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학교에서
아직은 겨울잠에서 깨어나기는 이른 나날 속에서도 소나무와 낙엽송이 곧고 신갈 참갈 상수리나무는 벌거숭이로 섰다.
같은 식물科의 참나무目에 속하는 자작은 벗은 몸체에 하얀 면포를 둘러 쓴 채 발밑으로는 잔설을 딛고 서있다. 눈 녹은 양지쪽 언덕 목장에는 건초덤불이 메말랐고 간간히 바람만 휩쓸고 간다. 산등성이 초목지에 한 무리 산양 떼가 등장하는 수채화 한 폭을 보기엔 철 이른 지금 강원도 대관령 골짝 한 켠에 자리 잡은 이름하여 <한옥학교> 이곳에 온지도 서너 달이 지나고 있다.
아직은 뒷걸음질 칠 때가 더 많은 과업을 수행하는 나날의 연속이긴 해도 계절의 변화는 어김이 없어 이곳에도 새봄은 찾아들고 있다.
오늘은 그동안 배운 것으로 국가기능사 자격시험을 위한 모의시험을 치는 날이다.
총 여섯 달 이수 과정 중 거의 절반을 지나 한옥학교의 소목과정을 이수하는 중에도 얼마 있지 않아 치르게 될 ‘건축목공기능사’ 국가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정년 이후 인생의 후반부 이모작 삼모작을 준비하는 사람 이왕에 목수 일을 하던 사람들, 혹은 인생의 설계를 다시 하겠다는 약관의 젊은이들까지 모두 25명 정원으로 시작해서 현재는 21명, 18세 청소년으로부터 66세 노장년층에 이르는 연령대 피교육생들이 각자 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해 왔다. 이 과정 공부는 상당한 수준의 기능을 요구하는 것으로 국가의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필수라 모의시험이긴 하지만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이 모두가 바짝 긴장을 하고 시험에 임한다.
마침 이런 날 아침 때늦은 함박눈이 내린다.
겨우내 그렇게 눈 오시기를 기다렸건만 진눈깨비만 몇 번 폴폴 날리고 말더니 남녘에 꽃이 다 폈다는 춘삼월 초입에 든 지금에서야 발목을 빠뜨릴 만큼 많은 양이 쏟아진다.
이렇게 쌓이도록 눈 내린 것은 11월 첫눈 오고 오늘이 두 번째다.
올 겨울 무지하게 가문 대지 위로 함박눈이 내린다.
온천지가 하얀색으로 소복하게 쌓여가는 눈 내리는 늦겨울 한 때가 참 아름답다.
눈 내리는 아침
더러는 가래로 누구는 발길로
눈길을 연다
아직 딛지 못한 길
아쉬워 주저하며 가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가야할 길 가나 보다
아서라
발길만 보다가
언덕 위 눈꽃을 보지 못하니
가던 길 잠시 멈추고
고개 좀 돌려보소.
4월에도 눈이 온다는 곳이 이곳 대관령이라니 이번 눈이 마지막이 아니길 기대한다.
시험을 치르기 전 우선 학교 앞 마당의 눈을 가래로 치웠다.
참 오랜만에 잡아 보는 제설도구 가래다.
남녘에서 나고 자라 눈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던 터라 이 가래질마저도 신나고 즐겁다.
눈을 치우고 그동안 연습하던 시험과제를 가지고 A, B팀으로 나눠 실제시험장처럼 이틀에 걸쳐 모의시험을 치기로 한다.
23(토)일 시험예정인 사람들은 A팀, 24(일)일 해당자는 B팀에 배정 되었다.
실제 시험처럼 오전 3시간 후 점심시간을 가지고 오후 2시간, 모두 5시간 안에 주어진 과제의 현치도를 작성하고 지급 받은 아홉 개의 부재를 현치도에 맞춰 자르고 깎고 다듬어 400x400x460mm 크기의 과제물을 만들어야한다.
이 과제 안에 한옥의 들보, 석가래, 기둥, 도리 등과 창호의 짜 맞춤 기술이 모두 집약 되어 있다. 신기할 정도다.
교육생 모두가 과제물에 집중하여 비지땀을 흘린다. 교육장의 바깥 대기는 영하이지만 모의시험장 안은 열기로 후끈하다.
톱질에 끌 망치질, 손대패에 전기대패의 윙윙거리는 소리까지 엄청난 굉음으로 가득하지만 정작 시험에 응하는 사람들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묘한 정적과 긴장감만 팽배하다.
여태껏 배운 기술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물 만들기에 집중할 뿐이다.
현치도
0.5mm 이내 오차범위
삼각자 긴자 각도자로 그린다.
치목
먹줄을 놓고
나무의 자란 키 가로무늬는 자르기 톱
나이테 있는 세로는 켜기 톱
세밀한 빗금은 등지기 톱
장부는 먹선 대로
장부구멍은 먹선 안으로
톱으로 켜고 끌로 판다.
막장에 꽉 쥔 주먹장
턱걸이 주먹장에 메뚜기장
따낸 이음에 반턱
은장에 나비장
긴촉이음에 엇걸이
연귀에 제비촉으로 잇고 맞춤한다.
과제 맞춤에 사용하는, 한옥 짓기 할 때의 이음과 짜 맞추기 이름들이다.
참 재미나고 멋지다.
마감시간이 되고 나름대로 심사를 받는다.
맞춤의 틈, 각도, 치수, 못질, 물매의 상태 등이다.
열 사람 중 일곱이 제 시간 안에 제출했지만 만족할만한 과제물은 없다. 그래도 시간 안에 맞춘 것에 만족해한다. 하지만 세 사람이 시간을 넘겼다. 연습을 더 하면 될 것이다.
담당교수님의 총평을 듣는다.
지금보다 30분 정도 빨라야 시험장에서 시간을 맞출 수 있으니 속도를 내고 정밀함을 더 하란다.
현치도 작성도 15분 안에 끝내야 한단다. 나는 현치도 작성에만 20분이 더 걸렸다.
오늘 중요한 과업을 마치고 나오니 언제 그랬느냐 싶게 쌓였던 눈이 다 녹고 없다.
어김이 없는 계절의 문턱 춘삼월인게다.
연일 미세먼지로 흐릿했던 하늘이 쏟아졌던 눈 덕분에 맑게 개였다.
시리도록 파란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한다.
‘함께 공부하는 한옥학교의 우리 학우 모두가 국가 건축목공기능사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시라고’
먹선 놓고 톱 대패 끌
나무의 결대로 쓸 요량대로
자르고 켠다
손에 잡힌 나뭇결이 고와서 어루만지고
木香 또한 좋아 숨 한번 크게 들이 쉰다
한나절 씨름한 목수 얼굴엔
어느새 나이테 하나 얼룩져 남았다.
(밴쿠버한인문협지 ‘바다건너 글동네’에 제출 수필과 시)
설국(雪國)
까맣다
적막함이다
설국에 눈이 오지 않는 밤은
숨소리마저 까맣다
노니는 소(牛)가 없는
메마른 초원엔
소리 없는 바람에 검불만 굴러가고
떨어지는 유성마저 갈색으로 변한다
눈이 오지 않는 설국에는
밤바람 같이
그리움도 메말랐다
어느 날
참, 그 어느 날
‘길고 긴 장문의 서신을 읽고
그 답을 그 문장에 다 맞출 수 없어
앞머리 뒤꼬리 이것도 지겨워
눈앞에 떠도는 말 한마디씩
집어 놓은 게 어느새
詩
시가 되었습니다.’
어느 시인의 "쉽게 쓰이는 시"가
이러했던가요
누님
내 속내를 다 들여다보기 전에
내 부끄러운 자락을 그렇게 펼쳐 놓지 마시오
우리 꽃 진달래가 왜 그렇게 붉은 것인 줄 아신다면
어차피 후회하고 아쉬워하며 사는 인생이라
결국은 하고픈 말도 다 못하고 사는 것
참고 사는 것이 아닌
안하고 사는 것도 괜찮지
그래서 가슴으로 담고 살아
그 속의 응어리로 남더라도
혹 모르지요만
불 끝으로 남을 열반의 사리로 남을지
또 모를 일이겠지요