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땅에는 ‘라합’이란 여자가 살고 있었다. 한국 번역에는 라합의 출신성분을 기생으로 되어 있는데 여러 가지 문헌이나 자료에 의하면 기생이 아니라 여제사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에 여제사장은 신과의 만남에 있어서 남성들과 성관계를 갖게 하는 의식에 의해 생겨진 직분으로 오해하여 오역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성경 속에 남녀평등이란 입장에서 번역되어 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남녀평등이 아니라 여성비하적인 번역으로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아직도 번역뿐만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여자를 존중하는 것에서 묘연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 속에 남녀평등을 위한 번역과 이해를 위한 주장을 펼쳐야 할 것이다.
라합은 기생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을 만나기 위한 접촉적인 성관계를 했다는 근거보다는 다른 신과 관계에 의한 음녀라는 차원에서 기생이나 창녀의 신분으로 못을 박아 그녀의 신분을 저하시키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라합의 신분과 존재성에 있어 다시 재론해야 한다는 점이다.
라합은 자신이 믿어왔던 신으로 인해 생계를 유지해 왔던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오는 과정부터 광야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 들어왔었다.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섭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것을 목도했거나 전해 들었을 것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며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도록 하신 사건들, 십계명을 전달을 받으면서 우상을 섬기던 백성들에게 임하는 심판의 사건들,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듣고 은밀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원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믿어왔던 신과는 전혀 다른 신으로 여겼으며 그 행하신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라합은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두 정탐꾼을 도와 숨겨 구해준 것은 다만 의협심 많은 점도 있겠지만 이에 의해 구원을 얻고자하는 갈망이 더 많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12~13) 왜 그녀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녀를 돌아서게 했을까? 그녀가 믿어왔던 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신앙으로 바뀌었을까?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에 라합이란 이름이 등재될 만큼 신앙위인열전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을까? 히브리서 11:31에 “믿음으로 제사장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하는 말로 기록 되어 있다. 또 야고보서 2:20에도 “이와 같이 제사장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라합이 행한 행동으로 인해 신약성경에 다시 재론할 정도 위대한 업적은 남긴 것은 단순히 두 정탐꾼을 숨겨준 것에 대한 행동만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행함과 함께 따르는 위대한 신앙이 뒷받침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앙선조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두 정탐꾼에 베푼 친절은 그녀의 심성도 있겠지만 신앙에서 발동된 행위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순히 의협심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 수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것을 듣고 보는 가운데 자기가 믿어 왔던 신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녀가 구원된 것은 이뿐만 아니라 두 정탐꾼과 한 약속을 실행에 옮김에 따라 자신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들 모두 구원받게 된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창문에다 붉은 줄을 매달아 놓으면(12)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다 살려주기 한 것을 굳게 믿었던 라합은 여리고 함락 시에 구원받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6:25~)
이 붉은 줄은 단순한 목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마지막 재앙을 막기 위해 유월절 밤에 기둥과 문지방에 바른 어린 양의 피를 바른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표식이라는 점이다. 자신도 여리고 멸망을 예견할 수 있는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재앙을 미리 감지하고 두 정탐꾼과 약속을 하게 된 것이다.
라합은 단순히 창녀나 기생의 신분이 아니다.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여제사장으로 선경지명이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것을 예견만 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지배할 것을 감지했다고 본다.여리고 성에 있는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옴을 예측하고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철벽같은 요새가 된 여리고성만 지키면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라합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장면을 꿈을 통해서나 환상을 통해서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믿었던 신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열망하며 구원의 섭리 속에 자신과 가족이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녀가 붉은 줄을 내리는 것은 두 정탐꾼과 약속을 위한 표시이지만 구원받기 위한 표시인 것이다.
그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마지막 재앙인 기둥과 문지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것과 동일한 방법을 취한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신뢰성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이는 장면은 유월절을 기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라합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복종과 신앙에 따른 구원의 은총을 입은 것이다. 차후에 아들 보아스를 태어나게 해서 룻과 결혼하여 다윗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마 1:5) 신약 성경에도 몇 번 등장하는 놀라운 은혜를 입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혈통이나 신분에 의해 구별해서 구원하시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 어느 누구든지 율법의 행함에 의해서 구원받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믿는 자만을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라합을 통해서 입증하고 있는 사건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는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 알게 된다면 라합이 왜 구원받을 수 없는지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내용은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차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글로 표현하려고 한다.
라합이 구원받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순하게 그녀의 성품에 따른 의협심과 친절함만이 아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따른 행보를 듣고 본 결정한 것이다. 또한 그녀의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뜨거운 열망 속에 행한 그녀의 신앙과 복종이 자신만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과 자손만대에 이르는 놀라운 구원의 계보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여호수아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접하여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땅을 향하여 전진하기를 바란다.
첫댓글 해석의 오류를 바로잡는 좋은 글입니다.
<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에서
너희보다라는 대상은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을 지칭하는데
""먼저 들어가리라"" 하신 말씀은 그들도 세리와 창기보다 뒤에 들어간다는 뜻 같습니다.
예전부터 이 말씀의 뜻을 붙잡고 다양한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말씀의 뜻이 온전하게 선포되고, 뜻이 왜곡되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뿜어져서
발목에서 무릎으로, 가슴에 넘쳐 온세상으로 흐르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삼손&&
라합이 문자 그대로 기생이 아닐 수 있다는데는 찬성합니다. 그러나 윗 글에는 실제로 왜 라합이 기생이 아니라 이교의 '제사장'인지에 대한 사실에 근거한 논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기생이라고 번역된 zanah의 쓰임새를 보면 성적인 죄와 관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내용도 우리가 생각하는 남녀 평등의 단어를 선택하여 쓰였으며 실제로 그러하다'는 논의로 라합이 기생이 아닌것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방향의 해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http://www.blueletterbible.org/Bible.cfm?b=Jos&c=2&t=KJV#s=t_conc_1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