집『교단』을 내는 한편, 문예지도 교사로 학생들의 문예 동아리 《빛불》을 이끌며 교지 『해송』과 홍보용 학교 신문을 만들며 원고지와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틈틈이 글을 썼지만 절박함이 없는 유희적 작문에 다름 아니었다. 어찌하랴. 몇 권의 문예지를 받아 보는 것으로 위안할밖에.
2. 애기봉은 건재했다
내가 ‘마산’이라는 지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군위군 우보면의 한 작은 마을에서였다. 학생이라 해 봐야 몇 되지 않는 초등학교 졸업식 때 당시 박씨 성을 가진 안골 대학생이 선배의 자격으로 축사를 하고 있었다. 대통령에 리승만, 부통령에 리기붕이라며 노골적으로 부정 선거를 저지르고 있으니 이게 무슨 민주주의 국가냐, 참으로 개탄스럽다는 울분의 내용이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석한 형사가 그를 체포하여 끌고 갔다.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선거는 치러졌고 소문은 흉흉했다. 마산에서 데모가 일어났다고도 했다. 사람이 죽었다고도 했다. 4월초부터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마산 시민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바다 속에 버려진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 군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는 급격히 확산되어 4.19가 일어나고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그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마산 사태임을 어찌 모르랴.
나의 마산 생활의 중심은 구암동이었다. 애기봉을 마주 보는, 하이트맥주(구 이젠벡)공장 앞의 한 아파트 3층이 나의 삶터였다. 공장의 좌측 백여 평 규모의 못은 분뇨처리장이었고, 우측 철조망 울타리 너머로는 술지개미를 함부로 버려 애기봉으로 가는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애기봉 기슭엔 3․15열사들의 묘역이 있다고들 하였으나 묘역은 이름뿐, 리기다소나무와 가시나무가 무성하였다. 설령 누군가가 마음먹고 찾는다고 하여도 안내인이 없으면 찾을 수 없었다. 공화국 위정자들의 의도적 무심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육신을 불살라 부정을 궐기한 영들의 넋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다니. 정의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말로가 훤히 내다보이는 일이었다. 당국의 철저한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가시나무를 치고 억새를 베어 묘역을 관리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있었고, 한 잔 술을 헌작하는 동지의 발걸음도 꾸준하였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약수터가 위쪽에 있어서 나는 수시로 내 아이들과 함께 묘역을 들러 영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공장의 연기가 솟고 악취로 길을 막고 남해고속도로가 진입의 불편을 주었지만 세월은 틀림없이 정의의 편이 될 터이었다. 마침내 묘역에도 봄은 오게 되었다. 정의는 당당히 승리하였고 묘역은 성역화 되었다. 묘역을 꾸준히 지켜온 시민들의 승리였다.
나는 애기봉을 노래한다.
술지개미, 인분 뿌려 들머리에 울을 치며
그렇게 두어 십 년 자존의 싹 짓밟아도
찾아와 술잔 권하는 정이야 어찌 베랴
바람과 맞선 것이 무모였나, 반역이었나
강물은 물결을 싣고 낮은 데로 그예 흘러
자유의 은빛 이름을 해서체로 음각했다
역사의 뒤란을 쓸쓸히 걸어온 사람들
그 3월 피의 함성 제단 위에 향을 살라
이슬로 빛나는 말씀 풀잎마다 꿰고 있다
「애기봉 설화」 전문
3.15정신은 6.10 부마사태로 이행된 마산의 정신이요 자존의 핵(核)이었다.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자란 내 두 아이의 정신의 핵도 바로 이 3.15정신이어야 한다.
3. 백청 선생을 만남
구암동 시절 나는 잊을 수 없는 시인 한 분을 만나게 된다. 교직원 아파트에 사시던 백청 황선하 시인이었다. 함자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가까이서 모시게 된 것은 진해에서 구암동의 교직원 아파트로 이사 오시면서부터였다. 선생과 나는 국어 교사로 만났는데 통성명을 한 뒤 그가 바로 황선하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백청 선생은 대선배였다. 일요일 10시쯤이면 구암동의 천주탕에서 어김없이 만날 수 있었다. 작가 정신이 박약한 내가 선생을 만난 것은 생의 반전을 위한 프로그램의 수순 이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등을 밀어 주고, 목욕 후에는 삼겹살에 소주 한 잔씩 하는 사이까지 발전하였다. 선생은 이따금 지역 문인들과의 교우 관계를 들려주곤 하였다. 그러면서 선생은 나에게 은근히 문학의 진수는 시임을 자랑하곤 하시었다. 마침 선생께서 첫 시집 『이슬처럼』을 발간하였다. 굵은 사인펜으로 친필 서명한 귀한 시집한 권을 나한테도 선물하였다. 내 평생에 시집 한 권이면 족하다며 매우 흡족해 하셨다. 참으로 소박한 웃음이었다. 여타 시인은 시 70여 편만 되면 작품의 질은 고하간에 시집 만들기에 급급한데 선생은 20여 년의 문단 생활을 하였음에도 겨우 시집 한 권으로 만족해하시다니. 수많은 작품을 써도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신조였다. 구워낸 작품이 시원찮으면 망치로 쳐서 도자기를 깨어버리는 도공처럼 선생은 매 작품마다 심혈을 기울여 쓰지만 이미 발표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용납하지 않았다. 선생의 시집이 나왔을 때 나는 너무 기뻐, 간도 크게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시집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후 나는 백청 선생을 통해 정목일 선생과 정진업, 이광석, 홍진기, 최명학, 하연승 시인을 알게 되었다. <창원문예교육> 시절에 만난 문인 몇 분은 생각이 다른 분들이라 교우가 길지 않았다. 이후 선생은 창원으로 이사 가시고 나 또한 창원으로 이사 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또 같은 목욕탕을 쓰는 이웃으로 인연을 잇게 되었다.
나는 등단도 하지 않고 시집 『모과향에 대한 그리움』을 내는 사고를 쳤다. 20여 년 간 교단생활을 하며 틈틈이 써 놓은 시를 그냥 태워 버리자니 시(詩)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소신을 가지고 내는 시집이었다. 가편집 사본을 보신 후 선생께서는 내에게 관심을 가져 주었다. 도서출판 우무석 시인을 만나 출판을 의뢰하고 우 시인으로부터 마산대학 이성모 교수님을 소개 받아 해설을 부탁드렸다. 두 분 다 내 시집 출판에 최선을 다해 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시집을 들고 찾아뵈었을 때 선생은 퇴원하여 댁에서 정양(靜養) 중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친히 몇몇 시인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주시며 꼭 시집을 보내도록 하라고 일러 주셨다. 선생은 마산에서 만난, 나에게 너무도 자상했던 문단 선배요, 큰형님이었다.
4. 글을 맺으며
나의 문학적 역정은 내 놓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평설이면 평설, 소설이면 소설, 자유시면 자유시, 수필이면 수필로 진력하여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문예교사로서의 정직한 경력은 갈래를 초월함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손대게 되었고 지금은 정형시인 시조에 심취하고 있다. 시조 세계는 내가 전력투구해도 닿지 못한 격조 높은 세계임을 늦게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25년여 동안 살아온 마산에서의 삶은 이제는 내 작품 속에 피가 되어 흘러 주기를 희망한다. 애기봉과 백청 선생과의 만남 또한 내 문학의 자양이 되어 어디서든 훈수 들기를 바란다.
거주지를 창원으로 옮긴 지금도 마산은 여전히 내 고향으로 남는다. 미더덕에 발목 잡혀 살아온 세월이 벌써 34년. 그 동안 1만 6천여 명의 제자가 나를 떠났다. 그 중 마산 태생이 절반. 그들의 삶의 터전 또한 마산. 그들이 이제 마산을 지키고 있다. 내가 한 근무지에 34년여나 근무하고 있음은 이들에 대한 부단한 믿음과 사명감 때문이다. 열정으로 지켜온 직장이 아니었나. 나는 그들을 위한 증인됨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세월의 배를 함께 타고 가노라면 노잡이는 항상 그들이 된다.
창원에 살든 마산에 살든 어시장 좌판의 비리도록 싱싱한 아침을 잊지 않는 한 누구도 마산을 떠나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주변 신도시의 건설로 마산의 시세(市勢)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아직 너무 젊은 무학산이 합포를 지키고 있음이니 도시는 다시 흥성하리라. 마산과 맺은 모든 인연을 내가 사랑하므로 나 또한 자랑스러운 마산 사람 아니겠는가.
사정이 있어 늦어진 원고임에도 늘 건강을 염려해 주신 오하룡 사장님의 배려가 고맙다.
공영해 : 시인. 가락문학회장
* 위의 글은 "마산과의 인연 -3"(도서출판 경남)에 발표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