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제목을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되지도 않는 무슨 인생 강론이나 늘어놓기 위한 훈시조의 글 제목 같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아니다.
때는 일제(日帝) 강점기인 1939년,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6월 어느 날의 일이다.
그날따라 하필 등교길에 발을 헛디뎌 게다(나막신의 일본말~げた)의 왼발 코끈이 끊어져서 한발만 신고 절둑거리면서 교문을 들어 섰다. 두발 다 벗으면 맨발이라 교칙 위반이지만 한발이라도 신고 있으면 최소한 아주 맨발은 아니니까.
교문을 들어서자 말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간호장(看護當番의 長~오늘날의 학생회 규율부장과 비슷하나 임명제이며 따로 학생회는 없었음. 집단적인 학생운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학생회는 두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됨) 이 나를 한쪽 옆으로 끌고 가더니 담임선생의 전갈이라면서 교장선생이 너를 찾으시니 얼른 교장실로 가 보란다.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했다. 아주 아주 특별한 사건이 아니고서야 나같은 보통이하의 보통 학생은 교장실까지 불려갈 꺼리가 못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무엇일까? 죽었구나!’ 지난 몇일간의 내 행적을 샅샅이 훑어본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내가 하늘같이 높고 무서운 교장의 꾸중을 들을만 한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백번을 짚허봐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허리에 찬 책보를 교실에 던져놓고 우선 교무실에 들렸다. 교장실에 가면서 그래도 조금은 소견머리가 있었던지 아니면 구원의 뜻에서였는지 우선 담임선생을 찾아 갔다. 그때의 나의 담임은 무라카미(村上)선생, 교장은 쿠라모토(倉元) 두 사람이 다 일본인이었다.
담임은 나를 보자말자 그 이유는 말도 하지않고 다짜꼬짜로 교장실로 가 보란다. 담임의 표정이 그렇게 굳어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큰 사건이 아닌 것은 감지했으나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어차피 탈난 목숨,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교장실 문을 노크했다.
조심 조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더니 교장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 키미까!" (아~ 너였나!) 하고서는 다시는 아무말도 없이 돌아가라고 하시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되돌아 나왔다.
무슨 일일까? 다행이 두분 표정으로 보아 아버지를 모시고 가야할 정도의 중죄(重罪)를 지은 것은 아닌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우리에게는 어린 마음에도 일인(日人) 선생에 대해서는 존경심도 있었지마는 이민족(異民族)으로부터 받는 어쩔 수 없는 이질감이나 공포감도 동시에 있었던 것 같다.
교장실에 돌아와서 채 10분도 못 되었다. 아직도 내가 냉정을 되찾기도 전에 “땡! 땡! 땡!”
전체 조회의 종이 울렸다. 전체 조회란 전교생이 교정에서 교장선생의 훈시를 듣는 조회이다. 하긴 전교생이라야 1학년에서 6학년까지 모두 합해도 백여명이 되락마락한 학생수이다.
“교장선생님에 대하여 경례!” 쿠라모도교장은 거수경례로 답례를 한 다음 다짜 고짜로 큰 목청으로 “5학년 이영만군 앞으로 나와!” 영문도 모르고 전교생 앞으로 불려 나갔다. 처음에는 어금니가 덜덜덜 떨리더니 다음엔 사지가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통이 막힌다.
“에~또, 지난 4월달에 경상북도에서 교통안전에 대한 표어를 도내(道內) 전 초등학교를 상대로 현상 모집했는데 다행히 우리 학교에서 당선작이 나왔다. 5학년 이영만군이 응모한 표어 <正しい 道を 正しく 步け>가 뽑혔다.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고도 무슨 말씀을 더 하신것 같은데 아무 것도 기억에 없다. 여전히 부들 부들 떨고 있었으나 조금전까지의 전율이 공포의 전율이었다면 지금은 흥분의 전율이다. 물론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맥박은 전보다도 훨씬 더 빨라졌다. 조회가 끝나고 교실에 들어가다가 화장실에 들렸을 때 한쪽발이 널판 사이로 빠져 하마터면 큰 일 날뻔 했다. 아마 공포에서 벗어난 허탈감 때문에 사지의 맥이 축 빠진 모양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인 1937년 7월에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인 중국군과 일본군의 북경 노구교(蘆溝橋) 충돌이 있었고 그해부터 일본어 사용이 강제되었으며 초중등학교 교과목에서 조선어가 폐지되었다. 따라서 1939년에 시행한 경상북도 교통안전 표어는 당연히(?) 일본어이어야 했다.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고 해서 한국사람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 것은 그 이듬해인 1940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차차 냉정을 되찾으면서 가만이 생각하니 지난 4월 언젠가 수업시간에 담임선생이 교통안전 표어를 써 내라고 해서 아무 생각없이 멋대로 뭔가를 적어 낸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것이 당선되다니.... 교장선생이 발표하시기 전에는 나는 내가 뭐라고 썼는지조차 기억에 없었다. 그야말로 생각도 안했던 기적이고 행운이다.
부상(副賞)으로는 예쁜 상자 하나를 받았다. 조회가 끝나고 교실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온 반 학생이 ‘상자속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물으면서 내 책상앞으로, 옆구리로, 등뒤로 겹겹이 몰려들어 어서 뜯어보란다. 예쁜 필통 하나, 고급연필 두(2)타, 지우게와 연필뚜껑 각각 세(3)개가 들어있다.
“와~~~~!” 그 당시의 우리네 안목으로는 대단한 상품(賞品)이었다. 학년말 우등상이 고작해야 잡기장(노트) 다섯권 정도였으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육통(동네이름)에 사는 C군이 “야! 영만아! 6학년 아이들 다 재치고 우리 5학년이 상을 타서 기분 좋다!”고 한다. 지금 그의 나이 83세, 건강이 나빠 오늘 내일 한다고 들었다.
모두가 “연필 한자루만 달라”는 것을 못 들은척 집에 가져가서 어른들에게 보이고 그 다음날 학교에 다시 가지고 나가서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나눠 가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여학생들에게 돌아간 배당이 훨신 많았던 것 같다. 특히 S양에게는 지우개와 연필 뚜껑과 연필 두(2) 자루를 남몰래 더 건네줬다.
나보다는 두 살 위의 연상의 학생이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여태껏 한번도 못 만났다. 우리가 6학년 때 함께 간호당번이 되어 각학년 교실 청소 감독 순찰을 하던 날 그녀로부터 남몰래 쪽지 하나를 받았는데 그 당시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내가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연애편지였던 것 같다. 쪽지를 받자마자 펴서 읽어볼려는 내 옆구리를 제법 아프도록 쥐어 박으면서 내종 혼자 있을 때 보라고 하는데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그때는 몰랐다. 1945년 해방되던 해부터 줄곧 그녀의 안위를 수소문 했으나 아직까지도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도 모른다. 아쉽게도 내 첫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요즘도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입버릇처럼 그 할망구의 소식을 묻는다. 그녀의 이름은 손외남(孫外男)
바른길 바르게 걸어라 (正しい 道を 正しく 步け)
그로부터 6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도 총동창회 때나 어쩌다 학교 교정에 들어 설 때에는 그 때 내가 섰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발을 한번 멈추게 된다. 별로 상(賞)복이 없는 사람이 평생에 처음 탄 큰 상의 추억 때문일게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알게 되었지만 내가 상(賞)을 타던 전날, 도(道) 학무국에서 초등학교 교장회의가 있었고, 수상자들을 도에까지 불러올리는 대신 교장이 학교에 돌아가서 시상토록 결정되었으며 교장은 시상전 어떤 아이인지를 담임을 통해 확인한 것이 나에게는 대 사건이 되어버렸던 것 같았다.
지금 만약에 어느 관청엔가에서 교통안전 표어 모집이 있어서 내가 다시 응모한다고 해도 이 이상의 표어를 내가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 같다. 필경 그 때 응모한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무심코 적어냈지만 심사하는 선생을 잘 만나서 그분이 내 응모작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 것 같다.
오늘 나는 66년전에 아무 것도 모르고 뱉은 나의 <正しい 道を 正しく 步け!> 이 한마디 표어를 오늘의 국가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정치 경제 등 모든 사회 실세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야! 이 사람들아. 제발 바른길 바르게 걸어가려무나! 몰라서 못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애송이 기관장 2004/11/10 16:47 추천 1 스크랩 1
애송이 기관장의 추억
내가 서울 경기 일원의 우편· 전신. 전화업무를 관장하는 한 기관의
장이 된 것은 내 나이 40에서 한두살 빠지는 청년시절이었다.
필경 당시의 노인들(오늘의 내 나이쯤 된)의 안목으로는 지극히 철없는
애송이로 보였을게다.
나는 부임해 가면서 어느 화가에게 부탁하여 내 앉은 자리 뒷벽을 꽉
채울만한 크기의 맹인과 코끼리의 그림을 그려 붙쳤다. 맹인 네(4)사
람이 코끼리의 다리, 등판, 꼬리, 코를 더듬는 그림이다.
사물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고 문제 전체를 통찰
하라는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이고 직원들에 대한 경고였다. 지금 그 그
림이 정통부 또는 통신공사 어느 창고에 처박혀 있는지, 아니면 오래전
에 이미 폐기되었는지는 알지를 못한다. 행방을 알 수만 있다면 도루
찾고 싶은 추억이 담긴 그림이다.
당시의 통상의 공무원의 승진기준으로 본다면 그때 나에게 주어진 직급
이나 직위는 빠른 편이었다. 빨랐기 때문에 나라가 나에게 거는 기대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국은에 보답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아마 보통사람
들보다는 좀 더 오랜 시간을 두고, 좀 더 골돌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국가에 대한 무정량의 충성>이 모든 공직자의 절대절명의 과제임은 상식
이하의 상식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수단은 직속상관에 대한 충성으로 표출된다. 장관이나
차관이 옳바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분들에게 충성을 다 하는 것이 곧 애
국이다.
비록 그것이 남의 눈에는 아부로 비춰도 좋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나라
에 대한 아부이니까. 그러나 그 반대로 상사의 생각이 국익에 위배될 시에
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부하여야 한다. 그 명령불복종은 궁극적으로는
애국에 귀결되니까. 그래서 고위공직자에게는 때로는 지극히 외롭고 용기
있는 결단이 요구된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당시였다.
아마 그래서 우수한 부하와 좋아하는 부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모양이
다.
화사첨족이기는 하나 꼭 한가지 확실하게 하여 두고 싶은 것은 나는 평생
을 두고 누구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한 일은 없다. 모든 공직자가 그러하였
듯이 나의 명예를 다른 무엇과도 바꾸지는 아니하였다고 자부한다.
그와 반대로 더러는 남의 부탁은 들어준 것 같다. 내가 봉직한 관청이
권력관청이 아니었으니 만치 별로 큰 청탁이야 있을 수 없었으나 좌우간
이런 저런 청탁은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빽을 써서 좋은 자리에 간 사람은 멀지 않아 또 다른 빽 쓰는 사람으로
인해 나쁜 자리로 밀려가게 마련이다. 또한 빽을 쓰는 사람들은 그들을
이용하는 누군가의 잔재간으로 수도 없이 좋은 자리 나쁜 자리를 왔다
갔다하기 마련이다.
그 보다야 그냥 그럴만한 수수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훨씬 등
따시고 배 부르다. 만약 꼭 빽이 필요하면 <실력>이라는 빽을 기뤄라.
이것만은 확실한 빽이 될테니까."
빽 말이 나오니 또 한가지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나에게 뭘 부탁하려 오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말이 있다.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마치 그네 타는 사람 도와주는 것과 흡사해요.
그네가 앞으로 갈 때에는 손까락으로 살작 건드려만 주어도 그네는 훨신
더 높게 힘차게 솟아 오리지마는 그네가 뒤로 내려올 때 잘못 거들다가는
머리통이 묵사발이 납니다. 당신이 충분한 준비를 하고 난 다음 기회가
왔다고 하는 확신이 설 때 나를 찾아 오시오"
언젠가는 이런 말을 하다가 단단히 한방 먹었다.
"여보시오 선생! 그러지 못하니까 부탁하는거지 가능성이 보인다면 뭣
때문에 당신을 찾아 왔겠오?"
행정기관의 장은 그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국정운영상의 정치와 행정의
경계선상에 있는 직위임을 확인한 것도 그때였다.
정치적 과욕이 행정을 오도할 수 있고, 행정적 합법성의 논리로 국가 운영
이 침체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 양자의 경계선에 선 고급공무원의
지혜로운 "휠터링" "스크리닝" "인타프리테이션"은 국가 발전을 위하여
절대절명의 과제이다. 요즘 정치하는 사람이나 국가공무원들의 상황판단
의 미숙, 경험부족, 과욕, 졸속등에서 오는 시행착오를 보면서 옛날의 나
의 행적을 한번 더 되돌아 보게 된다.
법률적 지식이나 직무지식이 풍부하지 못한 애송이 기관장이 어떤 사물의
국익을 저울질하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어떤 일이던 그 사안이
순리를 쫓고 있고, 건전한 상식으로 봐서 타당성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합법적이고 타당한 선택이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익혔다.
취사선택이 어려울 때에는 일단 그 사안이 '윈칙적으로 여하히 있어야 할
것인가?' 를 살피고 지금 할려는 일이 그 원칙과 얼마만한 거리가 있는냐
를 반드시 살피도록 강조하였다. 현실과 원칙과의 거리를 아는 사람은 절
대로 실수 하지 않는다.
내가 임지에 부임하려 갔을 때 그 예하에는 군에 있을 때의 나의 상사가
두분 계셨다. 많은 직원들이 상하가 전도된 위치에서 나의 처신을 지켜보
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그 두 기관을 가장 먼저 초도순시하였
다. 나의 인사말은 아래와 같았다.
"여러분의 국장님은 군에서 나보다 훨씬 높은 상사였습니다. 내가 부내에
서 존경하는 분을 뽑으라면 그것은 결코 장관도 차관도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의 국장입니다. 장차 여러분이 나에게 타이를 일이 있으시면 여러
분의 국장에게 말씀드리십시오. 나는 ○국장님의 말씀이라면 꼼짝을 못하
니까요"
그후 우리들의 관계는 지극히 좋았고, 그로 인해 내가 손해 본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거의 습관적으로 직원들이 문서 결재를 받으려 오면 무슨 트집을 잡
아서든지 반려하였다. 두세번 골탕을 메기고 난 다음에 그가 얼굴을 붉으
락 푸르락 하면서 다시 가지고 왔을 때에는 그가 허탈감을 느낄만치 무관
심한 표정으로 쉽게 결재를 해줬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욕감으로 약간 약이 올랐을 때 최대의 능력을 발휘한
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내용이야 그가 나보다 더 깊은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고 또 나보다 더
오랜 시간 그 사안을 검토한 사람이니까 내가 관여할 여지가 있을리 만무
하다.
또한 나는 사람에게는 한단계 뛰어넘고자 하는 습성이 있음을 보았. 마치
중학교 1학년과 3학년은 좋은 관계이나 1학년과 2학년은 그렇지 못한 것
처럼.
그래서 장관이나 차관에게 결재를 받아야 할 문서는 내 밑의 국과장에게
시켰다.
"나는 당신만치 자세하게 설명할 능력이 없으니까 당신이 갔다 오시오"
그가 왜 내 본의를 모르겠어요. 그가 '인정받는 장관의 부하'가 되기 위하
여 열심히 신나게 일할 것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그 신난 모습을 지
켜보는 내 기분은 더 없이 좋았다.
나 또한 나와는 한단계 아래의 과계장의 내방 출입을 적극 환영하였다.
나는 아랫사람들의 과오에 대하여는 비교적 냉혹하였던 것 같다.
만약 열심히 일하는 상사라면, 뭘 좀 안다고 생각되는 상사라면, 나를 애
껴주는 상사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러한 상사로부터는 좀 가혹한 힐책을
들어도 쉽게 승복을 하며 언짢은 기분을 갖지 않는 것이 사람의 심성인 것
같다. 상하간의 사랑의 감정은 결코 말로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말은 하지 않지만 내 윗사람은 나를 가장 좋아한다는 비밀스러운 확신을
부하의 가슴에 심어주는 일은 통솔의 중요한 요체라고 생각되었다.
또한 누구도 나의 힐책으로 인한 불쾌한 감정을 집에 가지고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일과를 되돌아보고 뭔가
찜찜하면 반드시 그 친구 방에 가서 헛소리를 한참하고 퇴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요즘도 한때 인연을 맺었던 백발의 노인이 추억담으로 "그때 당신의 그 말
은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하는 소회를 들을라치면 공연히 가슴이 뭉쿨
하여짐을 느낄 때가 있다.
때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뜻이 맞지 않아 으르릉 대는 것을 본다. 사람에
게는 선천적으로 윗사람에게 이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이런 경우
대부분은 윗사람에게 문제가 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잘못이 있다고 인
정되었을 때에는 왠만한 고통은 불만없이 참아 넘긴다. 그무렵 나는 동료
들이나 중간관리자에게 이런 충고를 곧잘 했던 것 같다.
언젠가 국제전화를 담당하는 교환국에 들렸더니 교환원의 휴게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담당 국장에게 몇가지 지시를 하고 그 몇일 후 다시
들렸더니 전여 달라진 것이 없어서 경위를 물었더니 상부에 문서로 예산신
청을 이미 해뒀다고 당당한 모습으로 대답한다. 좀 언짠은 기분이 들어 내
가 한말이다.
"여보! 관서의 장이라면 일과 일 아닌 것쯤은 구별할줄 알아야지요! 문서
만드는 것은 딘지 일의 준비이며 실무가 할 일이고 당신은 빚을 내서라도
당장 휴게실을 고처야 하는 것 아니오?"
일에는 언제나 합목적성과 합리성(합법성)의 양측면이 있으며 기관의 장은
[쿠키 문화] 조선 중기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채 발견됐다.
청안(淸安) 이씨 후손인 이순석(67·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씨 등에 따르면 지난 7일 오후 1시께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 분묘 이장지에서 조상의 묘를 이장 하던 중 500여년 전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사진>이 원형 상태로 보존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신의 주인공은 이씨의 11대 할아버지인 석탄(石灘) 이기남. 시신은 신장 160cm 정도로, 발견 당시 머리카락·얼굴·치아·어깨 등이 생생하게 보존돼 있고, 시신이 안치된 곳에는 삼베와 한자로 씌어진 부(賦), 검은색 천이 덮여 있었다.석탄 이기남은 조선 중기 선조시대 사람이지만 생몰년도는 명확하지 않다.
이씨는 “11대 할아버지의 묘를 인근으로 이장하기 위해 파 보니 옻칠한 목관 속에 매장 당시 모습으로 시신이 안치돼 있었다”고 말했다.
관 안에는 ‘황룡부주’(黃龍負舟·누런 용이 배를 지고 간다)는 제목의 시부(詩賦)가 적혀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한학자인 노강(蘆江) 박래호(64)씨는 “한자가 씌어진 종이가 훼손돼 정확한 내용을 해석할 순 없지만 당시 시대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한 것으로 한시 형태의 부(賦)로 추정된다”며 “시부 제목 중 ‘황룡’은 임금을 뜻하고 있으나, 지은이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서영미 학예연구사도 “종이에 씌어진 내용으로 봐서는 단순히 망자를 애도하며 쓴 글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정확한 내용은 추후 조사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후손인 이순석씨는 “시신의 주인공인 11대 할아버지는 성리학에 능한 학자로 송강 정철과 절친했고, 여러 관직에 천거됐으나 사양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국민일보 쿠키뉴스 제휴사/광주일보 김지을기자 dok2000@kwangju.co.kr
사진=청안 이씨 분묘 이장 과정에서 발견된 한자로 된 시부가 적힌 종이와 원형 그대로 보존된 시신. /장성=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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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 이흥락의 블로그 조선중기 미라 장성에서 발견
대성 이흥락의 블로그 조선중기 미라 장성에서 발견
유물명칭 : 충의록(정안이씨)
국적/시대 : 한국(韓國) / 조선(朝鮮)
재질 : 지(紙) / ()
크기 : 가로 : 19.8 cm / 세로 : 28.6 cm
용도/기능 : 문화예술(文化藝術) / 문헌(文獻) / 문집류(文集類) / 문집류(文集類)
소장기관 : 학교(學校) / 육군사관(육군사관)
유물번호 : 고대군사재(고대군사재) 83087
이 책은 임진 왜란시 문천(汶川), 洪川)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구를 무찌르다가 울주(蔚州)에서 순절한 둔촌공(둔村公), 이팽수(李彭壽)를 위시한 청안이씨(淸安李氏) 16義士 들의 의병활동을 수록한 충의록이다.
이 책에는 16의사들의 유사묘지명(遺事墓誌銘), 행장(行將)등이 수록되어 있어 청안이씨의 의병활동 상황을 잘 알수 있다. 이 책의 저술연대는 1858년 유치명(柳致明)의 서문(序文)으로 시작, 제작자는 후손인 이용복(李容復)등이다. 이 책은 5묶음의 제본을 붉은 색실로 묽었다.
충원공파(忠元公派)의 시조 이양길(李陽吉)의 시호는 충원(忠元)으로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검교시랑, 예빈사동정(禮賓寺同正)을 역임하였으며 이때 왕에게 직간한 것이 화가되어 제주판관으로 내려갔다가 공민왕 5년 10월 순절하여 1등공신에 녹훈되고 청안군에 봉해졌다.
충간공파(忠簡公派)의 시조 이한번(李漢蕃)의 시호는 충간(忠簡)으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한림학사와 영광군사(靈光郡事)를 거쳐 국사원(國史院) 검열관(檢閱官)을 지낸 뒤 1363년(공민왕 7년) 홍건적을 막은 공으로 초성보리공신 삼중대광에 책록되고 청안백에 봉해졌다.
이 두파는 예전에 시조를 이학년(李鶴年)으로 하였으나 최근에 여러가지 증거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서 이를 수정하였다.
[가문의번영]
1414년 전라도와 충청병마절도사, 병조판서(兵曺判書)를 역임한 이광경(李光慶),1452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고 1474년 현감(縣監)을 지낸 이기(李基)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관찰사를 역임한 이종주(李從周)를 비롯하여 현감을 지낸 이임(李臨), 현령(縣令) 이지(李地), 부사 이경방(李經邦)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다 개운포에서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된 이응춘(李應春), 훈련원자사(訓鍊院者事) 이덕매(李德梅), 첨정 이유인(李有隣), 판관 이삼한(李三韓), 영장(領將) 이눌(李訥),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曺參判) 이운춘(李運春), 도호부사 이승연(李昇淵), 부사 이방인(李芳隣) 등은 관직에 오른 후 선정을 베풀거나 충절로서 당대 청안이씨의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다.
언양읍 대곡리(大谷里) 반구대 아래(884-3번지)에 있는 청안이씨(淸安李氏) 문중의 정자·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퇴사재(退思齋) 이응춘(李應春)의 후손 구린(龜隣) 이용필(李容馝 : 1849∼1906)이 포은(정몽주)선생의 유덕(遺德)을 사모하여 정각을 지을 것을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1920년(경신) 그 아들 일봉(一峰) 정혁(正赫 : 1871∼1952)이 여섯 아우(章赫·鳳赫·能赫·奎赫·晙赫·左赫)와 더불어 긍구(肯構 : 아버지의 사업을 아들이 계승하여 성취함)했다. 바로 앞에 있는 반구서원, 집청정(集淸亭) 등과 더불어 주변의 경치가 빼어나 가히 절경(絶景)이다.
모은정기(慕隱亭記)는 숭정오임술(崇禎五壬戌 : 1922)년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쓰고 상량문은 이중구(李仲久)가 지었다.
차모은정운(次慕隱亭韻)에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석암(石庵) 이규린(李奎麟)·경석(耕石) 최해종(崔海鍾)·창은(蒼隱) 박종하(朴鍾河)·낭산(朗山) 이후·파평(坡平) 윤수(尹銖)·달성(達城) 서장성(徐章聲)·서장호(徐章顥)·풍산(豊山) 류철우(柳喆佑)·학성(鶴城) 이석정(李錫井)·아들 정혁(正赫)·삼종(三從 : 8촌) 주혁(周赫)외 박정환(朴楨煥)·이기혁(李基赫)·하석희(河錫熙) 등 많은 선비들의 글이 있다. 바로 옆에 사서각(賜書閣)이 있다.
시업주(始業主) 구린 이용필의 손자요, 육봉(六峰) 준혁(晙赫)의 아들로 20세기 후반 한국 한문학의 대가인 동초(東樵) 이진영(李鎭泳 : 1919-1993) 선생의 학문의 연원(淵源)이 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